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1. 발화 시도, 서석재의 발설
2. 점화, 박계동의 비자금 폭로
3. DJ의 비자금 수수 시인
4. 마침내 불거진 14대 대선자금 문제
5. 노태우, 구속되다
6. 뇌물공화국, 재벌공화국 - 노태우 정부
7. 야권의 수사발표 비난
8. 데자뷰 -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9. 출처


1. 발화 시도, 서석재의 발설


1995년 8월 1일에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의 4,000억 원 가·차명계좌 보유설'이 떠돌았는데, 발설자는 바로 김영삼 정부의 핵심 실세들 중 한 명이었던 서석재 총무처 장관이었다. 그는 이날 저녁 일부 기자들과의 저녁을 같이 했는데, 오프 더 레코드를 조건으로 발언했다고 한다.[1] 이에 서 장관은 이 사안이 보도된 8월 3일에 "시중에 떠도는 얘기를 가볍게 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 문제의 '전직 대통령'으로 지목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런 해괴하고 황당한 얘기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잘 참는 나도 이젠 못 참겠다" 하여 날뛰었고, 검찰은 해당 설을 '브로커들의 말장난'으로 돌리며 단순한 해프닝 취급을 하여 묻어버렸다.

2. 점화, 박계동의 비자금 폭로


그러나 서 장관의 설은 점점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10월 19일에 박계동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노태우가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주)우일양행 명의로 128억 2천 7백여만 원이 예치된 계좌의 예금조회표를 공개하며 "이는 노태우의 퇴임 직전인 1993년 1월 말까지 상업은행 효자동 지점에 예치됐던 4천억 원의 비자금을 이원조 씨가 시중은행 영업담당 상무를 시켜 각 시중은행에 1백억씩 40개 계좌로 나누어 분산 예치시킨 것 중 일부"라고 폭로했다.
박계동 의원의 폭로 다음 날 노태우의 집에는 노태우와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자 비자금 관리자인 이현우가 마주 앉았다. 이때 노태우는 "어떻게 된 겁니까"라고 물었지만 이현우는 말이 없었다. 노태우가 전날 박계동이 폭로한 문제의 3백억 계좌에 대해 "그거 우리 돈 맞아요?"라 다시 묻자, 이현우는 "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통장을 봐야 알겠습니다."라고 하여 그 자리에서 이현우는 노태우가 재임 중 재벌들로부터 끌어 모은 '검은 돈'이 입금된 통장과 장부가 모두 들어있는 가방을 한참 뒤지더니 "각하, 박 의원이 말한 신한은행 서소문지점 계좌는 우리 것이 맞군요"라고 했다.[2]
같은 날 한겨레신문 사설 <왜 '비자금'을 비호하는가>에서 비자금 사건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쿠데타 세력과의 단절과 결단을 촉구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수사 지시를 내렸다. 이는 서 장관 폭로 때와 달리 박 의원이 구체적 물증을 제시한 관계로 더 이상 피해가기 어렵다는 상황론과 노태우 비자금이 5, 6공 세력의 결집 용도로 쓰이는 걸 차단키 위한 '5, 6공 세력 견제론'이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3]

못난 노태우, 외람되게 국민 여러분들 앞에 섰습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말로는 다할 수 없이 부끄럽고 참담한 심정입니다.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통치자금은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정치의 오랜 관행이었습니다. 이를 과감히 떨쳐버리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5년 동안 약 5천억 원의 통치자금이 조성되었습니다. 주로 기업인들로부터 성금으로 받아 조성된 이 자금은 저의 책임 아래 대부분 정당운영비 등 정치활동에 사용되었습니다. 또 일부는 그늘진 곳을 보살피거나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을 격려하는 데에 보태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쓰고 남은 통치자금은 저의 퇴임 당시 천7백억 원 가량 되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액수가 남게 된 것은 주로 대선으로 인한 중립내각의 출범 등 당시 정치상황의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통치자금을 조성한 것도 비난 받아 마땅할 터인데 이를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유용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은 더더욱 큰 잘못이었습니다. 이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내리시는 어떠한 심판도 달게 받겠습니다.

