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방

 


1. 개요
2. 잘못된 표현 - 대본소
3. 만화방의 역사
3.1. 1950년대: 초창기
3.2. 1960~70년대: 성장 및 전성기
3.3. 1980년대 이후 ~: 쇠퇴기
3.3.1. 성인독서공간으로의 변모
3.3.2. 만화계의 만화방 살리기 노력
3.4. 만화방이 남긴 것
3.5. 이하 출처
3.6. 2010년대 만화방 상황
4. 잘못 알려진 점
5. 만화방 만화의 특징
6. 왜 공적으로 낙인 찍혔나?
7. 기타
8. 관련 문서


1. 개요


도서 대여시스템의 한 종류. 다수의 만화책을 구비하고 내방고객이 만화책을 대여 혹은 현장독서를 편안하게[1] 할 수 있도록 실내공간을 구비한 시설을 일컫는다.
장르로써 '만화방' 또는 '대본소'를 말한다면 일명 '대본소(만화방) 만화'라고 불리는 것들을 뜻한다. 말 그대로 일반서점에서 파는 목적이 아니라 만화방에서 빌려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찍어내는 책들을 칭한다.

2. 잘못된 표현 - 대본소


흔히들 만화방을 지칭할 때 '대본소(貸本所)'라고들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만화평론가 손상익의 견해에 의하면, 몇몇 만화계 인사들은 1950년대부터 생긴 만화방을 '일본에서 들여 온 도서 대여형태'라 단정하며 대본소로 잘못 읽기도 한다. '대본소(貸本所)'나 '납본(納本)'의 본(本)은 원래 일본어로 책 혹은 책을 세는 단위를 뜻하는데, 이로써 책을 '본(本)'이라 읽는 것은 일제의 잔재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또 대본소의 어원은 일본어로 도서대여점을 뜻하는 '대본옥(貸本屋)'에서 유래하였는데,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이는 '만화책 대여방' 정도가 적합하다. 그 명칭은 줄임꼴인 '만화방' 정도의 표현이 적합한 명사다. '대본소'란 명칭 역시 일본어에서 유래된 잔재라 할 수 있다.

3. 만화방의 역사



3.1. 1950년대: 초창기


사실 만화방은 처음부터 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손상익 선생은 1950년대의 초기형 만화방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을 설명하였는데, 전자는 서울의 시장판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길 한복판에 좌판을 차려 만화책을 읽게 했다는 설과, 후자로는 문구점 또는 완구점에서 매상을 올리기 위해 아이들에게 싼값을 받아 만화책을 읽게 했다는 설이다.
노점식 만화대여에 대한 주장으로는 초창기 국내 만화방 확산기에 유통을 담당했던 이국전 씨의 증언이 있는데, 이씨는 6.25 전쟁 때 북한군으로 참전했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서울 아현동에 헌책방을 차려 정착한 바 있었다. 그는 1957년에 만화 전문 출판사 '독수리문고' 설립에 참여하여 한국만화 총판의 초창기를 개척한 바 있었다. 증언은 아래와 같다.

1955~6년을 전후한 시기에 시장통 등에서 만화책을 좌판에 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싼 값을 받고 만화책을 읽게 하는 곳이 있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곳은 서울 남대문시장의 현재 지하도 입구 부근 쯤에서 한 중년 여인이 벌였던 만화책 대여 좌판이었다. 이 좌판 부근에는 늘 어린이, 청소년들이 옹기종기 쪼그리고 앉아 만화책을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 만화책의 구입은 서울의 덕홍서점을 비롯한 대형 서점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좌판 만화방 주인들은 도매값으로 만화책을 사갔다. 1957년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책 총판이랄 수 있는 '서울총판'을 서울 아현동 경기공전 앞에 세웠다.

이때 총판은 만화책을 리어카에 싣고 서울시내의 만화방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낱권을 파는 형태였다. 당시 서울시내 만화방은 약 2백개소 정도였으며, 남대문시장의 좌판 아주머니에게도 책을 팔았다. 일손이 모자랄 때면 사과장수하는 사람들을 오후에만 동원, 책을 팔기도 했다. 당시 오학운씨(1959년 부엉이문고 설립)도 만화책을 팔러 다녔다. 서울총판 시절 한 달에 약 7~8종의 만화가 새로 나왔다. 이때 만화방들은 만화책을 빌려주지는 않았고, 현장에서 보고 반환케 하는 방법으로 영업을 했다.

만화책의 총판시스템은 자금회전이 빨랐고 이에 따라 만화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59년 이후에는 부산을 비롯한 대구 등 대도시에 만화총판이 생겨났다. 이 시기에 '어린이서점'이란 만화총판을 직접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만화방은 만화총판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던 1959년을 전후로 폭발적인 증가추세를 나타냈다. 이 때 인기 있었던 만화는 3~4천 부씩을 찍어냈는데 박기준의 <두통이 시리즈>, 김경언의 <칠성이 시리즈>, 신동우의 <날쌘돌이>, 이종진의 <철인 28호>등이 그것이다. 신광서점을 인수한 오학운씨가 설립한 부엉이문고가 처음 발간한 산호의 <라이파이>는 1960년대 초기까지 인기가 지속, 최대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한국의 초기 만화방 형태를 '문구점에서 만화책 판매와 동시에 실비로 현장구독케 한 영업행위'라고 간주하여 만화방의 역사를 해방 전후 시기부터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1950년대를 대표한 만화가였던 박진우 전 만화진흥공동협의위원회(만진협) 회장의 증언도 이를 입증한다. 증언은 아래와 같다.

