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C YS-11

 


'''YS-11'''
ANA 소속 YS-11
용도
수송기
제작사
[image] 일본 항공기 제조 주식회사
공급사
개발
1956년 ~ 1962년 08월
생산
1962년 10월 ~ 1973년 05월
운용
1965년 03월 ~ 운용 중[1]
가격
약 3억 5,000만엔 (1960년 당시)
약 200만 달러 (1972년 당시)
납품
182대
1. 개요
2. 개발
3. 상업 운항
4. 종류
4.1. YS-11-100
4.2. YS-11A-200
4.3. YS-11A-300
4.4. YS-11A-400
4.5. YS-11A-500
4.6. YS-11A-600
4.7. YS-11E
5. 참고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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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image]
JAC 소속 YS-11
YS-11의 콕핏
NAMC YS-11은 일본항공기제작('''NAMC''')[2]터보프롭 여객기이며 수송기이다. "YS"는 일본어로 수송기(Yusōki)와 설계(Sekkei)에서 딴 것이며, 11은 각각 엔진 형식과 기체 스펙의 일련번호이다. 그러나 YS-11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해서 11 이외의 일련번호가 가시화되지는 못했다.

2. 개발



1963년 YS-11 기록영화
1950년대 중후반, 전전 일본에서 카피 생산한 DC-3가 노후화됨에 따라 이를 대체하여 국내선에 굴리기 적절한 여객기 개발 요구가 일본 정부에서 제기되었다. 1956년에는 운수성이 신메이와공업에 기초 연구를 발주하였으며, 이 결과로 이듬해 운수성의 주도로 수송기설계연구협회가 창설되었다. 1959년에는 본격적인 개발을 위하여 특수법인인 NAMC로 재편되었다. 이 때 민간에서 주도권을 쥔 것이 미쓰비시중공업으로, 항공기의 최종 조립 또한 미쓰비시의 고마키 공장[3]에서 제조하기로 결정되었다.
NAMC는 신형 수송기를 '''저익기[4], 쌍발 터보프롭, 60석 규모'''로 설계하였는데, 초기 구상에는 제로센의 디자이너인 호리코시 지로를 위시한 전간기 엔지니어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NAMC에는 합류하지 않아서 이들의 밑에서 2차대전시 군용기 설계에 참가했던 엔지니어들이 그 뒤를 이었다.[5] 엔진은 롤스로이스의 3050마력의 다트 엔진을 장비하였다.[6] 고출력 엔진 장착으로 수송력이 같은 쌍발기였던 포커 27 시리즈에 비하여 50% 정도 높고, 4발기인 영국제 비커스 바이카운트(Vickers Viscount)에 비해서도 그다지 밀리지 않는다고 홍보되었다.[7]
이외의 특징으로는 다른 경쟁 기종과 달리 민항기에 어울리는 합리화가 되지 않은 점이 있다. 이 때문에 소음, 진동 등 거주성이 떨어지고 중량이 늘어 일본의 파일럿들조차 출력 부족을 호소하였다.[8] 또한 전후 여객기에 일반화된 유압을 적용하지 않고 케이블로 조종면을 조종하는 구식 장치를 채택하여 조종이 힘이 드는 데다 오토파일럿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현재 이 체급으로 현역인 대표적인 프롭 커뮤터기종들은 연비와 함께 단거리 이착륙성능을 중시한 고익기며 YS-11과 같은 저익기는 드물다.
프로토타입은 1962년 8월 30일, 나고야 공항에서 성공적인 초도 비행을 마쳤고, 그 해 12월 28일에는 두 번째 프로토타입이 비행을 마쳤다. 1964년 8월 25일에는 일본 정부의 승인이, 이듬해 9월 9일에는 FAA의 인증을 받았다.

3. 상업 운항


인증 취득 후 1965년 4월 1일에 양산 1호기(생산 3호기)가 일본국내항공(일본에어시스템의 전신 중 하나)에서 상업 취항을 시작하였다.[9] 1973년까지 총 182대가 생산되었으며, 이 중 82대는 15개국으로 수출되었다. 이 중에는 대한항공 또한 포함되어 있으며, 납북 사건에 휘말린 기체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참조.
YS-11은 일본 국내에서는 지방 노선의 주력으로 운용되었으며, 특히 일본 에어 커뮤터(JAC) 등 지선 항공사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민항기 사업 경력이 전무한 일본에 대한 신뢰도도 부족한 데다 YS-11 자체도 중량이 과다하고 소음, 진동 등 승객 서비스 측면의 약점이 지적되었다. 이는 개량형 YS-11A의 도입으로 어느 정도 만회가 되어 판매 자체는 당초 계획했던 150기를 넘어섰으나 여전히 수익이 나지 않았으며, 특히 해외 판매 체제가 지리멸렬했던 탓에 손해를 많이 보았다. 이 때문에 YS-11의 사업 결손은 1971년에 '''당시 가치'''로 145억엔에 달했으며,[10] 결국 채권단의 주도로 1973년 생산 종료로 이어졌다. 1981년 말에는 정부 각료회의에서 정식으로 청산이 결정되어 1982년에는 서비스 업무를 미쓰비시에 이관하고 1983년에 최종 청산되었다. 청산 당시의 누적 결손은 360억엔에 달한다.[11]
YS-11은 일본 국내선에서 2006년까지 활약하였다. 마지막 운항 노선은 2006년 9월 30일 JAC의 오키노에라부(沖永良部)-가고시마 공항 노선으로, 의도적으로 JAC가 첫 편을 띄웠던 노선이라고 한다. 은퇴가 가까워져서는 아래 -500형의 사진과 같이 '고마워요 일본의 날개 YS-11' 문구가 적힌 특별 도색이 적용되었다. 마지막 상업운항을 수행한 기체는 필리핀 등으로 매각되었으며, 일본 국내에서는 자위대나 항공 교육기관 외에 양산 1호기(JA8610)가 일본 국립과학박물관에서, 구 JA8709가 중소 정비회사에서 동태보존되어 있다.[12]

4. 종류



4.1. YS-11-100


[image]
YS-11의 표준형. 이륙 최대 중량은 23,500kg. 48대 생산.

