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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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北齊)의 제5대 황제이자, 사실상의 마지막 황제였다.
2. 생애
556년, 아버지 고담과 무성황후 호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실은 차남이었는데, 고담의 첩 이씨가 고위가 태어나기 몇 시간 전에 남양왕 고작(高綽)을 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씨가 정실 부인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고위가 장남으로 알려졌다.
2.1. 황제가 되다
561년, 아버지 고담이 황제로 즉위한 후에 황태자가 되었으며, 핵심 장군이었던 곡률광(斛律光)의 딸과 결혼했다.
565년, 화사개와 조정의 건의에 따라 고담은 황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고위는 8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는데 고담은 태상황으로 있으면서 권력을 유지했다. 고위는 어려서 몸이 허약했고, 고담과 호씨 모두 고위의 친동생 고엄을 더 사랑했다. 고엄은 똑똑했는데 한 번은 고담에게 '형님은 너무 아픈데 황제가 될 수 있는지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비록 어린 아이의 말이었지만 고담은 고위의 폐위를 생각해 봤고, 결국 폐위시키지는 않았다.
569년, 무성제 고담이 갑자기 병이 들자 화사개에게 뒷일을 맡겼고 화사개는 태상황의 죽음을 몇일 간 알리지 않았다. 호씨는 이제 태상태후가 되었다.
2.2. 간신들에게 휘둘리다
무성제 고담이 죽자 화사개, 누정원(婁定遠), 조언심(趙彥深), 고문요(高文遙), 당옹(唐邕), 기연명(綦連猛), 고아나굉(高阿那肱), 태상태후 호씨의 사촌인 호장찬(胡長粲)이 조정을 장악했다. 이에 고담의 사촌 고예(高叡), 고담의 동생 고윤(高潤), 고담의 조카 고연종(高延宗)과 누정원, 고문요 등이 손을 잡고 조정에서 가장 강력한 이는 화사개라는 사실에 동의하며 그를 지방으로 보내려고 했다. 고예는 특히 화사개를 싫어했는데 화사개는 부패하고 부도덕적이었으며 특히나 그가 태황태후 호씨와 연인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관료들의 압박을 받은 화사개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고담의 장례가 끝나면 가겠다고 했다. 화사개는 연주(兗州) 자사로 가게 되어 있었고 고문요는 서연주(西兗州)로 가게 되어 있었다. 고담의 장례가 끝나자 고예는 가능하면 빨리 떠나라고 압박했는데 태황태후 호씨가 100일만 더 있다가 가게 해주길 바랬다. 이에 화사개는 떠나기 전에 한번만 더 태황태후 호씨와 고위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이때 화사개는 저들은 나쁜 놈들이라고 태후와 황제를 설득했고 고위와 호씨는 그를 믿었다. 고위는 고예를 질책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예는 궁에서 버티며 고위와 호씨를 압박했다. 이에 태황후 호씨는 고예를 체포했고 유도지(劉桃枝)를 시켜 그를 목졸라 죽였다. 이렇게 해서 화사개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여기에 더하여 후주의 유모인 육씨(陸氏)[1] 와 그의 아들 목제파(穆提婆), 그리고 조정이 그의 일파가 되었다.
570년, 후주의 후궁 목씨(穆氏)[2] 가 장남 고항(高恆)을 낳자 고위는 기뻐하며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에 목씨의 양어머니인 육씨는 고항을 황태자로 삼아 그를 황제로 옹립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황후인 곡률씨가 반대했기 때문에 후주는 고항을 곡률씨에게 주어 기르게 했다. 같은 해 겨울, 후주는 고항을 황태자로 삼았다.
무성제 고담과 후주 고위의 치세동안 북주(北周)는 조금씩 북제의 영토를 잠식했으나, 명장 곡률광이 반격을 가해, 분수(汾水) 이북의 많은 지역을 회복했다. 곡률광은 의양에서도 승리를 거뒀으나, 그의 부대가 업성으로 돌아올 때 고위는 이 군대를 제대로 보상도 하지 않은 채 해산하려고 했다. 곡률광은 황제에게 비밀리에 청원을 올려 그의 군대와 군사들을 위무할 사절을 보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고위는 주저하고 있었고 곡률광의 군대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채 수도 업성으로 행군했다. 고위로서는 곡률광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오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에 곡률광을 소환하는 한편 보상 없이 군대를 해산시켰다.