만화방이 생겨나기 전인 1947~8년경에도 <홍길동>이란 만화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서점에서 본 걸로 생각되는데 4X6배판에 두꺼운 종이로 제책된 만화였다. 만화책을 현장에서 대여받아 읽게 하는 만화방의 형태는 1957~8년경에 본격적으로 생겨났으며, 당시 문방구점에는 일반 대중잡지, 만화잡지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만화책들도 함께 진열되기 시작했다. 문방구의 손님들이 만화책을 사지는 않고 공짜로 슬쩍슬쩍 읽는 것을 보고 주인들은 '못 보게 말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실비를 받고 현장에서 구독케 하자'는 생각을 해냈던 것 같다. 이때부터 문방구점들은 천장에 고무줄을 쳐 놓고 그 줄에 빨래를 널 듯 만화책을 걸쳐놓고 대여영업을 했다. 당시 만화책 한 권은 2~3백 환 정도였으나 빌려보는 데에는 30~1백 환을 받았다. 만화방이 생기기 전에도 잡지를 빌려주는 곳이 있었는데, 조직적인 유통망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점에서 개별적으로 잡지를 구입해와 동네사람들에게 빌려주는 정도였다.

당대 기록이나 문헌상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당시의 정황을 참작해 보면 한국에서 초기 형태의 만화방이 출현한 시기는 1950년대 초~중반으로 볼 수 있다. 만화방 시대가 급속히 진전된 이유로는 당시 서점판매용 만화책이 서민가정에서 감당키 어려운 고가였던 것이 큰 원인으로 보인다. 이런 만화방의 폭발적 증가는 소위 만화총판이 전국적 배급망을 갖추는 것과 비례해 주택가 골목 구석구석까지 자리잡게 된다. 1960년대에는 한국 만화사에서 만화방 문화가 확산/정착된 연대로 기록된다.
또 손상익의 분석에 의하면, 초기 만화방의 숫자는 1958~9년 사이 전국에 걸쳐 약 1~2천여 개소가 영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숫자는 당대 대형 만화전문 출판사가 한 번에 찍어낸 만화책이 보통 2천 권에서 인기만화의 경우 3~4천여 권을 낸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 만화책 역시 거의 총판을 통해 만화방으로 납품된 것이다. 또 전국의 만화방 중 절반 이상은 만화 출판사들이 몰려있던 서울에 영업한 것으로 보인다.

3.2. 1960~70년대: 성장 및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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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박물관 미술관의 1970년대 만화방 재현 공간
만화방은 도서의 구입, 유통, 소비단계에 걸쳐 매우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1960년대 이후로 확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구조의 상부 시스템은 책을 생산해내는 출판사와 전국 시/도 단위 총판조직, 그 산하의 시/군 단위 소지방 판매처였다. 이 소지방 판매처에서 만화방 20~30개소를 외무원 1명씩 담당하여 만화방의 책을 공급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만화방은 영업 특성상 신간 만화책을 매일 일정분량 구입하여 고객을 확보해야 했다. 특히 서울의 경우, 외무원은 매일 낮 총판에 집결해 상대 출판사의 그날치 발행 만화에 대한 정보 등에 신경을 쓰면서 자신의 할당 판매량을 확정했다. 그것은 상대 출판사에서 인기만화가 발매되는 날에는 판매에 지장을 받기 때문이다. 확정된 만화책은 자전거에 싣고 담당 배달처(만화방)로 나갔다.
한편, 외무원들은 현금으로 만화책을 판매하고 그 대금에서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뗀 뒤 출판사에 입금을 시켰다. 당시 어린이들이 외무원의 자전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오늘은 어떤 책이 나왔어요?"라고 묻는 모습은 1960년대 만화방 전성기 시절 동네마다 꼭 있었던 것이었다.
당시 만화방의 영업형태는 신간을 언제 공급받는냐에 따라 달랐다. 신간을 공급받는 '신간집'을 필두로 이를 회수해 연쇄적으로 공급받는 '3일 뒷판', '5일 뒷판', '일주일 뒷판', 그리고 마지막 '구간(舊刊)집' 등으로 전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대도시에서 시골 마을로 내려갈수록 구간을 비치하였는데, 시골에서 내려간 만화책들은 헌 걸레짝마냥 훼손되어 너덜거리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제책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갱지보다 거칠고 질이 떨어지는 선화지를 썼기 때문에 책의 수명은 1~2개월에 불과하였다. 이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이전의 개봉관-재개봉관-재재개봉관 시스템과도 일맥상통한다.
만화방용 만화책은 초창기에 4~5종씩 발매되었으나 1960년 초반 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10종 이상이 발행되었다. 그러다가 1967년 신촌 합동출판사 출현 이후부터 20여종의 만화를 세트로 묶어 만화방 주인들에게 강매하기도 했다. 그런고로 합동의 전성기인 1970년대 중반에는 전국 2만여개 만화방에 매일 30여 종이나 공급되기도 했다. 또 언론인 오소백(1921~2008) 선생은 <세대> 1976년 11월호에 낸 2백자 원고지 150매 가량의 칼럼 '흙바람 속의 아동만화계'에서 당시 만화책 및 만화책 유통과정을 아래와 같이 전하였다.

