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
[image]
慶州 西岳洞 磨崖如來三尊立像. 통일신라 초기(7세기 중엽)에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의 정상 가까이에 있는 큰 암벽을 통째로 깎아 만든 마애불 3점.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 92-1에 소재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본존 7m, 우협시보살 4.62m, 좌협시보살 4.55m.
600년대 중엽, 경주 서라벌 지역의 신라인들이 8m 크기의 돌출된 거대 암면에 거대한 아미타여래본존을 조각하고, 좌우의 협시보살(좌측 :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 우측 : 대세지보살입상)을 별도로 원각(圓刻)하여 만든 마애불 3점이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암벽의 파손 때문에 머리와 신체 각 부분이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다.
경주 선도산은 토함산에 대응되는 신라의 명산으로, 이 산을 지키는 선도성모는 신라의 개국이래 나라를 수호하는 여신으로 중시되어 왔다. 이 삼존불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불상 조각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이 산의 정상에서 조성된 것인 동시에, 최근 발견된 명문을 통해 당시 여성 비구니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거대 불상인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신라 불교사 연구에 그 의미가 큰 자료이다.
[image]
2018년 6월에 이 불상 근처에서 고신라시대 명문들이 발견되었다.경주신문 : 선도산 마애불에서 삼국시대 명문 발견! 당시 여성 사회활동 유추 명문은 능숙한 솜씨로 새긴 해서체로 가로 3m, 세로 2.8m, 높이 2.5m의 바위 동쪽 면에 적혀있었으며, 경주 단석산 신선사 조상명문과 더불어 우리나라 석불 명문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사를 연구한 경북대학교 이영호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명문은 비록 일부 글자만 판독된 상태지만,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진평왕대(597~632년) 선도성모 불사 관련 역사가 실제 있었던 사실이거나 700년 전후에 조성된 마애삼존불의 조상명문(造像銘文)일 가능성이 높은 중요한 금석문이다”고 말했으며, 고대사를 연구한 연세대학교 하일식 교수는 “선도산 명문 중 ‘아니(阿尼)’는 신라의 불교 공인 직후부터 비구니의 출가가 이루어졌고, 그들이 여러 불사를 주도하거나 관여하는 등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서예사를 연구하는 정현숙 박사는 “명문의 글씨는 힘차면서 품격 있는 북위풍 해서로, 경주 남산 신성비 제10비(591년, 신라 진평왕 13년), 함안 성산산성 출토 ‘임자년’ 목간(592년), 하남 이성산성 출토 ‘무진년’ 목간(608년)의 서풍과 흡사해 진평왕대인 6세기 말 7세기 초반 신라의 북위 서풍 수용을 보여 주는 의미 있는 서예사적 자료로 평가된다”고 말하였다.
[image]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사진 출처 양 사이드의 협시보살 2점이 완전히 사라져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image]
왼쪽 협시보살의 경우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化佛)이 조각된 삼산보관(三山寶冠)을 쓰고 있다. 얼굴은 갸름하며 윤곽선이 부드럽고 적당히 살이 쪄서 복스럽고 우아한 얼굴이다. 눈은 가늘고, 코는 큼직하고 시원스러우며, 입술은 살짝 다물었는데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신체는 본존불에 비하여 훨씬 섬세하고 부드러운 편으로, 상체는 굴곡도 잘 나타나 있다. 왼손은 내려 정병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는데, 이 인상(印相)과 보관의 화불로 보아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이 좌우의 협시보살들은 조선시대에 유학자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몇 개의 조각으로 파괴되어 아래 계곡으로 굴려 버려놓은 것을 다시 가져와서 복원한 것이다.
[image]
중앙의 본존불은 손상을 많이 입어 머리는 없어졌고 얼굴도 눈까지 파손되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부분의 표현에서 자비로운 인상이 흐르고 웅위한 힘을 느낄 수 있다. 파손 때문에 무릎 이하는 옷 주름은 물론 발과 대좌까지 사라져 버렸으나 얼굴은 코와 입을 큼직하게 표현하여 강한 조형성을 보여주며 입가에서 커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양손은 상하 수직의 통인(通印)을 맺었고 대의(大衣)도 통견(通肩)으로 걸쳤다.
이 마애삼존불상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 제109호)의 본존,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의 본존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선의 표현과 법의의 U자형 옷주름 선은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제63호)과 비슷한 양식을 하고 있다. 비록 후대에 파손된 부분이 많으나 높이 7m 정도 되는 거구의 삼존마애불로, 통일신라 초기 신라의 석재공예술과 불교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에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1. 개요
慶州 西岳洞 磨崖如來三尊立像. 통일신라 초기(7세기 중엽)에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의 정상 가까이에 있는 큰 암벽을 통째로 깎아 만든 마애불 3점.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 92-1에 소재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높이 본존 7m, 우협시보살 4.62m, 좌협시보살 4.55m.
600년대 중엽, 경주 서라벌 지역의 신라인들이 8m 크기의 돌출된 거대 암면에 거대한 아미타여래본존을 조각하고, 좌우의 협시보살(좌측 :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 우측 : 대세지보살입상)을 별도로 원각(圓刻)하여 만든 마애불 3점이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암벽의 파손 때문에 머리와 신체 각 부분이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다.
