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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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2. 생애
1932년 일제강점기하 경상북도 대구부 금정2정목(現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3가)에서 이덕상(李德祥)[2] 과 밀양 박씨 박곤(朴坤)의 딸[3] 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륜중학교 시절 잠시 면관을 당하여 체육교사로 부임했던 김재규(훗날 중앙정보부장)와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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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학생증)
6년제 대륜중학교를 거쳐, 1950년 연희대학교에 진학,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5] 연세대 재학 시절에는 응원단장으로도 활동했는데, 당시에는 수염을 길러 '털보 응원단장'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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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응원단장 활동 모습)
연세대 재학중 헝가리 혁명과 이를 저지하기 위해 소련군이 헝가리를 침공하는 사태가 터지자 다른 대학생 7명과 함께 "헝가리 자유수호 학도의용병"을 결성하여 헝가리 시민군측에 참전하려고 했으나, 해외출입국 자체가 통제되던 시기에 공산국가로 가는것이 당시 정권의 눈에는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은 모양이다. 참전 자체는 저지되었지만, 민주화 이후 헝가리 정부가 어찌 알았는지 공로를 인정받아 국회의장을 지내던 2002년 3월 헝가리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졸업 후 통신사 기자로 일하다가 1958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때는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4.19 혁명 뒤 자유당 내 부정선거 책임자 구속 동의안이 부결되자 기자석에 앉았던 이만섭이 화를 참지 못하고 '자유당 이 도둑놈들아!'라고 외친 적도 있는데, 이에 대해 국회부의장이 '이만섭 기자 조용하세요'라고 답변한 것이 국회속기록에 남아있다.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초로 국회속기록에 이름을 올린 사례라고 한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의 민정 이양과 관련된 기사로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일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인연을 맺고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어 초선 국회의원으로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제6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66년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비판하다가 이병철과 이맹희에 의해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할 뻔 하였다. 제7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69년 정구영 등과 함께 3선 개헌에 반대하였다가 정권 실세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의 경질 등을 선행 조건으로 내걸고 찬성으로 선회하였다. 실제로 3선 개헌 이후 김형욱은 경질되었고, 이후락은 주일대사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만섭은 이 일로 말미암아 이후락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7대 대선과 8대 총선을 앞두고 주일대사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한 이후락은 이만섭을 낙선시키기 위해 다양한 공작을 펼친다. 8대 총선을 앞두고 대구 중구 선거구민들에게만 유독 과중한 세금고지서가 발부되지 않나, 선거 이후로 옮겨가기로 한 버스터미널이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옮겨가지를 않나, 선거운동기간 내내 중구에만 교통단속이 강화되지 않나;; 오죽했으면 선거운동 중 한밤중에 구청장이 찾아와 "의원님 죄송합니다. 위에서 꼭 떨어뜨리라는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여당이지만 봐주지도 감싸주지도 말라고 합니다. 선거 당일 제가 대구에 없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미리 사과했을 정도였다. 결국 이만섭은 여당 공천으로 여당 텃밭에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 중구에서 신민당 한병채 후보에게 7천 여 표차로 밀리며 낙선하고 말았다.
