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병
1. 개요
승려들로 조직된 군대. 대개 사찰들이 전쟁으로 인해 혼란한 시기에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승려들이 무장을 하고 절을 지키게 되었으며, 이러한 활동이 보다 조직화된 것이 승병이라 할 수 있다.
비단 전란의 시기가 아니더라도 산 속에 있는 절들은 많은 물자와 보물을 소장하고 있어 도적의 습격에 비교적 쉽게 노출될 수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점이 유럽의 가톨릭이나 정교회의 수도자들과도 비슷하다. 기독교의 수도원도 소장 가치가 높은 고서적이나, 신자들의 헌금으로 제작된 성유물 같은 값나가는 물건이 많다보니까 도둑들이나, 해적 및 외적의 약탈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수도자들이 자체적으로 검술을 익히거나, 아예 이런 무장한 수도자들로 구성된 기사단까지 결성될 정도였다. 중앙아메리카의 아즈텍 제국에서도 같은 이유로 사제들이 자기들만의 사병을 보유하기도 했다.
원래 동아시아에서 불교 사원세력은 그 자체로 일종의 봉건 영주 세력에 가까웠다. 단순히 사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 오래된 사찰들은 대부분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으로 건립되어 산과 강을 경계로 막대한 토지를 갖고 있었고 수백명 이상의 노비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도 고려시대에는 사원들이 사실상의 사병들을 보유했었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집권자들은 선종을 키우고 기존의 주류교단이었던 교종을 탄압했는데 그 때문에 특히 최씨정권 시기에 교종 사원들의 반란이 상당히 잦았다. 사원들은 수백명씩의 군사를 동원한 반란을 계속 일으켰고 그 와중에 교종 사원들이 결정적으로 몰락했다.
2.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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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삼국시대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전래되어 남북국시대부터 국교로 지정돼 나라와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고, '불교를 굳게 믿음으로서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보위해야 한다'는 한국 불교만의 독특한 사상인 '호국 신앙'[2] 과 결부되었고, 이에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승려들은 살생을 금하는 교리를 어기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군대를 조직해 이들을 격퇴하는 데에 힘을 보탰다.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승병은 고려사 최영전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때 당태종의 침공에 맞서 싸운 3만여 명의 승병들이다. 다만 최영이 승병(勝兵), 즉 승리한 병사들을 승려 병사(僧兵)로 착각하고 말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현존하는 곳곳에 당시 승려로써 참전한 이들이 있기는 있었다고 암시는 되며, 고구려에서도 신성이라는 승려 장수가 있긴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제 멸망 당시 귀실복신과 함께 백제 부흥군을 지휘했던 승려 도침. 신라 말기에는 민란이 잦아지다 보니 사원을 지키기 위해 해인사의 경우처럼 사원에서 자체적으로 경비 목적으로 승병을 양성하기도 했으며[3]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도 사원의 승병이 군벌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2.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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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5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오백나한도 중 제329 원상주존자로 묘사된 고려시대 승병의 모습. 일본 이데미츠(出光) 미술관에 있었으나, 고려산업 신성수 회장이 매입하여 현재 부산 일암관에 소장돼있다.
고려 때엔 가정을 가진 동시에 토지가 있으면서 노역을 하며 승려로서의 생활을 이어가는 '수원승도', 또는 '만불향도'[4][5] 라고 하는 평신도 집단의 승려들을 징발해 전쟁에 동원하는 '항마군'[6]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 밖에도 많은 승려들이 국난 극복에 힘을 보탰다. 몽골군이 고려로 쳐들어올 때 적장 살리타이를 전사시킨 김윤후도 승병이다. 이들 승병은 고려 초기 거란족과 여진족, 이후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활약을 펼쳤고, 그 후에 높아진 위세를 등에 업고 하나의 거대한 이익집단으로 변모한다. 그 외에 각지에 퍼져 있는 '원'[7] 의 운영도 보통 승려들이 맡았다고. 지방행정망이 발달한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운영하게 되지만.
거대한 사찰에서는 소유한 토지와 승병을 늘려가며 재물과 권력을 닥치는대로 긁어 모았고,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된 승려들은 무신집권시기 이의방을 암살하기 위해 무려 2천여 명의 승려가 집결해 도성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였을 정도로 커다란 위세를 떨쳤다. 이때 수적 열세로 인해 불리해진 승병들은 이의방이 급히 불러모은 병사들을 상대로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이 대등한 싸움을 벌였고, 이의방의 휘하 병사들은 큰 피해를 입어가면서도 끝내 귀법사, 중광사, 홍호사, 홍화사 등 여러 절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8][9]
최씨 정권 시기에는 흥왕사를 비롯한 개성 인근 왕실 원찰의 승려들이 집결하여 최충헌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것을 근왕세력의 친위쿠데타로 해석하기도 하고 혹은 문벌귀족들과 연결되어 있던 사찰 차원에서 직접 주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사건 후에 최씨 무신정권은 조계종을 전략적으로 지원하며 불교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고려 말기에 이르면 이렇게 재물과 승병을 비롯한 군사력을 갖춘 대사원이 난립하여, 대농장을 경영하며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금 장사를 하고 술을 빚거나 주색을 밝히며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것은 정도전을 위시한 조선 개국 과정에서 불교를 만악의 근원으로 여기며 철저히 숭유억불 정책을 펴는 계기가 된다.
