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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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北齊)의 제4대 황제.
2. 생애
537년, 동위의 대승상 고환과 누씨의 9남으로 태어났다. 고담은 그의 형 문선제 고양과 쌍벽을 이루는 폭군이었으나, 적어도 고양은 유능한 신하들이 정치를 잘했기에 그럭저럭 나라는 돌아갔지만 고담의 신하들은 간신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고담은 고양보다 더욱 인간말종이었기에 나라는 엉망이 되었다.
2.1. 힘을 키우다
544년, 아버지 고환은 유연과 동맹을 맺기 위해 유연의 칸 욱구려암나진의 딸을 고담에게 주었다.
550년, 둘째형 고양이 북제를 건국했다. 문선제 고양은 술에 취하면 고담을 비롯해서 고준(高浚), 고환(高渙) 등의 동생들을 때렸다. 결국 고준, 고환은 나중에 옥에 가두고 죽였는데 사실 이 죽음에는 고준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담이 연루되어 있었다고 한다. 고담은 이 시기 동안 화사개(和士開), 조정(祖珽)과 친하게 지냈고, 이들은 이후에도 고담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559년, 문선제 고양이 죽고 그의 아들 고은이 황제가 됐는데 형 고연과 재상 양음 간의 세력 다툼이 일었다. 결국 고연이 양음의 세력을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했다. 이후 고연은 진양(晉陽)으로 돌아갔고 업성(鄴城)은 고담이 맡았다.
560년, 고연은 결국 조카 고은을 내쫓고 황제가 되었는데 고연은 황제가 된 후에도 진양에 머물렀고 고담은 그대로 업성을 지켰다. 원래 고연은 자기가 황제가 되면 고담을 황태제로 삼기로 했으나, 막상 황제가 되자 자신의 아들 고백년(高百年)을 황태자로 삼았고 이때문에 형제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561년, 효소제 고연이 사냥 중에 낙마로 생긴 상처로 사망하자 고백년이 어렸으므로 유언에 따라 고담이 뒤를 이었다. 고연은 사망 전 고담에게 편지로 '''내 아들은 잘못없으니 황제가 되더라도 제발 죽이지는 마라.'''라고 썼다.
2.2. 사치향락에 빠지다
562년, 장남 고위(高緯)를 황태자로 삼았다. 관료들인 고원해(高元海), 필의운(畢義雲), 고건화(高乾和) 등이 동의해서 고귀언(高歸彥)을 기주(冀州)자사로 임명하고 중앙에서 내쫓았다. 고귀언이 기주에 도착했을 때 여사예(呂思禮)가 반란 계획을 보고했다. 무성제 고담은 장수 단소(段韶), 누예(婁叡)를 보내 그를 체포하고 아들 및 손자들과 함께 처형했다.
여름, 어머니인 태황태후 누씨가 죽었는데 고담은 상복을 입지도 않았을 뿐더러 상중에 계속해서 연회를 열고 음악을 연주했다. 이때 화사개(和士開)가 황제를 말렸지만 빡친 고담은 화사개의 뺨을 때렸다.
고담이 황제가 되자 형 문선제 고양의 황후였던 이씨[1] 와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는 형수인 이씨에게 자기의 요구를 응하지 않으면 아들 고소종(高紹德)을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임신시켰다. 이씨는 부끄러움에 아들 고소종과 만나기를 거부했는데 고소종은 어머니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화가 났다. 그 후 이씨는 딸을 낳았는데 던져 죽였다. 이를 알게 된 고담은 화가 났다.
직후 고소종을 불러 이씨가 보는 앞에서 폭행하고 활을 쏴 죽여버렸다. 이씨가 슬피 울자 화가 난 고담은 그녀를 내던지고 때렸다. 이씨는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곧 회복되었고 고담은 그녀를 궁에서 내쫓아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게 했다.네 년이 내 딸을 죽였으니 나는 네 아들을 죽이겠다!
563년, 고담은 화사개를 아주 신뢰했고, 계속해서 궁에 머무르게 했다. 고담은 화사개가 집으로 가면 곧장 다시 소환했고 이로 인해 화사개는 큰 보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 둘 사이는 황제와 신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으며 화사개는 무성황후 호씨와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화사개는 고담에게 들어가서 즐기고 골치아픈 조정은 관료들에게 맡기라고 했으며 고담은 그렇게 했다. 내정은 조언심(趙彥深), 재정은 고문요(高文遙), 군사부문은 당요(唐邕)에게 맡겼으며 황태자 고위의 교육은 황후 호씨의 형부인 풍자종(馮子琮), 황후의 사촌인 호장찬(胡長璨)에게 맡겼다. 정사는 모두 신하들에게 맡긴 채 3~4일에 한 번씩 조정에 나와 간단한 회의에만 참석했다.
이때 고담의 큰형 고징의 아들 고효유(高孝瑜)가 화사개와 황후 호씨간의 관계를 조사했는데 위기에 처한 화사개와 고담의 사촌 고예(高叡)는 이에 대응하기로 했다. 화사개와 고예는 거짓으로 고효유에게 반역 혐의를 씌웠고 고담은 고효유를 독살했다.
