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호
李斗號
1943년 7월 5일 ~
대한민국의 만화가. 본관은 전의(全義).
대표작은 임꺽정, 머털도사, 바람소리,[1] 객주, 째마리, 덩더꿍, 바람처럼 번개처럼, 두손이 등이 있으며, ''''바지저고리 만화가''''로 손꼽힌다.
거칠어보이는 그림체로 유명한데, 코지마 고세키와 시라토 산페이의 영향을 받았다.[2][3] 70년대 초는 치바 테츠야의 영향이 강하고[4] 80년대 초는 시라토 산페이 + 코지마 고세키의 영향이 강하며 80년대 후반 이후 거기다 서양식 화풍 + 우리나라의 부드러운 선/굵은 선/간결한 선/소재를 더하여 본인의 화풍을 형성한다. 서양화를 했지만 동양화식 그림도 잘 그렸다.
1943년 7월 5일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5] 에서 태어났다.# 8살 되던 1950년, 고향의 다산국민학교에 입학했으나 그 해 발발한 6.25 전쟁으로 가족들을 따라 대구시로 피난을 와야 했고, 피난지인 대구에서 남산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복명국민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했다. 이어 오성중학교와 영남고등학교를 차례로 졸업했다.
남산국민학교 4학년 때, 교내 사생대회에서 1등을 했고 이를 계기로 미술선생을 만나게 되어 강습을 받았다. 오성중학교 때는 야간부에 다니면서 낮에는 남산국민학교 시절 미술선생이 차린 화실로 가 그림공부를 했다. 몇몇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받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고 있는 사람의 눈에 띄어 만화책을 내게 되었으며, 3학년 때는 매일신문 신춘만화 공모에 뽑히기도 했다.
이후 영남고등학교 야간부에 진학하여 미술 공부를 계속한 뒤 더 넓은 곳에서 화가로서의 꿈을 펴보겠다는 생각에 1964년, 서울에 있는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집에서 등록금을 보내줘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으나, 2학년을 앞두고는 학비를 도저히 마련할 길이 없어 입대해 버렸다. 1968년 군 제대 후에도 당장 복학하기가 어려워 구두닦이와 행상 등으로 학비를 어렵게 마련했으나 복학 시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퇴를 택해야 했다.#
인터뷰에 의하면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다니다가 2학년 때 중퇴했다고 한다. 한때 중퇴라고 안 밝히고 슬그머니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출신이라고 넘겼으나 2000년대 초반에 유명인사 학력위조가 연달아 밝혀지며 파장이 커지자 중퇴 사실을 밝혔다.
원래 만화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으며 만화가라는 직업 자체를 환쟁이라고 낮잡아 봤다.[6]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일본 만화를 베껴 그리는 번안 만화가가 된다. 당시엔 저작권 개념도 전무했고, 외국문화상품이 거의 정식 수입되지 못하는 '문화쇄국주의'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작 만화를 그대로 복제해서 팔면 작품에서 드러나는 왜색 때문에 검열에 걸린다.[7] 그래서 배경이나 인물을 한국인으로 고쳐서 고대로 베껴 그린다.[8] 물론 작화수준은 일본 원작보다 훨씬 조악해진다.[9]
본격적으로 만화가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69년 소년중앙에서 '투명인간'을 연재하면서부터였다. 꿈은 화가였지만 밥벌이의 일환으로 만화계에 입문한 상황이다 보니 상술했다시피 데뷔 초부터 스스로가 만화가라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다고 한다. 게다가 만화가란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안좋았던 때라 자격지심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술자리에서 동창이 '너 요즘 돈 잘 번다면서?' 라고 하자 술김에 "그래, 나 만화 그린다, 어쩔래?"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술자리의 친구들은 벙쪘다고.
1969년 소년중앙이 나오면서 일거리가 늘었다. 당시 유명 소설이나 영화를 만화화 하거나, 상술했듯이 일본 만화를 수입해서 그걸 현지화(표절?) 시키는 게 유행했는데 이두호는 일본 만화를 우리식으로 번안하여 그리는 능력이 뛰어났던지라 만화출판사들이 '이두호만 있어도 만화 잡지 한 권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고[10] .
이후 스스로 만화가라는 자각과 자부심도 없는데다가 화가라는 꿈을 버릴 수 없었던 상태에서 만화를 계속 그리는 것은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결국 70년대 말~80년대 초 같이 화실을 쓰던 동료작가 한희작에게 2년간 '대필'을 해줄 것은 부탁했다고 한다. 전면 대필은 아니고 스토리와 중요한 인물 얼굴은 이두호 본인이 하기는 했지만 사실 상 그 2년간은 '만화를 놓은' 시기였다. 그 2 여년간 소원대로 유화를 맘껏 그렸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고 결국 생계를 위해서 다시 만화를 그린다.
