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환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문화공보부''' '''차관'''
<color=#373a3c> '''전두환 정부'''
13대
박현태

''' 14대
김윤환 '''

15대
최창윤
'''대통령비서실''' '''제1정무수석비서관'''
<color=#373a3c> '''전두환 정부'''
4대
허문도

''' 5대
김윤환 '''

6대
이진우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북 군위군·선산군)'''
''선거구 신설''

'''제13·14대
김윤환'''

''선거구 개편''
박세직[A]
김윤환[B]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북 구미시 을)'''
''선거구 개편''
박세직[C]
김윤환[D]

'''제15대
김윤환'''

''선거구 개편''
김성조[E]


'''대한민국 제7, 11, 19대 정무 제1장관
김윤환
金潤煥 | Kim Yoon-hwan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32년 6월 7일
경상북도 선산군 장천면 상장동
(現 구미시 장천면 상장리)[1]#
'''사망'''
2003년 12월 15일 (71세)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마두동
'''본관'''
선산 김씨
'''지역구'''
경북 군위군·선산군
경북 구미시 을
'''학력'''
대구수창초등학교 (졸업)
경북중학교 (졸업)
경북고등학교 (졸업)
경북대학교 (영문학 / 학사)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언론학 / 석사)
'''종교'''
유교 (성리학)
'''신체'''
'''182cm''', 80kg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10, 11, 13, 14, 15
'''약력'''
영남일보 기자
대구일보 기자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조선일보 정치부 부장
조선일보 편집국 부국장
조선일보 편집국 국장대리
오상교육재단 이사장
제10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입법회의 의원
제11대 국회의원 (전국구 28번 / 민주정의당)
제9대 문화공보부차관 (전두환 정부)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 (전두환 정부)
제13대 대통령비서실장 (전두환 정부)
제7대 정무 제1장관 (노태우 정부)
제13대 국회의원 (경북 군위군·선산군 / 민주정의당)
민주정의당 원내총무
제13대 국회 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제11대 정무 제1장관 (노태우 정부)
민주자유당 원내총무
제13대 국회 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제14대 국회의원 (경북 군위군·선산군 / 민주자유당)
제19대 정무 제1장관 (문민정부)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
신한국당 대표최고위원
제15대 국회의원 (경북 구미시 을 / 신한국당)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민주국민당 제2대 대표최고위원
'''호'''
'''허주(虛舟)'''
'''별명'''
'''킹메이커'''
1. 개요
2. 생애
2.1. 출생 ~ 신문기자 시절
2.2. 정치인 시절
3. 선거이력
4. 이야깃거리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이다. 본인의 호인 '''허주(虛舟)'''를 붙여 보통 "허주 김윤환"이라고 불리며 현대 한국 정치판의 대표적인 '''킹메이커''', 선거전략의 대부로 통하는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정치인들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친화력'''으로 수많은 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본인의 정치공학 구상대로 2명의 대통령을 당선시킨 전략가. 명실공히 한국 정치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이회창에게 토사구팽 당하고 낙선하면서 비참하게 정계를 떠나야 했으며, 3년 뒤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2. 생애



2.1. 출생 ~ 신문기자 시절


1932년 경상북도 선산군 장천면 상장동(現 구미시 장천면 상장리)에서 독립운동가 김동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지역 언론사인 영남일보대구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해 일본특파원 및 편집국장 대리를 거쳤다. 이 시절에 오랫동안 주일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일본 자유민주당의 금권 정치, 계파-계보 정치, 막후 정치를 보고 배운다. 중간에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성주군-칠곡군-선산군-군위군 선거구에 출마(민주공화당 신현확 후보와 신민당 김창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는 등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기사는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978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2.2. 정치인 시절