의외지만 고려 말기에 초기 화약을 다루던 병사들은 승려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화약이 지금처럼 안정된 물건이 아니라 불에 적당히 익으면 터지는 떡화약이라 종교적인 수양 없이는 다루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당시 화약무기는 지금처럼 화포를 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다이너마이트마냥 화약에 불붙여 던지는 형태였기 때문에 화약에 불을 붙이고 적당히 익기를 기다려 던지는 모양새였는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물건이라 제정신으로는 쓸 수 없었을 거라고.
2.3.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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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유억불 정책이 펼쳐진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이전의 시대에 비해 억압받았고 사원의 토지가 몰수당하는 등 이전과 같은 승병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그래도 임진왜란 당시 휴정대사나 유정대사 같은 수많은 고승들이[10] 승병[11] 을 조직해 왜군과 맞서 싸우고, 축성에도 종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승병이 지역 방어에 유용했던 점, 남초 직업군이며 인력과 경비를 자체 조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보부상처럼 유사시 즉시 동원가능한 상비전력으로 활용했다. 왕실에서 승려 중 도총섭을 임명하여 승병을 통제하는 동시에, 남한산성에 7개의 승영 사찰, 북한산성에 11개의 승영 사찰을 지어 승병을 주둔시키고 성을 유지시키는 한 축으로 삼고, 임진왜란 때처럼 축성에 계속 종사시키는 등 꾸준히 국왕 직속의 상비 전력으로 유지하기 시작한다.
승군이 하나의 요역으로 정착되었으나, 각 사찰에서 인원을 징발하는 '의승방번제' 로 유지하기엔 무리가 많아서 승병을 보낼 사찰에서 돈을 받는 '의승방번전'으로 바꾸게 된다. 물론 돈으로 때우기 시작하자 부정부패가 만연하기 시작하고, 승병 대장인 팔도도총섭은 막대한 비자금을 축적하기 시작한다.[12] 영조와 정조가 이를 막기 위해 손을 대보지만, 납부 금액만 약간 줄고 별 다른 성과 없이 계속 같은 모양새로 유지되다가 고종 때 되어서 갑오개혁으로 승병제가 폐지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3. 일본 소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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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승병은 '소헤이'[13] 라 불리는데 한국의 승병과는 달리 일종의 독립적인 무력 집단이었다는 게 특징이다.
헤이안 시대에 일본의 사찰들은 이미 다이묘화 되어가고 있었는데, 유명한 사찰은 중앙과 지방의 황실, 귀족, 혹은 무사들로부터 토지를 시주받아 넓은 장원을 보유하였다. 사찰이나 신사에는 면세 특권이 있었기 때문에 귀족이나 지방의 영주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들을 기꺼이 사찰과 신사에 기부하고, 이렇게 위장전입 형식으로 사찰과 신사에 토지를 기증한 다음에는 원래 주인인 자신들은 현지 관리인 자격으로 실효 지배를 행했다. 많은 금전과 보물, 물자도 사찰의 창고에 쌓여갔다. 이들은 도적으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고 주위의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사찰의 부를 노리거나 종단을 괴뢰화하기 위해 압박을 가하는 다른 정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승병을 조직하게 된다.
승병이 본격적으로 위세를 발휘한 것은 11세기 중반부터였다. 당시 일본에는 남도북령[14] 으로 대표되는 대사원 세력이 매우 막강했다. 심지어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시라카와 덴노마저도 엔랴쿠지의 승병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했을 정도로 위세가 강했다. 이 엔랴쿠지의 위세가 얼마나 큰지를 표현한, 시라카와 상황의 발언이 유명하다. "천하에 내 뜻대로 할 수 없는게 세가지가 있는데 카모가와[15] (賀茂川 교토 시내를 흐르는 강)의 강물과 쌍륙(당시 유행한 일종의 도박)의 주사위 패, 그리고 엔랴쿠지 승병이다." 자연 현상인 강물과 도박의 운수에 맞먹을 정도로 다루기 힘든 것이 당시 승병 집단이었다는 것. 시라카와는 헤이안 시대 때 절대적인 권세를 누렸던 후지와라 가문을 숙청하며 권력을 장악한 인물인데도 이런 한탄을 했을 정도면 승병들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이 간다.