- 1995년 10월 27일 사과문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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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95년 10월 27일 전직 대통령 노태우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사저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노태우 자신이 통치 시절 '''거대의 비자금을 가진 적이 있었고 거래도 한 적이 있었다'''는 충격적이고 놀라운 사실을 실토하여 세간의 논란과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비자금을 쓴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단지 정치자금과 공적자금으로 활용하였고 이러한 사건에 대해 국민 여러분들께 면목도 없고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며''' 눈물까지 훔치면서 위와 같이 자신의 진상을 밝혔다.
이후 12월 5일 검찰 수사결과에 따르면 노 전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기업체 대표들로부터 약 3천 4백억 원 내지 3천 5백억 원을 받고, 1987년 대선을 위해 조성한 자금 중 사용하고 남은 돈과 취임시까지 받은 성금 등 1천 1백억여 원을 합해 모두 4천 5백 ~ 4천 6백억 원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또 검찰은 "현재까지의 수사 결과 신한은행 등 아홉 개의 금융기관에 개설된 37개 계좌의 입금액과 양도성예금증서의 매입금액 등 합계 4천 189억 원 가량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당시 노태우가 밝힌 비자금 내역은 △1988년 4월 13대 국회의원 선거와 1992년 4월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각각 7백억 원씩 1천4백억 원 △부동산 위장매입에 3백82억 9천4백만 원 △민정당·민자당 지원금 7백90억 3천3백만 원 △예금 등 비자금 잔액 1천9백40억 원 등이며, 이를 합칠 경우 4천5백13억 2천7백만 원에 이른다. 그러나 이걸로 노태우 비자금의 사용처가 밝혀진 건 아니었다. 왜냐면 14대 대선에 쓴 자금은 여기에 한 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3. DJ의 비자금 수수 시인


사과문 발표로 국민들의 들끓는 비난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노태우는 사과문 발표 8시간 전에 중국에서 날아온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1992년 14대 대선 당시 노태우에게 20억 원의 비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하면서 또 벌집 쑤셔 놓은 분위기가 되었다. 해당 발언으로 인해 노태우의 비자금 중 여야 정치권으로 흘러든 자금의 규모가 정치적 쟁점으로 등장했으며, 이에 대한 도덕성 시비로 정치권을 크게 뒤흔들었다.
김대중은 "노 씨의 한 비서관이 순진한 인사의 뜻이라면서 가지고 왔다"며 "돈을 받은 이유는 돈의 성격이 위로의 명목이고 어떠한 조건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20억 원의 절반은 당에 주었고, 절반은 개인적으로 선거 때 썼다"고 했다. 또 그는 "20억 원 이외에는 노 씨로부터 어떤 정치자금도 받은 일이 없다"며 "노 씨가 이 점에 대해 명백히 밝혀주기 바라며, 김(영삼) 대통령과 관련한 점에 대해서도 명백히 밝혀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놀란 건 김대중이 노태우의 돈을 20억 원이나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민자당 부대변인인 이연석은 "김 총재가 5.18 광주학살 주역이라고 했던 노 씨로부터 돈을 받은 건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본 헌병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라고 했으며, 민주당 대변인 이규택은 "이제 김대중 씨의 좌우명은 행동하는 양심(良心)이 아니라 '행동하는 양심(兩心)'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했다. 이에 국민회의 대변인 박지원은 "오늘은 전국적으로 전기가 나가 TV도 꺼지고 신문 윤전기도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곤혹스러움을 표했다.[4]
이때 민자당 사무총장 강삼재는 김대중이 더 많은 액수를 받았다며 이른바 '20억+α'설을 공식 거론하며 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민자당의 입장에선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쟁점이 '20억 수수'에서 '+α'가 있느냐 없느냐로 이동하면서 오히려 국민회의 측이 역공을 취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4. 마침내 불거진 14대 대선자금 문제