8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에는 한동안 정치 낭인으로 지내야 했고, 10월 유신 이후 치러진 9대 총선에서도 민주공화당 공천심사에서 박찬 변호사에 밀려 탈락했다. 게다가 박정희가 사실상 임명하는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명단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 뒤 같은 대구 출신인 이효상 당시 공화당 의장의 배려로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상근부의장이라는 한직을 얻어 1978년까지 재임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다행히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아 대구 중구-서구-북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당시 부가가치세 도입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1979년 3월 국회 개원 때 여당 의원임에도 현 상황을 이야기하며 정부를 비판하였다. 이를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정희에게 악의적으로 보고하여 박정희가 이만섭을 민주공화당에서 제명시키려 하였다가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류혁인 정무수석비서관 등의 만류로 겨우 없던 일이 되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며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 출범한 뒤 실시된 정치규제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대구 중구-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원내에서 당을 대표하는 부총재로 활약하였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김종철이 한국국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나서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최치환을 누르고 한국국민당 총재에 당선되었다. 1987년 소속 국회의원들이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으로 대거 탈당하는 사태를 겪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야인으로 있다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1993년 재산 공개 파동으로 박준규가 국회의장직을 사퇴하자 잔여 국회의장 임기를 수행하였다.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1997년 8월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앞두고 신한국당 대표위원 서리에 임명되어 20일 동안 경선을 관리했다. 이회창의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선출에 반발한 이인제가 신한국당을 탈당하자 그를 따라 탈당했고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었다.[6] 1998년 국민신당이 새정치국민회의에 흡수되자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고, 1999년에는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으로 신당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3연속 여당에서만 전국구 의원이라는 나름의 진기록. 개원과 함께 제16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투표에 참여한 272명 중 140표를 얻어 132표를 받은 한나라당 서청원 의원[7] 을 단 8표차로 제치는 격전을 치렀다. 취임사에서 "나는 한 번은 여당을, 또 한 번은 야당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보고 양심의 의사봉을 친다."는 말을 남겼다. 2002년 3월 8일에는 국회의장의 중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뤄진 국회법 개정에 따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무당적 국회의장'''이 되었다.[8] 그 기간은 동년 5월 29일까지 3개월로 비교적 짧았으나,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의장 임기 중에 무당적 국회의장의 전례를 남기고 국회법으로 명문화 한 것은 엄연한 업적으로 남았다. 임기가 끝나자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하였으며, 2004년 8선을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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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4일 사망하였다. 향년 83세. 12월 18일 국회의사당에서 국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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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하던 군사정권과 3김시대에서 같이 활동했던 김대중, 김영삼 등과 비교해 인지도는 크지 않고, 한편으로는 여당 생활만 해 본 정치인으로 폄하되기도 하나 여당 안에서도 시류에 굴복하지 않고 소신에 따라 정권과 여당을 비판하는 데에 서슴없었던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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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두 번의 국회의장 재임 중 여러 차례 의장 직권상정-여당 단독 처리, 즉 날치기 압박을 많이 받았음에도 이를 거부하여 입법부의 수호자 노릇 역시 톡톡히 수행한 정치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2000년 자민련을 위한 교섭단체 완화 몰적의 국회법 개정안의 날치기 사회를 거부하고 사회권 이양도 거부한 것이다. 본인도 이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 듯 2001년에 출간한 저서의 제목을 <날치기는 없다>로 했을 정도.