이들의 위세는 그야말로 끝이 없어 지방관인 고쿠시(國司)마저 시비가 붙으면 문자 그대로 깨갱해야 했으며, 천황은커녕 상황조차 국사들을 보호하기 힘들었다. 국사가 대사원 소속의 승려를 체포하거나 진압과정 중 실수로 죽이기라도 하면, 설령 그 승려가 부패한 승려였다 해도 대사원 측에서는 휘하 승병들과 연계된 신사[16] 들의 신여(神輿)나 신목(神木)을 교토까지 들고 와 방치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17]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따르면 신여나 신목에는 신령이 강림하기 때문에 저렇게 길 한복판에 내버려두면 천벌을 받는다. 그래서 상황마저 대사원측에서 저런 식으로 나오면 사실상 어떻게 할 도리가 딱히 없었다. 이 시기에는 승병들이 떼거지로 교토에 쳐들어오는 등 하도 극성이라 상황 측에서는 무사를 적극적으로 등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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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미친 척하고 쓸어버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런 경우 이들은 신여나 신목을 교토로 가져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본업에 맞게(...) 종교적인 저주 의식도 행했는데, 간파쿠 후지와라노 모로미치의 경우 이러한 고소를 보다 못해서 무사들을 동원해 무력진압을 해버렸고, 이 와중에 실제로 신여에 화살이 맞고 엔랴쿠지 승려 한 사람이 화살에 맞아 죽기도 했다. 엔랴쿠지 승려들은 며칠에 걸쳐 5천 명이 히에이 산에 모여서 대반야경을 독송하면서 승려들을 무력진압한 간파쿠 후지와라노 모로미치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고, 후지와라노 모로미치는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하고 그의 아들 타다자네가 간파쿠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게 일본 역사에서 굉장히 엄청난 나비효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간파쿠 후지와라노 모로미치 생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던 후지와라 셋칸케의 세도 권력이 모로미치의 갑작스러운 급서 이후 간파쿠가 된 다다자네가 아직 정치적 경험이 없어서 국정을 장악하기 어려운 틈을 비집고 "나이 어린 호리카와 천황의 정치를 보조한다"는 명목으로 시라카와 상황이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정치력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후지와라 셋칸케의 세도 정치가 고소에 대한 무력 진압 한 방에 날아간 것과 같은 꼴이 되어버려 조정이나 관에서 승려들의 고소를 마냥 강경하게 무력진압하기도 어렵게 된 것. 그리고 이러한 고소를 다시금 무력으로 진압하고 몰락한 이가 헤이케였다. 1180년 다이라노 시게히라가 당시 헤이케에 반대하며 거병한 겐지의 편에 가담한 난토 즉 나라의 고후쿠지 승병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공을 펼쳤는데[18] 하필 불길이 고후쿠지나 도다이지 같은 대찰들을 모조리 태워버렸던 것이다. 일본사에서 말하는 '''남도 소각(南都焼き討ち난토 야키우치)'''이라는 사건이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이듬해에 병으로 사망했는데,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기요모리가 죽기 전에 위에 '무(無)'라는 글자가 적힌 불이 붙은 수레를 기요모리의 집 앞으로 끌고 가는 이들이 목격되었고, 무(無)라는 한자의 의미를 묻는 사람에게 그 수레를 끌고 가던 사람은 "나라의 대불을 불태워 없앤 대악인 기요모리를 무간지옥으로 끌고 갈 수레라는 뜻이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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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가 되면 사찰은 사실상 하나의 '종교 번', 또는 비유적인 의미로 '다이묘'가 되어버렸으며,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사찰 도시가 발달했다. 수 백 혹은 수 십개의 절을 수반한 종단를 기반으로 하여 경제적 이익을 두고 다른 종단의 승병들끼리 싸우거나 심지어 봉건 영주인 다이묘들과 싸우기도 하였고, 반대로 정치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다이묘의 세력에 가담하여 힘을 보태기도 했으며, 단순히 다이묘에게 돈을 받고 승병을 파견해 싸우는 용병일을 하기도 했다. 전국시대의 승병들은 이들의 만행을 보다 못한 오다 노부나가가 완전히 때려잡을 때까지 당시 일본의 혼란을 더 부추겼으며, 세금을 걷는 것도 모자라 주변 민가를 약탈하거나 기근이 들었을 때 재산은 한 푼도 풀지 않고 나몰라라 하는 등, 불교 종단이라고는 믿기 힘든 일들을 자행했다. 한마디로 땡초들. 이런 행태를 부리는 쪽은 주로 당시 일본의 거대 종파였던 진언종, 천태종, 일련종,[19] 정토종, 정토진종 등 웬만큼 커진 종단에 많이 보였으며, 그 당시 종단의 교주들은 실질적인 다이묘라고 봐야 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세력권 내의 영지에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도 신라, 고려 시대 사찰의 재산과 토지가 점점 늘어나게 되자 이를 방비할 목적으로 승려들이 자체적으로 경비대를 조직하기도 했지만 이 정도로 거대해지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대처승 제도를 이용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절의 경영권을 세습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각 종단들이 정치 세력화하는 것을 가속시켰다[20] . 그래서 나중에 메이지 유신 이후로 공경과 사무라이로 나뉘어있던 귀족 계층을 일원화한 화족 계급이 신설되자, 그때까지 존속해있던 중대규모 이상의 종단의 세습 주지들이 규모에 따라 차등하여 귀족 작위를 하사받고, 화족의 일부로 편입되기도 했다[21] .
