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카레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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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trompo'''
후안 카레뇨는 멕시코시티의 슬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공터에서 공을 차고 노는데 많은 시간을 썼고, 라 세다니타 공장에서 또래 아이들을 모아 축구를 즐겼다. 그런 그를 주목한 팀이 바로 아틀란테 FC였다.
그는 아틀란테에서 뛰면서 득점왕도 차지하고 2차례의 우승도 이끄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한 번은 네칵사와의 경기에서 전설적인 일화를 남겼는데 그들과의 시합에서 풀케[3] 내기를 했다. 2대1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얻은 코너킥. 카레뇨는 놀랄만한 발재간으로 네칵사의 골키퍼를 바보로 만들며 2대2로 동점을 만들어냈다. 그 다음 상황에는 카레뇨가 장난을 꾸며냈다. 경기장 중앙 위치에서 공을 잡은 카레뇨는 펠리페 로사스와 함께 삼각형의 대형을 만들었고, 반경을 더욱 크게 만들면서 네칵사의 마크맨을 벗겨냈고 심판을 혼란시켰다. 결국 한 골과 함께 아틀란테의 승리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카레뇨는 올림픽과 월드컵. 두 번의 국제 대회에 참가했다.
올림픽에서는 스페인을 만나 1대7로 대패했다. 여기에서 멕시코는 6대0으로 끌려가다가 카레뇨가 한 골을 만회하였고, 결국 영패를 당하지 않은 것에 만족하고 짐을 싸야했다.
초대 월드컵에는 3경기에 모두 참가하여 한 골을 기록하였다. 카레뇨는 개막전이던 프랑스전에서 멕시코의 첫 골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멕시코는 상대팀 골키퍼 테포가 빠진 유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4대1로 패했고, 카레뇨는 다음 두 경기에서는 골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결국 멕시코 대표팀은 3전 전패로 쓸쓸히 고국행 배에 몸을 싣게 되었다.
1934년 월드컵의 지역예선에도 참가하여 쿠바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멕시코의 최종 예선전 진출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멕시코 대표팀은 늦어진 일정 때문에 개막 3일을 앞두고 로마까지 가서 경기를 했지만 미국에 4대2로 패배. 결국 관광만 하다 멕시코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멕시코 대표팀은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두 대회 모두 멕시코 대표팀 역사상 처녀 출전 대회였다. 더불어 카레뇨는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모두 멕시코 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골을 기록한 선수로 남게 되었다.
카레뇨는 축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 술에 절어 살았고, 1940년 12월 16일에 사망하였다. 사인은 복막염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복막염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충수염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여느 충수염 환자들이 그랬듯이 처음에는 통증이나 예후나 별로 심하지 않게 출발하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통증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이는 카레뇨를 보다못한 로사스 형제와 메히아 같은 사람들은 그를 병원에 보내려고 했지만 그는 그 충고를 무시하고 무려 한 달을 민간요법으로 버텼다. 하지만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고 통증을 술로 잊으려고 했지만 그게 되나… 결국 병원에 실려 갔을 때에는 이미 때는 늦었고 그렇게 사망하였다.
그는 엄청나게 유니크한 선수였다. 축구의 룰을 존중하지 않았지만 가끔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별명인 el trompo는 그의 축으로 공에 회전을 주어서 수비수에게서 공을 숨기는 것에서 나왔다. 또 다른 별명으로는 el trompito[4] 도 있는데 뜻은 트럼펫이다.
'''El trompo'''
1. 생애
1.1. 클럽
후안 카레뇨는 멕시코시티의 슬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공터에서 공을 차고 노는데 많은 시간을 썼고, 라 세다니타 공장에서 또래 아이들을 모아 축구를 즐겼다. 그런 그를 주목한 팀이 바로 아틀란테 FC였다.
