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번의 난

 

<colcolor=black> '''삼번의 난
三藩之乱'''

'''기간'''
1673년 ~ 1681년
'''장소'''
중국 대륙
'''교전
세력'''
[image] '''청나라'''
운남성
광동성
복건성
오주
명정
막 왕조
'''지휘관'''
[image] 강희제
[image] 걸서
[image] 라포
[image] 악락
[image] 상가희
[image] 늑이금
[image] 상선
[image] 창태
[image] 부라탑
[image] 도해
[image] 망의도
[image] 뇌탑
[image] 상지효
[image] 장용
[image] 조양동
[image] 왕진보
[image] 희복
[image] 목점
[image] 서서
[image] 손사극
[image] 채육영
[image] 본홍렬
<^|1>'''삼번 수장'''
오삼계오세번
경정충
상지신

'''명정'''
정경

'''막 왕조'''
막경우

'''삼번 각군 지휘관'''
손연령
왕포신
포이니
오응기
오세종
오국귀
하국상
호국주
곽장도
마보
왕병번
고대절
마구옥
강원훈
백현충
증앙성
유진충
유국헌
'''병력'''
15만 또는 40만
오주: 20만
복건: 20만
광동: 10만
왕포신: 4만
손연령: 1만
명정: 1만
차하르: 1만
막 왕조: 불명[1]
'''피해규모'''
불명
불명
'''결과'''
'''반란 진압'''
'''영향'''
'''청나라의 기반 견고화와 중국 통일'''
1. 개요
2. 배경
2.1. 한족 항장과 삼번의 성립
2.2. 강희제의 등장과 철번, 오삼계의 궐기
3. 전개
3.1. 전반기(1673년 ~ 1675년)
3.2. 후반기(1676년 ~ 1681년)
4. 반란은 왜 실패했는가?
5. 결과
6. 조선의 북벌론과의 관련
7. 미디어믹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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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三藩之乱'''
'''Revolt of the Three Feudatories'''
1673년 ~ 1681년 운남오삼계, 광동상지신, 복건경정충 등의 삼번(三藩)이 대만 정씨 왕국정경 등과 연합해 대청국, 그리고 강희제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 이 전쟁이 청나라의 승리로 끝나게 됨으로서, 청은 진정한 의미의 중국 통일과 중화 제국으로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명청 전쟁으로 중원을 확보한 이후 청나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쟁 중의 하나이다.

2. 배경



2.1. 한족 항장과 삼번의 성립


오삼계는 명말 청초의 장수로, 명 말엽 숭정제의 지시로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으나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하자 산해관의 문을 열고 청에 투항하여 이자성군을 격파했다. 이후 오삼계는 청나라의 화남 정벌에 적극 종군하여 남명의 세력을 모조리 격파하고 추적하여 운남에 이르러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을 전멸시키고 명의 황족들의 씨를 말렸다. 그는 이 공로로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지고 운남의 번왕이 되었다.
경중명은 본래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의 부하로,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도망 및 뇌물 수수죄로 처형되자 이에 반감을 품고 공유덕[2]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이끌고 있던 수군과 화포 등을 갖고 공유덕과 함께 후금에 귀순한 사람이다.[3] 귀순 당시 청태종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총병관의 자리에 올랐고, 병자호란 때에 도르곤 밑에서 강화도 공략을 맡았으며 입관 이후에도 화남에서 저항 세력 정벌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정남왕(靖南王)이 되어 복건의 번왕이 되었으나 휘하 관리가 지은 죄에 연루되어 자결하고, 아들 경계무가 정남왕의 작위를 세습했으며 다시 경계무의 아들 경정충이 이 자리를 세습했다.
상가희 역시 모문룡의 부하로, 경중명과 달리 모문룡 처형 이후에도 군에 잔류하고 있었으나 원숭환에 대한 반감은 마찬가지였고 경중명의 반란이 실패하고 반란군이 후금에 귀순할 때 동참하여 역시 극진한 환대를 받고 병자호란과 북경 공략에 종군했고, 이후에는 광주 지역 공략에 전념하여 평남왕(平南王)에 봉해지고 광주의 번왕이 되었다.
이들 세 명은 청의 중국 통일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에 종군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청의 중국 통일에 큰 도움을 주었다. 때문에 이들은 순치제 기간 동안엔 청 조정의 우대를 받았다. 이들 삼번은 자체적으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는 특권에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특권이 있었고, 2대 정남왕 경계무의 경우처럼 작위의 세습도 가능했다. 때문에 청 조정은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화석건녕공주와 혼인시키는 등 삼번왕의 아들들을 공주와 혼인시키며 우대하는 동시에 북경에 머물게 하여 인질로 삼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삼번은 서로 자기들의 세력을 확대하기 골몰했다. 삼번은 자신들의 직할 병력을 늘리고 세수 지역을 임의로 넓히는 등 적극적 상행위로 재정을 늘렸으며, 주변 각 성의 인사권에도 개입하여 북경의 황제와 조정이 인사를 결정하기도 전에 삼번에 의한 추천 인사가 올라오는 지경이었다.
청으로서는 삼번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통제 불능이 될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니꼽긴 해도 일단 삼번은 대륙 통일에 있어 최고의 공신들이었다. 경중명과 상가희가 없었다면 청은 수군을 얻지 못하고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를 점령하지 못했을 것이며, 오삼계의 투항으로 인해서 쉽게 산해관을 넘을 수 있었다.