실제로 이들은 말이 승려이지 온갖 주지육림을 즐겼고, 심지어 떠돌이 낭인이나 도적을 절에서 고용해 머리만 깎여놓고 승병이라 칭하는 깡패 집단이었다. 무신론자인 오다 노부나가[22] 에게 허구한 날 대들던 히에이산 엔랴쿠지 승단(천태종 계열)이 있었다.
오다는 그래도 여러번에 걸쳐 세금만 내면 그냥 뭘 하던지 신경 안 쓴다고 했지만 이들은 오다를 불적이라고 이단시여기며 저항했고 결국 참다 못한 오다는 엔랴쿠지를 대대적으로 공격하려 했는데 이에 아케치 미츠히데를 비롯한 주요 중신들이 오랜 역사를 가진 엔랴쿠지를 공격하는 것은 민심을 잃기 쉽다고 반대하자 오다는 "아니, 민중들은 되려 그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라며 '''히에이 산을 불태워버렸다.''' 물론 이들도 죽기살기로 덤벼들었지만 이미 서양제 총포로 중무장하고 전문적인 전투 훈련을 받은 오다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으며 불바다가 된 승단 쪽에선 여자들도 엄청 나왔고 옷도 챙기지 않고 나오는 승려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오다는 분노하면서 "말로는 청빈과 경건함을 외치는 혹세의 무리들이 바로 저런 것이다! '''죄다 죽여버려라!'''"라 말하고, 그렇게 수천에서 수만여 명이 학살당하자 "저놈들이 말하는 불지옥이 나타난 것뿐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시 땡중들의 횡포에 학을 떼던 민중들은 노부나가의 행동을 영웅시했다는 기록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걸 보면 오다도 백성들이 그 당시 부패한 승려들의 횡포에 대하여 어찌 생각했는지 사전 조사를 다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엔랴쿠지 토벌에 주저하던 미츠히데 역시 평소에
라고 하며, 당시 백성들이 전쟁 뿐만 아니라 승려들에게도 온갖 고초를 겪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훗날 에도 시대 성리학자들(...)도 오다 노부나가의 이런 행위를 옹호하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라이 하쿠세키.仏のうそは方便と云う。侍のうそは武略と云う。士民百姓はかわゆきことなり。"
"부처의 거짓말은 방편이라 하고, 사무라이의 거짓말은 무략이라 한다. 사민 백성들이 가련할 따름이다."
그나마 당시 기록에서도 엔랴쿠지에 죄다 썩은 자들만 있지는 않아서 오다에게 항복하고 이 기회에 제대로 승려답게 청빈하게 살자고 하던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엔랴쿠지에서 배신자로 몰려 학살당하거나 쫓겨 나왔다. 이들 중 일부는 오다군이 쳐들어오자 상세하게 길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기도 했다. 처음에 오다는 '더러운 배신자가 아닌가?' 라고 했지만, 그들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엔랴쿠지가 너무나도 썩어서 결국 오다님의 말대로 불로 다 태워야하기에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실토했다. 그리고 이들은 마지막 부탁이니 엔랴쿠지 창건 이후 계속 밝혀온 법등 하나만은 남겨서 처음의 뜻을 기리고 다시는 더럽히지 않도록 해달라며 애원했고 딱 1개의 법등이 남아서 지금도 일본에 있다.[23]
물론 다이묘들에게 있어서 불교 종단들은 중요한 정치적 수단이자 돈만 있다면 쉽게 군사력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노부나가를 싫어하던 다른 다이묘들은 맹렬하게 노부나가를 비난했다. 그 중에서도 열렬한 불자이던[24] 다케다 신겐이 경악하여 불타버린 엔랴쿠지를 중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정토진종[25] 계열의 소헤이인 혼간지 세력은 8세 법주 혼간지 렌뇨의 카리스마와 능력으로 오오미, 호쿠리쿠 일대 세력을 구축하였다. 