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
이제 우리 만화계에는 조종(弔鐘)이 울리고 있다. 일부 언론의 선정적 보도로 시작된 만화에 대한 마녀사냥은 검경과 청소년보호위원회 등 소위 공권력의 무차별적이고 마구잡이식의 단속과 규제로 이어지고있다. 청소년 문제의 원인을 만화에 덮어씌우며 유독 만화인을 속죄양으로 삼는 이러한 야만적 사태는 일제 말기의 문화적 암흑기와 군사독재 시절의 정치적 억압을 연상시킨다. 작가들은 창작 의욕을 잃고 허탈감에 빠진 채 붓을 놓으려 하고 있으며, 만화 출판업, 유통업 및 대여업은 매출이 1/5로 준 채 그 생존 기반을 상실하고 있다. 만화를 사랑하는 독자들 역시 심각한 우려 속에서 만화계의 공황을 걱정하고 있다.
- <정부의 '만화 탄압'에 대한 범만화인 성명서>의 내용 중에서
'''미성년자보호법'''(1999. 2. 5. 법률 제5817호로 폐지되기 전의 것)''' 제2조의2 제1호 및 그 처벌조항인 제6조의2, 제7조의 각 해당부분''', 그리고 아동복지법(2000. 1. 12. 법률 제6151호로 전문개정되기 전의 것) 제18조 제11호 및 그 처벌조항인 제34조 제4호, 제37조의 각 해당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헌법재판소 2002. 2. 28. 99헌가8 결정).[1]
1. 발단
임기말 레임덕 상황을 겪던 김영삼 정부는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관한 문제를 거론해 학부모층 표심을 잡기 위해 학교폭력 문제를 단속하자는 명분으로 1996년에 만화를 비롯한 공연물, 영상물, 음반, 인쇄물 등 문화매체 전반에 대해 청소년의 정서를 보호한다는 취지의 '청소년 보호를 위한 유해 매체물 규제에 대한 법률안’을 들고 일어났다. 이때 정부는 만화원고 사전심의가 전근대적이라는 문화계 전반의 의견을 수용해 위와 같은 법률의 입법활동을 서둘렀다.
그러나 발의 당시 청소년 보호를 빙자하여 위장된 검열을 행하는 데다가 그 검열 판단의 결정을 행정기관이 판단한다는 점에서 언론인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반발이 거셌고, 무엇보다 이미 존재하는 법인 형법 제243조(음화반포)와 미성년자보호법과 중복되는 입법인데다 법에 명시된 심의 기준이 애매모호해 죄형법정주의 5대 원칙 중 하나인 '명확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에 우리 만화계가 1996년 11월 3일에 이현세, 이두호, 허영만, 황미나 등이 주축이 된 '만화심의 철폐를 위한 대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일반인에게 우리 만화가 겪고 있는 불합리한 창작 여건에 대해 알리는 데 주력했다.
2. 전개
그러나 문화계의 잇단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법은 국회에 발의되었고, 1997년 3월 7일부로 해당 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의 내용은 동법 27조에 따라 문화체육부 산하에 준사법권을 지닌 기구인 청소년보호위원회[3] 를 설치하고 동법 45조에 의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를 사단법인에서 법정기구로 바꾸어 1961년 한국아동만화자율회 시절부터 실시한 만화 사전심의제도를 36년만에 사후심의로 바꾸는 대신 동법 제2장에 '청소년 유해매체 표시'라는 규정을 만들어 시중에 파는 만화책을 수거하거나 외부단체로부터 유해성 여부를 의뢰받은 작품에 대해 청소년 정서에 부합되는지 등 유무해 여부를 판정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청소년 유해매체로 판정될 시 '18세 미만 구독불가' 딱지를 붙이고 비닐커버로 씌워 '성인용'으로 분류하도록 했고 이를 어긴 업자를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정부의 만화심의 형태가 사후심의로 전환되자 그 보완적인 차원에서 7월 1일부터 한국만화출판인협회와 한국만화가협회가 공동으로 기획/구성한 '한국아동만화자율심의위원회'를 만들어 협회 산하 출판사에서 발행되는 만화책 원고에 대해 한 권당 5만원 씩의 심의료를 받는 등 7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심의 업무를 한 바 있었다.
3. 1997년 여름, 만화사냥
그러나 1997년 7월 초, 중, 고등학생들의 학교폭력 경향이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검찰은 '고교생들이 집단폭력화하고 있는 현상은 일본 폭력만화를 모방하는 청소년의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발표해 대대적으로 불량만화 단속에 나섰다. 검찰의 해당 발표에는 당시 전국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일진회', '십이지장파' 등의 용어가 만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마침 <캠퍼스 블루스>라는 일본만화 해적판에서 '일진'이란 폭력단체가 등장했고, 이를 빌미로 대대적인 만화방 수색에 나섰다.