2.2. 강희제의 등장과 철번, 오삼계의 궐기


1661년 순치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강희제 초기에도 이러한 삼번의 위세와 청 조정의 기본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오삼계가 형식상 운남, 귀주 두 성의 지배권을 조정에 반납한 거 뿐이고 실질적 지배권은 여전히 오삼계에 있었다.
그러나 1669년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정의 최대 권력자인 구왈기야 오보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숙청당하고, 젊은 황제 강희제의 친정이 시작된 것이다.[4] 그리고 강희제는 삼번의 폐지, 즉 철번을 마음 속으로 강하게 결심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황제의 인사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삼번 지역에 자신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임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평남왕 상가희였다.
1673년 상가희는 자신의 나이가 많고 병이 많음을 이유로 평남왕 자리를 장남 상지신에게 세습해줄 것과,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원했다. 실제 번왕의 세습은 정남왕의 3대 세습을 통해 충분히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넙죽 상가희의 귀향은 허용했으나 평남왕작의 세습은 허락치 않는 철번을 결정했다. 그리고 상가희는 '''이 결정을 수용했다.''' 아쉽고 섭섭하긴 했지만 청의 개국 공신으로서 황명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희제도 이 쿨한 결정을 환영하며 상가희를 띄워주기 바빴다.
문제는 나머지 두 번왕이었다. 황제의 평남 철번이 주는 메시지는 명백했다. 위기감을 느낀 경정충과 오삼계는 뒤따라 “상가희의 예를 따라 우리도 철번하게 해주세요”라는 상소를 올리며 강희제를 떠보았다. 그리고 강희제는 즉시 '''응 그래 철번'''이라며 이 상소문을 넙죽 받아먹었다.
물론 조정에서도 반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허서리 송고투와 같은 조정 내 철번 반대론자들은 철번을 강행할 경우 삼번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대만의 정씨 왕국이 호응하면 쉽게 제압이 어려울 것이라며 안정을 위해 철번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제와 철번 찬성론자들은 "'''삼번 저거 이대로 두면 나라가 망한다. 그리고 저들의 인질을 우리가 잡고 있으니 섣불리 반란 못 일으키고, 설사 일으킨다 쳐도 오삼계 뿐이고 나머지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의 입장을 내세우며 초강경 모드로 돌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오삼계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오삼계의 측근과 가신들은 대부분 궐기할 것을 주장했고 오삼계가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려 1673년 11월, 청이 멸망시킨 명의 복수와 오랑캐 토벌을 대의로 내세우며 황제가 임명한 운남순무(雲南巡撫) 주국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

3. 전개



3.1. 전반기(1673년 ~ 1675년)