심지어 카가 국에서 잇코잇키를 일으켜 다이묘를 몰아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렌뇨의 아들인 간쇼지 렌쥰과 혼센지 렌고가 서로 대립하여 내전을 벌인다. 결국 패배한 렌고는 파문 당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내분에 다른 거대 종단인 일련종과 롯카쿠 사다요리, 아사쿠라 타카카게 등 주위 다이묘들의 공격으로 야마시나 혼간지가 불타버리는 지경에 이르자 견디지 못한 10세 법주 혼간지 쇼뇨는 본산을 지금의 오사카인 이시미야 혼간지로 옮긴다. 물론 정토진종이 각지에서 탄압 받는 건 달라지지 않아서, 미카와에선 마츠다이라 가신들까지 정토진종에 가세하여 잇코잇키를 일으키기에 이른다.[26] 쇼뇨의 아들인 11세 법주 혼간지 켄뇨는 더욱 더 극렬하게 다이묘들에 대항하는 정책을 펼쳐 각지에서 잇코잇키를 일으켰다. 이때문에 고생한 다이묘가 우에스기 겐신과 오다 노부나가. 특히 다케다 신겐은 우에스기 겐신을 견제하기 위해 호쿠리쿠 일대의 정토진종 신도들에게 잇코잇키를 사주하였다. 켄뇨는 처음에는 노부나가에 신종하는 자세를 취했으나, 이후 압박이 거세지자 그를 불적으로 규정하여 10년에 걸쳐 항전을 펼쳤다. 노부나가는 1570년 혼간지 세력과 미요시 3인중이 힘을 합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이시야마 혼간지를 공격하나 노다성, 후쿠시마성에서 대패하고 만다. 여기에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롯카쿠 요시카타까지 혼간지 세력에 가세하자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중재로 혼간지 켄뇨와 화의를 맺는다. 여담으로 사이가 마고이치의 사이가슈는 처음에는 오다군에 가세했으나 이들도 정토진종 신도들이라 이후 혼간지 세력에 가세한다. 이후 노부나가는 이세 나가지마에서 일어난 잇코잇키로 피똥 싸게 된다. 혼간지의 방관 시모츠마 라이단이 일으킨 잇코잇키로 여러 일족과 장수들을 잃는 등 매우 고전하다가, 잇키 세력이 식량이 떨어져 항복하자 모두 총살에 처하고 나가지마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1574년 타카야성 전투에서 오다군이 승리하나 다케다 카츠요리가 침공해오자 결국 다시 화의를 맺는다. 물론 이 화의도 그리 오래가지 않아 1576년 텐노지 전투가 일어난다. 결국 1580년 오오기마치 덴노의 중재로 혼간지 켄뇨가 귀순하면서 이시야마 전투는 끝이 나게 된다. 이때 혼간지는 오다군에 계속 저항하자는 큰아들 혼간지 코뇨와 귀순하자는 3남 혼간지 쥰뇨가 대립하였고 켄뇨의 아내인 뇨쥰니가 쥰뇨를 후계자로 지지하자 히가시혼간지, 니시혼간지로 분열하고 만다.
묘법연화경(법화경)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27] 종파인 일련종, 나무아미타불만으로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정토진종(잇코잇키) 등이 있었다. 이들은 점점 시대가 지나고 초창기에 비해 세력이 커지자 자신감이 생겼는지, 자신들의 종교를 강권하는 성격도 가지게 되었으니 그나마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쪽은 정상적인 불교 집단이라기보다는 민란 세력에 가깝기도 한데다,[28][29] 혼간지 켄뇨나 여러 종단이 전투용으로(...) 신도들을 선동해버려서 민란을 일으킨 정도이므로 광신도라기엔 뭔가 아리송한 면이 있다. 일본 불교는 오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것도 많아져 일본의 승병을 아랍 및 유럽 지역의 광신도와 같다고 보기에는 좀 모호한 면이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광신도가 아니라 겉으로 종교를 내세워 특권을 누리고 권세를 휘두르다가 반대파가 생기면 스스로 광신도처럼 보여 내세를 들먹이며 겁을 주는, 완벽히 속세의 권력 맛에 찌들은(...) 자들이었다.
다만, 위에서 보이는 일련종, 일련정종[30] 같은 니치렌(일련)을 교주로 하는 종단이 보이는 호전성은 부패에서만 오는것이 아니었다.
- 묘법연화경의 교리 자체의 특이점. (이하 법화경) 법화경이란 불교계의 마지막 불경으로서, 석가세존이 입적하기 3년전부터 설법한 내용들을 담은 경전이다.
