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빈 김씨

 


'''조선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 | 恭嬪 金氏
'''
'''시호'''
[1]
'''존호'''
[2][3]
'''빈호'''
공빈(恭嬪)
'''출생'''
1553년(명종 8년) 11월 16일
'''사망'''
1577년(선조 10년) 6월 13일
(향년 25세)
'''사당'''
봉자전(奉慈殿)
'''원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성묘(成墓)
'''재위'''
'''숙의'''
1573년 ~ 1574년
'''귀인'''
1574년 ~ 1576년
''''''
1576년 ~ 15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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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김해(金海)
'''부모'''
부친 해령부원군 김희철
모친 안동권씨
'''부군'''
조선 선조
'''자녀'''
2남
(1남) 임해군
(2남) 광해군

1. 소개
2. 생애
2.1. 선조의 후궁
2.2. 사후
3. 매체에서
3.1. 소설
3.2.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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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선조의 첫번째 후궁이자 광해군임해군의 생모. 해녕부원군(海寧府院君)[4] 김희철(金希哲)의 딸이다.

2. 생애



2.1. 선조의 후궁


야사에는 소주방 나인이었다가 선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명종의 정실 인순왕후는, 선조가 궁녀를 가까이하지 않길 바랐다고 한다. 당시 명종의 상중이었고, 선조는 의인왕후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적장자는 커녕 궁인이 낳은 옹주조차 귀한 조선 왕실에서 아들을 둘이나 생산한[5] 김씨는 빈이 되었고, 위세가 높았다. 중전 의인왕후 박씨를 제치고 선조의 총애를 독차지했으나, 김씨는 광해군을 낳은 지 2년만에 산후병에 걸려 사망했다.

2.2. 사후


죽어서도 선조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싶었던 공빈은 죽기 전에 "제가 아픈 건 다른 후궁들의 저주 때문입니다" 라고 선조에게 말했다. 실제로 선조는 그걸 믿고 다른 후궁들에게 모질게 대했지만, 이후 소용 김씨가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되어 인빈으로 승격되었다. 인빈 김씨는 왕에게 공빈의 허물을 자주 들춰내었고, 선조는 공빈을 잊고 인빈을 총애하게 되어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을 포함한 여러 자녀를 낳았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인 1610년(광해군 2년) 3월 29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었으나조선왕조실록 기록, 정원군 이부의 아들인 능양군 이종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이 폐위된 직후인 1623년(인조 1년) 3월 18일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
추촌과 강등 과정에서 묘소의 급도 같이 변하여, 광해군이 왕후로 추존했을 때에는 왕후의 묘역으로 승격되어 성릉(成陵)이라는 능호를 받았으나, 마찬가지로 인조반정 후에 다시 강등되어 성묘(成墓)라고 바뀐 뒤 오늘날에 이른다.[6] 광해군이 죽기 직전에 생모의 무덤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언대로 실행되어, 광해군묘가 성묘 근처에 있다.

3. 매체에서



3.1. 소설


드라마 <허준>의 시나리오의 바탕이 된 소설 동의보감의 작가였던 이은성 씨가 집필한 소설 <동의보감> 후반부에 매우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아름다고 어진 인물로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는데, 남동생 김병조가 구안와사에 걸리자 선조에게 아뢰어 궁에서 치료를 받게 해준다. 이때 어의 양예수가 치료를 맡으나 구안와사가 고치기 어려운 병인척 호들갑을 떨어 공빈의 총애를 받으려다가 공빈이 김병조가 위독한 줄 알고 눈물 흘리는 등 사태가 좋지 않게 돌아갔고 이 때문에 허준으로 주치의가 교체된다. 허준은 김병조가 단순히 구안와사 뿐만 아니라 위암에 걸려있다고 진단하고 사흘 안으로 이를 치료해내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정말로 치료해냄으로 공빈의 총애를 받게 된다. 이후 허준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지만 3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선조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최음제와 묘약 등을 무리하게 복용하다가 사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광해의 연인에서는 김수빈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며, 나인 시절, 선조의 승은을 입고 대비의 명으로 죽게 된 동무를 구하고자 빌었던 모습이 선조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 아들을 둘이나 낳았으나 후궁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선조는 공빈이 의지할 사람을 없애가며 공빈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겼다. 게다가 대비의 명으로 인빈 김씨가 선조의 눈에 띄게 되면서 점차 고립되어가다가 차라리 선조에게 아들과 함께 궐에서 내보내달라고 했지만 묵살당했다. 어느 날 사망했다고 하는데, 강 상궁[7]은 인빈의 수족이었던 자신의 오라비가 인빈의 사주를 받아 그녀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생전에는 광해군에게 삶은 달걀을 만들어 주는 상냥한 어머니였으며, 광해군도 생모를 그리워한다.

3.2. 드라마


공빈이 아마도 가장 긍정적으로 묘사된 작품 중 하나. 기품이 있으며 인물의 됨됨이와 재주를 잘 살피고 아끼는 성품을 지녔다. 동생인 김예직의 구안와사와 반위를 고쳐준 허준을 크게 신임하여 궁의가 되어 줄 것을 거듭 청하였으며 훗날 허준의 과거 죄가 드러나 하옥되었을 때에도 선조에게 그의 사면을 간곡히 부탁하는 등 후원자가 되어 준다. 훗날 선조의 총애를 빼앗아간 인빈이 방자한 태도를 보이고 선조가 병중인 자신조차 돌보지 않고 인빈과만 있으려 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 등에 크게 상심하여 진심통(심근경색)에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 결국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왕자 둘과 허준을 데리고 외출을 나가는데, 그곳에서 왕자들을 부탁한다는 일종의 유언을 남기고 얼마 후에 사망한다. 작중 허준에게 있어서 공빈이 끼친 영향은 상당히 큰데, 혜민서 참봉으로 남아있던 허준이 선조의 눈에 드는 계기가 되어 주었을 뿐 아니라 그후에도 허준의 재주와 인품을 아껴 후히 대우해 주었다. 이런 공빈의 죽음에 상심한 허준은 딱히 처벌을 받지 않았음에도 의술 정진을 위해 당분간 내의원을 떠나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훗날 돌아와서도 당파 싸움의 적대 세력과 선조의 눈 밖에 나서 여러모로 괴로운 광해군을 성심을 다해 모시고 병을 치료한다. 힘들고 괴로울 때엔 공빈이 남긴 마지막 부탁을 떠올리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육체의 병 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도 고쳐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심의가 되겠다는 허준 본인의 목표와 상통해서 더욱 가슴에 남은 듯 하다.
[1] 인조에 의해 삭탈된다. [2] 인조에 의해 삭탈된다. [3] 추탈된 공빈의 존호 경렬명헌(敬烈明獻)은 이후 그대로 효종인선왕후의 휘호로 재활용된다.[4] 공성왕후 추존 때 부원군으로 봉해졌다가 인조반정 이후 추탈되었다[5] 장남 임해군과 차남 광해군.[6] 다만 광해군이 조성한 묘소 근처의 문인석이나 무인석, 석등 등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성릉으로 조성할 당시의 모습을 여전히 살펴볼 수 있다. 이런 사례는 과거 폐비 윤씨의 무덤인 회묘가 먼저였는데 회묘도 본래는 윤씨지묘라는 이름의 무덤이었지만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왕후로 추증한 후 무덤도 회릉으로 고쳤다가 중종반종 이후 격하되어 회묘가 되었지만 그래도 릉으로 격상되었던 시절의 모습이 남아있다.[7] 위에서 언급됐던, 선조의 승은을 입는 바람에 죽게 되었던 그 동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