4.2. YS-11A-200


[image]
YS-11의 이륙 중량이 24,500kg로 늘어난 모델.

4.3. YS-11A-300


[image]
-200형의 콤비형. 커다란 화물칸 도어가 장비되어 있으며 승객/화물 둘 다 적재가 가능.[13]

4.4. YS-11A-400


-200형의 화물형으로, 일본 자위대에서만 사용되었다.

4.5. YS-11A-500


[image]
이륙 중량이 25,000kg로 늘어났으며, 1970년부터 생산 시작.


4.6. YS-11A-600


-500형의 콤비형.

4.7. YS-11E


[image]
일본 항공자위대에서 전자전기로 개조되어 신형 제너럴 일렉트릭의 T64-IHI-10E 터보프롭엔진으로 교체하고 항속거리를 2,670㎞로 늘리며, 전자전 장비[14]를 탑재하는 등 여러 개조가 적용된 최신형 모델이다.[15] 공자대 전자전 지원대 등에서 90년대 말~2000년대 초쯤해서 운용을 시작하였으며 현재 EA형과 EB형 총 10기를 운용 중이다.

5. 참고 링크



[1] 2020년 12월 25일 기준[2] Nihon Aircraft Manufacturing Corporation. 전후 1957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을 필두로 후지중공업, 신메이와 공업, 일본비행기, 쇼와비행기, 카와사키 중공업 등 항공기 제작사 외에 도시바, 스미토모금속등 기계, 전자 산업체가 참가하여 결성된 기업이다. NAMC는 설계 및 판매, 서비스 기능을 맡았고 실제 생산은 회원사가 분담하였다. YS-11의 생산이 종료된 이후인 1983년 폐업하였다.[3] 오늘날 미쓰비시 스페이스젯의 생산 거점이기도 하다.[4] 저익기라 다른 터보프롭기와는 달리 엔진이 중간에 배치되어 있는 게 아니라 프로펠러는 위로 돌출되어 있고 흡기구만 아래로 내려와 있다.[5] 오카 디자이너가 신칸센 제작에 참여하는등 전후에 대전기 기술자를 쓰는 사례도 많았다.[6] 예외적으로 제너럴 일렉트릭의 엔진을 장비한 경우도 있었다.[7] 다만 수송력에 대한 서술은 어디까지나 NAMC 측의 주장이며 실제로는 그다지 우세하지 않다. 최대 적재량은 YS-11이 6.6톤이며 F27는 Mark 100이 5.6톤, Mark 500이 6.5톤, 바이카운트는 Type 700이 6.3톤, Type 810이 7.6톤이다. 최대 적재시 항속거리는 YS-11이 590nmi, F27 Mark 100이 600nmi이며 바이카운트가 1,500nmi였다. 이들 기체는 모두 롤스로이스 다트 계열 엔진을 장착하였으며 어디까지나 YS-11이 채택한 엔진이 개별 추력이 큰 것이다.[8] 재미있는 것은 YS-11을 미국에 유일하게 도입한 피드몬트 항공(Piedmont Airlines)의 경우 YS-11이 고출력이라는 이유로 산악 도시 노선에 배치했다는 것이다.[9] 특이한 것은 양산 1호기가 납품된 곳은 정작 운수성이라는 것이다. 양산 2호기는 또다른 JAS의 전신인 일본국내항공으로 납품되었다.[10] 2019년 가치로는 440억엔에 달한다. 덧붙여 납입자본이 총 78억엔이었다. 먼 옛날에 자본이 잠식되었다는 뜻이다.[11] 원래 YS-11의 취항 이후 탄력을 받은 일본 정부와 NAMC는 제트기 개발 구상에 들어가서 1970년 즈음에는 3발 제트기로서 150석 이내의 소형기 YS-33과 150석 이상 중형기인 YX의 컨셉트를 잡고 있었다. 이는 1973년에 YS-11이 생산 종료되면서 현실화되지 않았으나, 중형기 개발의 리스크를 낮추려던 보잉과의 합작이 성사되어 보잉 767 이후의 보잉 기종은 일본 항공업계가 공동개발자로서 일정 지분을 보유하게 된다. 보잉 787에서는 그 비율이 35%에 달한다. 그러나 50여년 뒤 일본이 여객기 자체개발 프로젝트에서 큰 손실을 보는 것이 다시 반복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미쓰비시 스페이스젯 참조.[12] 정작 일본의 법규에 맞지 않아 미국으로 등록 국적을 옮긴 게 아이러니하다.[13] 사진은 화물기로 추정.[14] J/ALR-2 신호정보시스템, J/ALQ-7 전자방해 시스템등이 탑재되었다.[15] 4엽에서 3엽으로 프로펠러 날개 개수가 줄어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