법화경은 대승 불교에서 부파 불교와 갈라질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대승 불교에서 중요한 경전들 중 하나이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법화경의 내용은 혁신적인 면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남녀평등, 불성의 강조, 현실 중시, 계급 부정[31] 등이 있다. 추가로 일련종은 기복신앙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일련종의 밀교성은 일본 불교답게 상당히 강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기복신앙의 도구로써 쓰인 염불을 대신할 겸, 일련종의 핵심인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경을 외도록 하였다. 다만 기복신앙의 현신인 신토에 대한 적개심은 두드러지지 않는데, 이는 주로 교리, 철학적인 면에서 일본 불교 전체가 너나 할것없이 신토를 깔보고 있었던 것도 있다. 일련종의 주된 적은 일본 전체에 이미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다른 불교 종단들이었다. 법화경에 따르면,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충격이었던 이 설법을 석가세존이 얼마 말하지도 않았는데 나라한 대부분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나라한들이 떠나갔다는 기록은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해석이 많다. 대승 불교에서 부파 불교와 찢어지면서 기존 경전의 가르침에도 결별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것.
- 종단의 시초부터 있었던 호전성 문제. 다른 종파를 모조리 부정했기 때문에 적대감을 끌은 것이 있다. 법화경 항목에도 있지만, 일련종의 실질적 창종자 니치렌은 "지금까지 이전경을 믿었던 종파들은 다 없애버리고 법화경만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이 망한다"라는 주장을 했다.[32] 실제로 이 때문에 생전의 니치렌은 수 차례 처형 당할 위기를 겪는데, 이는 사회적 변혁을 꾀했다는 것보다도, '민심을 이반시키고 사회불안을 조장한다' 라는 것이 큰 이유였다. 더구나 당시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 있었던 시기였는데, 니치렌은 가마쿠라 막부가 법화경만을 믿고 다른 경전들의 가르침은 폐기하지 않으면 몽골군이 침공한다고 주장하였고 이게 실제로 들어맞아버리자 니치렌은 위의 주장을 더 견고히 했으며, 더 나아가 여몽연합군이 카미카제 등의 여러 문제를 겪고 후퇴하자 니치렌은 막부군이 나름대로 분전한 것은 인정치 않고 "카미카제가 분 것은 내가 기도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해서 가마쿠라 막부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니치렌의 주장에 따라 니치렌 사후 일어난 일련종이나[33] 조금 더 나중에 발족한 일련정종 등은 니치렌의 주장인 닛쇼안고쿠론을 끊임없이 변주하면서 당시의 문제를 모두 "법화경만을 신봉하는 자신들의 종파가 아닌 다른 종파가 일본에 있기 때문"이라 주장하면서 제2의 니치렌을 자처하며 호전적인 교리로 행동하였다. 때문에 일련종은 일본 불교에서도 불교 기준으로 볼 때, 이단급 종교적인 성향[34] 을 강하게 가지는 교파이기도 하다. 설법에서 말법 시대의 부처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도 있다.
- '주경이 같은 묘법연화경인데도 중국과 한국의 천태종단들은 왜 과격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에는 답이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 천태종은 밀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도교[35] 의 선도 사상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선종이라는 점이다. 비록 현지에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이미 박힌 돌이었던 다른 종단을 몰아내려 했던 일련종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현지와 친밀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종단이었기 때문에 갈등을 유발할 계기가 없었다. 두번째, 천태종은 '묘법연화경 제일'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태종은 법화경을 중심으로 여러 경전들을 함께 인정했다. 반면 일련종은 '묘법연화경 제일'이라는 호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일본에서 천태종이 날뛰었던 것은 부패의 이유가 크다. 이는 센고쿠 시대 당시 일본 불교 전체가 가진 폐단이었다.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불교종단이 승병을 모으고 다이묘화 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다군도 피해가 제법 커서[36] 오다 노부나가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다른 영주들과 전투를 벌일 일도 많은데 별 광신도들이 이러니 애가 탈 노릇이었고 그 와중에 아우 오다 노부오키(織田信興)가 잇코잇키와의 전투 중에 죽고 만다. 분노가 폭발한 노부나가는 광신자들에게 공포를 알려줘야 한다면서 고른 방법이 잇코잇키 승단에 들어간 자들의 3족을 멸하는 방법이었다. 광신도들의 식구나 친척까지 싸그리 죽이는 방법인데, 꽤 효과가 좋아서 자신은 극락에 간다고 나서던 광신도들이 상관도 없는 3족까지 죽게 할 수는 없다면서 겁을 먹거나 포기하고 나가는 경우도 속출했다. 잇코잇키 간부들은 죽은 3족도 극락에 간다고 부랴부랴 이들을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세력이 크게 줄었다. 그러나 이시야마 고보(石山御坊, 지금의 오사카성)를 거점으로 한 혼간지는 키이의 정토진종 문도들인 사이카슈, 주고쿠의 다이묘인 모리 테루모토의 도움을 받아가며 10년동안 오다 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오다 군이 모리 군의 수군을 격멸하고 혼간지측을 포위하며 전세가 기울어지자 혼간지 켄뇨는 항복에 가까운 형태로 화의를 맺고 이시야마 고보에서 물러났다. 다른 몇몇 잇코잇키는 이에 불복하고 독립하여 싸움을 이어갔지만, 결국 이들도 엔랴쿠지와 마찬가지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철저하게 박살나 뿌리뽑힌다.