고등학교 동창인 노태우의 권유로[2] 민주정의당 창당 멤버로 들어갔다. 민주정의당 전국구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 아래 청와대와 집권당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면서 정치권을 주무르는 실세 중의 실세로 군림한다.
전두환 정권 후반기인 1985년 2월 노신영 국무총리 내각이 출범할 때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으로 입각하였다. 문화공보부 차관으로 있던 1986년 여름, 미국에서 열린 국제 공보관 회의에 참석하려 갔다가 외신 기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은 누가 유력하냐"라는 말에 사견임을 전제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유력하다"는 발언을 한 게 문제가 되어 귀국길에 국가안전기획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3] 1년 뒤의 일을 예언한 셈이니 훗날 붙게 될 '킹메이커'라는 별명이 진짜인 셈.
1986년 8월 개각 때 허문도의 뒤를 이어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다. 1987년 7월 김정렬 내각이 출범하자 박영수의 뒤를 이어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에서 퇴임한 뒤 민주정의당으로 복귀했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향인 경상북도 군위군·선산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여소야대의 13대 국회가 개원한 뒤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에 임명되었고,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김원기, 통일민주당 원내총무 최형우, 신민주공화당 원내총무 김용채와 함께 4당 체제를 이끌어가는 원내 사령탑으로 화려한 활약을 펼쳤다. 3당 합당 이후에도 민주자유당 원내총무, 사무총장, 정무제1장관을 맡으며 정계의 중심에서 활약했고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같은 지역구에서 4선에 성공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윤환은 당대의 '''킹메이커'''(King Maker)로서 정치적 영향력이 절정에 올랐다. 김영삼에게 거부감을 갖고 있던 구 민주정의당 출신 민정계 인사들을 설득해서 강력한 김영삼의 지지세력, 일명 신민주계를 규합하여 결국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다. 당시 김윤환은 민정계 인물들에게 '국민들이 군부 출신 민정당 인물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으니 일단 김영삼을 세워서 정권을 이어가고, 그 다음에 우리(TK+민정계)가 주도하는 보수 정권을 창출하면 된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김윤환은 전두환 밑에서는 친구인 노태우를 후계자로 옹립해 대선에서 승리했고, 노태우 밑에선 김영삼을 후계자로 지원해서 역시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이후 김윤환은 정치권에 몰아친 사정의 태풍을 피해 해외에서 체류하다시피 했다. TK 민정계의 동료였던 박준규박철언 등이 대거 정계에서 축출당하는 상황에서 김윤환은 대통령을 만들어낸 2인자임에도 오히려 몸을 사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 1995년 2월 김종필이 민자당을 떠나고 6월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하자, 김영삼은 김윤환을 통해 당과 범여권을 안정시킬 필요를 느낀다. 이에 김윤환은 다시 민자당 사무총장으로 복귀했고 얼마 뒤에는 민자당 대표위원에 취임하여 명실상부하게 여당의 2인자가 되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정한 뒤에도 김윤환은 대표위원으로 유임되었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신한국당의 국회의원 당선자 139명 중 그의 계보로 꼽힌 당선자는 무려 26명으로 전체의 5분의 1에 육박했다.
1997년 4월 6일,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국민대화합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힐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김윤환 신한국당 고문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옴으로써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전두환, 노태우의 형 집행이 확정되기도 전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4].[5]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형 집행이 확정되자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신한국당의 김윤환 고문과 대구경북쪽 인사들을 비롯한 구 여권 출신 대선주자들은 종전부터 사면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김윤환 고문은 "부정축재 한 거 환수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죄는 주지만은 벌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 라는 발언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처벌에 봐주기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당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에 대해 찬성하는 방향으로 당내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6] 7월 22일에는 법무부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실무검토를 마쳤고 광복절 무렵에 사면될수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며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언제든지 사면시킬 수 있다"고 "준비되었다"는 법무부의 입장을 보도했는데, 결국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언제든지 대통령과 정부의 명령만 있으면 대선 이전에 준비가 완료되어 있던 셈이다. 