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봉

 



'''대한민국 제22대 국무총리
노재봉
盧在鳳 | Ro Jai-bong
'''
[image]
2017년 모습
<colbgcolor=#003478> '''출생'''
1936년 2월 8일 (88세)
경상남도 마산부
(現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본관'''
광주 노씨
'''재임기간'''
제22대 국무총리
1991년 1월 23일 ~ 1991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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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colbgcolor=#003478> '''부모''' 아버지 노준용[5]
'''학력'''
마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정치학 / 학사)
뉴욕 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 박사)
'''경력'''
서울디지털대학교 총장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제14대 국회의원
제2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대통령 비서실장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

1. 개요
2. 생애
3. 선거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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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정치인이다.


2. 생애


1936년 2월 8일 경상남도 마산부(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라전모방 창업주 노준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1] 이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서 교수로 근무하였다. 전공은 국제정치사상으로 토크빌, 민족주의 등이 주요 연구 대상. 1970년대에는 신민당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에게 중도통합론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또 1987년 6.29 선언 완성 참여자이기도 하다.
1988년 "광주 사태김대중 씨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정치기술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라는 정치성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추진 등의 배경까지 감안하여 1988년 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외교담당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1990년 3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는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하며 내각제 개헌을 지지했고, 그리고 12월 27일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재야 현대사학자 임영태는 저서 <대한민국 50년사> 2권에서 노재봉 내각 출범을 노태우의 '마지막 카드'라고 평했는데, 전자는 내각제요, 후자는 내각제 실패를 대비한 마지막 후계포석이었다. 훗날 김윤환 의원도 후자에 대해 청와대가 노재봉을 강영훈 전 총리,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과 함께 대선후보로 고려했다고 말했다.
취임 이후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 등의 재야 민주화세력에 대한 탄압이 격화되었다. 언론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좌경세력으로 몰아붙였고, 시위는 시종일관 강경진압이었다. 이로 인해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안 그래도 그해 2월에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2]이 터지면서 노태우 정권에 대한 의혹과 불신이 깊어지는 와중에 그는 5월 10일 KBS1 <시국 어떻게 풀 것인가>라는 특집 대담에서까지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당시 사회자가 "노 총리가 들어선 이후 의원 외유사건, 수서사건, 강경대 군 사건 등으로 시끄러운데, 그 자체만으로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노재봉은 "내각사퇴가 시국 수습이라는 주장에 관해서는 행정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차원에선 모르겠으나 행정적 차원에선 물러날 체계가 아니다. 시끄러우니까 물러나라는데, 앞으로도 민주화 과정에서 시끄러운 일이 많으리라 생각한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노재봉의 총리 생명은 끝났다. 이런 발언으로 여론이 더 악화된 데다가 학생들과 재야세력까지 들고일어났으며, 여당인 민주자유당 내에서도 비판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민주계인 김수한 전 의원은 "퇴계로에서 시위 현장을 지켜보니 공안통치가 아닌 무법천지"라고 했으며, 그는 이기붕차지철까지 들먹이면서 "그런 사람들이 대통령을 모시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 하여 결국 노태우가 추진하려던 내각제는 물 건너갔고, 그로 인하여 같은 해 5월에 사퇴하였다. 심지어 나중에는 상기한대로, 이철승의 중도통합론[3]이란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사람임이 밝혀지면서, 재평가할 여지 조차 사라졌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한 후 2002년부터 3년간 서울디지털대학교 2대 총장을 지냈다.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총리 재임 당시 서울시의 도시경관 정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서울시가 총리직속의 조직이었으니 이것저것 해 볼 수 있었다고. 전체적으로는 관료주의의 병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예로 든 이야기였다.
2020년 8월에는 성창경 기독자유통일당 대표의 유튜브 영상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고려연방제 통일을 위한 북한의 포석이라고 주장했다.

3.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4]

'''7,923,718표(38.5%)'''
'''당선 (1위)'''

[1] 53학번 입학동기인 지연월과 결혼하였다.[2] 통칭, 수서 비리라고 하던 그 사건이다.[3] 말이 중도통합론이지, 여당인 민주공화당에 유화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관제야당이 되자는 소리였다. 김영삼을 비롯한 다른 민주인사들에게 '''사쿠라'''라는 소리까지 들었다.[4]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비례대표제로 개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