다만 진언종 계열 승병집단은 줄을 아주 잘 탔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생전시에는 노부나가에게 승병을 빌려주다가 노부나가 사후에는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사이를 저울질하면서 줄을 탔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 시점에서는 도쿠가와에게 완전히 붙어서 히데요시 잔당 숙청에 힘을 빌려주면서[37] 사찰은 사찰대로 잘 번성했고 도쿠가와를 직접 도왔던 승병집단은 도쿠가와의 측근 무사가 되거나 조슈번의 가신이 되어 무려 막말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진언종 계열 승병집단은 타 종파의 승병집단과는 달리 진짜 용병부대에 가까워서 권력자와 맞서기 보다는 유리한 세력에 붙어 집단의 안녕을 꾀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4.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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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21세기 들어와 승병이 조직되었다. 사실 태국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이 나라는 원래 군대 아니면 승려가 되는 나라이며[38] , 승려가 되었다가 군인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군인이었다가 승려가 되는게 어렵지 않다. 승병이 조직된 곳이 바로 말레이시아 국경에 있는 빠타니·얄라·나라티왓 주이다. 이 3개 주는 원래 이슬람이 대다수인 곳인데, 과거 타이가 강제로 합병하며 이슬람 인구와 허구헌날 무력 충돌이 벌어지는 곳이라서 치안이 좋지못하다. 이때문에 이곳에 거주하는 승려들이 승병으로 조직되면서 M-16이나 AK-47 같은 군용 소총으로 무장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를 두고 태국 내에서도 반발이 크다. 왜냐면 이 승병들이 말만 승려이지, 불교도 경호라는 명목으로 군인을 승려로 위장한 것이라는 비난에서부터 불교는 평화의 종교인데 이렇게 무장하여 비무장 무슬림을 정당방어 및 테러 진압이라며 사살하는 일이 벌어지다보니 태국 내 국민들과 승려들도 반발이 크다. 그러나, 이슬람 과격파에게 불자나 승려가 테러당해 죽거나 다치는 일도 있기에 태국군부 측은 반발에 이런 피해를 내세워 반론한다.
한국에서 유신 독재정권 시절 사회별로 민방위대가 조직되면서 호국승군단이라는 유사 승병 단체가 조직되기도 했다. 당시 불교계에서 군대 가지 않고 수도생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39] 청와대에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과 논의하면서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20세 이상, 70세 이하 승려들은 군대 안 가고 봄 가을 자체적으로 군사 훈련을 하며, 해인사와 통도사에 모여 사단장이 참관하고 훈련 상태를 체크했다고 한다. 특별한 사유 없이 훈련에 빠지면 승적이 박탈되었다고 하고, 호국승군단의 노래라는 군가도 따로 있었다.# 유신 독재정권 붕괴 후에 점차 사라지고, 승려들은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병역에 복무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가족이나 옛날 애인들이 뻔질나게 면회와서[40] 환속하는 젊은 승려들도 꽤 많고, 어떤 승려는 자신이 승려임을 알리지 않고 티도 내지 않아서 제대할 때까지 부대원들이 몰랐다고 한다. 어떤 젊은 스님의 경우는 승복에 고무신 차림으로 훈련소에 갔더니 장교가 복장이 심히 불량하다며 꼬장을 부리고 연병장 뺑뺑이를 돌렸다. 그런데 다행히도 안면 있는 신자를 만나 얼차려를 그만할 수 있었다. 그 신자는 '''사단장'''이었다고 하며, 그 스님은 자대 가기 전까지 그 장교를 다시 볼 수 없었다나. 실제 입대한 스님과 훈련 받았던 이야기도 있다!# 스님도 군대 가나요...라는 책도 나왔다. 이 책을 쓴 스님은 출가했다가 공군에서 9년을 근무하셨다고. 최근에는 군대까지 갔다 오고 정식 출가하는 스님들이 많아, 스님의 입대는 과거보다 줄어들고 있단다.
5. 대중 문화에서의 승병
주로 역사를 주제로 한 게임들에서 많이 등장하며, 전투에 직접 나서기보다는 보조 마법사의 측면이 강하다. 한국권은 힐러, 일본권은 창(?)든 반란군처럼 그려진다.
5.1. 임진록(게임)
조선과 일본 모두 등장하는데, 사용 마법은 약간 다르다. 둘 다 공격력 게이지 = 마력이라 적을 너무 공격하다 보면 마력이 부족해 공격도 마법도 불가능해진다.