그는 아틀란테에서 뛰면서 득점왕도 차지하고 2차례의 우승도 이끄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한 번은 네칵사와의 경기에서 전설적인 일화를 남겼는데 그들과의 시합에서 풀케[3] 내기를 했다. 2대1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얻은 코너킥. 카레뇨는 놀랄만한 발재간으로 네칵사의 골키퍼를 바보로 만들며 2대2로 동점을 만들어냈다. 그 다음 상황에는 카레뇨가 장난을 꾸며냈다. 경기장 중앙 위치에서 공을 잡은 카레뇨는 펠리페 로사스와 함께 삼각형의 대형을 만들었고, 반경을 더욱 크게 만들면서 네칵사의 마크맨을 벗겨냈고 심판을 혼란시켰다. 결국 한 골과 함께 아틀란테의 승리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1.2. 국가대표
카레뇨는 올림픽과 월드컵. 두 번의 국제 대회에 참가했다.
올림픽에서는 스페인을 만나 1대7로 대패했다. 여기에서 멕시코는 6대0으로 끌려가다가 카레뇨가 한 골을 만회하였고, 결국 영패를 당하지 않은 것에 만족하고 짐을 싸야했다.
초대 월드컵에는 3경기에 모두 참가하여 한 골을 기록하였다. 카레뇨는 개막전이던 프랑스전에서 멕시코의 첫 골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멕시코는 상대팀 골키퍼 테포가 빠진 유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4대1로 패했고, 카레뇨는 다음 두 경기에서는 골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결국 멕시코 대표팀은 3전 전패로 쓸쓸히 고국행 배에 몸을 싣게 되었다.
1934년 월드컵의 지역예선에도 참가하여 쿠바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멕시코의 최종 예선전 진출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멕시코 대표팀은 늦어진 일정 때문에 개막 3일을 앞두고 로마까지 가서 경기를 했지만 미국에 4대2로 패배. 결국 관광만 하다 멕시코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멕시코 대표팀은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두 대회 모두 멕시코 대표팀 역사상 처녀 출전 대회였다. 더불어 카레뇨는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모두 멕시코 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골을 기록한 선수로 남게 되었다.
1.3. 사망
카레뇨는 축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 술에 절어 살았고, 1940년 12월 16일에 사망하였다. 사인은 복막염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복막염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충수염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여느 충수염 환자들이 그랬듯이 처음에는 통증이나 예후나 별로 심하지 않게 출발하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통증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이는 카레뇨를 보다못한 로사스 형제와 메히아 같은 사람들은 그를 병원에 보내려고 했지만 그는 그 충고를 무시하고 무려 한 달을 민간요법으로 버텼다. 하지만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고 통증을 술로 잊으려고 했지만 그게 되나… 결국 병원에 실려 갔을 때에는 이미 때는 늦었고 그렇게 사망하였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그는 엄청나게 유니크한 선수였다. 축구의 룰을 존중하지 않았지만 가끔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별명인 el trompo는 그의 축으로 공에 회전을 주어서 수비수에게서 공을 숨기는 것에서 나왔다. 또 다른 별명으로는 el trompito[4] 도 있는데 뜻은 트럼펫이다.
3. 뒷이야기
- 카레뇨를 아틀란테 FC로 스카우트한 사람은 팀의 선수이자 제빵사였던 로사스 형제였다. 그런데 정작 그들을 스카우트한 로사스 형제는 카레뇨보다 더 어렸다. 그들은 후에 카레뇨와 함께 초대 월드컵에 참가했다.
- 카레뇨는 마리아 리몬이라는 여자의 집에서 춤, 파티, 술을 즐겼는데 그녀의 직업은 매춘부였다.
4. 수상
4.1. 클럽
4.2. 개인
[1] 스페인어 위키백과에서는 후안 카레뇨 산도발로 항목이 작성되어있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멕시코의 술. 용설란을 이용한 발효주이다.[4] 이 별명의 출처는 스페인어 위키백과이다.[5] 리가 MX는 1943년에 프로화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이전에는 멕시코 내에 다른 여러 아마추어 리그가 존재했는데 그 중 수도인 멕시코시티를 주 연고지로 하는 프리메라 푸에르사가 적통으로 명맥을 잇고, 나머지 리그들은 프리메라 푸에르사에 흡수되는 식으로 전국 리그가 창설되는데 그것이 바로 리가 MX이다. 참고로 fuerza는 힘이라는 뜻이다.[6] 페루 출신의 훌리오 로레스와 공동 득점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