[image]
삼번의 난 전반기 형세도. 붉은 선은 오삼계 군의 진격로, 초록색 점선은 경정충 군의 진격로이다.
반란 직후, 강희제가 내려보낸 운귀(운남, 귀주)총독 감문혼이 이를 막으려 했으나 운남, 귀주 양 지역에서 황제가 임명해보낸 총독의 명을 받드는 관료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오삼계의 반란군에 가담하여 총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되는 상황에 빠져버리자 절망하고 가족들과 함께 자결했다. 그만큼 운귀 지역은 수십년 동안 오삼계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철저한 오삼계의 세력이 되어버렸다. 강희는 팔기군을 형주(荊州), 좀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호북성 강릉에 보냈다. 순승군왕(順承郡王) 늑이금이 영남(寧南)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패륵 찰니(察尼), 도통 각라주만, 호군 통령 이이도재 등 만주 팔기를 진격시키며 늑이금은 출발하면서 "운남과 귀주의 토벌은 8월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라 큰소리를 쳤다.[5]
한편, 철번을 위해 내려왔다 간신히 반란군의 손길을 피한 관료들이 반란 11일만에 중국 남쪽 곤명에서 수도 북경까지 밤낮없이 내달리는 처절한 레이스 끝에 반란 사실을 보고하자 청 조정은 멘붕에 빠져 철번을 주장한 관료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철번을 물리고 오삼계에 화해를 청하자고 주장했다. 강희제 본인도 설마 오삼계가 실력 행사로 나올줄은 예상 못해 당황했으나 이내 곧 침착을 되찾고 조정 내 화의파를 닥치게 한 다음 반란 토벌을 선언하고 반란 토벌의 격문을 띄웠는데 그 내용은 "'''오삼계 네놈은 명 부흥을 대의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애초에 명을 멸망시키는 데 앞장선 놈이 네놈 아니었냐? 네놈은 명에게도 반란군, 우리 청에게도 반란군이며 아무런 대의도 없다.'''"로 오삼계의 대명의 복수라는 논리를 완전히 논파했다.
그러나 전쟁은 말 싸움으로 되는 게 아닌 법이다. 1674년 초, 오삼계는 직접 군을 이끌고 호남호북[6]으로 진격하여 총병관 체세록을 생포하고 정부군을 격파하며 순식간에 장사를 점령하고 호남을 휩쓸며 강서성으로 가는 길목을 열고 북으로는 무창에 이르렀다. 뒤이어 사천성에서도 오삼계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 사천마저 오삼계의 손에 떨어졌다.
이에 강희제는 내응을 우려하여 북경에 있던 오응웅[7]을 교수형에 처하고, 군을 재정비하고, 경정충과 상가희에게도 급히 사신을 보내 "'''내가 어리고 우둔하여 조금 경솔했다. 철번은 취소하니 너희들이 계속 다스려라.'''"라며 철번을 취소하며 두 번의 반란 가담을 막고자 했다. 동시에 명에서 투항한 항장들 다수가 각 지방의 총독, 순무를 맡고 있어 반란에 줄줄이 합류할 가능성이 보이자 역시 칙령을 내려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충성하여 반란군 토벌에만 전념하라고 격려하며, 오삼계의 반란이 삼번의 반란이나 반청 복명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674년 3월, 결국 정남왕 경정충이 근거지 복건에서 반란에 가담, 절강, 강소 두 성까지 휩쓸고 대만 정씨 왕국의 지원까지 받기로 하면서 상황은 강희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서남과 촉에 국한되는 게 아닌, 화남 전역을 휩쓰는 대규모 전란으로 발전했다. 아울러 사천 지방이 오삼계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오삼계는 사천에서 한중을 거쳐 중원으로 나아가는 북벌을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섬서 총독 왕보신이 반란을 막기 위해 온 조정 중신과의 반목과 불화로 인해 반란에 가담하면서 섬서성 대부분이 오삼계군에 떨어지고 서안만이 외로이 남아 있었다.
한편 광동의 상가희의 경우 상황이 복잡했다. 전략적, 지리적 측면에서 상가희의 광동은 서쪽으로는 오삼계의 운귀 지역, 동쪽으로는 경정충의 복건, 북쪽으로는 오삼계가 점령한 호남에 둘러싸여 청 중앙군의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또한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 상가희는 철번 명령을 수용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심 강희제에 대한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때문에 철번을 진행하기 위해 광동으로 왔던 호부 상서 양청표 등 조정 인사들은 상가희가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서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오삼계가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상가희가 조정 인사들과 만나자, 양청표는 재빨리 기지를 발휘해서 위의 철번 취소령을 말해주고, 강희제가 상가희를 깊이 신뢰한다고 말했다. 불만이 있긴 했지만 반란 자체에도 회의를 가졌던 상가희는 이를 계기로 조정 편을 들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상가희는 결국 강희제와 청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는 상주를 올려 강희제를 기쁘게 하였다. 상가희가 청에 충성한다는 것은 삼번 전체가 반란에 가담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는 것과 동시에, 평남왕과 광동군의 군사력을 반란 진압에 투입할 수 있고, 무엇보다 백전노장 오삼계에 맞서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없어 연전 연패 중인 무능한 지휘관들과 달리 군력에서 오삼계와 맞먹는 상가희를 맞수로 투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때문에 강희제는 상가희에게 주변 지역 인사권, 군사권, 단독 작전권을 모조리 보장해주고, 상가희가 원하는대로 차남 상지효를 후계자로 인정해주었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광동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상가희는 본래 장남 상지신을 후계로 하려고 상주를 올렸다가 전란의 와중에 상지신에게 실망하여[8] 차남 상지효를 새 후계로 삼고 강희제의 승인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상지신은 마침 상가희가 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서 광동의 전권을 장악하고 오삼계와 연합 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상가희는 상지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자결 자체는 가족들이 발견해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결국 건강을 해쳐서 병으로 사망했다. 죽기 직전의 유언도 '황제께 큰 은혜를 받았는데 적을 무찌르지 못하고 죽으니 큰 허물이 남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엔 혼백이라도 황제를 섬길 것이다'라며 강희제에게 충성한다는 내용을 남겼다.
이로서 강희제가 그토록 염려하던 삼번의 동시 반란이 현실화하는 것 같았지만...