이에 앞선 4월 15일에는 '음란/폭력성조장매체공동대책협의회(이하 음대협)' 등 각 시민단체가 청소년 유해물로 스포츠신문을 지적하자, 이를 받아들인 검찰은 5월 26일에는 배금택과 이두호 등 만화가와 소설가, 스포츠신문 편집국장들을 소환해 조사를 벌인 바 있었다.
청보법 시행 다음날인 7월 2일부터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 대표서리 이만섭이 '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공권력의 만화 단속이 더욱 강해졌다. 이 시기부터 검찰과 경찰은 전국의 만화소매상 및 만화방 등지를 상대로 일제 단속을 벌여 만화책을 마구잡이로 압수하여 9일에는 미등록 출판사 대표 및 만화방 업주 142명을 입건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바 있었고, 열흘 뒤인 동월 23일에 천국의 신화에서 묘사된 음란성/폭력성을 문제삼아 당시 인도네시아에 휴가차 체류 중인 이현세 화백을 요청 4일만에 소환시켜 법정에 세우기까지 했다. 불법 복제된 일본 만화 단속이 토종 만화에까지 퍼진 현상에 대해 만화계는 이를 공권력의 '만화 탄압'으로 규정해 집단 반발을 일으켰으나, 검찰의 만화 단속 범위는 오히려 퍼져나갔다.
한편 7월 15일에 청소년보호위원회는 1,700여 종의 만화를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 기준을 근거로 하여 유해매체로 판정했는데, 이 중에는 이두호의 <객주>, 이희재의 <성질수난>, 허영만의 <닭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온다>[4] , <오! 한강>, <들개이빨>, 일본 만화인 <짱구는 못말려> 등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유해매체로 지정된 한국 만화 중에는 1997년 이전에 사전심의를 통과한 작품도 포함되었다. 청보위는 이러한 만화들을 실은 급조된 유해만화 리스트에 따라 또 한 번 만화방 압수수색 등의 단속 선풍이 불었다. 8월 1~2일에는 음대협의 고발을 받아들인 검찰은 스포츠신문 만화가들과 편집국장들을 대거 소환했다, 이때 불구속 기소된 만화가는 강철수, 방학기 등 8명이며, 이중 조운학 등 세 명은 약식 기소, 이두호, 황재, 배금택, 오일룡 등은 기소 유예되었다.
4. 만화계의 저항
이에 만화계 역시 일제히 반발했다. 7월 15일에 PC통신 '만화수호연합'이 첫 성명서를 낸 것을 시작으로 29일에는 한국만화가협회, 우리만화 발전을 위한 연대모임(현 사단법인 우리만화연대) 등 9개 만화 관련 단체들이 모인 '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한 범만화인 비상대책위원회'는 <정부의 '만화 탄압'에 대한 범만화인 성명서>를 냈다. 이 성명서를 낸 다음날에 해당 회의의 대표자들이 검찰에 항의 방문을 갔으나 담당 검사는 바쁘다고 하여 이를 따돌리기도 했다. 한편 만화평론가 손상익이 원장으로 있던 한국만화문화연구원은 기관지 <코코리 뉴스레터> 4호 표지에 5.18 당시 계엄군의 구타 사진에 만화책을 합성한 사진을 싣는 한편 <공권력의 만화탄압을 거부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냈다.
7월 31일에는 <Mr.블루(세주문화)>, <빅 점프(서울문화사)>, <매주만화(트루패밀리)[5] >, <투엔티 세븐(대원)> 등의 격주간 성인용 만화잡지들이 시한부 발행 중단[6] 을 선언함에 따라 연재 작가들의 절필 선언이 뒤따랐고, 8월 2일부터 이틀 간 비대위 측은 서울 신촌, 종로, 대학로 등 세 개 지점에서 공권력의 만화 탄압에 반대하는 범국민 서명운동에 돌입해 1만 4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후 공권력과 만화계의 반발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아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으나, 이 사태를 통해 만화계가 주장한 창작자유의 보장 등의 문제 등은 어떠한 해결책도 찾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5. 만화 매출액 측면
당시의 시장 위축은 IMF와 비슷한 시기에 찾아왔고 청보법 시행 이후 만화 매출액의 80%가 급감하는 등의 많은 문제가 드러났다. 이런 현상은 기존의 만화유통 구조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과도기적 단계로 해석되나, 때마침 검/경이 전국의 만화방과 인기 만화작가를 상대로 대대적인 유해만화 단속에 나서며 만화시장이 위축되었기에 만화가와 출판인들은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낀 것이다. 더군다나 오래 지나지 않아 만화잡지 자체가 사양길로 접어든데다가 이를 대체할 웹툰이 정착되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걸렸기 때문에 당대의 상황을 겪은 만화가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참혹한 기억이라 할수있다.
