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순
1. 삼국시대의 인물 郭循
郭循
(? ~ 253)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이자 자객. 자는 효선(孝先).
〈장억전〉과 자치통감, 〈조방전〉에는 곽수(郭脩)라고 나온다.
본래 행실로 서주(西州)에 이름이 알려졌고 250년에 촉한의 장군 강유가 위나라의 서평 지역을 공격할 때 당시 중랑장이었던 곽순은 촉군에 붙잡혔는데, 촉에서는 곽순을 좌장군으로 임명했다.
곽순은 원래 촉의 황제 유선을 암살하려는 뜻을 품어 잔치가 벌어졌을 때 임금에게 술을 권하면서 축수(祝壽: 오래 살기를 기원함)를 하게 되어 있는데, 이를 이용해 촉나라의 조정에서 연회가 열릴 때마다 축수하면서 유선에게 가까이 다가가 칼로 찔러 죽이려 했으나 매 연회 때마다 유선의 경호병들이 유선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서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때문에 유선을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촉나라의 대장군인 비의를 암살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그런데 비의는 항복한 자들과 매우 친했기에 자연스럽게 곽순과도 친했는데 이를 보고 장억이 말한다.
253년 세수(歲首, 1월 1일)에 새해를 맞이해 촉의 장수들이 한수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원래 비의는 성품이 너그러워서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데다가 이 날은 비의가 잔치를 즐기면서 술을 많이 마셨다. 기회를 노리던 곽순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말채찍 안에 숨겨온 칼로 비의를 칼로 찔러 죽이니 곽순은 바로 붙잡혔다가 얼마 가지 않아 사형당했다.옛적 잠팽은 군대를 거느렸고, 내흡은 절을 지니고 있었는데[1]
모두 자객에게 해를 입었으니, 진중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명공께서는 지위가 존귀하시고 권세가 무거우시니 의당 예전 일(잠팽과 내흡)을 살펴보소서.
위나라에서는 죽은 곽순을 섭정(聶政)이나 부개자(傅介子)[2] 에 비교해 칭찬하면서 장락향후로 봉하고 식읍 1천 호를 준 다음 시호를 위후라고 했다. 또 곽순의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받게 했다.
배송지의 평은 냉담한 편이다.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 예도 아니고 유선은 보통 이하의 군주에 비의는 중간정도 재능을 지닌 재상이니 둘을 죽인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위나라에 은혜를 입은 것도 아니고, 헛되이 몸을 망쳐 의롭지도 않고 공을 세운 것도 아니니 그야말로 광부(狂夫)에 가깝다고 평했다.[3]
[image]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도 한 컷 등장하는데, 그 한 컷이 비의 암살이기에 강렬하다.
삼국전투기에서는 '곽수'로 나오며, 암살을 했다는 것 때문인지 고르고13의 듀크 토고로 패러디되었다.
2. 조선의 문신 郭珣
郭珣
(1502년∼1545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백유(伯瑜), 호는 경재(警齋). 성기(成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원(孝元)이고, 아버지는 사재감첨정수녕(遂寧)이며,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김철단(金哲端)의 딸이다.
1528년(중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ㆍ호조좌랑ㆍ진보현감(眞寶縣監)ㆍ기주관(記注官) 등을 거쳐, 1543년 서천군수가 되었다. 이듬해 사예(司藝)ㆍ사성(司成)ㆍ장령(掌令)이 되었다.
그는 장령으로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상소하였으며, 1545년에는 교리ㆍ봉상시정ㆍ사간을 역임하였다.
중종이 죽고 인종 이 즉위하자, 소윤과 대윤간의 세력투쟁이 첨예화하더니 마침내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횡포가 심하자 관직을 포기하고 청도 운문산(雲門山)에 입산하였으나 을사사화 때에 장살당하였다. 1568년(선조 1)에 관직이 환수되고 영천(永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3. 삼국시대의 인물 郭純
郭純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263년에 한가현의 장을 지낼 때 위나라에서 파견된 등애와 종회 등의 공격으로 위가 촉을 병탄한 후에 무릉군 오계에 거주하는 무릉만이 봉기할까 두려워해 논의를 했는데, 이에 위나라는 곽순을 무릉태수로 삼아 이릉대전 이후로 계속해서 오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던 무릉만을 회유해서 아군으로 삼기 위해 보냈다.
무릉에 주둔하면서 일부 무릉만 지도자들이 그에게 호응했기에 곽순은 그대로 군사를 이끌고 서양현으로 진군하면서 천릉을 차지해 오나라의 군 내부를 두렵게 했는데, 오나라에서 무릉태수를 겸임해서 임명된 오나라의 평위장군 종리목이 공격하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을 군법으로 처리하고 밤낮으로 길을 나아가 산 속의 험준한 곳을 따라 행군하자 생각지도 못한 신속한 진군에 무릉만의 지도자들은 죽고 곽순의 군대도 흩어진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종리목의 패러디가 아이작 클라크이라서 한스 타이드먼으로 패러디했다.
[1] 모두 군의 고위직이었다는 말. 비의는 대장군이니만큼, 잠팽이랑 내흡처럼 암살당하고 싶은거 아니면 몸 좀 사리라는 소리다.[2] 전한 시절에 서역국인 대완국과의 교역을 누란국이 가로막아 한 나라 사절을 공격하니 한소제 때 누란국에 보내져 그 나라 왕을 살해한 인물이다.[3] 곽순을 위해 변호하자면 우선 곽순은 스스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힌 케이스다. 그러나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인 삼국시대 특성상 항복하여 남겨진 집안의 가솔들은 항복이 의도가 있든 없든 보통 연좌제에 걸려서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곽순이 위나라에 남겨진 가족을 위해서 공을 세우려고 한 것인지 혹은 배송지의 평대로 미쳐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전자였다면 곽순 입장에서는 꽤나 억울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