여담으로, 그 2년 동안 자기가 그린 유화 작품 중에 거대한 캔버스에 가시철조망만 빼곡히 그린 걸 가장 자랑스러워한다고 전한다. 이곳저곳에서, 특히 후배 만화가들에게 은근 자랑스럽게 아직도 "그건 내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다, 는 상징을 담은 그림이었다" 라고 설명하곤 한다고. 하지만 그정도 상징과 표현이라면 화가로 나서기에는 턱도 없는 역량이다. 이미 약간 앞선 시기의 피카소, 잭슨 폴락, 마르셀 뒤샹 같은 네임드의 표현 수준과 비교해볼 것도 없다. 웬만한 화가 습작생에게도 안 먹힐 자랑이다. 쉽게 말하면, 지도를 그리라니까 괴발새발 약도를 그리는 수준. 80년대 초반이면 백남준이 1984년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비디오아트 작품으로 세계최초 위성생방송과 인터랙티브 공연을 선보인 때다. 어줍잖은 사물 한두 가지 붓질해놓고 거창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시대는 지나간 셈. [11]
만화가로서의 자격지심과 화가로서의 자부심 때문에라도 성인물 같은 건 가급적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단다. 그러나, 성인대상 사극은 주간지에 연재한 게 많다.[12] 다만 윤승운[13] 같은 경우도 이렇게 알려졌지만 적어도 윤승운은 자부심이니 뭐니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그의 역사 만화가 보여주는 특징으로는 시각 이미지의 총체성이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작품에 재현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박물관이나 민속촌 등 자료로 삼을 만한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현장 답사를 하는 한편 사진자료도 스크랩해 모아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특히 사진촬영이 금지된 박물관에서는 스케치를 주로 했다. 이는 <객주>, <이두호의 한국사 수업>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상술했다시피, 표절과 저작권 침해로 가득한 경력이 비판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백'이나 '한국 만화의 거장'이란 타이틀을 얼렁뚱땅 챙겨버린 점 때문에 진짜 문화계를 아는 사람들의 복창이 터져나가고 있다. 요즘 세대는 이두호를 전혀 모르긴 하지만 문제는 '거장'[14] 이 함부로 남용되면 문화계 전체 수준 자체가 함몰된다는 점. 물론 그림 솜씨만으로 보자면 거장이라 하여도 별 무리가 없긴 하다. 후기의 머털도사 같은 데서는 그림체가 간략화되어 잘 알수 없지만, 초창기의 소년중앙 연재 소설 영규대사 등의 삽화나, (비록 베껴 그렸지만) 여러 초창기 만화들의 그림만큼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실력파가 맞다. 영화를 극화로 다시 그린 벤허 같은 경우는 그림 연출이나 필력이 지금 보아도 대단하다.
한 가지만 조금 기술해보자면, 데뷔 초기의 타이거 마스크의 표절작이 있다[15] . 후배만화가 박무직이 대표적인 비판자다. 표절은 100% 순금 순도로 맞다. 이두호 본인도 표절은 인정하면서도 "그땐 너도나도 그런 시기였다."라는 반성과 참회는 없었다. 물론 당시엔 일본의 문화가 잘 안 알려졌기에 Y세대 제갈공두나 태권V등 많은 표절작들이 있었기에 저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그렇지만 표절행위가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지내면서 상당히 교수빨을 받은 지라, 20~30대 일부 생각없는 학생들이 뭣도 모르고 "우리 선생님이 그땐 다들 베꼈댔어요. 버르장머리 없게시리, 어르신 화백님 용안 앞에서!" 투로 언동하고 표절 과거마저 합리화하며 지지하기도 했다. 표절을 신랄하게 지적·비판했던 박무직도 십자포화에 노출된 끝에 만신창이가 되어[16] 일본 만화판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박무직은 일본에서 자신이 비난하던 한국만화계 병폐인 문하생 착취[17] 를 그대로 따라하는 통에 당시 이두호를 옹호하던 사람들에게 결국 박무직도 내로남불이나 하니 선배들을 비난할 자격이 못됐다고 비난받고 있으며 박무직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비판으로 나왔다.
70년대 소년중앙에서는 내일의 죠를 도전자 허리케인이라는 이름으로 베껴 그렸고, TBC TV 에서 방송하던 6백만불의 사나이를 외전으로 그리기도 했다.[18] 내용은 당시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들끓던 동명 제목의 미드와는 무관하다. 내용은 무관하면서 설정은 멋대로 스토리에 차용했다(드라마의 무기 개발 박사가 한국인 여자 얄숙이-당시 이두호의 만화 캐릭터-를 입양했다는 둥...). 결국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클로버문고(?) 단행본은 '''얄숙이와 오스틴 대령'''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19]
또한 원더우먼도 월간 잡지에 연재했다. 당시 한국에서 방영되고 있던 실사 드라마 원더우먼의 인기에 편승한 해적판 만화였다(...). 그밖에 미국 드라마 뿌리나 영화 벤허를 만화로 그렸던 바 있다(....). 이처럼 장르가 다른 것을 만화로 바꾼 것은 창작으로 넣는다 해도 이것도 결국은 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반일적 내용이 들어가면서 때론 거슬리는 민족주의 설정이나 의견도 많다. 장독대가 주인공이던 소년중앙 연재만화에선 일본인의 검술을 두고 네놈들 일본 검술은 모두 우리 것이라고 꾸짖는 개드립이 나온다. 일본에서 맞서 싸우자면서 무리한 일본 것이 닥치고 한국 것이라는 설정이 지금 보자면 환빠같은 시각이라고 비아냥받을 게 많다.
