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과 자금성의 비교

 

1. 개요
2. 상세
2.1. 삼문삼조
2.3. 한양성과 북경성
2.4. 건축물의 차이
3. 결론


1. 개요


경복궁자금성을 비교하는 문서.

2. 상세


과거에는 경복궁이 자금성에 비하여 비교도 안될 정도로 무척 작고 초라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자금성이 경복궁의 수십배 크기이며, 심하게는 경복궁이 자금성의 화장실 정도 크기(?)라는 황당한 말까지 있었을 정도로 과장된 루머가 퍼져 있었다. 국공내전 이래로 1988년에 중국 관광이 이뤄지기 시작하기 일반인들은 중국을 왕래할수 없었다. 중국, 당시 중공은 6.25 때 우리나라와 싸운 적성 공산주의 국가였던데다가 여행자유화가 이뤄지기 이전의 일이었다. 또한 일반인은 물론이고 양국 정부 요인들 역시 1983년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 때까지 30년 동안 양국을 전혀 방문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과장된 루머가 퍼진 것이다. 물론 이런 루머가 퍼질수있던것에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경복궁 전각이 일제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만든다면서 대다수의 전각들을 허물어버린데다가 상당기간 동안 전후재건과 경제개발 우선정책 등으로 문화재 보존 및 발굴에 대한 에산이 많이 배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경복궁 앞을 가로막은 조선총독부 청사가 여전히 철거되지 않은 채로 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 쓰였을 정도로 경복궁 복원에 한 동안 진척을 보이지 못한면이 컸다. 그러다보니 소수의 전각만 남은 경복궁과 대부분의 전각이 남은 자금성을 비교해보면서 초라하다는 말이 나올수밖에 없기는 했다. 물론 자금성도 저우언라이가 아니었으면 허물어질 뻔했다.
당시 자금성이 경복궁의 수십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는 루머는 주로 두 궁궐이 완공되었을 당시 칸 수를 비교한 것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경복궁은 처음에 지어졌을 때는 필수 건물만 지어진 매우 작은 규모로 궁궐 담장 조차도 없는 상태였다. 이후 경복궁은 세종 대에 대규모 증축을 거친 후 조선 전기 내내 지속적으로 전각을 새로 건축하며 대형화되었다. 고종시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했을 때의 규모는 '''처음 넓이의 20배 정도'''가 되었다. 이는 '''자금성의 절반''' 정도가 된다. 한편 자금성의 경우 처음에 지어질 때부터 대륙의 풍부한 물적,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엄청난 규모로 지어졌고 처음 완공된 후 후원 조성 등 생활 편의시설을 보완한 것을 제외하면 전각 자체는 처음에 세팅된 것에서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아래의 같은 축척의 크기 비교 사진을 보면 경복궁이 그렇게까지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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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이 논의에 앞어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는데, 위의 사진에 나온 부분은 자금성이 아니라 자금성 내부의 궁성이다.
황성이라고 부르는 천안문을 정문으로 하는 성벽을 당대 사람들은 자금성이라고 불렀고 오문을 정문으로 하는 영역은 궁성이라고 불렀다. 즉, 우리가 아는 자금성보다 실제 자금성은 몇 배는 더 컸으며, 따라서 경복궁과 비교해도 그만큼 컸다. 물론 그렇다고 경복궁이 자금성 화장실 만하다는 낭설이 옳은 것은 아니다.
건물의 규모나 화려함, 격식 면에서도 자금성이 앞선다. 자금성은 면적 내에서도 건물이 빼곡한 데다가 화려한 멋이 있는 반면, 중국과의 대결을 피하고 안정을 우선시했던 조선은 제후국을 자처하였고, 주제(周制)라고 불리는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일반화된 궁궐의 법식에서 제후국의 형식을 채택했기에 천자국 형식을 택한 중국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원형을 대부분 보존한 자금성과는 달리, 경복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각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던 시절도 있는데다가 1980년대 이후로 복원작업에 들어갔지만 전체 복원이 이뤄지려면 한참 남았다는것도 크다. 실제로 고종 당시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의 경복궁은 자금성에 비하면 화려함과 섬세한면에서 부족한면이 있었기는 했지만 경복궁의 중건으로 심각한 물가상승을 초래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초라한 궁궐이라고 할수없었다'''.
한국의 건축은 자연과의 조화를 때놓고서는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시각으로 보았을때, 유홍준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경복궁은 북악산과 인왕산이 있다는 전제 하에 있는 것이며, 북악산과 인왕산은 경복궁에 있는 정원이다"
또한 서울에는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더 존재한다.