법무부는 대통령 특별 사면의 경우 법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추징금 문제를 집중 검토했다. 노태우 씨의 경우는 추징금에 해당하는 재산을 대부분 보전 처분해 상관이 없지마는, 전두환 씨는 추징금 2,295억원의 10% 정도만 확보되어 있고 전두환의 경우 재산 추적에 진전이 없어, 나머지 2천억 원에 대해서는 집행 불능 결정을 내리고 이를 사면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법무부는 사면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라 수감자의 건강이 나쁘거나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적용하는 형집행 정지도 검토했다. 그러나 형 집행 정지는 명분이 약하고 언제든지 재수감 될 수 있어 전, 노씨 두 사람이 거부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법무부는 보고 있다. 가석방은 형기의 1/3분을 마쳤을 때만 가능해 당초부터검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전, 노 씨를 풀어주는 길은 특별 사면밖에 없지만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법무부는 매우 조심스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도함으로써 이미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준비는 대선 이전에 완료되었고 김영삼과 정부의 말 한마디면 곧바로 사면될 수 있었던 형국이었다.[7][8]
이렇게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김윤환은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이내 자신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이회창을 차기 대통령으로 밀면서 다시 '킹메이커'로서의 위세를 떨쳤다. 당내 민정계와 영남 세력을 대거 규합해 이회창을 대선 후보로 옹립한 김윤환은 3회 연속으로 대통령을 좌지우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울 뻔했지만, 정작 이회창은 아들들의 병역 문제이인제의 이탈을 막지 못하면서 대선에서 김대중에게 패했다. 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한 이때부터 김윤환의 정치적 생명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2000년 16대 총선를 앞두고는 자신이 밀었던 이회창 총재에게조차 구시대 정치인으로 몰리면서 당해 공천을 못받고 한나라당에서 쫓겨난다.[9] 이후 조순, 이수성, 박찬종, 이기택, 신상우 등 3김 정치 + 이회창에게서 팽당한 정계의 옛 거물들을 끌어모아 민주국민당을 차렸다. 재야의 장기표나 심지어 신군부 출신 허화평도 있었다! 이렇게 거물과 명망가만으로는 상당히 그럴싸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급조한 정체성이 불문명한 정당으론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 양당 구도에 밀려 지역구에서는 춘천시한승수 前 경제부총리, 전국구에서는 후보 1번이던 강숙자 등 총 2명 당선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본인 역시 자기 지역구인 구미시에서 한나라당 김성조 후보를 상대로 10% 차의 패배를 당했다.(41.7%:32.1%)
16대 총선 낙선 후 김윤환은 민국당의 대표를 맡아 당을 추스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그의 몸에는 2년 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회창에게 토사구팽을 당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아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다. 당시 김윤환을 만났던 최병렬의 말에 따르면 함께 스테이크를 시켜놓고는 썰어놓지도 않은 채로 한 시간이 넘도록 이회창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고 한다. 암이 자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이후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약세와 자유민주연합의 패망으로 나름대로의 입지를 살려 3당 연합(혹은 DJP 재연합)에 낄 수 있었지만, 2001년 10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로 DJP 연합이 완전히 붕괴되자 유일한 지역구 의원 한승수도 탈당해버렸다.[10] 이 시기 "호남이 밀어 주는 영남 대통령론"으로 이회창을 패망시키는 정치공학적 구도를 구상했고 인지도가 낮아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졌던 노무현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노무현과 김윤환이 협력하는 일은 없었고[11] 김윤환 본인은 대선 직후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
이후 신장암 치료를 위해 국립암센터에 입원했고 미국까지 가서 투병했지만, 결국 회생불가 판정을 받고 귀국한 뒤 2003년 12월 15일에 사망했다. 향년 71세.
대화와 협력을 명분으로 실제론 막후 밀실에서 정치자금과 권력을 배경으로 야합하는 일본식 정치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노무현이 실제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으로서[12] 당선된 것이나, 홀로 여러 계파를 다룬 점 등 정치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 김윤환이 속해 있던 민주정의당에 맞서 싸웠던 김근태는 국회의원이 되어 김윤환을 만난 다음 "그래도 김 선배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장내에서 민주주의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평가를 했고, 언론계 인사들 역시 "허주는 순리를 바탕으로 정치를 물 흐르듯 한다."는 평을 아끼지 않았던 점을 보면 친화력만큼은 역대 정치인들 가운데 최고로 손꼽힐 수 있을 만큼 대단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죽기 직전에 낙선하고 정계에서 은퇴한 이회창이 사과의 뜻을 표했으나 공식적 화해 없이 세상을 떴다.