만화책이 날개 돋쳤던 (1960년대 후반)시절을 잠시 엿본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전 출판물의 67.2%가 아동만화(단행본 포함)였다. 아동만화가 '사회 6대악'의 하나로 비난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중략) 현재(1976년) 만협(한국만화가협회)의 회원은 235명. 여기다 화생[2]

까지 합하면 6~7백명이 될 것 같다. 만화출판업자는 대, 소 합쳐 20개 가까이 된다. (중략) 만화가게(대본집)는 전국에 약 1만 5천군데, 여기에 총판 외무원까지 합하면 만화 관계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약 1만 7천 ~ 2만 명을 웃돈다. 거기에 가족까지 셈한다면 8~9만 명이 될 것이다 (중략)

만화책의 소비자는 모두 대본업소인 만화가게다. 막대한 부수가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만화책을 서점을 통해 사고 팔 수 없는 것도 보기 드문 현상이다. 만화책은 꼭 대본소에 가서 읽어야만 하게 돼 있다. 만화가게의 환경이 제법 고쳐졌다지만 아직도 문제점은 많다. 어른들이 들어와서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는다. 어린이들이 성인만화를 안 읽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딱딱한 나무의자며 삐걱거리는 탁자에 머리를 맞대고 책을 읽는 어린이들의 모습. 조명장치가 제대로 돼있지 않아 어두컴컴하다. 실내의 공기는 탁한데다 연탄불 냄새가 코에 스민다. 떡볶이며 번데기 냄새가 대본소 안을 맴돈다. 하루에 고작 1천 원 안팎의 벌이를 하는 대개가 아낙네들이 손을 대고 있는 형편이다. 영세성을 띤 대본업자의 30%는 그나마 생계를 걸고 허덕이는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

위와 같이 이렇게 만화시장이 총판체계로 재편되어 급속하게 성장하자 이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이에 따라 여러가지 폐단들(인기있는 만화 표절하기, 저급종이로 찍어내기, 인기있는 만화가 빼돌리기 등등)이 생겨났다. 그리고 1967년 이르러 만화시장이 또 한번 재편되는 시기를 거치면서 이런 폐단들이 독점 만화출판사 집단인 합동출판사(합동동우회)에 의해 관행으로 정착되었다. 하지만 이 독점출판사를 거치지 않으면 만화방에 만화를 낼길이 없었기에 만화가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합동에 소속되었어야 했다. 1960~80년대에 활동한 한국만화계의 스타 고행석, 허영만, 이현세, 고우영, 이두호 등의 인물들이 전부 만화방 출신이었고, 이원복 교수 , 김수정 등도 어릴 적 만화방을 드나들며 만화가의 길을 택하기도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도 어릴 적 단골이었다.
여하튼 당시 만화방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방과 후 필수 순례코스가 될 만큼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오락시설이 별로없던 당시로써는 푼돈으로 값싸게 만화책을 볼 수 있었고, 거기에 부수적으로 무협소설, 월간 대중잡지 등을 들여놓아 어른들에게도 대여케 했으며 어묵이나 군고구마, 번데기 같은 군것질거리를 팔기도 하였다. 심지어 서울 변두리나 중, 소도시 만화방에서는 1961년 TV방송 개시 이후 부수입용으로 거금을 들여 만화방 한켠에 당시로선 고가 제품인[3] TV를 설치하여 만화영화라든가 어린이 프로그램 방영 시간대에 맞춰 이를 유료관람시키는가 하면, 인기 드라마나 스포츠 중계라도 할까 하면 동네 어른들까지 모여 단체시청하는 등 당시 변변한 문화공간 없던 서민들에게 문화 사랑방 역할까지 해냈다.
당시 서울에서 만화방을 운영하던 박봉희의 증언에 의하면, 만화방 측은 TV를 보려는 사람들에게 비표를 내주기도 했으며, 의자를 치우고 멍석을 깔아 관람객들이 앉아서 시청하도록 했다. 물론 간간히 사람들이 즐겁게 TV를 시청하고 있을때 간혹 경찰들이 공연윤리법에 저촉된다며 만화방 업주들에게 으름장을 놓는 일이 꽤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TV를 더 잘 보려고 고개를 번쩍 치켜드는 사람이 많아서 주인은 긴 막대기로 허공을 내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대 말 국내 만화방 실태를 분석한 자료로는 서강대 대학원생인 정순자가 쓴 석사학위 논문 <아동만화에 관한 연구(1978)>가 있는데, 이 논문은 서울 송정국교 4~6학년생 439명을 대상으로 하여 아동과 만화에 대한 온갖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이에 대한 현상을 분석한 것이다. 특히 이 중 만화방에 대한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만화방에 가는 빈도 조사에서는 '간다'라고 답한 어린이가 전체의 59%(259명)를 차지했고 이 중에 '매일 간다'가 7명(2.7%), '3~4일에 한 번 간다'가 39명(15.06%), '일주일에 한 번 간다'가 55명(21.24%)으로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11세, 10세, 13세, 12세 순으로 '자주 간다'고 답해 만화방의 최대 고객층은 국교 4학년생(8세 입학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화방에 가는 이유'에서는 전체의 28.3%인 82명이 '책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에'이라 답했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보기 때문'이 58명(20.0%), '집에서 만화를 못 보게 하기 때문'이 39명(13.45%) 순으로 응답한 걸로 보아 당시 만화방은 어린이들 소일거리 독서문화공간 내지는 또래집단의 사교장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만화책을 빌려보는 장소로 47%의 어린이가 '친구에게서 빌린다'고 응답했으며 31%는 '만화방에서 빌려본다'고 대답하였다. 이렇듯 만화방은 현장독서만이 아닌 재택 독서를 위한 장기대여의 수단으로 활용하였음도 알 수 있다.
1970년대 이르러선 만화방이 1만 8천여 곳[4]으로까지 늘어났지만 무한확장에 따른 폐해도 심각하였다. 학교 주변의 만화방에서는 중,고등학생 등 미성년자에게 개피담배를 팔아 흡연을 묵인하는가 하면, 대도시 번화가나 기차역 주변 만화방에서는 가출 청소년들이 진을 치며 온갖 폭력사건 등을 일으키는 진원지가 되어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더군다나 1980년대 VTR의 보급으로 만화방 안에 밀실을 갖추고 외국산 포르노 비디오를 트는 데까지 생겨나 언론과 시민단체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이런 일부 탈선 만화방들로 인해 학부모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던데다가 만화검열이 심해지던 시절이라서 만화책의 질이 그다지 높다고 할수없었고 더군다나 위에 적혀있다시피 합동출판사에서 만화방 업주를 상대로도 횡포를 부렸고(...) 이에 항의하면 만화책 공급을 끊고 청와대나 문공부, 사법기관에 신고해도 모른척 해주는 행위가 난무했고, 만화방 업주에 대한 인식도 그리 좋지도 않았다. 위와 같은 일부 만화방들의 탈선으로 전체 만화방이 '풍기문란 업소'로 지정되어 경찰당국의 고정 단속대상 업소로 전락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1972년 2월 정병섭군 자살사건으로 인해서 일부 만화방 업주들이 구속당하거나 만화가가 사회의 질타를 받기 시작하고 만화책이 불태워지는 사건이 벌어지며 만화방에 대한 인식은 날라리들이 뺀질나게 돌아다는 곳이나 아이들에게 허무맹랑하고 저질적인 만화책을 보게 만들어서 용돈 낭비를 부추기는 악마의 장소(...)정도로 위상이 추락되었다. 정병섭군 사건의 여파로 현재까지도 만화계에선 보수, 아니 정부 자체라면 치를 떨게 되었다.[5]
한편 만화방 업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들은 합동의 세트제 강매에 반발해 1970년에 '전국연합친목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에 주일상을 앉혔다. 이 조직은 합동 편을 드는 단체인 '한국대본업정화협회[6]'에 맞서기 위해 세운 단체로, 서울 남산에서 합동문고 만화책 화형식을 여는 등 실력행사에 나섰으며 전국 만화방 주인 1천여 명이 서명한 진정서를 청와대에 보내기도 하였다. 1967년에 한국아동만화자율회 회장 최상권 화백은 <전국 대본업자 여러분께 알리는 말씀>이라는 성명에서 대본업정화협회의 이권개입과 사전심의 과정에서의 부당행위를 경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화방 주인들의 자생적 모임이던 전국연합친목회는 결국 1972년에 해체되었고, 대신 문공부 산하 단체로 '한국도서보급회'가 생겨났으나 별다른 활동 없이 만화방이 쇠퇴한 1990년대 들어 해체되었다.