2.1. 삼문삼조


주례의 오문삼조(五門三朝), 삼문삼조(三門三朝) 원칙에 따라 자금성은 천자의 궁궐이므로 정전인 태화전까지 5개의 문을, 경복궁은 제후의 궁궐이므로 정전인 근정전까지 3개의 문을 두었다.
오문삼조와 삼문삼조에서 정하는 문의 개수라는 건 궁궐 안을 나누는 문의 개수이며 궁궐의 정전까지 가면서 거치는 문의 개수이다. 오문삼조는 고문(皐門), 고문(庫門), 치문(稚門), 응문(應門), 노문(路門)이라는 5개의 문을 궁궐 경계에서부터 그 안에 두고, 그중 고문(皐門) 안을 외조(外朝)[1], 응문 안을 치조(治朝)[2], 노문 안을 연조(燕朝)[3]로 하여 궁궐 안을 세 구역(조)로 나누는 걸 말한다.
다시 말해, 궁에 5개의 문을 두고 안을 3개의 조로 나누는 것. 그리고 제후국의 삼문삼조라는 건 이 중 고문(庫門), 치문(稚門)을 빼고 3개의 문을 두어 3개의 조로 궁궐 안을 나누는 것이다.
황성이 없는 조선 왕조의 경복궁은 두 문이 없고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으로 삼문을 세웠다.

2.2. 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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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이 연행길 가던 시절에 청나라의 궁궐이라고 부른 영역은 가운데 빨간색의 자금성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분홍색 부분의 황성 전체를 얘기했다. 박지원은 현대에 자금성이라고 부르는 빨간색 부분은 '''궁성'''이라고만 불렀고, 천안문을 정문으로 하는 분홍색 부분, 지금의 '''황성''' 영역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자금성을 사용했다.
박지원이 설명한 자금성의 4문은 남쪽의 천안문, 동쪽 동안문, 서쪽 서안문, 북쪽 지안문이다. 즉 천안문 양옆으로 뻗어단 성벽에 둘라싸인, 이 문서에서 황성이라고 부르는 영역을 박지원은 청나라의 자금성으로 인식한 것이다.
황성까지가 자금성인데 황성이 헐려나가고 경산과 북해는 공원이 되고, 중난하이는 주석과 총리와 그 가족들의 관저로 쓰이고, 태묘는 공산당의 공연 시설로 사용되어 궁성만 남게 되면서 오늘날에는 궁성만을 자금성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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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역 전체가 청나라 시대의 황성이다. 현재는 황성의 일부인 궁성만을 자금성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 시대의 황성은 지금은 사라진 대청문을 합쳐서 천안문 단문, 오문, 태화문까지 5개의 문이 있다.
이 이미지 하단의 대청문(大淸門)과 천안문(天安門) 사이는 황성에 포함되지 않는다. 천안문이 황성의 정문이다. 이 두 문이 연결된 통로같은 것은 한국의 육조거리[4]에 해당하며, 이 통로 양편에는 정부 주요 부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대에는 이것을 모두 헐어버리고 천안문광장이 들어서 있으며, 대청문 자리에 마오쩌둥 기념당이 세워져 있다.
자금성은 '''성'''이고 한양의 궁궐들은 '''궁'''이니 궁궐의 크기만 따지면 조선의 궁궐들이 더 크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 자금성뿐만 아니라 황성 권역 전체가 황제 한 사람의 생활, 업무, 휴식 등을 위해 지어졌으므로, 베이징 성 내부에 위치한 '''황궁'''이라고 봐야 한다. 규모로도 단순히 황제의 거주 구역을 넘어서 하나의 '성시(城市)'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거대하고 방대하기도 하다. 역시 위에 서술했듯이 경복궁 하나와 여러 시설을 다 가진 황성을 비교할 수는 없다. 굳이 비교하려면 경복궁과 후원에 사직, 종묘, 왕족들의 잠저까지 다 합쳐서 베이징 황성과 비교해야 한다.