3.2. 후반기(1676년 ~ 1681년)


[image]
삼번의 난 후반기 형세도
강희제는 오삼계군의 중원 진출을 막기 위해 서북 전역을 총괄하는 사령관으로 무위 대장군 도해(圖海)를 임명하였고 도해는 한중을 넘어 진격해온 오삼계군을 격퇴하는 것과 동시에 감숙성의 반란군 거점 평량을 함락하고 반란에 가담한 섬서 총독 왕보신을 온갖 지극정성으로 회유하고, 반란에 가담했던 상황을 참작한다며 설득, 끝내 왕보신의 항복을 받아내고 반란이 화북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며 중원을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강희제는 복건의 경정충을 이탈시키기 위해 1676년에 절강성을 향한 집중 공세를 개시하며 항복을 제안했다. 이때 경정충은 같은편인 대만 정씨 왕국을 공격했다가 역으로 당해 영토 일부를 뺏기기도 하는 등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기에 청의 집중타를 맞자 저항할 의지를 상실해 버렸다. 강희제는 이 날을 위해 오삼계의 아들은 처형시켰음에도 경정충의 아들들은 나중에 죽일 생각으로 억류만 하고 있었고, 이에 한치 앞을 못 보던 경정충이 항복을 택했다.
뒤이어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광주의 상지신도 항복했다. 애초에 상지신은 양쪽 사이에서 간을 보는 처지였기에, 오삼계군의 광동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오삼계의 병력 지원 요청을 무시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경정충이 항복하자 즉시 오삼계 편에서 이탈하며 자신의 왕위와 번의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을 한 것이다. 그래도 상지신은 이 덕택에 일족을 보전할 수 있었고 본인도 곱게 죽긴 했다. 상지신은 반란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지위 보전이 목적이었기에 강희제는 능지형 대신 자살로 형을 낮추었고, 연좌도 하지 않았다. 결국 상지신이 1677년 5월 항복하면서 반란은 다시 삼번의 난에서 오삼계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
삼번 가운데 2개 번을 이탈시킨 청조는, 중원 - 한중 - 사천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산악 험로를 포기하고, 대신 오삼계가 점령하고 있던 호남, 호북으로 공세를 집중했으나 동정호 전투나 창사 전투 등에서 크게 패하여 막히고 있었다. 그러나 오삼계군의 초반 기세가 사라진 것은 명백했고, 이제 주도권은 청이 쥐고 있었다.[9]
오삼계는 이러한 상황을 정치적으로 뒤집기 위해 호북성 형주를 창천부라 개칭하고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周), 연호를 소무(昭武)로 하고 1678년 3월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같은 해 8월, 달랑 5개월동안 제위에 있다가 노쇠로 죽어버리고 말았다.(손자 오세번(吳世藩)이 주의 2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오삼계가 죽으면서 막강한 오삼계군의 유대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각지의 반란군 지도자들이 다시 청조에 투항하면서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세번은 불리함을 깨닫고 본거지인 곤명으로 후퇴하며 방어전으로 전환했고, 1678년 말엽이면 청조는 마침내 호남, 호북성을 완전히 탈환하기에 이른다.
결국 1681년 마지막 총 공세가 펼쳐지면서 사천 지방이 청조에게 넘어가고, 근거지 곤명까지 청군이 밀려오자 오세번은 자살, 곤명이 청군에게 함락되고 오삼계 일족이 멸족되면서 삼번의 난은 종결되었다.

4. 반란은 왜 실패했는가?