당시 문화예술계 전반에서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의 선진 문물을 우리식으로 차용해 재제작하는 것도 하나의 작업 방식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만화의 경우 다른 것들 보다 쉽게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많이 이용했다. 예를 들어 소설 같은 것들을 만화로 만들었고 영화를 수입한 회사가 아예 이걸 만화로 그려달라고 하기도 했다. 일종의 홍보 및 전파제 역할을 한 셈이다. 또한 성인층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아동용으로 바꿀 때도 즐겨 써먹었다.
당시 출판사는 파워가 컸기 때문에 만화가가 말 안들으면 바로 만화계에서 퇴출이었다. 그려라 하면 그려야 하는 때였다. 타이거마스크의 경우 하기 싫다고 뻗대다가 결국 그리긴 했는데 이름은 안싣는 조건으로 그렸지만 이름을 기재 안하면 출판 등록이 안되는지라 출판사에서 마음대로 이두호 이름을 실었다고 한다. 자꾸 이래놓고 돈받았다 뭐다 욕하지만 그 시절, 만화가에게 주던 돈은 형편없었다는 것이나 기억하자. 70년대 , 길게 말할 거 없이 합동출판사를 보면 안다. 무협만화로 유명한 이재학 화백이 여기서 억지로 일본 순정만화를 베껴 그리게 강압하여 먹고 살고자 어거지로 그려야했던 것이라든지, 이희재 화백처럼 회장이 정해 준 필명을 거부하다 쫓겨나는 등, 이런 거 못그린다고 하면 만화계를 떠나야 하던 시대이다. 이런 표절을 억지로 강요하고 마지못해 그려도 주던 돈만 해도 아주 형편없어서 합동에서 이런 표절 만화가 생활을 하던 김수정이 분노하여 그만두고 잠깐 세일즈맨 생활을 했는데 만화책 1권을 그려 받던 돈의 4배는 이 세일즈맨 기본급으로 줬다고 할 정도였다.
더불어 이두호 말고도 위에 서술한대로 만화계에서 과거 표절에 대하여 입다무는 것도 문제이다. 장태산만 해도 비록 80년대 중순 연재작이라고 해도 매드 맥스를 고대로 베낀(주인공 옷차림이나 여러가지로 트레이싱 가까울 정도로!) 가디언 엔젤 2088을 90년대에까지 재연재했다. 그쯤되면 비디오나 지상파로 이 영화를 봐서 어느 걸 베꼈는지 많이 알게된 시절임에도. 이전 글에서 나오듯이 이두호와 비교된다며 나오던 김형배는 태권브이 표절에 대하여 후회한다는 거였지, 정작 그도 바벨 2세를 베껴 그린 바벨 3세라든지 닥터 후라든지 인디아나 존스를 그대로 베껴 만화로 연재하고 책까지 내던 것에 대해선 입다물고 언급도 하지 않았었다.
다 같이 문제이니 이두호를 뭐라고 하지말자가 아니라, 이 시대를 겪으면서 이런 표절 논란에서 그리 언급되지 않은 만화가 최신오는 90년대 새벗이라는 잡지에서 만화계 이야기를 언급하다가 '''"그 시대, 표절을 언급하면 다른 만화가에게도 왜 그런 걸 거론하냐며 옹호하고 되려 언급한 만화가가 뭐 잘났냐며 비난받기 일쑤라서 입다물어야죠..."'''라고 이런 만화계의 풍토에 대하여 씁쓸한 감정을 내비쳤다. 최신오가 겪은 이야기로 70년대 일본으로 사업나간 지인을 통해 일본만화책 여러권을 사서 소장해 일본어는 몰라도 그림체를 보며 참고하곤 했는데 한 선배만화가(지금도 유명한 만화가라고만 언급)가 그 책들을 빌려갔다.그리고 얼마뒤에 연재하던 그의 작품에 이 일본만화에 나오던 배경이나 디자인이 그대로 베껴 그려져 연재한 걸 보고 아연실색하였지만 그때는 뭐라고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이두호나 한국만화계의 어둡던 표절에 대하여 만화가들부터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시대의 초상이라고 봐야겠다.
