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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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수선전도(보물 제853호)
연노란 부분[1]이 바로 조선의 한성 5대궁 권역이다.'''

'''1901년 한성부 지도에 묘사된 대한제국 5대궁 권역.'''
1. 개요
2. 상세
3. 건물의 등급
4. 궁궐의 요소
5.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대한제국 시대의 궁궐은 임금이 사는 집, 그리고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잠저), 여행갈 때 머물렀던 집(행궁)을 의미한다.[2] 심지어 죽은 임금을 모신 사당에도 '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2. 상세


조선시대에 임금이 평소에 거주하고 정치행위를 펼친 궁을 정식 궁궐로 볼 수 있는데,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경운궁(덕수궁)이 남아있다. 이를 묶어서 조선의 5대궁이라고 주로 부른다. 각 궁의 위치에 따라 이칭으로 법궁/정궁(중심 궁궐)인 경복궁을 '북궐', 창덕궁·창경궁을 '동궐'[3], 경희궁을 '서궐'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 사용되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창덕궁·창경궁·경희궁이 사용되었다. 19세기에 고종이 즉위한 뒤에는 경복궁을 중건하여 아관파천 이전까지 경복궁을 사용했다. 1897년부터 사용된 경운궁은 조선의 궁이기도 하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중심 황궁이기도 하였다.[4]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사실 일제강점기에 전체 궁의 93퍼센트 정도가 훼손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궁궐의 모습은 전체의 7퍼센트에 불과하다. 창경궁, 창덕궁 등은 고유명사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원래 대부분의 궁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던 것. 궁궐에서 숙식하는 궁인들의 거주지는 물론 숱하게 이름난 전각들도 허물어졌으며, 경희궁 같은 경우는 아예 자취가 사라지려고 하는 것을 현대에 와서 복원한 것이며,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전락되어 세 명의 대비를 모셨던 곳이 동물원으로 전락하는 등 마개조를 제대로 당했다. 창경궁과 종묘 또한 원래는 연결되어 있던 형태였으나 도로를 신설해버려서[5]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 장탄식을 샀다.
대충 위의 전각도(의 설명은 오류가 많지만)만 보아도 사대문의 성곽 안에서 궁궐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하면 광화문에서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창경궁, 낙산, 인왕산, 경희궁과 그 이후까지 근접한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 부지와 그 안에 마련되어 있는 궁인들의 생활공간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준. 그러나 일제는 대대적으로 그리고 또 적극적으로 훼손을 시행했고 대한제국 멸망 후에는 본격적으로 그 자리에 총독부의 허가를 받은 민간 사업자들까지 출몰, 왕궁 터 = 좋은 기운이 흐르는 노른자위라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터를 매입했다.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로 왕궁을 복원할 생각은 아니하고 그곳에 개인 건물을 짓거나 본인 사업을 위한 터로 사용하는 등 개개인의 손에 왕궁 터가 넘어감으로써 이전 궁궐로의 완전한 복원 사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남아있는 원형으로라도 만족하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 것.[6]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어른의 사정이 숨어있는데 왕궁터를 매입한 건물 매입주들은 대부분이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사회의 실세라 할 수 있는 높으신 분들 , 소위 기득권 층이 대부분이었고 광복 후에 터를 매입한 사람들도 사대문 안 왕궁이라는 노른자위 안에 자신의 미학을 실현할 공간 내지는 영향력을 과시할 만한 건물을 갖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결국 유교왕가의 궁궐 안에 불교 박물관이 들어서는 등 희한한 현 상태가 유지되는 중이다.
결국 현재 모든 궁들은 도심지 안에 마련되어 있는 일종의 유료공원이 되었으며, 10년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 촬영 장소로 쉽게 내주기도 했었으나 훼손이 심각하여 현재로서는 관광지 및 공원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궁궐 내에는 풀밭이 많이 없고 통행로는 흙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결코 풀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풀이 나있는 묘지나 관리되지 않은 들판에나 자라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므로 전통방식의 정원 내지 공원 관리방법은 박석마사토를 사용한 것이며, 현재의 궁궐 역시 이를 토대로 관리되고 있다. 단, 현대의 방식 역시 일부 받아들여 잔디밭이 있는 곳도 더러 있다.
조선의 궁궐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 철학을 반영하여 상대적으로 보면 규모가 작고 소박한 편이다. 궁궐이 크고 화려하다는 것은 백성들을 괴롭힌 흔적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광해군을 추방한 인조반정 당시 반정 세력이 내세운 별의 별 대의명분 중에 현재도 그 정당성이 인정되는 명분이 바로 궁궐병이었을 정도. 심지어 광해군이 쫓겨날 때 백성들은 궁궐병 환자가 더는 궁궐을 짓기 위해 가렴주구를 하지 못할 거라며 만세를 부를 정도였다. 실제로 보면 경복궁의 부지 크기는 '''자금성의 70% 수준'''이지만, 아직 복원 중이고, 주요 건물의 크기가 중국보다 작기 때문에 소박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규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경복궁의 부지가 자금성의 70% 수준이지만 부지 내에 존재하는 전각의 크기나 규모는 격을 달리 하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사치를 엄격히 금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구와 영토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규모가 넘사벽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고려의 정궁인 만월대만 하더라도 규모가 작으나 전각을 화려하게 꾸미고 지형지세로 커버했다고 했을 정도로 규모가 조선의 궁궐 권역보다 더욱 작았다.[7] 어차피 전근대 국가에서 궁궐 내에서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은 보행 정도이고 자금성이나 베르사유 궁전[8] 정도가 사람의 신체로 감당할 수 있는 궁궐 크기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으며[9], 그보다 작은, 경복궁이나 창덕궁 정도만 해도 충분히 지친다. 따라서 경복궁의 크기에만 집착하며 자금성에 비하면 그리 작지 않다는 주장만 반복하다간 한국 궁궐 본연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 있다.
다만 조선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옛 한국인들은 확실히 조선보단 크게 지었다. 신라황룡사 금당 치미나 그보다 더 큰 고구려 안학궁 치미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보다 1,000여년 더 이전의 고대 한국 전통 건축문화에서는 확실히 건물을 위용이 넘치도록 큼직큼직하게 지었다. 이것이 현대 한국인들로 하여금 전통 건물의 크기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끼게 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인데, 처음부터 조상님들이 작은 크기로만 건물을 건축했다면 우리는 전통적으로 원래 그랬다는 식으로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데, 고대, 중세까지는 신라를 방문한 일본인이 황룡사 9층 목탑을 보고 크게 경의를 표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다른 나라에서 경악하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짓다가 갑자기 성리학적 명분론을 등에 업고 건물 규모를 급격히 축소시킨 것이기 때문에 어느 때를 우리 본연의 전통 문화로 보는 가에 따라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

