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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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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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5월 5일에 중화인민공화국 민항총국 소속 트라이던트 2E 여객기가 춘천시의 주한미군의 육군 항공기지인 캠프 페이지(Camp Page)에 불시착한 사건이다. 이 기지는 춘천역 앞에 있었으며, 2005년에 춘천시에 반환되었다.
본 문서에서는 나무위키 표제어 기준 대만을 '''중화민국'''으로, 중국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표시하여 구분한다.
2. 발단
1988년 이전까지 대한민국에서는 '중국 대륙'을 통치할 정통성이 대만에 있다고 보아, 중화민국을 '자유중국'으로 부르는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가 유일정당인 중국 공산당을 줄여 중공이라고 불렀다. 나라도 아니고 그저 정당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1970년대 들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으로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가 개선되긴 했지만,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기에는 북한의 존재감이 매우 컸었고, 당시 전두환 정권도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었기 때문에 한중간의 수교는 커녕 교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3년 5월 5일에 중화인민공화국 민항총국 소속 영국제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Hawker Siddeley Trident) 여객기[1] 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선양 공항을 출발하여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으로 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영공에서 비행 도중 여객기는 하이재킹당했고, 비행기를 납치한 여성을 포함한 6명의 납치범들은 중화민국으로 망명을 꿈꾸며 권총을 이용하여 조종실 문을 부수고 들어간 뒤 비행기 기장에게 중화민국으로 가라고 협박하였다.[2] 그러나 기장이 평양순안국제공항으로 비행기를 돌렸고 평양 상공에서 기체를 선회시키며 기장은 여기가 서울이니 착륙하자고 블러핑을 시도했으나 납치범들이 서울이 아님을 알아채고 다시 기장에게 협박을 가했다. 결국 납치범에 의해 점령된 비행기는 당시 미수교 적성국이었던 대한민국으로 방향을 돌렸고, 한국군 측에서는 이 시점부터 수상한 비행기가 북한 쪽 상공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는 것을 레이더로 탐지하였고 휴전선으로 접근해오자 F-5와 F-4전투기를 내보냈다. 여객기는 전투기들의 유도하에 지금은 없어진 춘천시의 미 육군 항공기지인 캠프 페이지(Camp Page)의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당시로서는 미수교 적국이던 중화인민공화국의 비행기가 북쪽에서 남한으로 넘어올 당시에 서울, 경기, 강원 지역에 어린이날 휴일에 난데없이 공습경보가 울리고, 라디오에서 지금 상황은 실제 상황이라고 연신 방송이 나왔었다. 한국에서 초계 중이던 F-5 전투기 2대가 춘천 시내 바로 위로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등 전쟁이 다시 터진 줄 알고 사람들이 많이 놀랐었다.
한국으로 넘어오는 중화인민공화국 민항기를 관제할 적에 활주로가 길어서 안전하게 착륙이 가능한 김포국제공항에 내리게 하지 않고, 활주로가 짧아 위험한데도 춘천의 미군 기지 헬리콥터 활주로에 내리게 했는데, 이는 미군 기지 안에 비행기를 놓음으로써 중화인민공화국도 감히 미국을 상대로 윽박지를 수 없도록 조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장이 이를 거부하려 해도 당시엔 이미 연료가 거의 바닥났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활주로를 50여 미터나 지나 가까스로 멈췄을 만큼 꽤 위험했던 불시착이었고, 이는 '비행기의 수리가 필요하다'라는 이유로 협상을 지연시킨 대한민국의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무장 납치범들은 서울지방검찰청(지금의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부에 의해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승객들은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 숙박하면서 서울 시내와 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 구경을 다니고, 출국할 때 컬러 TV[3] 까지 선물로 받는 등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체제 경쟁이 극심했던 당시로서는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공산 국가에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정상화를 원했던 전략적 의도도 있었다. 물론 당시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항공 여행을 할 정도라면 상당한 고위직 내지는 특권층이고[4] 한국의 사정에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이를 직접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전략은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3. 협상 과정
당시만 해도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전무한 '적성국'이었다. 따라서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민항국 소속의 조종사 2명이 귀순한 것을 비롯해 본 사건 이전까지 항공기나 선박 납치 사건이 5차례 발생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교섭대표를 대한민국에 딱히 파견한 적이 없으며 문제 해결을 서두른 적 없이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었다.
그러나 1983년 불시착 사건 때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대단히 이례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선다.[5] 사건 당일 오후에 바로 민항국장 명의로 교섭 대표단을 파견할 테니 착륙을 승인해 달라는 전문을 중국민항 일본지사를 경유해 팩스로 발송했고, 이건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한국으로 발송된 외교 전문이었다. 이에 한국은 외교부 명의로 답신을 보냈다. 내용은 5월 7일[6] 12시 30분에 김포공항으로 대표단을 착륙시킬 것과 한국에서는 이번 일을 외교부에서 전담한다는 것이었다.