불과 1년 ~ 2년만에 오삼계군은 화남을 휩쓸고 장안까지 넘볼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으나 이러한 전성기는 몇 년 가지 못하고 너무 쉽게 패망했다. 청의 베테랑 장수들이 모두 죽거나 일선에서 은퇴하고 도르곤과 오배에게 줄섰다가 죽은 사람도 많아서 군사 작전에서 오삼계군에 고전을 면치 못했음에도 이리 쉽게 무너진 건 다음과 같다.[10]
첫째, '''오삼계군에게는 대의명분이 없었다.''' 실제 오삼계는 반란의 대의명분으로 대명의 부흥, 복수를 내걸었으나, 애초에 산해관을 열어 청을 맞이한 것도, 남명의 저항 세력을 모두 박살낸 것도, 남명 최후의 황제 소종 영력제를 직접 교살한 인간도 오삼계다. 오삼계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영력제의 묘를 참배하고 눈물을 흘리는 퍼포먼스를 했지만, 본인이 영력제와 그 일족을 직접 목졸라 죽여놓고 15년 뒤에 흘리는 거짓 눈물에 감동할 정도로 백성들과 명의 유신 및 장수들은 바보가 아니다. 심지어 오삼계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의 번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였고, 반란을 일으킨 것은 자신과 자기 가문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함일 뿐이었기에 다른 번이나 청조에 투항한 항장, 유신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할 동기가 없었다. 이러니 그 진정성을 믿어주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때문에 오삼계 및 그 군과 유대 관계가 얽힌 경우를 제외하면 청에 항복한 명의 항장이나 유신들이 반란에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었고 백성들 또한 지지하지 않았다. 청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재야에 묻힌 명의 유신들을 오삼계군이 초빙하려 했으나 한결같이 역적에게 충성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거절했을 정도.
더욱이 다른 항장들 역시도 오삼계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점도 오삼계의 명분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는 증거다. 오삼계의 명분이 그럴듯했으면[11] 그래도 오삼계처럼 항장 출신들이 몇 정도는 가담해야 할 텐데 강희제가 "지위는 보장해줄 테니 반란 진압이나 해라"라고 하자 다들 오삼계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즉 그 항장들 눈에도 오삼계의 명분은 택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는 거다.
후당의 적이었던 거란의 힘을 빌려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을 건국한 석경당의 경우 자기가 세운 나라가 오주와 비슷하게 2대 황제 치세에 멸망했는데, 명나라 잔존 세력들의 입장에서 오삼계는 한족판 석경당이고 오주는 한족 왕조판 후진이었던 셈이다. 외세의 힘을 빌려 출세하고 더 나아가 창업군주가 되기까지 한 매국노가 중화문명의 수호자 코스프레를 했다는 점에서 석경당과 오삼계의 행보는 각각 후당과 명나라의 유신들에게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설령 삼번의 난이 성공했다 해도 상술한 이유로 인해 오삼계가 한족의 배신자였던 점이 계속 걸림돌로 작용하는 바람에 명의 유신들 및 한족 백성들은 오주 황실을 배신자의 후손으로 보며 철저히 불신했을 것이다. 이것이 다른 문제점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경우 결국 오주는 실제 역사보다 좀 더 오래가고 덜 비참해질 뿐, 실제 역사의 명나라나 청나라마냥 완전히 자리잡아 200년 이상 이어지지는 못하고 허무하게 단명했을 것이다.[12]
둘째, 애당초 삼번이 합심하고 계획적으로 일으킨 반란도 아니었다. 공식적으로야 삼번의 난이었지만 광동의 상가희는 오히려 초반에 적극적으로 반란을 토벌하려 했고, 쿠데타로 집권한 상지신도 어디까지나 정치적 목적에서 반란에 가담했다고 선언했을 뿐 실제로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채로 청조로부터 자신의 작위를 인정받는 걸 목적으로 했다.(실제로 그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바로 청조에 항복했다.) 복건의 경정충은 상지신보단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했으나 적극적으로 반란에 참여하진 못한 채 결국 제일 먼저 청에 항복했다.[13] 차라리 이들이 합심해서 반란에 나섰더라면 당시 청의 상태 및 후방에 있는 몽골, 준가르의 반청 감정 등을 고려하건대 의외의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따로 놀다가 각개격파당하고 망했다.[14]
셋째, 명장이자 반란의 중추이던 오삼계가 삼번의 난을 일으킨 시기에는 너무 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난을 일으킨 지 얼마도 지나지 않아서 일찍 사망한 것도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당시 청나라 황제가 다른 인물도 아닌 '''강희제'''였다. 사실 반란의 초기 기세가 매우 거셌기 때문에[15] 경험이 없는 황제가 공황상태에 빠져서 북원이 그랬듯이 본거지인 만주로 달아났다면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강희제는 어렸지만 절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여기에 청나라의 군사력, 즉 팔기군 및 만주족 장수들도 당시 건재했고, 실전경험도 풍부했다. 그 중 핵심인 몽골-만주 기병은 당연히 한족이 중심이 된 반란과 무관했다. 19세기 초에 가면 만주족들이 대륙의 풍요와 사치에 취해 야성을 잃어서 팔기군이 몰락하기는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민족 전원이 전투원인 만주족 특유의 집단의식은 고스란이 남아 있었으며, 전투력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청나라 영역으로 남아있는 대륙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까지 고려하면, 아무리 오삼계가 산전수전을 다겪은 명장이더라도, 변방에서 모은 군대로 청나라군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한편 반란의 주동자가 오삼계가 아닌 상가희/상지신 혹은 경정충이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셋 다 자기 이익만을 위한 반란이었고 오삼계만한 세력과 카리스마도 없었으며 합심도 안했고 상가희면 모를까 상지신, 경정충의 경우, 특히 경정충은 대만 정씨 왕국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되려 지기까지 했으니 오삼계가 주동했을 때보다 더 빨리 망했을 것이다.