그러나 김대중의 실토는 노태우에게도 악재였다. 노태우의 대국민 사과 발표가 미흡하고 변명뿐이라는 국민여론이 노태우를 궁지에 몰아 놓고 있는 터에 애써 묻어두었던 1992년 대선자금 문제가 첨예한 관심사로 불거지면서 노태우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노태우의 애초 계획은 정치자금 조성 경위 등의 진상 발표보다는 사과에 무게를 둔 대국민 발표를 하고 시간적 여유를 가진 뒤 사법적 처리의 족쇄에서 벗어나려고 정치권의 '뇌관'격인 대선자금 부분과 관련된 언급은 일체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태우는 "대선 당시 중립내각이 출범하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엄청난 통치자금이 남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김영삼에게 정치자금이 흘러가지 않았음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방책을 사용했다. 정치권에서는 노태우가 마지막 협상용으로 대선자금 문제를 뒷손에 든 채 청와대(김영삼) 쪽에 '선처'를 바라는 손짓을 보낸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김대중이 노태우에게 20억의 정치자금을 받은 걸 시인함으로 인해 그 불똥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노태우 쪽의 계산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김영삼의 대선 정치자금이 주요 정치 쟁점으로 부각될 경우 노태우의 협상 카드는 더 이상 유효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노태우의 한 측근은 "김 총재가 무슨 이유로 급하게 선거자금을 털어놨는지 모르겠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었느냐는 불만이 있었다.
노태우 측은 김대중의 정치자금 수수 사실 실토가 민자당 대표 김윤환의 26일 발언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김윤환은 그 날 "김(영삼) 대통령도 선거자금을 받았을 것"이라며 "야당 지도자에게도 선거자금을 줬을 수도 있는 만큼 이 부분도 밝혀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발언이 불씨가 되어 김대중이 선수를 치고 나온 게 아니었겠느냐는 분석이 나왔다.
결국 이렇게 해서 노태우 비자금만이 아니라 14대 대선 자금도 문제가 되었으나 사건의 칼자루를 쥐고 있던 김영삼 대통령은 이에 대해 계속 오리발을 내밀었다. 천문학적 숫자가 쓰여졌을 걸로 추정되는 민자당의 14대 대선자금 내역을 공개할 것과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액수를 밝히라는 국민의 요구에 대해 김영삼은 "1992년 대선자금과 관련한 자료가 없어 이를 공개하지 못한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시사주간지 <NEWS+(현 주간동아)> 1998년 4월 16일호는 14대 대선 당시 민자당이 사용한 대선자금이 3천 34억 4천만 원이라고 폭로했다. 물론 이것은 공식조직인 민자당이 사용한 것만으로서, 당시 김영삼 후보의 사조직은 물론이고 준공식 조직이었던 '민주산악회'나 '나라사랑운동본부(약칭 나사본)'의 대선자금도 빠져 있었다.
<NEWS+>는 14대 대선과 관련된 비밀문건 '제14대 대통령 선거자금 결산보고'를 인용해 민자당이 공식적으로 조성한 대선 자금의 총액은 3천 1백 76억 9백만 원이고, 그 가운데 3천 80억 원을 김영삼 총재가 혼자서 조달했다고 폭로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 돈의 많은 부분을 재벌에게서 쓸어모았을 것이며 노태우로부터도 상당한 액수를 받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나 그 액수가 얼마인지 오리무중이다.
위와 같은 사정으로 봤을 때 노태우 비자금은 검찰이 발표한 4천 5백억~4천 6백억 원보다 더 많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신동아 1998년 3월호 기사에서 하종대 기자도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노 씨가 대선 직전에 CD 등을 매각해 마련한 3백억 원의 사용처가 밝혀지지 않았던 점까지 들 수 있다. 노 씨는 92년 대선 보름 전쯤인 12월 3일 이현우 당시 실장에게 3백억 원을 찾아오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 계좌추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로써 '노태우 비자금은 8천억 원이다.'라는 주장이 제기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2011년에 낸 회고록에서 "김영삼에게 3천억 원을 모아서 줬다"고 밝혔다.

5. 노태우, 구속되다


결국 노태우는 11월 1일 9시 45분,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에 직접 출두하여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노태우 비자금은 40여 개 대기업에 50~350억씩 수금한 것이었기 때문에 4일부터 한보그룹의 정태수 등 재벌총수들이 이날부터 줄줄이 소환되었다. 이후 16일에 노태우는 배임수뢰 혐의로 '''구속수감'''이 결정되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사저를 떠나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노태우의 비자금 3차 공판이 열릴 적인 1996년 1월 29일에 노태우는 "피고인은 대통령 재임 중 쓰다 남은 비자금 2,200억 원을 어디다 쓰려고 하였는가?"란 재판장의 질문에 "통일을 앞두고 보수세력과 혁신세력의 대립이 격화될 것이다. 남겨둔 비자금을 이때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할 건전한 보수세력을 지원하는 데 쓰려 하였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정지환 기자는 경제정의 1996년 봄호 <보수 논쟁의 가면을 벗긴다>에서 "건국 이후 최초로 감옥에 간 '못난' 대통령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최근 정치권은 보수 논쟁이 한창이다"라고 평했으며, 실제로 '정통보수', '온건보수', '신보수', '원조보수' 등 온갖 종류의 보수가 난무하였다.
결과적으로 노태우는 재판에서 포괄적 뇌물죄가 인정되어 유죄를 선고받았고,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징역 17년 및 추징금 2,628억 원이 부과되었다. 이마저도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전두환과 같이 석방되었다.