이현세, 허영만 등과 같이 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 당시 애를 먹었다. 음대협의 고발로 같이 구속된 동료 스포츠신문 만화가들과 함께 검찰에 기소유예되어 "신문연재 만화를 청소년에 유해하지 않게 그리겠다"는 서약서를 요구받은 그는 법을 안 바꾸면 만화를 안 그리겠다며 절필을 선언했고 ‘만화 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지내며 그해 민가협에서 주최한 양심수 석방 캠페인 '하루감옥체험'에서 원수연, 장태산 등 동료 만화가와 함께 참가했고, 1998~2000년까지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1997~2000년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윤리위원을 맡아 한국만화의 표현수위를 확장하기 위한 활동에 매진했다. 2003년 기나긴 공방 끝에 승소를 했다. 당시 청소년 보호법 만화계 상황
게다가 만화를 천대했던 1980~90년대의 시대적/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별다른 선정성 시비 없이 1988년에 '어머니들이 뽑은 좋은 만화'로 선정된 것에 이어 1989년 서울 YMCA 우수만화작가 선정[20] , 1993년에 서울 YWCA에서 <두손이>로 우수어린이만화작가상을 수상받았고, 이후 1995년에 문체부로부터 <임꺽정>으로 한국만화문화상 저작상, 2004년 코믹어워드 대상, 2006년 고바우만화상, 2007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4년부터 3년간 부천만화정보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무식하면 용감하다(2006)>가 있다.
1943년 7월 5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만화가. 본관은 전의(全義).
대표작은 임꺽정, 머털도사, 바람소리,[1] 객주, 째마리, 덩더꿍, 바람처럼 번개처럼, 두손이 등이 있으며, ''''바지저고리 만화가''''로 손꼽힌다.
거칠어보이는 그림체로 유명한데, 코지마 고세키와 시라토 산페이의 영향을 받았다.[2][3] 70년대 초는 치바 테츠야의 영향이 강하고[4] 80년대 초는 시라토 산페이 + 코지마 고세키의 영향이 강하며 80년대 후반 이후 거기다 서양식 화풍 + 우리나라의 부드러운 선/굵은 선/간결한 선/소재를 더하여 본인의 화풍을 형성한다. 서양화를 했지만 동양화식 그림도 잘 그렸다.
2. 생애
1943년 7월 5일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5] 에서 태어났다.# 8살 되던 1950년, 고향의 다산국민학교에 입학했으나 그 해 발발한 6.25 전쟁으로 가족들을 따라 대구시로 피난을 와야 했고, 피난지인 대구에서 남산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복명국민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했다. 이어 오성중학교와 영남고등학교를 차례로 졸업했다.
남산국민학교 4학년 때, 교내 사생대회에서 1등을 했고 이를 계기로 미술선생을 만나게 되어 강습을 받았다. 오성중학교 때는 야간부에 다니면서 낮에는 남산국민학교 시절 미술선생이 차린 화실로 가 그림공부를 했다. 몇몇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받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고 있는 사람의 눈에 띄어 만화책을 내게 되었으며, 3학년 때는 매일신문 신춘만화 공모에 뽑히기도 했다.
이후 영남고등학교 야간부에 진학하여 미술 공부를 계속한 뒤 더 넓은 곳에서 화가로서의 꿈을 펴보겠다는 생각에 1964년, 서울에 있는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집에서 등록금을 보내줘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으나, 2학년을 앞두고는 학비를 도저히 마련할 길이 없어 입대해 버렸다. 1968년 군 제대 후에도 당장 복학하기가 어려워 구두닦이와 행상 등으로 학비를 어렵게 마련했으나 복학 시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퇴를 택해야 했다.#
인터뷰에 의하면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다니다가 2학년 때 중퇴했다고 한다. 한때 중퇴라고 안 밝히고 슬그머니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출신이라고 넘겼으나 2000년대 초반에 유명인사 학력위조가 연달아 밝혀지며 파장이 커지자 중퇴 사실을 밝혔다.
원래 만화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으며 만화가라는 직업 자체를 환쟁이라고 낮잡아 봤다.[6]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일본 만화를 베껴 그리는 번안 만화가가 된다. 당시엔 저작권 개념도 전무했고, 외국문화상품이 거의 정식 수입되지 못하는 '문화쇄국주의'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작 만화를 그대로 복제해서 팔면 작품에서 드러나는 왜색 때문에 검열에 걸린다.[7] 그래서 배경이나 인물을 한국인으로 고쳐서 고대로 베껴 그린다.[8] 물론 작화수준은 일본 원작보다 훨씬 조악해진다.[9]
본격적으로 만화가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69년 소년중앙에서 '투명인간'을 연재하면서부터였다. 꿈은 화가였지만 밥벌이의 일환으로 만화계에 입문한 상황이다 보니 상술했다시피 데뷔 초부터 스스로가 만화가라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다고 한다. 게다가 만화가란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안좋았던 때라 자격지심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술자리에서 동창이 '너 요즘 돈 잘 번다면서?' 라고 하자 술김에 "그래, 나 만화 그린다, 어쩔래?"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술자리의 친구들은 벙쪘다고.
