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유옹주

 



'''조선 영조의 왕녀
화유옹주 | 和柔翁主
'''
'''출생'''
1740년(영조 16년) 9월 29일[1]
'''사망'''
1777년(정조 1년) 5월 21일
(향년 38세)
조선 한성부 창성궁
'''부왕'''
영조
'''생모'''
귀인 조씨
'''부군'''
창성위 황인점[2]
'''자녀'''
1남 1녀
(1남) 황기옥[3]
(1녀) 김제만의 처
'''묘소'''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 산 32
1. 개요
2. 생애
3.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영조의 서10녀. 귀인 조씨에게는 차녀가 된다.[4]

2. 생애


1751년(영조 27) 영조는 호조 참판 황재(黃梓)의 아들 황인점을 화유옹주의 부마로 결정하고, 창성위로 삼았다. 그러나 이듬해 화협옹주가 세상을 떠나면서 혼인이 연기되었고, 실제 혼인은 1753년(영조 29)에 치러진다.
한중록에 따르면, 방이 좁은 탓에 화유옹주가 혜경궁 홍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인원왕후가 "빈궁이 얼마나 중한데 제가 감히 그리하느냐"고 혼을 낸 적이 있었다. 인원왕후가 궁중의 예법에 엄격한 사람이기도 했으나 그만큼 세자빈의 권위에 임금의 딸인 옹주라도 맞설 수 없었다는 뜻이다.
화유옹주는 1777년(정조 1)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정조는 크게 슬퍼하면서 "선조의 옹주 가운데 궁중을 출입한 사람은 단지 이 옹주 하나 뿐이었는데" 라고 말하고 3년간 그대로 녹봉을 주게 하였다.[5] 영조가 딸부잣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대부분 요절한 탓에[6] 정조 대까지 살아있었던 옹주는 화유옹주, 화완옹주, 화령옹주 뿐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하면서 화완옹주는 폐서인 되었고, 화령옹주숙의 문씨의 딸이란 이유로 폐서인이 될 뻔한걸 정조가 허락하지 않아서 간신히 옹주 직위를 유지하던 상태였다. 그러므로 문제가 없던 이는 화유옹주 한 사람 뿐이었다.
후일 정조는 화유옹주와 그 어머니 귀인 조씨의 무덤에 치제하는 등 잊지 않았다.

나의 고모시여 / 曰我姑母

부드럽고 아름다움을 본받았으니 / 柔嘉維則

부모님의 당부 말씀을 밤낮으로 지켜 / 蚤夜鞶衿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네 / 不遺寸尺

병신년[7]

이후로는 / 維丙以後

우러르는 나의 심정이 더했는데 / 增予依仰

심원의 종고에 / 沁園鐘鼓

도위가 무고하네 / 都尉無恙

묘소의 입구가 눈에 보이는데 / 墓門延眺

그 나무가 꽤나 굵어졌으니 / 厥木拱把

무엇으로 심회를 쏟을까 / 何以瀉懷

이에 나의 행차를 멈추네 / 爲停予馬

《홍재전서》 和柔翁主墓致祭文

그녀의 남편 황인점은 1779년부터 1793년까지 모두 6회에 걸쳐 정사(正使)로서 연경에 다녀왔다. 그런데 1784년(정조 8)에 같이 간 이승훈천주실의를 비롯한 천주교 서적을 반입했던 일이 드러나 관직이 삭탈되었다. 죽은 뒤에는 화유옹주와 합장하였다.

3. 여담


[image]
《화유옹주 묘 출토 명기》
  • 화유옹주는 도자기를 비롯하여 옥제 비녀, 금동제 비녀, 은제 주전자, 녹색 벼루 등 30점이 넘는 부장품과 함께 묻혔다. 1991년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나왔으며, 후손들은 이를 국가에 기증하였다. 현재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복제품은 부천향토역사관에서 볼 수 있다. 이 중 도자기는 청화 안료로 장식한 합과 화려한 색으로 등나무 무늬를 장식한 합과 잔이 있어서 눈에 띄었는데, 진한 녹색을 띄는 팔각의 유리병에는 굽 바닥에 '건륭년제' 라고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남편 황인점이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옹주를 위해 사온 선물로 추정된다.
[1]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화유옹주 태지석. # [2] 본관은 창원이다. [3] 1781년(정조 5) 영희전 참봉으로 관직에 올라 양천현령, 재령군수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4]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서 귀인 조씨의 장녀는 요절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5]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5월 21일 을유 1번째기사. # [6] 12명의 옹주들 중 9명이 영조 대에 사망했다.[7] 영조가 승하한 1776년(영조 52)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