3.3. 1980년대 이후 ~: 쇠퇴기


한동안 번성했던 우리 만화방은 1980년대 들어 정체기를 맞았고, 1988 서울올림픽 이후에는 사양산업으로 전락하여 급속히 내리막을 걷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1990년경에는 전국 1만여 개소, 1998년 기준 5천 개소 미만으로 줄고 말았다. 이 만화방 사양화의 대표적 원인은 다음과 같다.
우선, 만화방 만화책이 일부 인기 작가들의 마구 찍어내기로 말미암아 내용의 질적 저하가 두드러진 것이다. 유행에 민감한 소재와 이를 이용한 히트작이 생기면 금세 짝퉁 만화가 양산되며, 비슷비슷한 그림체와 내용전개 일색인 만화책에 독자들이 식상해한 것이다.
이와 함께 만화의 접촉경로 다양화도 빼놓을 수 없는데, 만화책이 만화방이 아닌 서점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학습만화와 역사만화 등이 통신 및 방문판매를 통해 날개돋쳐 팔린 것도 만화방을 도태시킨 요인 중 하나로 꼽혔다. 심지어 1969년에 창간된 일간스포츠가 만화지면을 초대형으로 신설함에 따라 이에 자극받은 일간 신문사에서도 경쟁적으로 스포츠신문을 창간해 만화지면을 늘린 것도 만화방의 용도를 위축시킨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듯 1980년대 만화방 쇠퇴 현상은 결국 우리 국민들의 일반적인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사서 보는 만화시대가 도래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한 번 보고 버리는 만화잡지의 발행량도 증가한 것도 이 시기에 벌어진 것이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전자산업의 발달에 따른 각종 비디오 게임 소프트웨어 시장 확산, 나아가 개인용 컴퓨터 보급 확대로 인한 어린이, 청소년들의 관심 분산도 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거기에 몇몇 대도시 만화방이 불량청소년들의 탈선 현장으로 변모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때도 199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일이었다. MBC 뉴스데스크 1987년 11월 17일자 방영분 <카메라출동: 불량 만화가게>, 조선일보 1991년 11월 16일자 사회면 르포기사에서도 이를 다루었다. 이로 인해 1990년에는 '학교보건법' 및 동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만화방도 '상대정화구역'으로 간주되어(본 시행령 4조 2항) 유치원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모든 학교에서 직선거리 200m 이내에는 만화방을 두지 못하게 했으며, 본 시행령 부칙 2항에서도 이미 영업중인 만화방 등은 1995년 12월 31일까지 철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외에도 1991년에 제정된 '풍속영업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서도 단속대상 업소로 지정되는 등 만화방은 청소년의 탈선현장으로 인식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외에도 만화방의 사양화를 가속시킨 데에는 1993년경부터 우후죽순 생겨난 도서대여점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도서대여점이 일반 출판사에서 대량으로 낸 만화책을 대여도서로 간주하여 기존의 만화방 영역을 잠식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1995년에 동국대 정보산업대학원생 이종현이 쓴 석사학위 논문 <우리나라 도서대여점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평균 보유 도서 수에서 일반도서 3,662권, 만화책 3,377권으로 비슷한 증세를 보였으나, 이용자의 76.2%가 중고생이고 전체의 26.9%가 만화책을 선호한다고 나왔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간윤)의 기관지 <간행물윤리> 1995년 1월호에 게재된 <도서대여업소 운영실태 조사분석>에서도 국내 도서대여점 중 92.9%가 만화책을 보유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만화방이 사양산업화되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3.3.1. 성인독서공간으로의 변모


