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협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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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영조의 서7녀이다.[4]
2. 생애
2.1. 혼인
1743년(영조 19) 2월 18일 옹주로 책봉되면서, 화협(和協)의 작호를 받았다. 이어서 영조는 2월 21일 전국에 금혼령을 내렸는데, 이때 금혼 연령은 11세부터 13세까지의 소년이었다. 3월 11일 초간택, 3월 15일 재간택, 4월 2일 삼간택을 치르고 경기감사 신만[5] 의 아들 신광수가 부마로 간택되었다.
그해 윤4월 28일, 화협옹주는 가례를 올렸다. 하지만 하필이면 극심한 가뭄이 닥치는 바람에 혼인을 더 미룰 수 없는 사정으로 검소하게 치렀다.
그런데 당시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는 2살 차이였는데, 혼인의 순서를 두고 영조와 신하들이 의견 차이가 있었다. 영조는 화협옹주가 '먼저 태어난 누나'라서 사도세자보다 먼저 혼인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신하들은 장차 '대를 이을 세자'이므로 민간에서처럼 태어난 순서를 따지면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6] 영조는 세자의 지위는 남들과 다르지만, 형제간의 순서는 뛰어 넘을 수 없다며 누나인 화협옹주의 혼인 날짜부터 먼저 잡으라고 결정하였다.
2.2. 미움받는 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는 자신의 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하지 않고 편애하는 아버지였다. 모두 영빈 이씨의 소생인데도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는 귀애하고,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는 미워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조는 효장세자를 잃고, 아들이 태어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리 네 번째로 태어난 자식이 딸이었기 때문에 화협옹주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그렇다고 화협옹주 다음에 아들로 태어난 사도세자를 사랑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딸인 화평옹주를 보러 갈 때에는 사도세자에게 뭐라도 물어서 대답을 들은 뒤에 귀를 씻고 양치질을 했고, 그 물을 화협옹주의 집 방향으로 버렸다. 두 남매는 서로를 동정하고 각별한 사이가 되었으며, "우리 남매는 귀 씻을 준비물이로다" 하고 서로 웃었단다.화협옹주는 1733년생이니, 1728년 영조께서 효장세자를 잃고 아들이 태어나기만 기다리시다가 또 딸이 나오니 애달파 그리하셨던지, 그 옹주가 용모도 빼어나고 효성도 있어 아름다우시되 부왕 자애를 입지 못하니라. 그때 영조께서 화협옹주가 아들이 아닌 것이 애달파, 심지어 당신이 사랑하시는 화평옹주와는 서로 한집에도 머물지 못하게 하시니, 화평옹주가 홀로 부왕의 자애를 받는 일이 숨은 아픔이 되어 부왕께 ‘마옵소서’ 여쭈나 아무리 해도 영조께서 듣지 않으시니 할 수 없었느니라. 더욱이 화협옹주로 인하여 그 부마인 신광수까지 사랑을 못 입으니라.
《한중록》[7]
하지만 《영조실록》과 《일성록》 등을 보면, 한중록의 이러한 묘사와 대치되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영조는 화협옹주의 사저에 직접 거둥하기도 하고, 화협옹주방에서 진 외상 빚을 모두 갚아주기도 한다. 화협옹주의 궁방은 다른 옹주들과 비교해서 그 규모가 적지도 않았다.
신광수는 사람 됨됨이가 좋지 못해서, 1761년(영조 37) 관아에서 일하는 서리를 폭행하여 영조가 파직을 명한 적도 있고, 지나치게 재물을 탐하여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부마들이 이정도 문제를 일으키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오히려 화협옹주의 남편 신광수를 정말 미워한 사람은 사도세자다. 《한중록》에서는 신광수의 아버지 신만이 자신을 참소한다고 생각하여, "그 정승 복 없고 밉다" 하였고, 나중에는 신광수를 잡아다가 죽이려고까지 하는 모습이 나온다.[8]
2.3. 죽음
화협옹주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홍역으로 요절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옹주의 집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김약로 등이 영조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생각해 만류했다. 그러자 영조는 "내가 아픈 건 당파싸움 때문이지 딸이 죽어 슬퍼했기 때문이 아니다"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9] 그렇지만 지난 해 화평옹주가 떠났는데, 화협옹주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영조의 건강이 아주 좋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영조의 자식들은 모두 오래 살지 못했는데, 그나마 오래 산 자식들이 정조 대까지 살았던 화완옹주, 화유옹주와 순조 대까지 살았던 화령옹주 세 사람이다.
사도세자 행장에서는 화협옹주를 두고 "나는 이 누이에 대해 각별한 정이 있는데, 이제 갑자기 죽었으니 이 슬픔을 어디에다 비기겠는가" 라고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10]
3. 무덤 발굴
2016년 12월 28일 문화재청이 남양주에서 화협옹주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1970년대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이장한 관계로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발굴시 나온 지석에서 아버지 영조가 젊은 나이에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딸에 대한 슬픔을 적은 글이 적혀 있고 또한 같이 발굴된 석함에서 화장품으로 추정되는 물건들이 나와 왕실 여인들의 실생활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9월, 여기서 발견된 백자 화장품함에 남은 화장품을 분석[11] 하여 이를 현대기술로 재현한 화장품이 출시를 앞두고 있다.# 관련 기사. 4년에 가까운 연구 끝에 전통 화장품의 성분을 포함하면서도 인체에 유해한 납이나 수은 성분은 모두 제외했다고 한다. 화장품 업체와 손잡고 ‘프린세스 화협’(Princess Hwahyup)이라는 상표명을 붙여 이른바 'K-뷰티'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출시되는 화장품 용기 역시 묘지에서 발견된 백자 용기의 모습을 변형시킨 용기를 사용한다고.
[1] 대사동에 있었다. [2] 본관은 평산이다. [3] 본래 영성위 신광수의 8촌 형이 되는 신광면의 2남이었으나 양자로 입적되었다. [4] 영빈 이씨는 1남 6녀를 낳았으나 화협옹주 위로 태어난 세 딸들은 모두 요절해서 옹주로 책봉되지도 못했다. [5] 훗날 영의정의 자리까지 오르는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현장에서 방관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된다. [6] 영조실록 57권, 영조 19년 2월 22일 병오 1번째기사. # [7] 혜경궁 홍씨, 정병설 편역, 『한중록』, 문학동네, 2010. [8]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신광수를 잡아다가 죽이진 못했지만, 신광수의 관복, 조복, 군복 및 날마다 쓰는 여러 기구와 패옥, 띠까지 다 가져다가 불태우고 깨트렸다고 썼다. [9]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 11월 27일 갑신 1번째기사. # [10] 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0월 7일 기미 4번째기사. # [11] 대부분의 성분과 그 용도를 알아냈지만 딱 한 가지 성분의 용도만은 그러지 못했다. 그건 바로 곤충인 황개미로 이뤄진 덩어리. 위키피디아의 황개미 항목. 수천마리 정도의 황개미를 뭉친 덩어리가 액체와 함께 화장품 그릇에 담겨 있었는데 연구진은 이 황개미 유체의 용도는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