1969년 소년중앙이 나오면서 일거리가 늘었다. 당시 유명 소설이나 영화를 만화화 하거나, 상술했듯이 일본 만화를 수입해서 그걸 현지화(표절?) 시키는 게 유행했는데 이두호는 일본 만화를 우리식으로 번안하여 그리는 능력이 뛰어났던지라 만화출판사들이 '이두호만 있어도 만화 잡지 한 권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고[10] .
이후 스스로 만화가라는 자각과 자부심도 없는데다가 화가라는 꿈을 버릴 수 없었던 상태에서 만화를 계속 그리는 것은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결국 70년대 말~80년대 초 같이 화실을 쓰던 동료작가 한희작에게 2년간 '대필'을 해줄 것은 부탁했다고 한다. 전면 대필은 아니고 스토리와 중요한 인물 얼굴은 이두호 본인이 하기는 했지만 사실 상 그 2년간은 '만화를 놓은' 시기였다. 그 2 여년간 소원대로 유화를 맘껏 그렸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고 결국 생계를 위해서 다시 만화를 그린다.
여담으로, 그 2년 동안 자기가 그린 유화 작품 중에 거대한 캔버스에 가시철조망만 빼곡히 그린 걸 가장 자랑스러워한다고 전한다. 이곳저곳에서, 특히 후배 만화가들에게 은근 자랑스럽게 아직도 "그건 내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다, 는 상징을 담은 그림이었다" 라고 설명하곤 한다고. 하지만 그정도 상징과 표현이라면 화가로 나서기에는 턱도 없는 역량이다. 이미 약간 앞선 시기의 피카소, 잭슨 폴락, 마르셀 뒤샹 같은 네임드의 표현 수준과 비교해볼 것도 없다. 웬만한 화가 습작생에게도 안 먹힐 자랑이다. 쉽게 말하면, 지도를 그리라니까 괴발새발 약도를 그리는 수준. 80년대 초반이면 백남준이 1984년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비디오아트 작품으로 세계최초 위성생방송과 인터랙티브 공연을 선보인 때다. 어줍잖은 사물 한두 가지 붓질해놓고 거창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시대는 지나간 셈. [11]
만화가로서의 자격지심과 화가로서의 자부심 때문에라도 성인물 같은 건 가급적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단다. 그러나, 성인대상 사극은 주간지에 연재한 게 많다.[12] 다만 윤승운[13] 같은 경우도 이렇게 알려졌지만 적어도 윤승운은 자부심이니 뭐니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그의 역사 만화가 보여주는 특징으로는 시각 이미지의 총체성이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작품에 재현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박물관이나 민속촌 등 자료로 삼을 만한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현장 답사를 하는 한편 사진자료도 스크랩해 모아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특히 사진촬영이 금지된 박물관에서는 스케치를 주로 했다. 이는 <객주>, <이두호의 한국사 수업>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3. 비판
3.1. 표절
상술했다시피, 표절과 저작권 침해로 가득한 경력이 비판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백'이나 '한국 만화의 거장'이란 타이틀을 얼렁뚱땅 챙겨버린 점 때문에 진짜 문화계를 아는 사람들의 복창이 터져나가고 있다. 요즘 세대는 이두호를 전혀 모르긴 하지만 문제는 '거장'[14] 이 함부로 남용되면 문화계 전체 수준 자체가 함몰된다는 점. 물론 그림 솜씨만으로 보자면 거장이라 하여도 별 무리가 없긴 하다. 후기의 머털도사 같은 데서는 그림체가 간략화되어 잘 알수 없지만, 초창기의 소년중앙 연재 소설 영규대사 등의 삽화나, (비록 베껴 그렸지만) 여러 초창기 만화들의 그림만큼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실력파가 맞다. 영화를 극화로 다시 그린 벤허 같은 경우는 그림 연출이나 필력이 지금 보아도 대단하다.
한 가지만 조금 기술해보자면, 데뷔 초기의 타이거 마스크의 표절작이 있다[15] . 후배만화가 박무직이 대표적인 비판자다. 표절은 100% 순금 순도로 맞다. 이두호 본인도 표절은 인정하면서도 "그땐 너도나도 그런 시기였다."라는 반성과 참회는 없었다. 물론 당시엔 일본의 문화가 잘 안 알려졌기에 Y세대 제갈공두나 태권V등 많은 표절작들이 있었기에 저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그렇지만 표절행위가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지내면서 상당히 교수빨을 받은 지라, 20~30대 일부 생각없는 학생들이 뭣도 모르고 "우리 선생님이 그땐 다들 베꼈댔어요. 버르장머리 없게시리, 어르신 화백님 용안 앞에서!" 투로 언동하고 표절 과거마저 합리화하며 지지하기도 했다. 표절을 신랄하게 지적·비판했던 박무직도 십자포화에 노출된 끝에 만신창이가 되어[16] 일본 만화판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박무직은 일본에서 자신이 비난하던 한국만화계 병폐인 문하생 착취[17] 를 그대로 따라하는 통에 당시 이두호를 옹호하던 사람들에게 결국 박무직도 내로남불이나 하니 선배들을 비난할 자격이 못됐다고 비난받고 있으며 박무직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비판으로 나왔다.
