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량

 


'''고려의 문하시중'''
서눌

'''황주량'''

최충
'''고려 칠대실록 편찬자
황주량
'''
'''시호'''
'''경문공(景文公)'''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본관'''
황주 황씨(黃州 黃氏)
'''이름'''
주량(周亮)
'''생몰연도'''
? ~ ?
1. 개요
2. 상세


1. 개요


초기 고려왕조의 문관. 다수의 고려 초 인물처럼 생몰년도나 본관, 개인의 생애는 알 수 없다. 고려사 기록으론 최소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네 임금을 섬겼으며 광종 대부터 시작된 과거제로 조정에 들어온 신하이다.

2. 상세


황주량은 목종 대 실시된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1] 목종 대의 조정에 들어갔으며 현종 대엔 어사대(御史臺)[2]의 시어사(侍御史)[3] 직에 임명되어 조금씩 승진하기 시작했다.
'''현종조 사관(史館)국가기록원 관료
고려 7대사적 편찬자
'''
'''감수국사(監修國史)사관 장관'''
'''이부상서(吏部尙書) - 참지정사(叅知政事) 최항'''
'''수국사(修國史)사관 차관'''
'''예부상서(禮部尙書) 김심언'''
'''수찬관(修撰官)'''
'''시어사(侍御史) 황주량'''
'''우습유(右拾遺) 최충'''
'''예부시랑(禮部侍郞) 주저'''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
여요전쟁으로 인해 고려왕실이 제작한 실록이 사라졌다. 현종은 자신의 앞 7명 국왕의 기록을 다시 모으고자 했고, 이에 사관[4]을 재정비해 이른바 '칠대사적(七代史籍)'을 편찬하였다. 황주량은 사관에서 낮은 직위를 겸했지만 기록 수집 및 정리를 주도하여 칠대실록 제작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되었다. 총 36권을 편찬하는데 성공했고, 이 공로를 인정 받아 계속 진급하여 중추원[5]의 차관[6]이 되었다.
현종 원문대왕이 붕어하고 그의 태자 덕종 경강대왕이 즉위하였다. 덕종 대엔 한림원[7]의 장관[8]이 되어 국왕의 측근이 되었다.
황주량을 가장 중용한 왕은 덕종의 동생 정종 용혜대왕이다. 정종은 아버지, 형을 보좌해온 황주량을 요직에 임명해 신뢰를 드러냈다. 황주량은 상서성의 예부(禮部), 호부(戶部)의 장관을 거치고 중서문하성[9]의 참지정사[10],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11] 직까지 올랐다. 고려의 제후로 들어온 여진의 분쟁을 처리하고 두 번이나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최했다.
정종이 봉한 황주량의 최종 관작은 다음과 같다:
  • 공신호: 추충진절문덕광국공신(推忠盡節文德匡國功臣)[12]
  • 문산계 품계: 특진(特進)[13]
  •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14] -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15]
    • 수직: 수태보(守太保)
  • 훈위: 상주국(上柱國)[16]
정종 ~ 선종 시기에 죽은 것으로 보이며 황주량 사후 정종은 시호 경문(景文)을 내렸다. 선종은 황주량을 정종의 묘정에 배향하고 종 1품 문산계 품계인 개부의동삼사를 추증했다. 황주량은 현대에 와선 그다지 유명한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제작한 칠대사적은 조선시대까지 내려와 고려사의 주 인용자료가 되었다. 조선왕조나 대한민국이 고려 초기 역사에 대해 연구할 때 큰 도움이 된 셈이다.

[1] 당시 시험관(지공거)는 최항이다.[2] 고려의 감찰기관이다.[3] 어사대의 서열 3위급 직위.[4] 지금의 국가기록원과 비슷한 부서.[5] 고려의 최고위 정부기관 중 하나.[6]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7] 임금의 명령을 문서화하고 기록하여 전달하는 부서.[8]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9] 중추원과 더불어 고려의 최고위 정부기관이다.[10] 중서문하성의 서열 3위급 직위.[11] 중서문하성의 서열 2위급 직위.[12] 광국공신호.[13] 정 2품 품계. 문산계 중 두번째로 제일 높다.[14] 중서문하성의 장관.[15] 상서성 소속인 이부의 장관.[16] 1등급 훈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