571년, 고위의 동생 낭야왕 고엄이 화사개가 권력을 잡고 전횡하고 있는 것을 꼴사나워 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켜 화사개를 죽여버리고, 후주의 유모였던 육씨와 그녀의 아들 목제파 역시 죽여버리려고 했다. 곡률광은 고엄이 화사개를 죽인 것은 인정했지만 아직 황제에 충성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곡률광은 고엄의 부대를 향해 해산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낭야왕의 군대는 와해되었다. 그 후에 고엄을 사로잡아 궁으로 끌고 왔는데 고위는 처음에 고엄을 용서했지만 겨울에 유도지(劉桃枝)를 보내 결국 목졸라 죽였다. 그리고 고엄의 사생아였던 아들들도 모두 죽여버렸다. 태황태후 호씨가 불교 사제인 담헌(曇獻)과 바람피운 사실이 발각되자 고위는 담헌을 처형하고 호씨는 자택에 연금시켰으며 이후로 누구도 귀족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조정은 태황태후 호씨를 폐위하라고 했지만 고위는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에 황태후는 동생 호장인(胡長仁)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였던 호씨를 궁중에 불러 이쁜 옷을 입혔다. 이에 고위는 그녀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후궁으로 들였다.
2.3. 곡률광을 죽이다
572년, 황후 곡률씨가 딸을 낳았는데 고위는 곡률광을 기쁘게 하기 위해 처음에는 아들이라고 했다가 곧 딸이라고 인정했다. 이 때 곡률광은 조정 및 목제파와 권력 다툼 중이었는데 그는 조정(祖珽)을 좋아하지 않았고, 조정이 군사적인 일에 있어서 장군들의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한 번은 곡률광이 정부 건물에서 쉬고 있었는데 조정이 그만 지나쳐 버렸다.[3] 곡률광이 화가 났다는 말을 듣고 조정은 곡률광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곡률광의 하인에게 뇌물을 주어 곡률광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오라고 했다.
그러는 동안 목제파는 곡률광의 딸을 첩으로 삼으려 했지만 곡률광이 거부했다. 더 나아가 목제파가 후주에게 진양의 공지를 좀 달라고 했는데 곡률광은 이 땅은 군대의 말을 먹여야 하는 땅이라고 반대했다. 결국 조정과 목제파는 둘다 곡률광을 싫어했고, 이 둘은 고위까지도 곡률광을 싫어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고위가 황후 곡률씨를 총애하지 않으면서 더 심해졌다. 이때 북주의 장수 위효관(韋孝寬) 역시 이런 의심을 부추겼는데 그는 곡률광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며 고씨 왕조가 망하고 곡률씨 왕조가 설 것이라는 노래를 유포시켰다. 이에 조정과 유모 육씨는 이 노래를 알려 고위가 더욱 곡률광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고위는 다른 심복인 한장란(韓長鸞)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한장란은 곡률광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위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조정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곡률광의 부하 장교였던 봉사양(封士讓)을 꼬드겼는데 봉사양은 571년 곡률광이 군사를 이끌고 왔을 때 반란을 꾀했다고 고변했다. 고위는 이번에는 이를 믿었고 곡률광에게 말을 하사한다고 속이며 그를 궁으로 불렀다. 곡률광이 궁에 들어오자 고위는 유도지(劉桃枝)를 시켜 곡률광을 목졸라 죽이게 했고 곡률씨 일족도 멸족시켜 버렸다. 우선 그의 동생과 따르는 장군 곡률선(斛律羨), 그리고 그의 아이들인 곡률무도(斛律武都), 곡률세웅(斛律世雄), 곡률항가(斛律恆伽)도 죽였다. 오로지 막내 아들 곡률종(斛律鍾)만이 어렸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이 때 황후 곡률씨도 폐위당하고 별궁에 유폐되었다.하인 : 공이 권력을 잡고 부터 곡률광은 계속해서 탄식했고 '봉사가 권력을 잡았으니 나라가 망하겠구나.'라고 했습니다.