6. 뇌물공화국, 재벌공화국 - 노태우 정부


위와 같이 엄청난 충격과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단순히 노태우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권과 재벌이 합작해 밀실에서 국가를 주무른 정경유착의 교과서였고, 6공의 정치체제 그 자체였다. 그런 점에선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아니라 6공화국 비자금 사건이다. 당시 노태우 정부 시절의 6공화국은 청와대를 정점으로 한 정치권력과 재벌로 대표되는 경제권력의 야합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뇌물공화국이요, 재벌공화국이었다. 이런 정경유착은 우리나라 정치체제의 구조적 문제였다. 알다시피 엄청난 자금은 기업에서 나왔다. 기업이 낼 세금, 재투자비용, 노동자들 월급이 권력자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말았다. 기업가는 이 돈을 뇌물로 갖다 바치고 그 대신 다른 이권을 챙겼으며, 그 돈은 모두 손비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검찰 수사발표문만 읽어봐도 알 수 있듯, 재벌 총수들이 노태우에게 갖다 바친 돈은 하나같이 이권이랑 맞물렸다. 재벌들은 정치권력의 강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바쳤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의 주장은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건과 관련된 기업인들은 모두 유죄를 인정받았으나 얼마 안 가 불구속 기소되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재벌이 갖다바친 돈의 액수는 검찰 발표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한 사실은 수사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6공 비자금 사건 당시 핵심이었던 이현우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진술과 재벌 총수들의 진술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신동아 1998년 3월호에서 하종대 기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현우 전 경호실장이 진술한 재벌총수들의 뇌물금액은 50억원에서 3백50억 원까지 다양했다. 검찰은 이 전실장의 진술을 토대로 재벌그룹을 A, B, C, D의 4등급으로 분류했다. 3백억 원 이상은 A등급, 2백억 원 정도는 B, 1백50억 원 정도는 C, 마지막으로 1백억 원 전후는 D등급으로 분류했다.
또 검찰이 1995년 11월2일 작성한 이현우 씨의 3차 진술조서에서 따르면 A등급에는 삼성, 현대, 대우, LG, 롯데 등 5개 그룹, B등급에는 쌍용, 선경, 한진, 대림 등 4개 그룹, C등급에는 동부, 진로, 두산, 동아, 한화, 풍산, 삼부토건, 태평양, 한보, 동양화학, 한양 등 11개 그룹, D그룹에는 기아, 금호, 효성, 고합, 한일합섬, 코오롱, 해태, 극동, 미원, 대농, 효성, 동국제강, 대한전선, 삼양사 등 14개 기업이었는데, 재벌총수들이 진술한 뇌물액수는 이 전실장의 진술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이 전실장이 3백억 원 이상 뇌물을 건넨 것으로 진술한 삼성, 현대, 대우, LG는 최고 2백50억 원에서 2백10억 원까지 돈을 건넨 사실을 시인했으나 롯데는 1백10억 원만 시인했다. 반면 2백억 원 정도를 낸 것으로 진술이 된 쌍용은 80억 원, 선경 30억 원, 한진 1백70억 원, 대림 70억 원으로 그룹에 따라 최고 6배 가까이 차이가 났으며 1백50억 원 가량을 냈다고 진술이 된 동부그룹은 40억 원, 진로 1백억 원, 두산 20억 원, 동아 2백30억 원, 풍산 5억 원, 삼부토건 30억 원, 태평양 10억 원, 한보 1백50억 원, 동양화학 10억 원, 한양 1백억 원 등으로 천차만별이었다.
또 1백억 원 전후를 낸 것으로 진술이 된 기아는 40억 원, 금호 70억 원, 고합 30억 원, 한일합섬 1백억 원, 코오롱 20억 원, 극동건설 50억 원, 미원 20억 원, 대농 40억 원, 효성 75억 원, 동국제강 30억 원에 불과했으며 검찰 조사에 강력 반발한 한화, 대한전선, 삼양사는 한 푼도 시인하지 않았다.
위에서 보듯이 재벌들이 진짜 어쩔 수 없는 강압으로 인해 뇌물을 바쳤다면 피해자가 아닌가. 그러면 재벌은 떳떳이 액수를 밝혀야 옳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상대적으로 솔직한 편이었다. 그는 "250억 원을 갖다 바쳤는데, 노태우 그 사람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치권력에 돈을 계속 바치는 것보다는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게 돈이 적게 들겠더라. 그래서 14대 대선에도 출마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느 정도 들어줄 구석이 있다.
그러나 대다수 재벌 총수들은 정치자금의 액수를 줄여 언론과 국민의 눈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을 뿐이다. 삼성그룹이건희 회장은 처음에 80억밖에 바치지 않았다고 버티다 현대와 동일한 2백 50억을 시인하느라 10시간 이상을 조사받아야 했으며, 어느 재벌은 "노 대통령에게 절대 돈을 준 일이 없다"고 하며 "내가 뭣땜에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고 하며 머리를 조사실 벽에 부딪치며 책상을 발로 차는 등 거친 행동을 보여 결국 조사도 하지 못한 채 돌려보내야만 했다.
또 당시 수사 관계자는 수사가 끝난 지 몇 달 뒤 "재벌들이 노 씨에게 줬다는 금액은 사실 적게는 절반, 많게는 5분의 1까지 줄여서 진술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고, 모 재벌의 경우 "계좌추적 결과 노 씨에게 갖다 준 돈이 8백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고 나왔다. 그런 정황으로 봤을 때 하 기자는 "비자금의 액수는 4천 5백억이 아니라 8천억에 가까울 것"이라고 보았다.

