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성궁

 


1. 개요
2. 역사
2.1. 화유옹주와 창성위 황인점
2.2. 이후


1. 개요


昌城宮.
한성부 북부 순화방,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57 일대에 있던 조선시대의 궁가이다. 영조의 딸 화유옹주부마 황인점이 살았던 곳이다. 정식 이름은 '창성위궁(昌城尉宮)'. 규모는 대략 4,300㎡(1,300평)이다.

2. 역사



2.1. 화유옹주와 창성위 황인점


화유옹주영조후궁 귀인 조씨 사이에서 47세에 얻은 10째 딸(...)로 다른 딸들보다도 훨씬 귀하고 예쁘게 여겼다. 14살 되던 해에 호조참판 황자(黃梓)의 아들 황인점과 혼인하였고 황인점은 본관인 창원의 지명을 따 창성위에 봉해진다. 영조는 경복궁 서쪽에 있는 순화방의 을 하사하여 화유옹주 부부가 살게하였다. 이 궁은 ‘창성위궁(昌城尉宮)’이라 불렸고 약칭인 창성궁으로 널리 알려진다.
조선의 부마는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기에, 부마 황인점은 영조 때까지 할 일 없이 지내다가 1776년(영조 52년) 영조가 승하하자 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화유옹주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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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화유옹주와 창성위 황인점의 합장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유물들.
조선 후기 사대부 생활 상을 보여주는 유물들로, 황인점이 청나라에서 들인 물품들도 있다.
이후 정조는 창성위 황인점을 매년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1]청나라에 보낸다. 당시 조선은 책력을 구하기 위해 매년 말이면 선물을 듬뿍 싣고 동지사를 보내 책력을 얻어 와야 했다. 그러면서 황인점은 여러 차례 청나라를 드나들었는데, 그 때문에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고초를 겪기도 했다. 1783년(정조 7년) 황인점이 동지 겸 사은정사로 베이징에 갔을 때 함께 갔던 서장관 이동욱의 아들 이승훈이 천주교 관련 서적을 가져왔는데, 이를 몰랐다 하여 정사(正使)로서 책임을 물은 것이다. [2] 이후 황인점은 삭탈관직 되고 그 충격 때문인지 1년 뒤 1802년(순조 2년)에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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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점의 파직에 영향을 준 조선인 최초 영세자 이승훈.

2.2. 이후


이후로도 황인점의 후손이 살다가 왕실 소유가 되었다. 특정한 주인이 없는 궁은 내명부의 소유가 되었기에 대한제국 고종황제 때 창성궁은 순헌황귀비 엄씨의 소유가 되었다.[3]
1905년(광무 9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황실 소유의 재산을 국유화하려고 했다. 저 당시 대한제국의 내정은 통감부가 담당했기 때문에 국유화는 사실상 일제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 순헌황귀비 엄씨의 양동생 엄준원이 정동에 있는 달성위궁[4]에서 사립학교 건립을 준비했다. 이에 순헌황귀비는 엄준원에게 자신의 소유인 창성궁을 하사하여[5], 이 곳에서 1906년(광무 10년) 여메례를 학감으로 하여 진명여학교가 개교되었다. 순헌황귀비와 그녀의 친정 엄씨 가문은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 진명여학교 외에 숙명여학교(1906)와 양정학교(1905)도 설립했다.
진명여학교 설립에 들었던 모든 비용은 순헌황귀비의 경선궁과 영친왕궁 소속 재산인 강화군의 토지 · 전답 · 임야 등을 제공하여 마련했다. 불과 1년 후인 1907년(융희 원년)에 일제대한제국 황실 재산을 국유화했으니, 이때 순헌황귀비의 용단이 없었다면 창성궁은 일제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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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궁에 위치했던 진명여학교 구 교사(校舍).
진명여학교는 이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진명여자보통학교로 나뉘었다. 진명여자보통학교는 폐교되고,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51년에 오늘날과 같은 3년제 진명여자중학교와 3년제 진명여자고등학교로 나뉘었다. 그러다 진명여중은 1987년 폐교되고, 진명여고만이 1989년 8월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해 오늘까지 내려온다.
진명여학교 자리에는 ‘진명여중고교 터’라는 표지석(자하문로16길 21 맞은편)이 2019년 11월에 세워졌지만, ‘창성궁의 옛터’임을 나타내는 설명은 없어 창성궁이 어디였는지는 찾기 어렵다. 오직 ‘창성동’이라는 동명과 ‘진명길’이라는 길 이름만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도로명 변경으로 진명길은 ‘자하문로16길’이 되었다.

[1] 중국에 정기적으로 다니는 사신단.[2] 이 때 이승훈은 베이징에서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어 돌아오면서''' 천주교 교리 서적 등을 가져왔다. 세례명베드로.[3] 명성황후의 사망 이후 고종은 죽을 때까지 정실부인을 맞지 않았다. 그래서 후궁들 중 가장 으뜸 서열이던 순헌황귀비가 사실상 황후에 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4] 선조인빈 김씨의 소생 정신옹주의 남편 서경주의 집[5] 그러나 창성궁'''만'''으로는 규모가 작아, 주변의 주택을 구입 · 수리하여 교사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