사흘 후인 5월 7일, 33명의 대규모 교섭 대표단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파견됐다. 대표단원들의 신분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민간기구인 '민항국 직원'이었지만 실제로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와 정보기관의 부국장급 인사, 관영언론 신화통신 간부를 포함한 고위급 실무진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측과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5월 6일부터 회담을 진행하였고, 같은 날 3명의 일본인 승객은 일단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쌍방의 대표 자격과 국호(남조선과 중공), 국기 사용 문제 때문에 난항을 거듭하였다. 오로지 북한만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던 중화인민공화국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문제였지만, 대한민국 측 교섭 대표단은 '남의 안방에 들어와서 안방 주인에게 인사도 안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결국 본 협상에 앞서서 양국의 공식 명칭과 국기를 사용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아서, 회담장 테이블에는 태극기와 오성홍기가 장식되었고 협상 내내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사용하였다.
3일간의 협상 끝에 5월 10일, 한국 측 대표 공노명[7] 외무부 제1차관보와 중화인민공화국 측 대표 선투[8] 민항총국 국장은 피랍 승객과 승무원, 항공기를 조속히 송환하며, 당장 이동이 어려운 부상자는 서울에서 치료를 받은 후 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된 다음 바로 출국시킬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특히 '''무장 납치범들은 한국 법에 따라 처벌하기로 합의'''했다. 양쪽은 대한민국(The Republic of Korea)과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란 공식 국호가 표기된 최종합의문에 서명했으며, 협상 결과에 따라 대부분의 중화인민공화국 국적 승객들은 5월 16일에 귀국하였다.
즉, 대한민국의 요구를 중화인민공화국 대표단이 대부분 수용한 것이다.
4. 결과
무장 납치범들은 대한민국에서 재판을 받고 각각 4~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약 1년을 복역하다가 형 집행정지로 출소한 뒤, 인도적 차원에서 중화민국으로 추방 형식으로 망명하였다.[9]
원래 하이재킹 억제를 위한 협약(헤이그협약)에 따라 항공기 납치는 엄벌에 처해야 할 중범죄이다. 헤이그협약 제2조에는 '각 체약국은 범죄를 엄중한 형벌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할 의무를 진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국내법으로도 항공기 납치는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며, 사망자나 부상자가 발생한 경우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당시나 지금이나 법정 형량은 같다.
이때 한국의 몇몇 국회의원들이 그들을 자유의 투사로 보아 재판 없이 중화민국에 송환하자는 주장을 하였지만, 그렇게 놔주기 시작하면 일 벌이고 정치적 이유 운운하면서 악용될 소지는 충분하고 파급력이 커지게 된다. 당시 전두환 치하 철저한 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심정적으로 저들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바가 아니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혈맹이나 다름없던 중화민국과의 관계도 감안하여 이 정도 선에서 절충한 것.
협상 과정에서 보듯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대단히 이례적으로, 아주 신속하게 한국과의 협상을 조기에 체결하고 귀국했다. 이유는 당시 여객기 중에 자국의 최고 군사기밀을 쥐고 있는 미사일 전문 학자가 탑승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화인민공화국 국적 탑승객들이 한국 호텔에 투숙한 뒤 가장 먼저 자신의 신분증을 잘게 쪼개어 화장실 변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외교열전> "불시착機에 中 미사일 전문가 탔었다"
한편 전두환은 이 사건에서 이례적으로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이 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사건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 군단장이 캠프 페이지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주한미군의 제지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미국과의 외교 문제도 걸려 있으니 외교부 장관 출신으로 외교 문제 처리에 능통한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이 군을 지휘하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장세동 대통령경호실장이 군의 사기가 걸려 있어서 안 된다고 만류하였으나 전두환은 강행하였다. 물론 합동참모의장인 김윤호 장군 등의 군 수뇌부는 반발하였으나 결국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은 박세직 제2차장과 군을 지휘하여 사건을 해결하게 하였다. 현재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해당하는 민군간 컨트롤타워 직위가 없다보니 생긴 해프닝이었던 셈. 그리고 이 지휘 사건으로 그 동안 정치적 동반자의 위치에 있던 신군부 주요 인사들이 주군과 가신의 관계로 바뀌면서 본격적으로 전두환 중심의 정권으로 나아가게 된 점도 주목할만한 부분.