경주 선도산은 토함산에 대응되는 신라의 명산으로, 이 산을 지키는 선도성모는 신라의 개국이래 나라를 수호하는 여신으로 중시되어 왔다. 이 삼존불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불상 조각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이 산의 정상에서 조성된 것인 동시에, 최근 발견된 명문을 통해 당시 여성 비구니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거대 불상인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신라 불교사 연구에 그 의미가 큰 자료이다.
[image]
2018년 6월에 이 불상 근처에서 고신라시대 명문들이 발견되었다.경주신문 : 선도산 마애불에서 삼국시대 명문 발견! 당시 여성 사회활동 유추 명문은 능숙한 솜씨로 새긴 해서체로 가로 3m, 세로 2.8m, 높이 2.5m의 바위 동쪽 면에 적혀있었으며, 경주 단석산 신선사 조상명문과 더불어 우리나라 석불 명문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사를 연구한 경북대학교 이영호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명문은 비록 일부 글자만 판독된 상태지만,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진평왕대(597~632년) 선도성모 불사 관련 역사가 실제 있었던 사실이거나 700년 전후에 조성된 마애삼존불의 조상명문(造像銘文)일 가능성이 높은 중요한 금석문이다”고 말했으며, 고대사를 연구한 연세대학교 하일식 교수는 “선도산 명문 중 ‘아니(阿尼)’는 신라의 불교 공인 직후부터 비구니의 출가가 이루어졌고, 그들이 여러 불사를 주도하거나 관여하는 등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서예사를 연구하는 정현숙 박사는 “명문의 글씨는 힘차면서 품격 있는 북위풍 해서로, 경주 남산 신성비 제10비(591년, 신라 진평왕 13년), 함안 성산산성 출토 ‘임자년’ 목간(592년), 하남 이성산성 출토 ‘무진년’ 목간(608년)의 서풍과 흡사해 진평왕대인 6세기 말 7세기 초반 신라의 북위 서풍 수용을 보여 주는 의미 있는 서예사적 자료로 평가된다”고 말하였다.
[image]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사진 출처 양 사이드의 협시보살 2점이 완전히 사라져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image]
왼쪽 협시보살의 경우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化佛)이 조각된 삼산보관(三山寶冠)을 쓰고 있다. 얼굴은 갸름하며 윤곽선이 부드럽고 적당히 살이 쪄서 복스럽고 우아한 얼굴이다. 눈은 가늘고, 코는 큼직하고 시원스러우며, 입술은 살짝 다물었는데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신체는 본존불에 비하여 훨씬 섬세하고 부드러운 편으로, 상체는 굴곡도 잘 나타나 있다. 왼손은 내려 정병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는데, 이 인상(印相)과 보관의 화불로 보아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이 좌우의 협시보살들은 조선시대에 유학자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몇 개의 조각으로 파괴되어 아래 계곡으로 굴려 버려놓은 것을 다시 가져와서 복원한 것이다.
[image]
중앙의 본존불은 손상을 많이 입어 머리는 없어졌고 얼굴도 눈까지 파손되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부분의 표현에서 자비로운 인상이 흐르고 웅위한 힘을 느낄 수 있다. 파손 때문에 무릎 이하는 옷 주름은 물론 발과 대좌까지 사라져 버렸으나 얼굴은 코와 입을 큼직하게 표현하여 강한 조형성을 보여주며 입가에서 커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양손은 상하 수직의 통인(通印)을 맺었고 대의(大衣)도 통견(通肩)으로 걸쳤다.
이 마애삼존불상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 제109호)의 본존,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의 본존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선의 표현과 법의의 U자형 옷주름 선은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제63호)과 비슷한 양식을 하고 있다. 비록 후대에 파손된 부분이 많으나 높이 7m 정도 되는 거구의 삼존마애불로, 통일신라 초기 신라의 석재공예술과 불교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에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3. 바깥고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
- 두산백과 :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
- 한국어 위키백과 :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
- 미술백과 :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
-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 경주 서악리 마애석불상
4. 보물 제62호
선도산 정상 가까이의 큰 암벽에 높이 7m나 되는 거구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왼쪽에 관음보살상을,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한 7세기 중엽의 삼존불상(三尊佛像)이다.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아미타여래입상은 손상을 많이 입고 있는데, 머리는 완전히 없어졌고 얼굴도 눈있는 부분까지 파손되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뺨, 턱, 쫑긋한 입의 표현은 부처의 자비와 의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넓은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웅장한 체구는 신체의 굴곡을 표현하지 않고 있어 원통형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범할 수 없는 힘과 위엄이 넘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묵직해 보이며, 앞면에 U자형의 무늬만 성글게 표현하였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의 관음보살은 내면의 법열(法悅)이 미소로 스며나오는 우아한 기풍을 엿보게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다룬 데 없는 맵시있는 솜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에 비해 신체는 섬세하며 몸의 굴곡도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준다는 대세지보살은 얼굴과 손의 모양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관음보살과 동일하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을 바로 뜨고 있어서 남성적인 힘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 삼존불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불상조각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의 중요한 작품으로, 본존불은 높이 7m, 관음보살상 높이 4.55m, 대세지보살 높이 4.62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