호리이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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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


공식 트위터
堀井 雄二 (ほりい ゆうじ)
일본게임 개발자. 1954년 1월 6일 효고현 스모토시 출신.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의 메인 디렉터로 유명하며, 그 외의 대표작은 포토피아 연속살인사건, 이타다키 스트리트 시리즈. 서구권 게이머 사이에서는 드래곤 퀘스트보다는 크로노 트리거의 제작자로 유명하다.[1]

2. 상세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를 졸업했다. 원래는 만화가가 꿈이었고 나가이 고의 제자가 되려고 했다가 거절당한 적도 있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 간 것도 만화 스토리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고. 지인인 게임제작자 사쿠마 아키라 말로는 원래는 그림도 곧잘 그렸다고 하는데 사고를 당하고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어서 글쓰기로 전향했다고 한다. 이때 만화 스토리 작가였던 코이케 카즈오의 제자로 들어갔다.[2]
그림을 못 그리게 됐지만 디자인 센스는 꽤 있다는 평이며 자신이 감수하는 만화의 콘티도 그려준다. 크게 기대할 정도는 아니고 가모우 히로시 수준이지만. 이 때문에 드래곤 퀘스트의 몬스터는 호리이 유지는 본인이 직접 설명과 함께 그림을 그린 후, 토리야마 아키라한테 전달하여 그것을 토리야마가 실제 형태한다는 흐름으로 태어나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슬라임처럼 토리야마가 크게 고치거나 아예 새로 창조한 것도 있지만, 거의 다수가 호리이 유지의 디자인이 거의 그대로에 토리야마가 그림체만 자기 스타일로 바꾼 정도이다.
대학 졸업 이후에는 프리 라이터로 활동해서 소년 점프를 비롯해 이런저런 잡지에 여러가지 글을 투고하였다. 소년 점프로 간 이유는 그림을 못그리게 됐지만 어떻게든 만화 관련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닉네임은 '유우보우'이며 지금도 인터넷 닉네임은 이것. 그외에도 드퀘에서도 같은 이름의 몬스터 동료가 나올 때도 있다.
그 이후 81년 여러가지 사무의 편의를 위해 컴퓨터를 구입했으나, 당시 일본 퍼스컴의 성능이 지나치게 후져서[3] 그 컴퓨터로 게임이나 하다가 게임 디자이너로 전직했다.
이후 소년 점프에서 게임 창작 대회 취재하러 가놓곤 자기가 만든 게임을 내놓는 등 기행을 해대더니 결국 에닉스(현 스퀘어 에닉스)에서 주최한 게임 개발 대회에서 입상한다. 여기서 천재 프로그래머 나카무라 코이치를 만나 태그를 맺고, 마시리토(소년 점프 편집장 토리시마 카즈히코)의 주선으로 토리야마 아키라의 그림을 받아 드래곤 퀘스트를 제작해 대박을 친다.
가정용으로 이식되면서 동료 회화 시스템 등의 추가로 텍스트량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7 이후의 작품(4리메, 5리메, 8)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의 스토리나 대사는 혼자서 집필했다. 최근 작품은 보조 작가들이 자잘한 대사를 써주지만 기본적인 플롯이나 설정은 호리이 유지가 직접 하고 있다. 특유의 뒤통수치는 전개와 정신나간 대사 센스로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밝은 사람이라는 평이지만 게임에 대해선 완벽 주의자다. 과거 패미컴 게임 리뷰를 소년 점프에서 할 당시엔 거의 AVGN에서 욕설만 뺀 수준으로 신랄하게 다른 게임을 까대는 게임 비평가였다. 다른 스태프들이 게임 제작사에서 직접 게임을 받아가지고 하느라 비평을 맘대로 못하자 사비로 수십만엔의 게임을 구입해서 다 깠다는 전설도 있다. 사실 드퀘의 탄생 계기도 "차라리 내가 만들면 이것보다 더 재밌겠다"라는 생각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드퀘를 만들 때도 다 만들어놓고는 맘에 안든다고 갑자기 갈아 엎을 정도. 드퀘의 맵, 던전 구성이나 밸런스 등도 직접 짜고 있다. 드퀘 발매 연기의 원인은 대부분 이 사람에게 있다. 비슷하게 갈아엎기로 유명한 미야모토 시게루와 비견되기도 한다. 실제로 제작자 입장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게임을 만든다는 방법론도 미야모토 시게루와 많이 비슷하다.
게임 역사에서는 스토리와 연출이 있는 텍스트 게임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게임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 구성과 플래그, 스크립트 관리법을 선보였단 부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문학을 전공하고 프로그램도 공부한 사람이라 프로그램적으로 시나리오를 구현하는 방법을 이것저것 창시할 수 있었던 것.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란 직업은 이 사람 덕분에 생겨난 직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일본에서 게임 시나리오 쓰는 것에 대해서 이론, 방법적으로 접근할 때는 이 사람이 창시한 방법부터 접근한다.
반면 게임의 시스템적인 면에서 변화를 주거나 새로운 시도가 거의 없기 때문에 혁신적인 면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가 실질적으로 JRPG라는 장르의 창조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되는 편견이다. 그가 오리지날이기 때문에 튀지 않는 것 처럼 보일 뿐, 그는 오리지날의 창조자라는걸 잊지 말자. 실제로도 시나리오 라이터에 가까운 그는 시나리오의 작성에 있어서 수많은 도전을 해왔다.
드퀘 제작 당시 그래픽을 더 리얼하게 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기록 용량이 초과되는 문제가 있어서 고민하던 중, 공원에서 아이들이 역할극 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상상력의 중요함을 다시금 알게 되어 그래픽쪽을 희생하고 텍스트적인 재미를 늘렸다는 일화도 있다.
인터뷰를 보면 드퀘8 개발 이후로는 한국산 온라인 게임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 영향인지 드퀘9에서 강화를 부분 도입해버려서 일본 드퀘 팬들에게 상당한 쇼크를 주었다.(연금 가마솥 항목 참고)
2009년 가을에는 인터뷰에서 '러브 플러스에 푹 빠져있다.'고 밝혀 수많은 사람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거기다가 여친은 아네가사키 네네라고 한다.
2000년대 후반 작품들에서 자꾸 캬바쿠라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데보라, 샌디, 세티아 등)가 나와 '호리이 유지가 캬바쿠라 단골이라 그러는 거 아니냐?'라는 루머가 돌기 시작하고 호리이 유지가 뭔가 기행을 하면 '이게 다 캬바쿠라 탓이다.'라고 하는 풍조가 팬덤에 불기 시작한다. 이에 대해서 호리이 유지가 직접 해명을 하기에 이른다. "전 술을 마시면 머리가 아프기 때문에 캬바쿠라는 년 1, 2회만 갑니다. 오해입니다."라고 한다. '''가긴 가는구만...'''