70년대 소년중앙에서는 내일의 죠를 도전자 허리케인이라는 이름으로 베껴 그렸고, TBC TV 에서 방송하던 6백만불의 사나이를 외전으로 그리기도 했다.[18] 내용은 당시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들끓던 동명 제목의 미드와는 무관하다. 내용은 무관하면서 설정은 멋대로 스토리에 차용했다(드라마의 무기 개발 박사가 한국인 여자 얄숙이-당시 이두호의 만화 캐릭터-를 입양했다는 둥...). 결국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클로버문고(?) 단행본은 '''얄숙이와 오스틴 대령'''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19]
또한 원더우먼도 월간 잡지에 연재했다. 당시 한국에서 방영되고 있던 실사 드라마 원더우먼의 인기에 편승한 해적판 만화였다(...). 그밖에 미국 드라마 뿌리나 영화 벤허를 만화로 그렸던 바 있다(....). 이처럼 장르가 다른 것을 만화로 바꾼 것은 창작으로 넣는다 해도 이것도 결국은 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3.2. 민족주의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반일적 내용이 들어가면서 때론 거슬리는 민족주의 설정이나 의견도 많다. 장독대가 주인공이던 소년중앙 연재만화에선 일본인의 검술을 두고 네놈들 일본 검술은 모두 우리 것이라고 꾸짖는 개드립이 나온다. 일본에서 맞서 싸우자면서 무리한 일본 것이 닥치고 한국 것이라는 설정이 지금 보자면 환빠같은 시각이라고 비아냥받을 게 많다.
4. 반론
당시 문화예술계 전반에서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의 선진 문물을 우리식으로 차용해 재제작하는 것도 하나의 작업 방식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만화의 경우 다른 것들 보다 쉽게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많이 이용했다. 예를 들어 소설 같은 것들을 만화로 만들었고 영화를 수입한 회사가 아예 이걸 만화로 그려달라고 하기도 했다. 일종의 홍보 및 전파제 역할을 한 셈이다. 또한 성인층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아동용으로 바꿀 때도 즐겨 써먹었다.
당시 출판사는 파워가 컸기 때문에 만화가가 말 안들으면 바로 만화계에서 퇴출이었다. 그려라 하면 그려야 하는 때였다. 타이거마스크의 경우 하기 싫다고 뻗대다가 결국 그리긴 했는데 이름은 안싣는 조건으로 그렸지만 이름을 기재 안하면 출판 등록이 안되는지라 출판사에서 마음대로 이두호 이름을 실었다고 한다. 자꾸 이래놓고 돈받았다 뭐다 욕하지만 그 시절, 만화가에게 주던 돈은 형편없었다는 것이나 기억하자. 70년대 , 길게 말할 거 없이 합동출판사를 보면 안다. 무협만화로 유명한 이재학 화백이 여기서 억지로 일본 순정만화를 베껴 그리게 강압하여 먹고 살고자 어거지로 그려야했던 것이라든지, 이희재 화백처럼 회장이 정해 준 필명을 거부하다 쫓겨나는 등, 이런 거 못그린다고 하면 만화계를 떠나야 하던 시대이다. 이런 표절을 억지로 강요하고 마지못해 그려도 주던 돈만 해도 아주 형편없어서 합동에서 이런 표절 만화가 생활을 하던 김수정이 분노하여 그만두고 잠깐 세일즈맨 생활을 했는데 만화책 1권을 그려 받던 돈의 4배는 이 세일즈맨 기본급으로 줬다고 할 정도였다.
더불어 이두호 말고도 위에 서술한대로 만화계에서 과거 표절에 대하여 입다무는 것도 문제이다. 장태산만 해도 비록 80년대 중순 연재작이라고 해도 매드 맥스를 고대로 베낀(주인공 옷차림이나 여러가지로 트레이싱 가까울 정도로!) 가디언 엔젤 2088을 90년대에까지 재연재했다. 그쯤되면 비디오나 지상파로 이 영화를 봐서 어느 걸 베꼈는지 많이 알게된 시절임에도. 이전 글에서 나오듯이 이두호와 비교된다며 나오던 김형배는 태권브이 표절에 대하여 후회한다는 거였지, 정작 그도 바벨 2세를 베껴 그린 바벨 3세라든지 닥터 후라든지 인디아나 존스를 그대로 베껴 만화로 연재하고 책까지 내던 것에 대해선 입다물고 언급도 하지 않았었다.