한편 당시 춘천 미군 기지에 불시착한 여객기 기체도 다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활주로가 군용 활주로라 민항기가 이륙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짧았다. 때문에 중량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비행기를 띄워 김포국제공항으로 날아간 후 거기서 재정비하여 본국을 향해 다시 이륙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객실 의자, 주방, 화장실 설비 등 무게를 줄일 수 있는 장비는 모두 떼어내 트럭에 실어 육로로 김포공항으로 수송했다. 항공유도 김포까지만 비행할 만큼 아주 조금 넣었다. 또 이륙 거리를 줄이기 위해 이륙 시간을 이른 아침 시간인 7시 30분로 잡았다. 혹시 모를 추락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활주로 앞 근화동 일대 주민들을 모두 소개(疎開) 하였다. 그리하여 민항기를 간신히 띄워 김포국제공항으로 보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해당 여객기는 정비를 거쳐 5월 18일 김포공항을 떠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갔다.
5. 후일담
당시 비행기를 납치한 6명은 줘창런 (卓長仁), 장훙쥔 (姜洪軍), 가오둥핑 (高東萍)[10] , 왕옌다이 (王豔大), 안웨이젠 (安偉建), 우윈페이 (吳雲飛)로, 중화민국에서는 반공투사의 귀순이라며 대대적인 환영 + 막대한 정착금을 받았고 '6의사'라고 불렸고, 줘창런과 가오둥핑은 서로 결혼까지 했다. 하지만 그중 줘창런과 장훙쥔은 바뀐 환경에 적응을 못한 채 정착금을 모두 투자 등으로 탕진했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반공 의사였던 스샤오링(施小寧)[11] 과 함께 1991년 8월 16일 타이베이 병원의 한 의사의 아들을 유괴살인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2001년 8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나마 공무원이 된 안웨이젠이나 취직한 우윈페이를 빼면 6의사 중에는 몰락한 이가 더 많았다. 카오둥핑은 이 후 저소득층으로 전락했고, 왕옌다이도 상당한 액수의 빚을 졌다.
여객기가 불시착한 활주로 지역은 캠프 페이지가 춘천시 및 대한민국에 반환, 어느 정도 재개발된 후, 2018년 춘천시 측에서 꿈 자람 관련 시설물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도 공원화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공원화 구획 안 중 불시착 지역 근처를 '중국 민항기 불시착 광장'이라는 이름의 공간으로 꾸밀 계획이 있다는듯하다. #
6. 의의
이 사건의 가장 큰 의의는 바로 1953년 7월 휴전 이후 한중 양국이 최초로 공식적인 외교적 접촉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을 중국 대륙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있었고, 반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은 북한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간주하고 있던 시절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당시 북한의 요청으로 남한산 면직물에 대해 ‘원산지 증명’을 요구하여 대한민국 면직물 산업에 타격을 주고 있었는데, 민항기 사건 이후 더 이상 원산지 증명 요구를 하지 않았다. 민항기 사건 후 대한민국의 대(對) 중화인민공화국 수출총액은 1983년 484만 달러에서 1984년 1,694만 달러로 급증했다.
사건 다음 해인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권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참가 선언을 하게 되었고, 특히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는 아시아의 공산권 국가들 중 유일하게 참가했다. 이후 대한민국 역시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 참여하는 등 스포츠를 통한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승객 및 승무원들이 서울에 머물면서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중 교류가 반세기 가까이 끊어지면서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들이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대부분 북한의 선전물이었기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한성(서울)은 전깃불도 제대로 안 들어오고 거지들이 우글거린다더라'라는 수준의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서울은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어느 대도시보다도 화려하고 발전된 모습이었으며, 특히 엄연한 적성국가 국민이었음에도 가는 곳마다 미소 띤 얼굴로 극진하게 환대해주는 한국인들을 보고 느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듯. 지금이야 중화인민공화국이 마천루와 지하철, 고속철도, 고속도로 건설을 잇따라 해대며 대규모 인프라 시설들을 건설했기에 한국보다 야경이 못할게 없어졌지만, 그때는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안팎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북한보다도 못살던 시절이던지라 이러한 인프라 시설들은 많이 열악할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대도시라도 야경이 썩 화려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지하철은 베이징에만 있었으며 21세기 이후로 야경으로 이름을 날리는 상하이 푸동 지구도 당시에는 시골 벽촌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이들은 상류층들이므로 정보의 접촉면에서 일반인들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상류사회에서 이들의 한국 경험담은 꽤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12]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한(對韓) 외교정책 전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런 흐름이 계속 이어져 2년 뒤인 중국 해군 어뢰정 망명사건 때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신속히 자신들의 실수를 사과하고 한국 정부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1992년에 한중 수교를 이끌어 낸다. 물론 자연히 중화민국과는 국교 '''단절'''.
이 사건을 두고 훗날 외교라인에서 '봉황이 날아들었다'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 양국 간 외교 관계에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
물론 이에 반비례하여 중화민국과의 관계는 나빠졌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은 자국과의 외교 정상화의 선제 조건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자신들만을 중국 대륙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 대한민국도 실리를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중화민국과는 단교했다.