그런 와중에도 만화방의 현황과 이용실태에 대한 조사는 1990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90년 8월 간윤이 서울지역 만화방 1백 개소 및 이용고객 1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만화대본업소 운영실태에 관한 조사>를 보면 만화방 주인의 98.0%와 이용고객 67.3%가 '대본소는 우리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응답했으며, 만화방의 하루 평균 이용자 수는 평일 50명, 주말 60명 수준으로 집계되었다. 또 연령별 이용자 분포에서는 국교생이 2.0%, 중고교생이 22.0%, 10대 이상 28.0%, 20대 47.0%로 각각 나타났다. 놀랍게도 만화방을 찾는 전체 고객 중 3/4이 20대 이상 성인으로 나타났다.
1993년 12월에는 한국도서류써비스업조합이 만화방 주인 5백여 명을 대상으로 1990년부터 한국갤럽에 의뢰해 조사/비교분석한 <만화대여업소 유통실태조사>가 발표되어 눈길을 끌었다. 이 조사에 의하면, 1990년 당시 18세 이상 성인 독자가 전체의 73%를 차지한 반면, 1993년에는 76%로 3% 더 증가하였다. 특히 이 기간 중 대학생들의 참가는 더욱 두드러져 1990년 35%에서 3년 뒤 48%로 무려 13%가 증가해 만화방이 대학 캠퍼스 주변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이 조사에서는 일본만화 해적판 비치가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 증거로 조사대상 업소 중 24개소가 포켓판 일본만화를 10권~3백 권까지 진열하고 있었으며, 211개 업소가 일본 만화책을 적게는 10권(5개 업소)에서 많게는 4백 권(12개 업소), 5백 권(3개 업소), 심지어는 1천 5백 권(1개 업소)까지 비치한 곳도 있음이 드러났다. 이로 미루어 보아 만화방은 1990년대 들어 일본만화 해적판의 유통경로로 새로 대두되었다는 걸 입증케 해 준다.
이밖에도 1995년 8월 간윤이 전국의 만화방 1천 5백개 점포를 직접 방문해 조사한 <전국 만화대본업소 운영실태에 관한 조사>가 있는데, 이 조사는 당시 전국 4천여 개 등록업소 중 1/3 이상이 조사대상에 포함되어 만화방 영업개시 이래 최대 규모의 현장 실태조사로 기록되었다. 이 조사는 만화방 중 78%가 1~2만여 권의 도서를 비치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용자들이 선호하는 장르는 무협(37%), 기업(30%), 액션(11%), 순정(9%), 스포츠(8%), 명랑(5%) 순으로 나타나 만화방의 주 고객이 성인층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음을 입증케 해 준다.
이렇듯 만화방의 '어린이 및 청소년-성인' 이동 현상은 1980년대 이후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여러 사회적 요인이 있다. 우선 경제적인 풍요로 아이들도 혼자 쓰는 공부방을 가지게 되었으며, 생활환경의 질적 향상으로 인해 온갖 형태의 오락, 소일거리가 만화방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어린이들은 넉넉해진 용돈으로 만화책을 빌리지 않고 직접 사서 볼 수도 있고, 전자오락실 등 신종 오락시설 공간이 늘어나 이들이 만화방을 밀어낸 것이다.
반면 만화방들은 성인들이 만화방을 찾는 시류에 편승하면서 이들은 시설의 고급화를 서둘렀다. 1980년대 이르러서 어린이들 상대의 주택가 만화방이 서서히 사라진 반면, 대학가 앞 만화방은 부쩍 늘어났다. 1990년대 들어서 대다수 만화방들은 소파와 탁자 등의 집기는 물론, 깨끗한 실내환경과 밝은 조명시설을 갖춘 성인 독서공간으로 변모하였다.

3.3.2. 만화계의 만화방 살리기 노력


1990년대 들어 시설은 고급화되었지만, 전체 만화방 수는 급격히 감소하여 만화계 내부의 우려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도 건전 만화방 육성을 위해 간윤은 1991년 11월부터 전국의 우수 만화대여업소 20개를 선정하여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만화방 주인들도 1990년대 들어 사양산업화되는 시대적 흐름에 어쩔 수 없이 타협했으나, 이들은 정부의 규제가 완화되고 스스로 의지를 불태우면 다시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의지를 지녔다. 이런 의지는 1993년 8월에 김기백(1935~2017) 화백을 초대 위원장으로 추대하여 발족된 '만화진흥공동협의회(만진협)'로 나타났다.