다 같이 문제이니 이두호를 뭐라고 하지말자가 아니라, 이 시대를 겪으면서 이런 표절 논란에서 그리 언급되지 않은 만화가 최신오는 90년대 새벗이라는 잡지에서 만화계 이야기를 언급하다가 '''"그 시대, 표절을 언급하면 다른 만화가에게도 왜 그런 걸 거론하냐며 옹호하고 되려 언급한 만화가가 뭐 잘났냐며 비난받기 일쑤라서 입다물어야죠..."'''라고 이런 만화계의 풍토에 대하여 씁쓸한 감정을 내비쳤다. 최신오가 겪은 이야기로 70년대 일본으로 사업나간 지인을 통해 일본만화책 여러권을 사서 소장해 일본어는 몰라도 그림체를 보며 참고하곤 했는데 한 선배만화가(지금도 유명한 만화가라고만 언급)가 그 책들을 빌려갔다.그리고 얼마뒤에 연재하던 그의 작품에 이 일본만화에 나오던 배경이나 디자인이 그대로 베껴 그려져 연재한 걸 보고 아연실색하였지만 그때는 뭐라고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이두호나 한국만화계의 어둡던 표절에 대하여 만화가들부터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시대의 초상이라고 봐야겠다.
5. 기타
이현세, 허영만 등과 같이 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 당시 애를 먹었다. 음대협의 고발로 같이 구속된 동료 스포츠신문 만화가들과 함께 검찰에 기소유예되어 "신문연재 만화를 청소년에 유해하지 않게 그리겠다"는 서약서를 요구받은 그는 법을 안 바꾸면 만화를 안 그리겠다며 절필을 선언했고 ‘만화 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지내며 그해 민가협에서 주최한 양심수 석방 캠페인 '하루감옥체험'에서 원수연, 장태산 등 동료 만화가와 함께 참가했고, 1998~2000년까지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1997~2000년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윤리위원을 맡아 한국만화의 표현수위를 확장하기 위한 활동에 매진했다. 2003년 기나긴 공방 끝에 승소를 했다. 당시 청소년 보호법 만화계 상황
게다가 만화를 천대했던 1980~90년대의 시대적/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별다른 선정성 시비 없이 1988년에 '어머니들이 뽑은 좋은 만화'로 선정된 것에 이어 1989년 서울 YMCA 우수만화작가 선정[20] , 1993년에 서울 YWCA에서 <두손이>로 우수어린이만화작가상을 수상받았고, 이후 1995년에 문체부로부터 <임꺽정>으로 한국만화문화상 저작상, 2004년 코믹어워드 대상, 2006년 고바우만화상, 2007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4년부터 3년간 부천만화정보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무식하면 용감하다(2006)>가 있다.
6. 관련 문서
[1] Mr.블루 연재작.[2] 시라토 산페이의 작품을 좋아했고. 개인적으로 번역까지 해서 읽고 이걸 한국적으로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출처[3] 코지마 고세키는 시라토 산페이의 어시스턴트로 일한 적이 있지만 극화체를 개척한 선구자고, 시라토 산페이는 일본 만화계에서 극화 붐이 일자 극화체로 화풍을 바꾼다.[4] 축구소년 까목이 등 초기작의 캐릭터가 치바 데츠야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다. 예를 들자면 주인공의 뾰족한 코...그런데 이건 내일의 죠를 장기간 베껴 그린 이후 일이기 때문일지도. 그 이전 작풍은 그렇지 않았다.[5] 전의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영로도 이 마을 출신이다.[6] 그만의 인식이 아니라 당시 사회 전반적 인식이다. 실은 일반인 인식은 화가, 디자이너까지 몽땅 딴따라와 고급인 천한 환쟁이에 들어갔었다. 만화가는 그런 환장이들 사이에서도 지위가 더 낮았던 것.[7] 저작권은 아무 문제가 안 되었다. 국내에 법이 없었고 국제저작권협회 가입 같은 것도 안 되어 있었기 때문. 요즘 중국을 생각하면 된다.[8] 그래서 왜색이 드러나지 않는 유럽 역사물이나 SF물 같은 것은 제철이 반대라 원고를 뒤집고 대사 식자만 다시 해서 그대로 버젓이 연재, 출판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벨 2세.[9] 다만 이두호는 그 점에서는 예외에 속했다. 그림 솜씨가 원작자 못지 않거나 더 잘 그릴 정도였으니. 덕분에 인기 작가가 된 것이기도 하다.[10] 칭찬 아닌 칭찬... 그 만화 잡지 한 권이 데즈카 오사무처럼 순수창작이었다면 지금 '대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겠지만... [11] 반론 유행이나 시대 조류에 안맞느다고 해서 특정 사조가 완전히 가치를 잃진 않는다. 그저 안팔리는 경우가 생길 뿐. 당장 전국에 그림 전시하는 아무 갤러리에나 한번 들어가봐도 작가가 아예 추상(비구상) 쪽으로 파고드는 경우가 아닌 한 풍경화나 정물화 쯤은 있다. 