3. 건물의 등급


각 건물은 사용 용도와 거주자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 졌다. 이 등급에 따라 건물 명칭의 마지막 글자가 정해진다.
등급은 높은 순으로 '''전당합각재헌루정'''으로 나뉜다.
  • 전(殿)
가장 중요한 건물이며, 따라서 건물의 크기도 가장 크고 화려했다. 주로 왕이 쓰는 건물 중 공적인 업무를 위해 사용된 건물이다.
  • 당(堂)
전과 크기나 화려함 면에선 뒤지지 않으나 한 단계 낮은 등급의 건물. 주로 왕이 생활하는 건물이다. 이 중 특이하게도 왕과 왕비가 거사를 치르는 건물에는 용마루가 없는데, 이에 대한 설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이 건물에선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기에 만들지 않았다는 설과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고 때문에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10]이 있다.
  • 합(閤), 각 (閣)
주로 전과 당 근처의 부속 건물.
  • 재(齋), 헌 (軒)
주로 왕족이나 기타 궁궐 내 거주하는 사람들이 활동하는 주거공간.
  • 누(樓)
지면에서 1층 정도 높이에 마루를 둔 높은 건물. 이층 건물의 경우 이층은 누, 일층은 각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경회'루', 보신'각'
  • 정(亭)
주로 연못이나 경치 좋은 곳에 설치된 정자.