5. 결과


오삼계는 부관참시 당하고, 그 일가는 전원 멸족되었으며 번은 철번되었다. 그리고 강희제는 애당초 다른 번들도 존속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다른 번들의 말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평남왕 상지신이 북경에 압송되어 자살 명령을 받고 자살하였다. 그는 반란에 가담한 혐의 외에도, 항복 이후에도 황명을 씹고 반란 토벌에 가담하지 않은 죄가 걸려있어서 얄짤없었다. 다만, 아버지 상가희가 죽을 때까지 청조에 충성했으며 반역 자체를 장남 상지신 혼자서 주도한 것, 그리고 상지신이 처음부터 자기 지위의 보전이 목적이라서 전면적으로 반역에 적극 가담하지 않고 바로 항복한 것이 참작되었다. 그래서 상지신에겐 능지형 대신 자살로 형을 낮추는 한편 나머지 가족의 죄는 묻지 않았다. 상가희의 차남 상지효가 부친의 시신을 운구하여 북경에 오자 강희제가 직접 맞이하기도 했으며, 상가희에게 예우를 갖춘 장례식을 치러 주도록 했다.
물론 죄가 오삼계와 동급이던 정남왕 경정충과 그 일족은 애당초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강희제는 경정충과 그 일족을 당연히 처형했다. 경정충은 대역 죄인에 내려지는 능지형을 받았다. 일족들 역시 빼도박도 못하는 적극적인 반란 가담 혐의가 걸려 역시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로서 강희제는 목표로 한 삼번의 철폐를 큰 희생 끝에 이뤄내고 중국 전토에 대한 직접 지배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정경 사후 내분에 휩싸인 정씨 왕국의 대만 또한 정벌하면서 청은 명말·청초의 대란을 이겨내고 중원을 완전 정복하게 된다.
이 전쟁의 여파로 경덕진이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중국에서 도자기를 수입하던 유럽인들은 다른 매입처를 찾아야했고, 그 후보로 떠오른 곳이 바로 일본이었다.[16] 도자기 제조 기술을 갖고 있던 국가로 조선도 있긴 했으나 지리적으로 볼 때 유럽 상인들이 가까운 일본을 거르고 왕래가 없던 조선을 택하기란 불가능했고 또한 이미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병사들이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일본이 따라잡았던 상황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으로 한동안 일본산 도자기가 유럽 시장을 휩쓸었고, 18세기에 접어들면 유럽의 도자기 시장은 일본과 중국, 그리고 자체적으로 도자기 제조 기술을 갖추기 시작한 (본차이나 등의) 유럽산으로 삼분된다.

6. 조선의 북벌론과의 관련


한편 당시 조선은 윤휴가 북벌론을 주장하던 시기와 맞물리는데, 윤휴가 북벌을 주장한 까닭 중 하나가 "오랑캐들을 봐라. 지금 삼번이 저 난리를 친다. 우리도 협력해서 치욕을 씻자!" 이것이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도 삼번의 난을 이용해서 대만 정씨 왕국이나 삼번과 호응하자는 의견도 많았으나,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사실 군사를 내고 싶어도 시도할 수 없었는데, 당시 조선의 사정도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인구가 격감했는데, 여기에 한국사 최악의 기근인 경신대기근(1670-1671)[17]까지 닥친 뒤라 군사를 낼 힘이 있으면 당장 백성부터 먹여 살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사신들은 매년 북경을 다녀와서 청나라의 강대함을 조정에 보고하고 있었고, 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으므로 아무리 화이관이 투철한 조선 조정도 무모한 짓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숙종 연간의 청 공격은 당시 황제가 강희제인 데다가, 그 외 조선의 여러 내부 문제까지 겹친 만큼 북벌을 감행했다가는 중원을 재평정한 청나라에 의해 병자호란 때 겪은 삼전도의 치욕 저리가라 할 만큼 무자비한 보복을 받고[18] 조선 왕조는 멸망하였을 것이며 심지어는 한반도 전체가 중국에게 병탄되었을 가능성조차 있었으니 북벌을 안 한 게 되려 천만다행인 셈이다.