7. 야권의 수사발표 비난


1995년 12월 5일에 야권은 검찰의 노태우 비자금 수사 결과에 대해 '짜맞추기 수사'라고 일제히 비난하며 김영삼의 대선자금 수사를 촉구했다. 특히 국민회의는 "김대중 총재가 노씨로부터 20억원 이외에도 더 받았다는 민자당 강삼재 총장의 주장은 모략임이 드러났다"고 하여 강 총장의 사과를 요구했다.
김대중은 이날 서울 잠실 향군회관에서 열린 송파 갑 지구당(위원장 김희완) 창당대회에서 "예상했지만 실망스럽고 한심한 결과"라고 지적하고 "노씨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준 대선자금을 전혀 밝히지 않은 검찰수사를 국민들은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검찰은 나에게 20억 원 이외에 더 주었다는 것을 조작하려했으나 내가 더 받은 사실이 없기 때문에 실패했다"며 "그동안 무책임하게 설을 조작해 제1야당의 총재를 음해하고 방자하게 몰아내려 한 민자당은 국민적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대변인 이규택은 "검찰이 노 씨 비자금의 구체적인 사용처를 밝히지 않은 것은 앞으로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의도를 남긴 것"이라고 비난했다. 부대변인 김부겸도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던 속담과 같이 검찰 발표에 진상규명은 없었다"며 "진실을 밝히기 보다는 권력과 금력에 아부만 하는 검찰에 더 이상 수사를 맡길 수 없다"고 말했다.

8. 데자뷰 -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사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의 시작은 1995년이 아니었다. 1993년에 검사 함승희가 수사한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때에도 밝혀진 것이었지만, 검찰 수뇌부는 함승희의 거듭된 수사 건의를 묵살하고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은 물론 노태우 비자금 사건도 은폐했었다.[5]

9.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90년대편 2권>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6. p228~238
  • <대한민국 50년사 2권> 임영태 저. 들녘. 1999. p300~307
[1] 2001년 9월 1일에 방송되었던 격동 50년 39화 <대통령의 비자금> 1편에서 서석재 본인의 증언을 극화 형식으로 재현했던 부분에서 나온 말이다.[2] 원 출처: <각하, 찢어버립시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 취재전쟁(조선일보 사회부 법조팀 편.)>. 자작나무. 1996. p13.[3] 원 출처: <각하, 찢어버립시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 취재전쟁(조선일보 사회부 법조팀 편.)>. 자작나무. 1996. p51~52.[4] 원 출처: <정치인들, 말조심하시오>. 김창룡 저. 공간미디어. 1996. p142~143.[5] 노태우 대통령은 개인적으로야 김영삼 대통령과 관계가 안 좋았지만(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 성립으로 인한 최대 피해자가 김영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전두환, 노태우의 12.12 군사반란이 없었다면, 박정희 사후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는 김영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노태우의 쿠데타로 인해 대권의 꿈은 날아가 버리고 12년간 와신상담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이와는 별개로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서 당시 정부여당인 민자당의 전직 대통령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정부여당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는 현 정권의 정치자금과 연결될 수 있어 김영삼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줄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더구나 정권 출범 직후인 1993년에 그런 사건이 터졌다면 김영삼은 5년 내내 레임덕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