6. 타 문화매체에 미친 여파
이는 만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문학의 경우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작가 장정일이 청보법 시행 전인 1997년 6월에 구속되었다. 영화의 경우 장선우 감독이 제작한 <나쁜 영화>가 7월 22일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등급외판정을 받았다가 8일 만에 재심의에서 일부 장면이 삭제된 채 개봉되었고, 7월 11일에는 왕가위 감독의 홍콩영화 <춘광사설>이 동성애를 다룬다는 이유로 공윤에 의해 수입불허 판정을 받았으나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무삭제 판정을 받아 개봉된 바 있었으며 이듬해에 일부 장면을 삭제한 '아시아 버전'이 <해피투게더>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심지어 간윤은 8월 19일에 '서울민주청년단체협의회(이하 서청협)[7] '라는 재야 청년운동 단체가 펴낸 기관지 <서울청년> 8호에 미군 철수 내용과 김영삼 정권 퇴진촉구 내용을 이유로 '청소년 유해매체' 판정을 내렸다.
음반의 경우 10월 30일에 스티브 유 1집 <West Side>가 인트로에 실린 영어 욕설을 이유로 '대중음악 부적합' 판정을 받았으며 인터넷의 경우 그해 11월에 피바다학생공작소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 의해 폐쇄되기도 했다.
7. 결말
한편 <천국의 신화>로 인해 법정에 선 이현세[8] 는 1998년에 벌금형을 선고받고[9] 이에 항소하여, 2002년에 2심에서 무죄판결을 선고받았으나(판결 전문), 검사가 상고하였고 21세기인 2003년에야 대법원에서 미성년자보호법 2조가 위헌판결을 받게 되며 무죄 확정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스트레스 때문에 애초 100권 기획이었다고 하는 천국의 신화는 훨씬 짧게 끝났다.
8. 유사 사례
이후 10여년이 흐른 2011~12년에도 역시 연이은 집단괴롭힘 자살사건과 같은 학교폭력을 이유로 웹툰과 게임을 규제를 하여 다시 한 번 논란이 되었다.
9. 출처
- <한국만화통사(손상익 저)> 하권. 시공사. 1998. p283~286
[1] 방학기, 강철수, 박봉성 등 14명의 만화가와 3개 스포츠신문사 간부들이 형사재판에서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한 사건이다.[2] 종래 이 법률이 규정하던 사항은 청소년보호법으로 통합되었다.[3] 1998년부터 국무총리실 직속으로 변경한 이후 2005년에 문화관광부 청소년국을 통합하여 '청소년위원회'라는 명칭으로 변경했다가 이후 국가청소년위원회를 거쳐 2008년부터 여성가족부 직속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청소년 유해매체 결정부터 유해매체 표시, 포장, 격리, 수거, 폐기까지 이르는 준사법권을 행사하는 기관이다.[4] 여담으로 김영삼이 국회의원 시절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5] 원래는 <주간야구>의 자매지였다.[6] 해당 잡지들은 하반기에 복간했지만 Mr.블루, 매주만화, 투엔티 세븐은 1998년, 빅점프는 2000년에 각각 폐간되었다.[7] 한국청년단체협의회(이하 한청협) 의장 전상봉이 1991년에 결성한 NL계 청년운동단체[8] 수사를 맡은 당시 서울지검 형사1부는 서울시내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천국의 신화의 음란, 폭력성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설문조사를 하는 생쇼(...)를 벌인(경향신문 1997년 8월 16일자 등 참조) 끝에 이현세를 벌금 300만 원에 약식기소하였고, 이현세는 이에 불복하여 정식재판을 청구하였다.[9] 당시 1심 판결을 선고한 김종필 판사는 "자식들에게 과연 이 만화를 보여주어도 괜찮을지 따졌을 때 유해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주옥같은 개드립을 남긴 바 있다.### 다만, 판결문에까지 그렇게 기재한 것은 아니고, 판결이유에는 "보통인의 가치기준에 따라 객관적으로 판단해 볼 때 미성년자에게 그 음란성, 폭악성, 잔인성을 조장하거나, 미성년자로 하여금 성적범죄와 폭력관련 범죄의 충동을 일으키게 할 우려가 있다"라고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