573년, 곡률황후가 폐위되자 유모 육씨는 비어 있는 황후 자리에 자신의 양녀인 목씨를 밀었고, 태황태후 호씨는 자기의 조카딸 호씨를 밀었다. 태황태후는 육씨에게 선물을 주고 자기가 하자는대로 하자고 했다. 고위 역시 호씨를 더 총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씨는 조정과 협의를 해서 호씨를 황후로 삼기로 했고, 고위도 이에 동의했다. 고위는 호씨를 아주 총애했고 그에게 좋은 옷을 많이 해주었다. 육씨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황제에게 '그렇다면 황태자의 어머니가 첩이면 되겠습니까?'라고 했지만 고위는 호씨를 총애했으므로 그녀의 바램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이에 육씨는 점술가를 고용해 황후 호씨에게 저주를 걸었는데 이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몇달 후 호씨는 정신 이상을 보였다. 호씨는 별 이유없이 웃거나 혼자서 중얼거렸는데 고위는 이런 그녀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결국 싫어하게 되었다. 겨울, 육씨는 목씨를 치장시켜 황제에게 보여주면서 '이래도 황후로 안 뽑으실 겁니까?'라고 했다. 후주는 결국 목씨를 황후로 삼고 그를 '우황후'라 하고 호씨를 '좌황후'라 하였다.
573년, 육씨는 태황태후 호씨에게 황후 호씨가 태황태후의 명성을 더렵혔다고 말했는데, 태황태후는 화를 내며 진상 조사도 하지 않고 황후 호씨를 궁에서 내쫓았고 고위도 그녀를 폐위시켰다. 이렇게 되자 육씨와 목제파의 힘이 너무 커져버렸으며 자연히 이들은 부패했고 관직을 팔았다. 목제파, 고아나굉(高阿那肱), 한장란(韓長鸞)은 조정을 장악했으며 고위 자신도 궁을 짓고 헐고 짓고를 반복하면서 국고를 비워나갔다.
여름, 진나라의 선제 진욱은 오명철(吳明徹)에게 군사를 주어 장강을 건너 공격하게 했는데 고위는 공격받는 지방을 보강하려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고,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위파호(尉破胡), 장손홍략(長孫洪略)을 보내 막았지만, 오명철의 군대에 패배했고 이에 왕림을 수양(壽陽)으로 보내 막게 했다. 하지만 왕림의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곧 수양이 함락됐으며 왕림은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이렇게 되면서 북제는 장강과 회하(淮河) 사이의 지역을 진나라에게 빼앗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제파와 한장란 등은 여전히 흥청망청 살고 있었다.
목제파 : 우리가 황하 이남의 땅을 빼앗긴다 해도 구자(龜茲)[4]
에서 살 수 있다!
한정란 :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을 살아도 즐기며 살 것이다. 겨우 수양 땅이 무슨 대수겠는가?
2.4. 고장공을 죽이다
고위 역시 이에 동의하고 날마다 잔치를 이어갔다. 진나라의 공격을 받던 와중에 조정은 나름대로 개혁을 하려고 시도했으나, 그는 육씨와 목제파, 한장란에게 막혀 중앙 정부에서 쫓겨났다. 조정이 중앙에서 내쫓긴 이후로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고 정권은 한층 더 무능력해졌다.
고위는 더 나아가 이번 원정 기간동안 유능한 장수였던 사촌 고장공(高長恭)을 의심하여 독살했다. 진나라의 공격 도중에 또 다른 대량 학살이 고위의 명령으로 일어났는데, 그는 진양(晉陽)에 방문하려고 했다. 원로 관료인 최계서(崔季舒), 장조(張雕) 등은 이 시기에 진양으로 가는 것은 진양으로 도망가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민중들의 동요가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고위에게 업성에 그대로 머물라고 조언했고, 봉효염(封孝琰), 유적(劉逖), 배택(裴澤), 곽준(郭遵) 등이 여기에 동조했다. 그러자 한장란은 이들에게 반란의 의도가 있다고 고발했고, 고위는 이에 동의하여 최계서, 장조, 배택, 곽준 등을 체포한 다음 그들의 집안 사람들도 같이 추방하고 집안의 여자들은 몰수했으며 남자들은 거세시켰다.