의회주의자를 견지한만큼 보스주의 정치인 삼김정치에 아무래도 비판적이었으며, 특히 의회주의자를 자처하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후 국회에 각 3회/1회만 방문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전국구-소선거구 1위-낙선-낙천-중대선거구 2위(2회)-낙선-전국구 3회로 임기를 마쳤기에 유권자들의 정치적 의사와 무관하게 당선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여당 전국구만 4회이며(...) 야당으로 있을 때는 구 여당계 관제야당인 한국국민당의 총재였다. 다만 눈에 띄는 철새 행각을 벌이거나 본인이 자부하듯 여당의 거수기로 활동하지 않았던 점, 청렴했던 점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노무현 탄핵 정국 당시 날치기에 동조한 점은 의아한 점. (물론 이때는 엄연히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한 상태니 당론을 따른 것이 된다.) 실제로 열린우리당 해체 전에 이만섭은 모두까기 모드의 인터뷰를 하면서 노무현에게 국민적 신뢰를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정권 재창출을 위한 속임수 개편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정치자금 1/10 발언이나 대통령의 특정정당 지지발언 등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하며, "탄핵은 노 대통령이 자초한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박관용 국회의장의 경호권 발동은 문제라고 지적하는 모두까기 모드를 잊지 않았다. 물론 그 직후 정계은퇴 했기 때문에 큰 과오로 기억되지는 않았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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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모교 연세대에서 연희관(사회과학대학 소재)의 401호실을 '이만섭 홀'로 명명하여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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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얘기를 꺼낼 때, '''"입 바른 소리하는 훌륭한 사람인데 너무 일찍 죽어서 안타깝다"''' 고 털어놨다. 이만섭에게 김두한은 '재야 정치인 김두한' 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불량배 김두한' 이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로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꽤 났음에도[9] 친분이 깊었다고 한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119회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등장한다. 작중 당대 언론계의 큰어른인 최동열이 인정할 정도로 유능한 인재. 고대생 습격 사건 때도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국회의원이 된 모습으로 재등장해 김두한이 국회 오물 투척사건을 일으키기 전, 정부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해 분노하여 질의 연설을 하던 중이었고, 그 후 이어지는 김대중의 질의 연설이 끝나자, 그 다음에 차례였던 김두한이 연설을 하다가 갖고온 똥물을 뿌려버린다. 나중에는 장내가 아수라장이 되자 김대중, 박순천과 함께 당황하여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배우는 태조 왕건에서 왕식렴, 제국의 아침에서 왕욱을 맡은 정국진. 외모가 실제 이만섭의 젊은 시절과 상당히 닮았다.
이만섭의 회고록에 의하면 과거 1969년 의원 총회에서 3선 개헌에 관한 발언을 하며 3선 개헌에 앞서 구체적인 선행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조건을 늘어놓았는데 그 중에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비서실장의 퇴진이 들어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분노한 김형욱에 의해 암살당할뻔 했던 것을 김성곤 의원이 알아채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 사실을 알려 저지했다고 한다.
야구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마침 박용오 전 KBO 총재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국회의장 재임 당시 자신의 고향인 대구광역시에서 열린 2001년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를 맡기도 했다.
5. 소속 정당
6. 선거이력
7. 둘러보기
[1] 족보에는 첨사공파 34세손 기(基)자 항렬을 써서 흥기(興基)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만섭(萬燮)은 일명(一名)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2] 보명(譜名)은 이환상(李煥祥)이다.[3]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image][4] 김재규가 아낀 제자가 이만섭이라고 한다. [5] 부산 피난 시절, 공군사관학교 3기로 입교했다가 중퇴하기도 하였다.[6] 사실 이 행보는 이만섭 의원의 정치 이력 가운데 가장 신기한 행보인데, 의외로 문민정부 청와대와의 교감이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방금 전에 대표로 있던 사람이 탈당을 한다는 자체부터가 그렇고, 공천권이 없는 현실에서 이만섭 계파라는 것이 크지 않았기 때문. 사건 자체가 이회창 후보 측에서 김영삼 대통령 지우기를 실행하며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고 있었던 시즌이기도 하고. 이만섭 본인은 김영삼 이회창 양시양비와 삼김정치 청산론을 외치면서 반DJP 단일후보를 위해 탈당한다고 명분을 내세웠지만, 정작 뒤이은 행보는 반이회창을 위해 DJP와 연대하는 꼴이 되었다.[7] 지금도 8선의 보수계 최다선 현역 원로지만 이 시기에도 5선의 중진의원이었다.[8] 14대 전반기 박준규 의장도 잠시 무당적이었으나, 이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YS의 외압으로 탈당한 케이스였다.[9] 김두한은 1918년생으로 무려 14살이나 많다. [10] 새정치국민회의에 흡수 합당[11]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2] 대구 중구[13] 중대선거구로 전환되며 기존 중구에 서구와 북구 지역이 포함[14] 78년 경북 1선거구에서 북구 지역이 이탈[15] 상반기 국회의장[16] 1997.10.28: 신한국당 탈당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
(15대 대선 이인제 후보 지지)[17] 상반기 국회의장
(15대 대선 이인제 후보 지지)[17] 상반기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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