7. 미디어믹스에서


중국의 소설가 얼웨허[19]가 2000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인 강희대제[20]에서 초반부의 중요 내용이 바로 이 삼번의 난이 벌어지는 배경과 그 과정이다. 삼번의 난 초반에 한때 궁지에 몰렸던 강희제이지만, 믿음직한 신하들과 그 자신이 가진 불굴의 의지와 행운으로 인해 끝내 삼번의 난을 평정하는데 성공한다.

[1] 오삼계의 소무 연호 채용, 보급품 지원.[2] 경중명, 상가희의 동료로써 역시 원숭환 사후 청에 투신하여 병자호란 및 북경 공략. 화남 정벌 때 정남왕(定南王)으로써 광서의 번왕에 봉해졌지만 남명의 손가망과 싸우다가 패해 자결했다. 공유덕의 사위 손연령이 광서를 지배하며 오삼계에 붙었다가 나중에 다시 청에 투신하려 하여 살해된다.[3] 이 때의 반란 때문에 조선도 명으로부터 반란 토벌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공동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이 때문에 후금에게 밉보이게 되었고, 훗날 청 태종이 '명나라랑 친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고 협박을 하는 이유가 된다.[4] 오보이는 삼번에게 뇌물을 받아먹으면서 그들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5] 늑이금은 후에 겁을 먹고 전투를 회피한다. #[6] 삼국지에서 유표가 다스리던 그 형주다. 호북은 형주 북부, 호남은 형주 남부 4군.[7] 오응웅은 오삼계의 맏아들이다. 청 태종의 14녀인 건령공주와 결혼했고, 맏아들은 오세번, 차남은 오세림이다. 오세번은 북경 탈출에 성공했으나, 오세림은 아버지와 함께 처형당한다. 그리고 그보다 어린 아들들은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된다. [8] 상가희는 위에 언급한 양청표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작은 연회를 열고, 자식들과 휘하 장수들이 조정 인사들에게 인사하도록 했다. 그런데 상지신은 조정 인사들에게 인사를 하려 들지 않았고, 이에 상가희는 크게 화가 난 나머지 상지신의 손을 깨물어 버리고 '소인은 폐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라며 사죄한 일도 있었다.[9] 오랜기간동안에 연결된 루트에서 오삼계의 기반이 되는 운남에 중심지역을 타격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은 산악 험로이기는 하지만 한중에서 사천으로 들어가는 길이였다. 이 길은 전국시기 秦이 연결한 길로 이 길을 통하여서 사천분지를 점령하였고, 운남지역까지 내려갔다. 그에 비하여서 호북에서 호남을 거쳐서 가는 길은 처음에는 평지이지만, 호남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큰 길이 없는 밀림지역이였고, 중간 점령지인 귀주는 가난하기로 지금도 몇 손가락안에 뽑히는 곳이였다. 우회해서 광서까지 간다고 하여도 광서도 귀주와 마찬가지로 빈약한 지역이고, 도로도 없으며, 보급로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다만 호남까지 진출한 오삼계군을 격퇴하여 적의 경제적인 이익을 제거하는 단기적인 전투목적으로 보여진다. 또한 청이 패하기는 하였지만, 동정호나 창사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호북일대가 청의 완벽한 관할로 돌아 섰음을 보여준다.[10] 자잘하게 제법 괜찮은 장수들이 있겠지만, 아이신기오로씨들의 능력이 압도적으로 탁월하였고, 이들이 사망하면서 약화되었다. [11] 예를 들면 번왕의 자치권을 침해하는 독재자 황제를 몰아내고 번왕의 자치권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온건한 성향의 황제를 새롭게 옹립하자는 명분, 명나라든 청나라든 똑같이 문제가 많은 왕조이니 차라리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는 명분 등. 전자의 경우 청 왕조에 의해 토사구팽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후술할 "지위는 보장해줄 테니 반란 진압이나 해라"라는 강희제의 말을 불신하고 오삼계에게 협조하는 항장이 많아졌을 것이며, 후자의 경우 명말청초 한족 민중들이 명나라와 청나라를 모두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한족 민중들의 삼번의 난 가담이 많아졌을 것이다.[12] 현실의 한자문화권에도 해당 대체역사의 오주와 비슷한 케이스로 베트남응우옌 왕조가 있다. 