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동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강서구 갑)'''
제13대
이원배[1]

'''제14대
박계동'''

제15~17대
신기남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송파구 을''')'''
제16대
김성순

'''제17대
박계동'''

제18·19대
유일호
[image]
朴啓東
1952년 6월 26일 ~
1. 개요
2. 생애
3. 논란
4. 선거 이력
5.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2. 생애


민주화 운동가 출신 정치인으로, 1952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2]#에서 태어났다. 서울 보성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적도 있었고 1980년대 민주화청년연합(민청련) 설립 후 집행위원[3]이었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등의 재야단체에서 활동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 따라가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 노태우 대통령의 4000억 원 비자금 건을 폭로하였다.
국회에서 노태우 비자금 혐의 증거를 폭로하는 모습. 이 장면은 노태우의 구속, 그리고 이어지는 신군부 주요 인사들의 법정 심판, 그리고 YS의 14대 대선자금 문제까지 이어졌다. 의장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황낙주 당시 국회의장이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정치국민회의 신기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선거에서 낙선하고 나서 통합민주당 낙선자들과 함께 1997년 3월 하로동선 식당을 창업하여 1999년까지 운영한 적이 있다. 노무현, 유인태, 김원웅 등과 함께 사업을 같이 했다.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되었는데 누수되는 비용들이 많아서 남는게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후 통합민주당 이기택 총재의 당 운영 노선을 비판하며 김원기, 노무현, 김정길 등과 통합추진국민회의(통추)를 조직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통합민주당이 당내 대선후보 출마 문제와 내홍을 겪었고, DJ의 패권정치[4]와 3김 정치에 대한 반대의 기치를 걸고 신한국당과 통합하면서 한나라당이 되자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그러나 1995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대한 김영삼 정부의 대처와 검찰 수사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가두연설을 하고 다녔는데, 당시 유세위원장을 맡았다. 그런데 서울 종로구에서 노무현이 이 가두시위의 연사를 맡았는데 "이 썩은 3김 정치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이 종로에 노무현을 당선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는데 그 발언 자체가 사전 선거운동으로 적발되었다. 당시에는 사전 선거운동기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발언을 한 노무현을 처벌하지 않고 박계동이 사전선거운동으로 기소되어 대법원에서 벌금 600만 원을 선고받아 피선거권이 박탈된다. 박계동 본인은 이 사건에 대해서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 및 정부 비리에 대한 폭로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이 일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못했다.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하자, 박계동은 "억울하게 출마길이 막혔으니 사면복권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니가 한나라당 소속으로 있는 한 안 된다. 새정치국민회의로 오면 해주겠다. 그리고 좋은 지역구에 뒷배까지 봐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출처 결국 사면, 복권을 영영 받지 못하게 된다.
이후 몇 년 동안 택시 기사로 일했다.
2003년 2월 7일에 고 제정구 의원의 추모행사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이 "한나라당으로 간 통추 인사를 권세와 이익을 쫓아간 이들이라고 비판한 것을 사죄한다."[5]라는 발언을 하자, 박계동은 "노무현보다는 제정구가 옳았습니다. 무슨 변명을 그렇게 해!"라고 노 당선인을 향해 고함을 쳤다. 노 당선인은 이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옆에 있던 유인태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내정자는 박계동을 향해 "누가 누구에게 그런 얘길 하냐!"고 쏘아붙였다.[6]
이런 사건 외에도, 2006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 방문하자 완전히 무시하는 등 박계동과 노무현은 1999년 이래로 완전히 원수가 된 것으로 보인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송파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5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행사에서 이재정 통일부장관에게 폭언을 하여 물의를 빚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친이계로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일호에게 밀려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했다. 후술할 성추문 논란과 과격한 언행들이 공천탈락의 요인이다.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국회사무총장을 역임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국민생각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 유일호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011년 분당구 재보궐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강재섭 후보가 공천되면서 본선에는 출마하지 못했다.
택시기사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서 2015년 쿱택시 이사장에 취임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택시 기사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과 개선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으나... 제수를 경리부장, 처남구미쿱택시 이사장으로 임명하는 등 기존 택시회사 사장들의 구태를 답습했고, 결국 2018년 4월 조합원 비상총회에서 퇴출되는 수모를 당했다.

3. 논란


2006년 5월 초 동영상 하나가 웹에 급속히 퍼졌고 이것으로 정치인생이 사실상 끝나 버렸다.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이 영상을 보고 평론을 쓰기까지 했다.

4. 선거 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rowcolor=#fff>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서구 갑

'''32,190 (33.93%)'''
'''당선 (1위)'''
초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26,358 (29.88%)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송파구 을

'''40,697 (49.51%)'''
'''당선 (1위)'''
재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4,035 (4.03%)
낙선 (3위)


5. 둘러보기




[1] 1992.2.28 의원직 상실(뇌물수수)[2] 권경석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당시 의장은 김근태, 부의장은 장영달이었다.[4] 1992년 대선의 패배로 정계은퇴했던 김대중은 1995년 정계복귀하고 자신의 계파를 중심으로 통합민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창당과 동시에 제1야당이 되었다.[5] 원문은, "지난 대선 때 통추 인사 가운데 한나라당을 택했던 사람들을 두고 '권세와 이익을 쫓아갔다'고 말한 것에 대해 해명하고 싶다... 당시 방송연설 원고에 정구 형 등 사람을 특정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돼있어서 그냥 읽었던 것인데 나중에 젊은 동지로부터 직접 항의를 받고 보니 유족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사과와 양해를 구한다. 내가 추모식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다."이다.[6] 사실 노 당선인의 사과에 제정구 의원 유가족 및 '''김부겸, 김홍신, 이부영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까지도 박수를 쳤을만큼 진정성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볼 때 박계동의 돌발 행동은 분명 일부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