574년, 남안왕 삭주(朔州) 자사 고사호(高思好)는 고위의 시종인 작골광변(斫骨光弁)에게 무례를 당했다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무렵 고위는 황후 목씨에게도 싫증이 났는데 대신 목씨의 시종이었던 풍씨(馮氏)[5] 에게 빠져 그녀를 '좌황후'로 삼았다.
575년, 북주의 무제 우문옹은 항상 북제를 멸망시키길 바래 가을, 대대적인 원정을 계획했다. 몇몇 장군들은 진양으로 곧바로 쳐들어가자고 했지만 우선 그는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북주의 군대가 중담(中潭) 요새에 이르렀을 때 부복(傅伏)이 강력하게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고 게다가 우문옹이 병들었기 때문에 후퇴했다. 그러는 동안 진나라의 진욱도 오명철을 시켜 팽성(彭城)을 포위했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
576년 겨울, 우문옹이 다시 대규모 원정을 실시하고 평양(平陽)을 함락시켰다.
2.5. 북제의 멸망이 시작되다
북주군이 평양에 당도했을 때 고위는 기연지(祁連池)에서 황후 풍씨, 고아나굉 등과 함께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보고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원병도 보내지 않았다. 평양이 함락당하자, 고아나굉이 고위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고위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갔다. 우문옹은 고위의 군대가 여전히 강하다고 생각하여 후퇴하고 평양에는 양사언(梁士彥)을 남겨 지키게 했다. 북제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 평양을 공격했고 얼마 후 성벽에 구멍을 냈다. 평양을 거의 탈환하기 직전이었는데 이 때 갑자기 고위가 공격을 멈췄다. '''왜냐면은 풍씨를 불러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 풍씨가 도착할 동안 북주군은 이 구멍을 메웠고 북제의 공격을 막아냈다. 상황을 지켜보던 우문옹은 군사를 데리고 평양으로 진격했고, 고아나굉은 북주군과 싸우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환관들에게 부추김을 받은 고위는 우문옹에 맞서기로 했다.
그러나 전투에 들어갔는데 점점 밀려 조금씩 후퇴하였고 풍씨와 목제파는 패닉 상태가 되어 돌아가자고 징징거렸다. 고위는 이 말을 듣고 군대를 버리고 진양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북제의 군대는 와해되었는데 이쯤되면 북제는 거의 멸망 테크를 훌륭하게 타고 있었다.
진양으로 돌아온 고위는 사촌인 고연종(高延宗)과 고효형(高孝珩)에게 진양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삭주(朔州)로 도망가려 했지만 고연종이 이를 말렸다. 그러자 그는 먼저 태황태후 호씨와 아들 고항(高恆)을 먼저 삭주로 보냈다. 그런데 정작 북주군이 진양에 다다르자 그는 진양을 고연종에게 맡기고 자신은 삭주나 돌궐로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매승랑(梅勝郎)의 제안으로 업성으로 갔는데 고아나굉도 함께 갔다. 그러는 동안 목제파는 고위를 버리고 북주에 투항했는데, 이 보고를 들은 고위는 목제파의 어머니 육씨에게 자살을 명하고 목씨 일족은 처형하거나 강제 노동형에 처했다. 당옹(唐邕)은 여전히 진양에 남아있었는데 이때 그는 다른 장수들과 함께 고연종에게 황제가 되라고 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은 그를 위해 죽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위는 아주 걸작인 명언을 남긴다.
북주군의 진양 공성전이 시작되었고 동문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고연종의 군대는 북주군을 막아 우문옹은 거의 죽을 뻔 했다. 하지만 고연종의 부대는 이 승리에 도취해 재편성하지 못했고 다음날 북주의 공격으로 진양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북제 제2의 수도 진양의 함락은 북제의 멸망이 기정사실화됐음을 천하에 알리는 것이었다.'''진양을 고연종에게 넘겨주느니 차라리 북주에게 넘겨주리라!'''