2.3. 한양성과 북경성


북경성과 한성은 아예 도시 구조부터가 다르다. 베이징성은 내성이 있고, 그 내성 안에 황성이 있으며, 내성 밑에 외성이 있는 구조에다가 평지성이다.
그에 반해 한성은 평산성이며, 내외성 개념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구조이며, 추가로 도성 위 지역에 탕춘대성과 북한 산성이 이어져 있는 구조이다.[5]
양국의 문화나 방어 전략에 따른 차이로 도시 구조에서부터 큰 차이가 난다. 따라서 황성의 정문인 천안문을 한국 궁궐 혹은 도시 구조에서 어떤 문에 대응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그 무언가가 생길 수가 없다.
현대 경복궁은 청와대 영역을 빼놓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래 청와대가 있는 곳은 경복궁의 후원으로서, 중난하이나 북해 공원 같은 왕실 정원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극명한 차이로 인해 일대일대응이 어렵다.
억지로 ''역할''을 중심으로 따지자면 한양 도성은 베이징성의 내성에 해당하고, 황성은 도성 내의 5대 궁궐과 청와대 지역 및 종묘, 사직공원에 해당하며[6], 탕춘대성북한산성은 베이징성의 외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4. 건축물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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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있는 각 건물들의 크기가 자금성보다 작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경복궁은 면적이 넓을 뿐 경복궁 내부를 구성하는 건축물들은 작은 단층 목조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자금성이 거대하게 느껴지는 건 그 자체만으로 거대한 석축 기반 위에 다시 거대한 목조 건물들을 지어 단순히 면적만 넓은 게 아니라 건물 자체도 위압감을 줄 정도로 거대하기 때문에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경복궁 답도
자금성 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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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금천
자금성 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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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동십자각
자금성 동십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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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궁궐의 기타 요소들을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계단 장식인 답도를 보면 근정전 계단의 답도는 간략하게 형식만 갖춘 반면 자금성의 답도들은 서양의 대리석 조각에 준하는 정도로 음각과 양각이 깊고 크기도 훨씬 거대함을 알 수 있다. 정전의 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의 크기도 다르고 궁궐의 벽을 지키는 망루인 십자각의 크기도 자금성 쪽이 더 거대하고 더 사치스럽다. 단순히 궁궐 면적만 비슷한 수준으로 확보했다고 해서 두 궁궐의 크기가 비슷하다고 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
또한, 대문에 뚫린 구멍, 그러니까 통로의 갯수가 천자의 궁궐은 5개고 제후의 궁궐은 3개이다. 자금성의 정문인 천안문은 구멍이 5개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3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7] 문의 개수가 다른 이유는 제후국인 조선은 신하 - 왕 - 신하의 3문이면 족하지만, 천자국인 명과 청은 양 옆에 제후들을 거느리고 있어 신하 - 제후 - 황제 - 제후 - 신하와 같이 5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3. 결론


전 세계 총 생산의 30%를 차지하던 명나라의 궁궐과 조선시대의 궁궐의 규모를 비교하기는 어렵다. 인구가 중국의 5%가 채 되지 않았던 국가의 궁궐이 자금성만큼 호화스럽고 컸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8] 그리고 경복궁은 자금성보다는 작아도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의 고궁인 일본교토고쇼슈리성, 베트남후에 황궁에 비해 더 크다.
임진왜란 전의 경복궁은 자금성보다 수십 년 먼저 지어졌기에 열화된 모방이 아니며, 조선은 개국 당시부터 검소함을 지향하는 왕도 정치를 표방했기 때문에 궁궐의 장식이나 규모에서도 검소함을 지향했고 균형미와 조화로움도 추구했기 때문에 단순한 면적과 전각의 수로만 비교하기 어렵다.
또한, 경복궁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한국 고유의 궁궐 건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만의 개성으로 나타나는 단청의 색과 문양, 창덕궁만큼은 아니지만 경직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 등은 북악산과 이루는 조화를 통해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보여주고 있다. 규모로 따질 수 없는 고유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명확히 드러나며 그 완성도도 수준급이다.
단순히 규모로만 아름다움을 따지기에는 경복궁이 가지고 있는 세세한 아름다움이 매우 많다. 자금성은 자금성이고 경복궁은 경복궁인 것이다. 면적이 넓거나 크기가 크다고 해서 더 훌륭하고 우월할 수는 없다.
[1] 신하들이 바깥에서 집무를 보는 구간이다.[2] 군주가 정치를 펼치는 구간이다.[3] 군주 일가가 쉬는 구간이다.[4] 지금의 세종대로광화문 광장이다.[5] 조선시대 한양의 안팎을 구분하는 성저십리까지 포함한 기준이다.[6] 중국은 황성의 정문인 천안문자금성의 정문인 오문 사이에 사직단과 태묘가 있다. 즉, 황성 안에 사직단과 태묘까지 있다.[7] 창덕궁 돈화문은 조금 다르다. 문서 참조. 고려의 만월대 승평문이 돈화문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추정한다.[8] 이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자 원납전당백전을 만들어서 국가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던 개화기를 돌아보더라도 명백해진다. 인과관계로 본다면 경복궁의 중건은 흑역사로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