7. 그 외
방송인 출신 정치인 이계진이 방송인 시절 썼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책에 따르면, 이때 북한이 공습을 한 줄 알고 민방위 사이렌이 울려대면서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라고 외쳐서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게다가 하필 저 때 미그기 귀순이 많았기도 했고 '''하필 사건이 일어난 날이 빨간 날이라서''' 일요일 새벽에 6.25 기습 남침을 겪은 트라우마도 되살아나고, 한편 IPU 서울총회를 방해하려는 북한의 공작이 실패한 후 실제 무력 행사를 고려하고 있다는 여러 경로로 입수되는 소문[13] 등 때문에 더더욱 난리가 났었다. 또한 5월 9일부터는 대규모 멸공훈련 '멸공83훈련'을 실시하기로 계획[14] 이 되었기 때문에 군의 긴장감 자체도 높아진 상황이었다.
납치 후 항로를 보면 대한민국 쪽으로 올 때 서해상의 공해를 이용해서 넘어온 게 아니라 북한 땅을 평양까지 가로질러서 왔는데, 어이없게도 북한 쪽에서는 '''자국의 수도인 평양 위에서 세 차례나 선회하고 있는 이 비행기를 전혀 눈치채지를 못했다!''' 레이더 성능과 관리상태가 그만큼 개판이었단 말. 평양의 방공망이 밀도가 높다고 해봐야 납치 부호까지 달고 있는 미확인기 탐지도 못할 지경이니 얼마나 한심한지 알 수 있다. 오히려 당시 한국군이 이 시점에 벌써 비행기를 탐지하고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방송공사 반공 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평양으로 오던 중화인민공화국 여객기가 방향을 틀어 한국으로 가버리자 김정일이 손수 오진우 등 군 고위층을 두들겨패는 묘사가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
[1] 이 여객기는 1960년대 초반 미국의 보잉 727에 대항하여 영국의 호커 시들리사가 개발한 중형 삼발 여객기이다. 그러나 낮은 인지도와 엔진 문제로 인해 보잉 727은 물론 후에 나오는 소련제 삼발기인 Tu-154와도 제대로 경쟁해 보지 못한 채 117대만 생산되고 단종되었으며, 호커 시들리는 이후 여러 회사들과 합쳐져서 현재의 BAE 시스템스가 됐다.[2] 조종실 승무원 2명은 실제로 다리에 총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3] 한국에서도 아직 컬러TV 대중화가 완료되지 않았을 시점이었고 중국은 이제 막 전국적인 TV보급이 진행되고 있었다. 참고로 중국은 컬러방송을 한국보다 훨씬 일찍 시작했지만 경제발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것이 1970년대 말부터인 관계로 1983년 시점으로는 컬러TV는 일반직장인 몇년치 봉급에 해당될 정도로 고가품이었다.[4] 일반 중산층들도 거리낌 없이 비행기를 이용하는것은 2000년대 중반에서야 가능했다.[5] 이는 해당 항공기 탑승자 중 한 명이 결과 항목에 하술되어 있듯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방 최고 기밀을 안고 있는 거물 유도탄 학자였기 때문이라고 후일 박춘호 판사(국제해양법재판소의 재판관을 지낸 바 있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리스광 박사를 만나 사석에서 답을 얻었다. 리 박사의 말로는 미국에서 와 유도탄을 개발했다고 하는 췐쉐선 박사보다도 뛰어난 학자라고 하나 기밀사항이라서 그렇게 얼버무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 학자가 누구인지 진실은 저 너머에.[6] 사건 다음날이 아닌 이틀 후를 기일로 정했고 기상악화와 항공편을 이유로 삼았다. 협상 전략을 세우고 불시착한 비행기와 승객들에 관한 일을 처리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7] 노태우 정부에서 초대 주소련 대사와 일본 대사를 거친 뒤에 김영삼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특히 최초의 모스크바 주재 한국 외교관으로 한소 수교에 큰 기여를 한 인물.[8] 예전 언론 기사에 '쉔투', '센투'라는 표기가 자주 보인다. 외래어 표기법/중국어에 의하면 沈圖(Shen Tu)는 일단 '선투'가 맞다.[9]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재판을 받았으면 사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0] 6인방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11] 1985년에 대륙에서 무기를 배에 싣고 중화민국으로 귀순. 그도 이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12] 당장 88올림픽을 통해 해외에 소개된 한국의 모습은 공산권뿐만 아니라 '''같은 서방 사회에조차'''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13] 1983년 5월 6일 경향신문 기사 내용 중[14] 1983년 5월 6일 매일경제 기사 내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