564년, 북주가 군대를 두 개로 나눠 북제를 침략했다. 남군은 달해무(達奚武)가 사령관을 맡고 평양(平陽)으로 쳐들어왔으며, 북군은 양충(楊忠)이 돌궐과 동맹을 맺고 북방을 공격했다. 이에 곡률광(斛律光)을 남쪽으로 보냈고, 고담 본인은 직접 진양으로 가서 북주군을 막았다. 하지만 고담이 진양에 도착했을 때 북주와 돌궐 연합군이 급습해왔다. 고담은 도망갈까 생각했지만 고예(高叡)와 고효완(高孝琬)의 반대로 도망가지는 않았다. 단소는 양충의 공격을 막아냈고, 양충은 철수했으나, 그러는 동안 진양 북쪽 영지는 돌궐족들에게 약탈당했다.
봄, 북제의 형법을 만들었는데 고담은 법을 널리 알리는 것에도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관료들의 아이들에게 법을 공부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전 시대보다 법에 대한 전반적 이해도가 올라갔다. 그리고 징세 제도도 개혁하여 세금 부담을 줄여주는 한편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어 농사를 짓게 했다. 이로써 전반적인 생산력도 늘어났다. 하루는 점쟁이가 와서 황제에게 병이 생길 운이라고 말하자 고담은 이 운을 자기의 조카이자 형 고연의 아들 고백년에게 돌리려고 했다. 고백년의 선생은 가덕주(賈德冑)였는데 이때 고백년은 서예를 배우고 있었다. 고백년은 연습삼아 하필 칙(敕)[2] 을 몇 자 베껴 썼다. 무슨 생각인지 가덕주는 고백년이 쓴 칙을 고담에게 보냈는데 고담은 고백년을 불러 칙을 써보라고 했다. 그리고 가덕주가 보낸 칙과 비교해 보니 과연 필체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호위병을 시켜 감히 황제 자리를 노린다고 고백년을 때렸고 심한 부상을 입힌 상태에서 그대로 참수해버렸다.
565년, 북주의 섭정 우문호(宇文護)가 윤공정(尹公正)을 북제에 평화 사절로 보내, 평화에 대한 보답으로 우문호의 어머니 원씨와 그의 고모 우문씨를[3] 을 북주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고담은 북주와 돌궐이 공격해올까 두려워서 우문씨만 북주로 돌려보냈다. 가을, 고담은 원씨는 그대로 데리고 있으면서 그녀를 이용해 우문호의 약속이 담긴 편지를 받기를 원했다. 단소(段韶)가 반대하긴 했지만 고담은 우문호를 두려워해 원씨도 돌려보냈다. 겨울, 돌궐이 북제의 북방을 침략했는데 우문호는 자기가 혹시나 그들을 속였다고 생각할까 두려워 북제를 공격해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단소와 고장공(高長恭)이 낙양에서 북주의 군대를 물리쳤고 북주군은 철수했다.
2.3. 고위에게 양위하다
조정(祖珽)은 화사개에게 그의 운명이 고담과 엮여 있기 때문에 고담이 죽으면 화사개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황제 자리를 황태자 고위에게 물려주어 황후 호씨와 황제 모두에게 잘 보이자고 했다. 화사개는 이에 동의하여, 천문을 보고 점을 쳐보니 운이 황제보다는 황제의 아버지에게 있다고 보고했다. 여름, 무성제는 이 말을 듣고 그의 황위를 8살난 황태자 고위에게 물려주었다. 이에 고위의 아내인 곡률씨는 황후가 되었고 고담은 태상황제가 되었다.
고담은 황제에서 퇴위를 하긴 했지만, 고위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중요한 결정은 그대로 자기가 했다. 하지만 고담과 황후 호씨의 삼남 고엄(高儼) 편에 서있던 사람들은 불만을 가졌는데, 고엄이 고위보다 어리긴 햇지만 훨씬 더 총명했고 유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 고위가 황제가 되었는지 의아해했고, 고담과 황후 호씨도 고위를 폐위하고 고엄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566년, 화사개와 조정은 고징의 3남 하간왕 고효완(高孝琬)에게 누명을 씌우고 반란 혐의로 고발했다. 고담은 고효완을 사로잡아 심한 고문을 했는데 결국 다리를 부러뜨렸다. 고효완은 결국 이 상처로 인해 사망했고 고효완의 다섯 번째 동생 안덕왕 고연종(高延宗)이 너무 슬피 울었다. 이에 고담은 고연종을 체포해 고문을 가했으나,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567년, 조정은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싶어했다. 그는 조언심(趙彥深), 고문호, 화사개를 부패와 붕당 혐의로 고발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이전에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 스스로 방어할 수 있었고, 조정은 역관광당했다. 고담은 조정을 체포하고 심문하며 그에게 태형 200대를 선고하고 옥에 가두었다. 옥에서 피운 향으로 인해 조정은 결국 눈이 멀었다.
568년, 고담이 병이 들자 관료인 서지재(徐之才)가 그를 돌보며 건강을 회복시켰다. 그래서 고담의 건강이 회복된 후 화사개의 지위가 서지재보다 낮아지게 되었고, 결국 화사개는 서지재를 연주(兗州) 자사로 내보냈다. 겨울, 고담은 다시 갑자기 병이 들었고 다시 서지재를 소환했다. 하지만 서지재가 도착하기 전에 고담은 화사개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죽었다. 사후에 영평릉(永平陵)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