응우옌 왕조 초대 황제인 자롱 황제도 오삼계와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기는 힘들지언정 외세의 힘을 빌려 승승장구했다는 한계가 있었던 점이 비슷하며(자롱 황제를 도와준 외세 중에는 아유타야 왕국 시절부터 인도차이나 반도의 맹주 자리를 놓고 계속 베트남과 치열하게 다투었던 태국도 있었고 크메르 제국 수리야바르만 2세 치세에 베트남을 침공했던 캄보디아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자롱 황제는 조국의 상업권을 프랑스에 들어바치려는 시도까지 했음), 이것이 계속 걸림돌이 되면서 결국 응우옌 왕조가 세워진지 약 150년 만에 멸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더군다나 응우옌 왕조 4대 황제인 뜨득 황제가 응우옌 왕조가 타국의 속국이 아니던 시절의 마지막 황제였고 그 후로 1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까지는 모두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허수아비 황제였으므로, 응우옌 왕조는 사실상 150년은커녕 100년보다도 더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되고 멸망한 거나 다름없다.[13]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복건 자체는 그다지 풍요롭지 않은 변두리였으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복건을 지나 절강 일대까지 정씨세력들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정충에게 복건을 준 것이니 원래부터가 대만 정씨와는 라이벌이였다. 또한 서북이 산지인 복건에서 중심지역은 동남방 해안가인데, 이 앞에 대만이 있으니 경정충에게는 대만 정씨는 자신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였다.[14] 이들이 가진 운남, 광동, 복건은 베이징에서 먼 곳이면서 대체로 궁핍한 지역이였다.(광둥은 제외되지만, 인근의 광서와 운남 인근의 귀주도 가난한 지방)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렇다 하더라도 인구가 많은 곳도 아니였고, 그 인구도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이 포함된 숫자였다. 비록 초반에 매서운 기세를 보였지만, 사천과 섬서에서 일어난 반란이 아니였다면 이러한 영역진출이 가능할지도 의문이 들 정도이고, 몽골은 홍타이지 시기 이미 융합한 상황이며, 준가르는 저 먼 신강지역에 거주하였다. 청의 당시 국력상 서북 제압에 실패하더라도 남방의 삼번 제압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15] 오삼계군이 더 남쪽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거의 1500여년전 제갈량이 천하삼분지계에서 그렸던 모양새를 그대로 따라했고, 점령지만 보면 오삼계군은 제갈량의 북벌보다 성공했다. 오삼계 반란군의 주력은 사천성(제갈량 당시 촉나라 전역)를 석권했고, 촉나라가 오나라에 뒤통수 맞고 빼앗긴 형주지역도 거의 점령했다. 즉, 제갈량이 원래 천하삼분지계를 그릴 때 생각했던 조건을 거의 갖추었다는 것이다. 위 지도에서 오삼계군이 점령한 평량은 제갈량이 위나라와 티격태격하던 천수보다 훨씬 더 북쪽에 있는 지역이며, 운양은 형주 양양의 북쪽에 있으니, 오삼계군은 남서의 협공으로 장안(서안)을 함락시키기 매우 유리한 위치까지 올라온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수도인 연경(북경)은 위나라 수도였던 낙양보다는 훨씬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조정은 흔들리지 않았고, 설령 서안이 오삼계군에 함락되었다고 해도 그다지 타격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당시 청나라 주력은 한족의 힘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청나라 말기와 달리 중원이 아니라 만주와 몽골 출신인 이민족 병사였고, 강희제는 이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고 있었다.[16]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은 도자기의 제조 능력이 없었다.[17] 삼번의 난은 1673~1681년이므로, 아무리 늦어도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등극하는 1674년에는 대륙에서 난이 발생했다는 것이 알려졌을 것이다.[18] 청나라는 자신들의 뒤통수를 때린 "반란"에는 거의 예외없이 진압 후 본보기성 대량학살로 마무리했다. 예를 들어 건륭제 시절, 입조과 배신을 반복하면서 청나라의 신경을 거스르던 준가르부는 결국 청나라의 대대적인 정벌을 받았고, 1757년 지배층만 도륙난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모조리 학살당했다. 1850년 증국번이 지휘하는 상군이 태평천국의 수도 남경을 진압 후 주민 전원을 반란군으로 간주해 처형자 수가 30만에 가까웠다는 설이 있다. 또한 조금 나중에 발생한 1860년대의 서북의 회족반란도 청나라는 난 진압후에 대량학살을 벌였고, 이 대문에 일부 후이족은 러시아령으로 도피해 둥간족이 되었다.[19] 二月河, 청나라의 세 황제들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를 다룬 대하소설인 이른바 제왕삼부곡 시리즈(전 42권)를 발표하여 중국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2018년 12월 15일 향년 73세로 별세.[20] 2005년 7월 건국군주 강희대제로 다시 번역 출간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