3.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8선거구

'''18,521 (11.64%)'''
낙선 (4위)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

-
'''당선 (1위)'''
'''초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28번

-
'''재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군위군·선산군
'''50,692 (76.16%)'''
'''3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36,607 (61.49%)'''
'''4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구미시 을

'''37,306 (55.74%)'''
'''5선'''[13]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구미시

'''39,207 (32.07%)'''
낙선 (2위)


4. 이야깃거리


  • 2003년 그가 죽자 그의 호인 허주(虛舟), 즉 빈 배처럼 갔다고 해서 권력은 무상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 그의 친동생인 김태환은 17대, 18대, 19대(한나라당 - 새누리당) 국회의원이다. 지역구는 구미시 을인데, 이 곳은 15대 국회의원 시절 김윤환의 지역구였다. 16대에도 구미시(단일 지역구)로 출마했으나 이 때는 김윤환이 2위로 낙선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안전행정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사후 경상북도 구미시 장천면 상장리의 오상중고교 뒷편에 안장됐다. 오상중고교는 김윤환의 아버지인 김동석 전 국회의원이 세운 학교다.[14]
  • 시인으로도 활동했는데, 경북대학교 정문과 학생주차장 사이에 새롭게 단장한 KNU 센트럴 파크에 그의 시비가 있다.[15]
  • 격동 50년[16]에서는 김동현이 맡았다.
  • 문명자 기자의 취재수첩에 의하면, 김윤환의 형인 김규환은 경북중학 시절 좌익 학생운동 리더였고 대구 10.1 사건 때도 가담했으며 6.25 때는 북한군 군복까지 입고 행세했다고 한다. 출처
  • 사석에서도 절대 남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위에도 쓰여져 있다시피 이회창만은 예외였다.
  • 조선일보, 중앙일보의 기자를 지낸 이연홍[17]은 말년의 김윤환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로부터 영남후보론, 노태우김영삼 등을 대통령으로 만든 이야기, 심지어 재벌들과 관련된 이야기등의 각종 비화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윤환은 자신이 해준 이야기를 정리해서 회고록으로 써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연홍은 기자가 어떻게 남의 회고록을 쓰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1] 선산 김씨 집성촌이다.[2] 사석에선 전두환, 노태우와 서로 반말하면서 술 마시는 사이라고 한다.[3] 말 그대로 조사만 받았다. 고문을 했다거나 강압적인 수사를 한 게 아니라, 왜 그런 발언을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질문했다고. 김윤환 본인은 기자들이 하도 귀찮게 물어서 그냥 대충 둘러댄 거라는 식의 답을 했고 당시 특별히 수상한 뒷일 같은 것도 없었던지라 금방 풀려났다.[4] 1997.4.8 경향신문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입장 밝힐 예정[5]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40600209101006&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4-06&officeId=00020&pageNo=1&printNo=23501&publishType=00010| 李(이)대표全(전)|盧(노)씨 사면건의 검토 金潤煥(김윤환)고문"대법 刑(형)확정후 실시 이미 건의"[6]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65839_19482.html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최종 판결후 사면 문제 제기[7]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557_19482.html|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팔일오 사면 실무 검토[8]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9] 이 당시 이회창의 참모가 윤여준이었는데, 그간 총선의 화두는 공천이었음을 상기시키며, 김윤환을 위시한 민정계, 구시대 인물들을 쳐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회창은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윤여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윤여준의 전략대로 중진급 현역 의원과 정계 거물 수십여명을 날리고 정치 신인들을 대거 전면에 내세운 개혁 공천은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예상을 뒤엎고 한나라당의 총선 승리를 이끌어냈다.[10] 한승수는 무소속 의원 신분으로 외교통상부 장관직을 유지하다가,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자 7월 장관을 사퇴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이회창 후보의 외교담당 특별자문이 되었다.[11] YS에게 팽당한 5공, 유신 세력을 포용한 김대중과는 달리, 노무현은 3당 합당 당시부터 보여주었던 자신의 원칙대로 옛 군부 정권 시절 인사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주변 사람들을 세웠다. 5공 시절부터 킹메이커로 이름을 날린, 그것도 TK의 좌장이나 다름없던 김윤환이 노무현과 연합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던 셈.[12] 개혁 성향의 영남후보를 세워서 영남표를 잠식하고 수도권의 개혁 성향 야당표를 결집시켜야 한나라당의 호남 포위 구도를 깨뜨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실제 천하삼분지계제갈량만의 독창적 사고가 아니라 당시 주요 책사들의 공통적 인식이었던 것처럼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 소위 영남후보론도 정치권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나리오로 여겨지던 내용이다. 당시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선 노무현의 지지율이 2~3%에 불과할 때도 일단 민주당 후보 경선만 통과한다면 대선 승리 가능성은 가장 높을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13] 2000.2.24 탈당 (공천불복)[14] 칠곡3번 경운대행이 장천시외버스터미널에 정차하기 전에 오상중고교를 지나지만, 무정차 통과한다.(상장1리에는 정차한다.) 칠곡3번을 탔다면 장천터미널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한다.[15]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는 김춘수 시인의 유명 작품인 "꽃"도 KNU 센트럴 파크에 새겨져 있다.[16] 본인이 직접 증언했던 육성이 방송에서 나왔고 생전에 애청자였다고.[17] 90년대 기라성같은 조선일보기자들 중에서도 출중한 취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연홍이 조선일보 데스크와 마찰을 빚고 회사를 나오자 이건희가 직접 중앙일보로 스카웃을 지시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