3. 여담


예)
전언판 → 현재 휴업중.
유우보우의 디지털 카메라 일기 → 디지털 카메라를 샀지만 아직 익숙하지 못하므로 익숙해지면 갱신
드퀘9 극비 정보 → '패스워드를 입력해 주십시오'라고 써놓고 밑에는 "죄송합니다 뻥입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라고 써있음.
드퀘 20주년 기념화상 → 공사중.
  • 젊었을 때는 목까지 내려오는 긴머리와 사각 뿔테안경이 트레이드 마크였으나 이후 탈모가 와서 대머리(하게)라는 별명이 붙었다. 본인도 자학개그 수준으로 쓰고 있다. 김정일을 닮았다는 소리도 일부 나온다.
  • 오픈 월드 게임도 좋아하며 특히 위쳐 3는 "내가 게임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걸 다 해버린 작품."이라며 극찬했다. 단지 오픈 월드 게임은 만드는 측 뿐만 아니라 즐기는 플레이어도 즐길 줄 아는 재능이 있어야 재미를 느끼는 장르라고 생각한다며, 대중을 위해 만들고 있는 드퀘를 오픈 월드로 할 생각은 없다고 한다.
  •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에 성우가 잘 도입되지 않다보니 한국 팬들 사이에서 "호리이는 게임에 음성이 도입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긴다"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굉장한 성우 덕후다. 베테랑부터 신인 성우까지 다 파악하고 있으며 라이안스기타 토모카즈, 핫산야스모토 히로키 같은 경우는 직접 지명했다고 한다. 녹음대도 직접 보고 연기 지도까지 해줄 정도였다고. 그래서 음성이 들어간 8 리메이크나 드퀘 히어로즈 같은 경우에는 성우 팬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드퀘에서 음성 도입이 잘 안 되는 것은 고전 드퀘 팬들이 성우 도입에 부정적이고 호리이 유지가 직접 관리하는 제작 시스템상 제작 기한이 넉넉치가 않기 때문에 안 들어가는 것이라고 봐야한다.

4. 관련 문서



[1] 다만 호리이는 의외로 크로노 트리거 제작에 아주 깊게 관여하지는 않았다. 스토리 원안 제공 및 초기 시나리오를 감수한 정도.[2] 코이케 카즈오와 자신은 글 쓰는 스타일이 다르므로 크게 배운 것은 없다고 한다. 대신 코이케 카즈오 덕에 자신 만의 스타일을 찾을 수 있었다고. 이후로도 스승님이라 언급하며 사적으로도 자주 만나는 편.[3] 일본의 컴퓨터는 한자 변환 등의 문제로 90년대 중기까지는 제대로 된 성능을 낼 수 없어 문서작성을 할 때는 와프로라는 전용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