4. 궁궐의 요소


  • 품석 : 정전 앞에 줄을 맞추어 정열되어 있는 작은 비석으로, 말 그대로 품 별로 나누어 오와 열을 맞춰 서라고 세워진 표식. 문관들은 동반, 무관들은 서반에 섰으며 이를 합쳐 양반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 드므 : 정전 같은 주요 건물 앞에 설치된 금속제 물동이. 여기에 채워진 물은 화재 발생 시 방화수로도 쓰였으며 화마가 여기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놀라 달아가게 하는 목적으로도 쓰였다.
  • 부시 : 단청에 쳐진 그물. 지금은 현대식 그물인지라 흔히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설치한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옛날부터 존재했으며 비단 그물을 사용했다. 단청에 새가 똥을 싸거나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하는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특히 둥지를 틀 경우 알과 새끼를 노리고 뱀이 꼬일 수 있기 때문에 단청 보호 및 뱀 예방용으로도 효과가 있다. 그물을 치기 힘든 회랑이나 궐담 같은 곳에는 오지창을 꽂아 새들이 앉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 오방색 : 동서남북의 사신을 대표하는 색 + 황룡의 노란색으로, 이 다섯 색으로 단청을 칠한다. 궁궐 외에 이 색을 쓸 수 있는 건 절뿐이다.
  • 잡상 : 지붕의 네 모서리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수호신들. 주로 왕이 있는 중요한 건물에만 설치하기 때문에, 이것의 유무로 건물의 중요성을 구분할 수 있다. 간혹 이 잡상을 어처구니로 알고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국립국어원은 어처구니와 잡상은 다른 단어라고 밝혔다.
  • 봉황 : 정전 앞에 설치된 답도에는 봉황이 조각되어 있다. 봉황은 용과 함께 왕의 상징이었다. 정전에 왕이 들어가려면 이 봉황 위로 가야 했으며, 이는 봉황이 있는 하늘의 위, 곧 천상에 왕이 있음을 상징한다. 대한제국 때 중건된 덕수궁의 정전 중화전 답도에는 황제국의 위상을 반영해 봉황이 아닌 용을 조각했다.
  • 일월오봉도 : 옥좌 뒤에 있는 그림으로, 해, 달, 다섯 봉오리, 소나무와 두 폭포가 그려져 있다. 주로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병풍으로 만들었으며 왕이 공식적 업무로 가는 곳 마다 미리 만들어 두거나 가지고 다녔다. 왕이 붕어하면 함께 묻었다. 이 그림은 왕권의 상징이자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기원하였으며, 해와 달은 각각 왕과 왕비를 의미한다. 다섯 봉오리는 한반도의 다섯 산이며 소나무와 폭포는 영원을 상징한다.

5. 관련 문서



[1] 종묘와 사직은 제외.[2] 정확히 말하면 궁은 임금의 사적인 공간, 궐은 공적인 공간을 나타낸다. 경복궁을 예로 들면, 임금의 거처인 강녕전이나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궁전. 문무백관이 문안을 드리던 정전(근정전)이나, 국정을 논하는 장소인 편전(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은 궐이다. . 여담이지만 경복궁강녕전편전이 직선코스로 거리가 굉장히 짧다. 즉, 이 일어나면 바로 코 앞에 일터가 있는 것. 때문에 조선시대의 왕들은 경복궁을 굉장히 답답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3] 구한말까지만 하더라도 창덕궁-창경궁-종묘까지 이어져 있어서 하나의 권역으로 기능하였다. 물론 일제의 만행으로 인해 현재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4]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했는데,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왜 덕수궁(경운궁)으로 거처를 이동했는가 하면 을미사변이 경복궁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끔찍하게 살해당한 장소는 꼴도 보기 싫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경운궁 바로 근처에 러시아 제국의 공사관이 위치한 점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황도의 법궁으로 삼은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였다.[5] 현재 대학로에서 안국역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6] 새롭게 궁궐을 복원하겠다고 그 모든 땅들을 다 매입하거나(엄청난 가격이다) 아예 새로 쌓아올린 경희궁을 제외하고는 궁궐을 짓겠다고 민간에게 넘어간 건물과 터를 매입하여 부수는 것도 재정적인 여건과 문화에 대한 안목이 높지 못했던 당시 정부로서는 힘든 일이었다.[7] 다만 이는 애당초 고려의 왕도인 개경이 한양에 비해 터가 좁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애당초 대규모 궁궐을 수축할 넓고 평탄한 터 자체가 없었던 것.[8] 보통 서양의 궁전이 그렇듯, 웅장한 건물 1-2채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궁 부지의 대부분이 정원이며 베르사유 궁전 또한 마찬가지이다.[9] 다만 그러한 분석은 다소 오류인 것이 한 장안의 미앙궁, 장락궁, 당 장안의 정궁이라든지 대명궁도 황성 부분을 빼면 북경 자금성보다 규모가 컸다.[10]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다.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으며 일반 서민 가옥들에도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