일례로 로커빌리가 한물 간 음악 형식이라해서 락 타이거즈를 가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게다가 비구상 쪽을 판다 해도 저 이두호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 그들은 화가가 아니란 말인가? 이건 뭐 미슐랭 식당 리뷰나 읽어본 스노브가 경양식집 사장한테 니들은 요리사도 아니다 이러는 것도 아니고...게다가 원론적으로 보자면 이두호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만화도 엄연한 예술이다. 비구상에 약한 면을 보였을 수는 있지만 이두호의 기본 데생 능력이나 필력은 미술대학 회화과 나온 전공자 수준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 않다. 홍대 미대 회화과는 그 때나 지금이나 국내 1위, 아무나 들어갈수 있는데가 아니다. 물론 당시는 지금보다야 경쟁율이 낮긴 했으나, 입학한 것만으로도 실력 검증은 된 것.[12] 70~80년대 주간지는 지금 보면 19금이 아니라 포르노물이라고 할 정도로 실린 소설, 만화 작품의 성적 묘사 수위가 높았다. 당시 박정희나 전두환 때 3S 덕을 본 것이다.[13] 항목에도 나오듯이 성인물을 안 그렸다고 알려졌으나, 그도 성인 사극물을 그린 바 있다.[14] 한국만화판에서 누군가한테 꼭 거장이란 타이틀을 줘야겠다면, 소양있는 문화예술 관계자들은 차라리 '고우영'을 꼽는다. 이두호 또래이면서 활동한 시기도 겹친다. 고우영은 화풍부터가 18세기 김홍도까지 한국 만화 원류를 끌어올릴 만한 인물이다. 또, 표절이나 무단도용이 일절 없고 차라리 중국 사대기서나 한국 고전을 만화화했다. 또 영화 연출도 한 적 있으므로 오늘날 말하는 머천다이즈(콩글리시로 OSMU)까지 아우른 인물인 셈. 작품도 한국어 자체의 언어 유희와 한국 문화 특유의 해학미를 잘 살렸다. 하지만 중국 태생이란 점(오늘날로 치면 중국동포 aka 조선족) 그리고 문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작품 활동만 전념한 탓(?)에 이두호가 '거장'이란 타이틀을 챙기는 동안 철저히 잊혔다.[15] 사실 표절보다 정도가 심해서 그냥 베꼈다는 게 올바른 표현...[16] 하지만 박무직도 잘난 게 아닌게 무턱대고 표절한다고 비난하며 이두호를 주로 거론했다는 점. 박무직이 존경했다는 황미나도 마지못해 이런 표절만화를 그려야 했다든지, 까고 보면 줄줄이 나옴에도 이런 건 거론하지 않아서 정작 지가 존경하는 선배는 덮어버리고 거론도 안하는 이중논리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황미나의 표절은 극초기 대본소용 단편 한두 편 뿐이지 이두호처럼 대량 장기간 연재한 것도 아니라서 그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17] 문하생들에게 돈도 제대로 안주고 그냥 대충 밥먹여주고 잠재워주고 그림이나 배운다는 투로 버티는 게 수두룩했다! 심지어 문하생을 집안일 청소를 시키거나 아주 머슴처럼 부려먹는 것도 흔했다. 만화가 고행석이 이런 문하생 생활을 겪다가 욕하면서 나와버렸고 수소문 끝에 당시 드물게 돈도 꼬박꼬박주고 일을 다하고 나면 자유시간을 인정하여 평판이 좋던 선배만화가 박기준에게 갔는데 경쟁률이 장난아니라서 어렵사리 들어가 그의 곁에서 문하생 생활을 잘 지냈고 이후로도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때론 문하생이 그린 그림이나 줄거리를 억지로 빼앗아 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는데(리니지로 유명한 신일숙이 문하생 시절에 이런 피해를 당했다.) 박무직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이러한 병폐가 박무직 화실에서 그대로 나왔기에 박무직이 두고두고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내로남불이라느니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느니...[18] 이건 이두호 화백 문제보다는 소년중앙 편집부의 의도였다. 당시 6백만불의 사나이를 방영한 TBC와 중앙일보가 한 집안이었으니, 프로그램 홍보 의도로 소년중앙에 여러 번 특집 기사를 실었고, 부록으로 육백만불 사나이의 컷신을 수첩형으로 엮어서 페이지를 넘기면 움직이도록 만든 것까지 같이 주기도 했다.[19] 저작권 문제라고 볼수는 없는 것이, 당시 한국은 세계저작권협약 및 베른협약 가입 전인데다 새소년 클로버 문고 자체가 국내 것은 거의 없고 일본 소년 잡지의 것을 번역하거나 새로 그리거나 베낀 것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바벨 2세도 유령 작가인 "김동명 글/그림"으로 클로버 문고로 나왔다.[20] 그러나 이두호도 그렇고 이 선정에 대하여 만화가들은 시큰둥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전해인 1988년 우수작가로 선정된 이진주만 해도 웃으면서 우수작가 상패를 받고 집에 와서 상패를 내던졌다고 한다. 허구헌날 만화 공격을 벌이던 짓이나 하니 만화가들은 당시만 해도 여러 언론에 시끄럽게 구니 차마 이 단체에 대들지 못하던 터라...이두호에 대한 책자에서도 이 상받아서 집에 그냥 두고 어디에 둔지 몰라라고 웃으며 당시 껄그러운 기분을 이야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