1994년 들어 박진우 화백을 위원장직에 앉힌 만진협은 만화방의 최소 영업유지가 가능한 숫자를 5천 개소로 보고, 그 이하일 경우 만화출판업계가 연쇄 도산할 것을 우려해 만화방에 대한 정부의 각종 규제책을 철폐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1995년 7월 들어 대통령 직속 행정쇄신위원회에 이 안건이 상정되어 재검토되었고, 그 결과 '학교보건법' 등 일부 만화방 영업 규제 법률이 완화되었다. 이 공로로 만진협은 그해 11월에 문화체육부로부터 '한국 만화문화 대상' 공로상을 수여받았으나, 결국 이 단체는 1997년 1월 30일부로 해산되었다.
이후 박진우 전 위원장은 "도서대여점이 생겨날 당시 출판협회와 만화가협회 모두가 긍정적이었으나, 막상 도서대여점이 생기고 나서 번성하자 출판업계는 물론 만화방도 큰 타격을 받았다. 아무도 예측 못한 일이었다. 1997년 현재 전국에는 만화방보다 많은 도서대여점이 영업 중이고, 여기서 발생하는 대여수입은 만화방을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3.4. 만화방이 남긴 것


결론적으로, 만화방은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하기까지 이 땅의 어린이, 청소년들의 독서문화공간으로서 한동안 그들의 문화를 가꾼 현장으로 이름을 남겼지만, 1980년대 이후 끊임없이 존폐 논란을 몰고 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만화방은 만화문화의 확산과 1960년대의 만화 전성기에 핵심 역할을 담당한 공적이 있었으나, 청소년들의 탈선 조장, 기형적인 총판시스템과 이의 독과점으로 인한 만화소비 시장의 파행, 유통구조의 전근대성 고착, 일부 인기작가의 다작을 유도하여 저질만화를 양산하는 만화공장의 출현, 밀폐된 공간의 열악한 시설에 기인한 비위생 문제 등의 부정적인 요소도 남겼다. 이런 문제점들은 교육 관계자나 사회학자, 일부 만화전문가들이 끊임없이 '만화방 무용론'을 제기케 하는 빌미를 만들었다.

3.5. 이하 출처


  • 한국만화통사(하권) - 손상익 저. 시공사. 1998. p204~220.

3.6. 2010년대 만화방 상황


2010년대 들어서도 몇몇 작품이 나오곤 하지만 위에 서술하는 대로 줄거리나 여러 모로 그저 그런 만화 찍어내기 작품이고 대여점도 많이 죽은 상황에서 얼마 남지 않은 24시간 만화방같은 곳으로 판매하거나 아니면 스포츠신문 만화라든지 그런 쪽으로 판매하여 버티는 중. 2016년 통계로 만화방은 전국 다 뒤져봐야 450개를 겨우 넘길 수준만 남았으며 해마다 문닫는 곳이 늘고 있다. 1970년대만 해도 전국에 1만 5천 곳이 넘던 대본소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이젠 거의 다 죽었다고 봐야할 수준.
2000년대 학습만화의 호황과 웹툰의 부상, 만화잡지의 몰락으로 대표되는 양극화 현상에서 김성모의 케이스가 너무 알려져서 심하게 까인면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대본만화도 잡지만화와 더불어 패배자였다는 것이었다. 차이라면 조금 늦게 몰락했다는 점일 뿐.
이러다보니 만화방 만화가였던 이들도 다른 사업하며 벌어먹고 옛 작품을 유료 만화사이트나 앱에다가 실어서 판매 수익을 버는 경우가 태반이다. 유명작가들이야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인터넷 만화사이트나 모바일 만화플랫폼에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고, 하승남이나 김성모처럼 웹툰계로 진출한 인물도 있지만 이것도 포털사이트나 메이저급 사이트에 진출해야 이름을 알릴수있는데다가 세대의 차이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많은 이들이 진출한것도 아니고, 오일룡[7]같이 식당을 하며 재기하려고 했지만 작품연재할 곳이 없어 결국 포기한 경우도 있으니.
만화 카페로 업종을 바꿔 (?) 버티기도 하지만 만화 카페 역시 그다지 많지 있다. 그리고, 만화 카페는 주로 판매용 책자나 고급 웹툰 관련 책자를 주로 사서 내세우고 있지, 과거 만화방 시절 그야말로 저급한 수준 종이로 찍어내기로 내던 만화책들은 만화 카페에서도 그다지 반기지 않는 상황이라 만화 카페 판매용으로 더 고급종이를 써야하고 제조 단가가 늘어났다고 한다. 뭐 만화방에 주로 납품하던 총판조직들도 엄청나게 문닫고 있는 상황이다.
2010년대 이후 현재는 만화방과 도서대여점 모두 만화 카페로 대체가 완료된 상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2010년대 이후 만화 카페가 대중화되면서 만화 카페를 거꾸로 만화방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24시간 만화방으로 영업하는 곳은 만화가 주가 아니라 샤워실, 침대 같은 것을 설치하면서 일용직 노동자, 노숙자 등을 타겟으로 하고 있는 곳도 꽤 있다.