2.6. 업성이 함락당하다
고위는 업성에 도착한 후 사람들에게 군대에 입대하면 보상을 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을 풀어놓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또 그가 군대의 사기를 위해 연설을 했을 때 불손한 태도 때문에 장군들의 분노를 샀다. 더구나 이미 북주군이 진양까지 점령한 상황에서 장군들과 관료들도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고매(高勱)는 태황태후 호씨와 고항을 삭주에서 데리고 와 업성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자고 했지만 고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점술가가 나라의 운이 다했으니 황제를 바꿔야 한다고 알렸고, 577년 봄에 고위는 7살난 아들 고항에게 황위를 넘기고 자신은 스스로 태상황제가 되었다.
아들 고항이 황제가 되었지만 태상황이 된 고위가 그대로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모다루경현(莫多婁敬顯)이 위상원(尉相願)과 같이 고아나굉을 죽이고 고효형(高孝珩)을 황제로 선언하려 했다. 하지만 매복조가 고아나굉을 죽이지 못하면서 이 음모는 탄로나고 말았다. 고효형은 군대를 주면 자기가 북주를 물리치겠다고 청원했지만 고아나굉과 한장란은 그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여 그를 창주(滄州) 자사로 내보냈다. 이 때 북주군은 이미 업성에 당도했고 고위는 남쪽으로 달아나 저항군을 조직하고 여의치 않으면 진나라로 도망가려 했다. 그는 모용삼장(慕容三藏)에게 업성을 맡기고 자신은 제주(濟州)로 도망갔는데 이미 태황태후 호씨, 황태후 목씨, 아들 고항은 이미 보내놓은 상태였다. 고위가 떠나고 모용삼장은 버틸 힘이 없었기 때문에 업성도 곧 함락당했다. 수도 업성의 함락은 북제의 사실상 멸망이었고 고위는 도망자일 뿐이었다.
2.7. 북제가 멸망하다
고위는 제주에 도착해서 고항의 이름으로 교서를 발표했는데 황위를 고위의 삼촌인 고개(高湝)에게 넘긴다고 했다. 그리고는 곡률효경(斛律孝卿)에게 명령해 옥새를 고개가 있는 영주(瀛州)로 보내게 했다. 하지만 곡률효경은 옥새를 들고 북주에 가 버렸다. 고위는 더 동쪽인 청주(青州)로 도망갔고 거기서 진나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고아나굉은 북주군과 접촉하고 있었고, 고위를 북주에게 넘겨주려 일부러 천천히 내려갔다. 북주군이 제주에 도착하자 고아나굉은 항복했고, 북주군은 빠르게 청주로 갔다. 고위는 빠르게 도망가려 했지만 북주의 장수 울지근(尉遲勤)에게 사로잡혀 황태후와 함게 업성으로 끌려갔다. 고위와 황후는 처음에는 대우를 잘 받았는데 고개와 고효형이 창주에서 저항했다. 우문옹은 고위에게 이들을 말리라고 했고, 고위는 편지를 써서 항복하라고 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 후 우문옹의 동생 우문헌(宇文憲)이 고개와 고효형의 군대를 격파했고 그들을 사로잡음으로써 저항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고위의 사촌 고소의(高紹義)는 돌궐로 도망갔는데 타발가한(佗缽可汗)은 고소의를 받아들이고 그를 제나라의 황제로 선언했다.
577년 여름, 우문옹은 고위와 북제의 관료들 및 제왕들을 데리고 수도 장안으로 돌아갔는데 일부러 고위를 승리 행진에 앞세웠다. 그 후 고위는 온공(温公)에 봉해졌으나, 겨울에 우문옹은 목제파가 반란을 모의한 일로 처형되자 이 일에 연좌하여 고위를 포함한 고씨 일족을 멸문시켰다. 이 때 고씨 중 살아남은 것은 장애인들로 그들은 촉 땅으로 보내져 천수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