4. 잘못 알려진 점


만화방 만화는 질이 낮다고 생각하기 쉽지만[8][9], 지금은 고전인 공포의 외인구단, 신의 아들, 별빛 속에, 북해의 별 모두 만화방 만화였다. 그 시절에는 소수의 어린이 잡지 부록과 신문을 제외하고는 만화가로 데뷔하는 방법이 만화방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두호같은 대가도 만화방이 세력을 자랑하던 시기엔 객주같은 명작을 대본소로 낼 수밖에 없었으며 반대로 만화방의 기세가 약해지던 시기에 적절하게 유혹을 뿌리친 김수정아기공룡 둘리를 만화책 판매업체인 요요 코믹스를 통해 내는데 성공했다.
일본에서도 만화방 같은 도서대여 시설이 없어서 만화발전이 이루워졌다고 보는 시각이 있지만 사실 일본에서도 1950년대에는 '대본옥'이 주류였다. 다만 일본이 일찍 경제성장을 했기때문에 굳이 만화방에서 만화를 사서보는 메리트가 없어졌기에 일찍 만화잡지-단행본 체계로 전환하여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고 그와 별개로 일본에서도 만화방은 엄연히 존재하기는 하다.

5. 만화방 만화의 특징


만화방 만화의 특징 중 하나는 스타 시스템에 있다.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주인공 캐릭터가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에 나오는 것으로, 그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나온 캐릭터가 다른 작품에도 나오는 등... 극단적인 예로 이현세오혜성이나 고행석구영탄, 이진주하니를 들 수 있겠다. 주인공, 여주인공, 악당들이 전부 다 이름, 성격, 역할이 정해져있다. 이는 1960년대 방영진의 <약동이> 시리즈와 임창의 <땡이> 시리즈 등 스타시스템을 체택한 작품이 크게 인기를 끌게되자 관행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림체는 1980년대 이전에는 명랑만화체가 주류였으나 1980년대~90년대 이후 아동독자층이 잡지만화나 학습만화쪽으로 빠져나갔고[10] 그 자리를 성인독자층이 차지하면서 극화체가 주류를 이루고있다. 게다가 온갖 표절트레이싱이 넘쳐놨다. 사실 이는 단순히 만화업자들과 당대의 만화가들만 탓하기에는 1990년대 이전에는 저작권 의식이 희박했다. 당시의 일반만화나 학습만화 업계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저작권 의식이 희박한것은 만화방 업체들과 큰 차이는 없었는데. 1970년대의 클로버 문고만 봐도 일본 만화나 외국 영화를 베낀 만화들도 거릴껏없이 발매되었고, 학습만화도 상당수가 표절이거나 무단출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는 여타 출판부문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외국서적을 발매했을 때 일본서적을 번역하거나 일본 외 책의 경우 일본어판을 중역해서 내는 일이 다반사였을 정도였다. 그래서 1980년대 후반 이전 이러한 서적들의 외래어 표기를 보면 가타카나를 음차한듯한 표기가 나오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또한 어린이 영화나 극장판 애니메이션, TV방송[11], 연극계, 게임계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 상황은 비슷했다. 심지어 국산만화도 표절의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라서 로봇 찌빠를 표절한 만화가 버젓히 타 신문사에 걸려있다던가하는 일도 있었다. 다만 대본소 업계가 상대적으로 나이든 만화가들이 남아있게되니까 보다 장기적으로 남아있게 된 수준인것은 사실이었다.
침묵의 함대를 베낀 장훈의 제국의 함대는 1992년 애니평론가 박병호 교수가 월간 <PC매니아>를 통해 폭로한 뒤 신문에서 까며 보도된 적이 있다.[12] 그 밖에 보스의 두얼굴이라든지 엄청 많은 일본만화를 베꼈던 적도 있다. 박인권은 그림체는 물론이고 스토리 마저 일본만화나 외국 영화를 베끼고, 엑스트라나 조연급 인물의 성격이나 캐릭터를 도용하기도 했다.
다만 60년대 말에서 70년대까지 합동출판사가 만화방용 만화책 시장을 독점했을 시기 만화방 주인들에게 세트로 강매하거나, 만화가에게 일본만화를 표절할걸 강요해서 김수정, 이재학, 이현세, 허영만 처럼 어쩔수 없이 표절작품을 내야했던 만화가들이 많았다.해당만화가들은 이 시절을 굴욕으로 여기고 김수정 같은 경우 그리다 못해 한동안 만화가를 포기하고 애니메이터, 세일즈맨으로 벌어먹던 적도 있을 정도로, 이런거 안 그리자면 만화가를 포기해야 했기에 이걸 비난만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오일룡, 박인권, 박봉성, 김성모, 장훈 등이 80년대 이후에 했던 표절까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이런 만행이 버젓이 90년대나 심지어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졌으니 더 이상 옹호할 것도 없었다. 박인권만 해도 90년대말에 연재하던 만화방에서 이카리 신지라든지 여러 일본만화 주인공을 아예 등장시키는 배째라 표절을 저질렀다.

6. 왜 공적으로 낙인 찍혔나?


1980년대까지도 당시 많은 유명 만화가들도 만화방 만화로 작품을 내거나 연재하여 벌어먹던 시절이 있었지만, 만화방을 공적으로 낙인박아 두는 것은 1967년부터 생긴 합동출판사나 몇몇 탈선 만화방들이 만들어둔 업보이다. 1973년 한국일보가 만화방 단행본 시장에 진출하기 전까지 합동총판은 경쟁사를 말려죽이며 만화시장을 독점하여 왔다가 1974년에 소년한국일보조차도 1982년 자유경쟁 전까지 합동에 붙어 공동독점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 팝픽 착취현황 폭로 사건은 저리가라할 정도로 노동력 착취가 벌어졌고, 이를 전통과 역사랍시고 지금도 강요하고 있는 곳이 상당수라고 한다.
기성 만화가중 유명인인 허영만은 생활고의 문제로 임창과 함께 만화방 만화사업(땡이출판)을 몇 해동안 하던 적도 있는데 그는 지금도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서 말리고 싶을 정도로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라고 치를 떤다. 그래서 그의 만화 식객에서 만화를 그리지 않고 찍는다고 하는 만화방 만화 공장장(?)의 대사를 통해 "만화가 국수냐! 찍게!"라고 만화방 체제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다.

7. 기타


'만화계의 양판소' 정도로 요약 가능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보물섬, 만화 광장, 아이큐 점프, 소년 챔프를 위시한 잡지만화에게 밀려 차자 세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설상가상으로 90년대 초반 만화방의 숫자가 줄어들어 만화시장 주도권을 잡지만화에게 완전히 넘겨주고 말았고, 작가진들 또한 만화잡지쪽으로 상당수 넘어갔다. 그래도 만화방의 변형판이라고 할수있는 대여점이 2000년대 중반까지 버티기는 했지만 이 역시도 시간을 지나면서 지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상태고, 성인만화를 중심으로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다. 현재는 공장만화라고 불리는 김성모, 박인권, 박봉성[13], 박세원 등의 성인만화 계열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이 쪽의 대본소 만화와의 차이점이라면 책의 내구성에 좀 더 신경을 썼다는 정도인데 암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대본소와 큰 차이가 없다.
액션 계열 외에 순정만화 계열의 대본소 만화도 있다. 이것 역시 단행본 출간 속도가 다른 것들에 비해 무지 빠르다는 점에서 두드러지는데, 다만 극화 계열과 달리 표면상의 작가(황미리, 한유랑)를 내세우고 실제 스토리와 작화는 소위 '문하생 집단'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 대본소 순정만화 일본만화 표절과 모방으로 시작했다는 원죄를 지니고 있어서 마찬가지로 까이고 있고, 설령 표절이 아니더라도 양산형 인터넷 로맨스 소설의 유치하고 개연성 없는 스토리나, 같은 작가 작품인데 매번 들쑥날쑥한 그림체 같은 이유로 디스 당할 소지가 다분하다. 그나마 황유랑이나 황미리는 카카오 페이지등에다가 만화를 내면서 버티고 있는듯하다.
실제로 2001년에 아선미디어(지금은 부도나서 사라짐)에서 내놓은 <내 ID는 성형미인> 이란 만화는 서예린이란 가명으로 내놓은 표절 모음만화였다. 당시에도 욕 신나게 먹었다. 사실 이거 작가 서예린 이름만 보고 여자라고 오해하기 딱이지만 50대 남성만화가로서 대본소 만화에서 순정물로 문하생 생활만 수십여년동안하던 사람이라고 한다(출처는 한국의 만화가 18인. 여기선 S라는 이니셜로만 나왔다.). 그 밖에도 80년대 대본소 순정만화계에서 인기를 끌던 김영숙도 실은 이런 대본소 문하생들이 거의 그리던 사실 이름만 내놓은 가명의 만화공장장이었다.
이외에도 문방구(...)와 더불어 90년대의 후기 해적판 일본만화들이 보급되던 첨병중 한곳이기도 하였다.

8. 관련 문서



[1] 이게 도서관과 제일 큰 차이점인데, 도서관은 공부하러 가는 느낌이 강하다. 반면 만화방은 놀러가는 곳이라 어느정도 수다까지는 떠들수 있도록 터치를 잘 안하며, 무엇보다 책을 읽을때 소파는 기본이고 침대(!)까지 있으며 굳이 편의점이나 구내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필요 없이 그자리에서 먹을수 있으며 당연히 시설내에서 음식물을 먹는것도 자유롭다 .[2] 문하생 또는 제자를 지칭.[3]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 정도를 제외하면 TV는 꽤 잘사는 집에서나 있는 귀한 물품이었고, TV가 두세대 있던집은 더더욱 드믈었다. TV가 전국적으로 보급된건 70년대 중후반 와서부터이며 당대에는 출산율이 4-5명대에 달하던 시절인데 반해 한집에 TV가 두대 이상 있는 집은 더더욱 드믈었단 시절이었다 이러니 만화방이 흥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던것.[4] 만진협 추산 기준.[5] 대표적으로 이현세 화백이 2002년 16대 대선에서 이회창을 지지선언하자 그에게 실망하였다는 만화가들이 줄을 섰다. 이현세는 성향 자체는 보수가 아니라고.[6] 1966년 9월 13일 내무부 인가, 1969년 6월 18일 등록취소.[7] 1980년대에는 대본소 시장에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었다.[8] 1960~70년대 합동출판사의 독점이 낳은 서글픈 편견이라고 할수있다. 물론 합동 출판사 이전과 이후에도 저질만화는 있어왔긴 하지만...(예를 들어 땡이 시리즈가 인기를 끌자 표절만화를 그린다거나...)[9] 심지어 1995년 9월 21일 한국미생물학회가 발표한 <대여점 서적 미생물 오염도 분석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대여용 만화책이 '세균 덩어리'라는 지적이 나왔다.[10] 이때쯤 학습만화 시장에는 80년대 이전 당시 명랑만화를 그리던 원로 (명랑)만화가들중 몇몇은 학습만화로 활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윤승운화백.[11] 1960년대 후반에서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예능프로그램 형식이나 코너 면에 있어서는 일본것을 베껴쓴다는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12] 다만 장훈 작가는 출판사로부터 명의를 도용당했다고 주장했다.[13] 별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나온다... 정확히는 아들이 박봉성 프로덕션이란 이름으로 운영하는 것. 비슷한 경우로 무협만화가 이재학이 죽은지 15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아내가 이재학 프로덕션을 운영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