임진록2/조선의 반격에서는 조선군의 힐러로 등장. 초기에는 세 국가의 힐러 중 제일 마력이 적고 치료 마법밖에 없는 전형적인 힐러였으나, 후에 패치로 인해 2번째로 마력이 많은 힐러가 되어 조선 영웅들의 무한 마법난타가 쉬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사용 마법은 치료 마법 뿐이다.
5.2. 천년의 신화
천년의 신화에서 신라의 힐러로 등장. 고구려와 백제는 각각 도인과 박사가 대체한다. 여기서는 삼국의 힐러 중 제일 좋다.
5.3. 라크무
트리거소프트에서 만들다 만 RTS게임 라크무의 종족 중 동양계인 위국군의 힐러로 등장. 여기서의 승병은 발해의 호국불교 사상에 기초하여 무술과 술법을 겸비한 배틀메이지라는 설정. 때문에 의외로 강한 체력에 근접전을 하며, 치료 마법과 디버프 해제 마법, 근처의 적에게 유도 화염 부적을 날리는 기술을 쓴다.
5.4. 토탈 워: 쇼군2
승병(Warrior Monk) 계열에 해당하는 여러 병종이 존재한다. 역사 고증인지, 상당히 강력한 최종 테크급 병과이며[41] 나기나타와 활, 화승총 등을 사용하고 주 종교를 불교로 유지할 때만 사용 가능하다. 기독교로 개종하는 순간엔 양성 불가는 물론, 보유한 승병마저 모두 사라진다. 우에스기 가문 (이쪽은 고증에 안맞다)과 잇코잇키 (이쪽이 맞다. 대신 팩션 자체가 고증오류)의 경우 승병에 특화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5.5.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탐험가로 수도승이 등장하며,[42] 일본과 중국 지형에서 교역소를 지어 동맹이 가능한 중립 종교 단체 중 소림사와 선불교 사원에서 각각 소림사 등패수 과 소헤이를 생산 가능하다. 성능은 둘 다 괜찮은 편. 이외에 고용 가능한 왜구 중에 장님 승병 궁사가 있다. 컨셉에 따르면 두 눈이 안 보이는 대신 도력으로 물체를 맞춘다고 하는데, 사정 거리가 무려 18이나 된다.
5.5.1. 소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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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 원주민 용병. 나기나타 기병과 같이 나기나타를 든 중보병.
5.5.2. 콘시 야마부시 승병
항목 참조
5.5.3. 잇코잇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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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가, 대전사와 같은 일본의 영웅 유닛. 중국 소림사 승려와도 닮았지만 활을 사용하는 원거리 공격이다.
체력이 얼마 남지 않은 적에게 크리티컬을 주는 패시브가 있고, 다른 수도승처럼 감시자를 기절시킨다. 사쿠마 키치로처럼 연막탄을 터뜨려 홈 시티로 귀환하는 능력을 갖고 있고, 건물에게 폭탄을 던지는 특수 능력도 존재한다.
특이하게도 일본의 영웅 유닛 하면 바로 생각날 법한 다이묘나 쇼군 같은 유닛들도 이 게임 내에 다 존재하는데, 정작 영웅 유닛은 이 이코 이키다. 다이묘와 쇼군은 홈시티 카드, 불가사의 막부와 연계되어만 생산할 수 있는 일반 유닛으로 존재한다[44] . 전작인 미쏠로지의 자알, 또는 중국 장군과 닮은 경우.
사실 이들은 열성 신도들이지 '''승병은 아니다'''. 그래서 삭발이 아니라 촌마게를 하고 있다.
5.5.4. 장님 수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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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감시자이자 수도원에서 고용 가능한 용병.
장님이라면서 사거리가 18이나 되는 활을 쏘는 비범함을 보인다.
5.5.5. 소림사 등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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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패로 무장한 중국 소림사의 원주민 용병.
이 등나무로 만든 방패로 물 위를 배처럼 이동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게임 상에서는 수상 이동 기능이 없다.
5.6. 육룡이 나르샤
딱히 승병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비국사가 고려시대 승병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정보상인으로 활동하며 돈을 밝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력행사도 불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일종의 무력집단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6. 기타
영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warrior monks[45] 인데, 이걸로 검색하면 백이면 칠십은 소림사가 나온다. 소림사는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권법 등 무술계에서 무술의 본산으로 취급되는데다가, 명나라 때는 왜구를 상대로 승병을 조직하여 싸웠고, 청나라 시대에는 만주족 정권에 맞서 반청 운동을 하다가 불타기도 하는 등의 이력을 갖고 있어 승병으로 볼 수도 있지만, 위의 이야기들이 다 날조라는 설도 있어 애매하긴 하다.
서양에서 비슷한 개념을 찾자면, 기사수도회를[46]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 승려는 그리스도교의 수도자에 대응되고, 이 수도자들이 전문적인 기사를 겸한 것이 기사수도회이기 때문이다.
[1] 번역자의 무지함으로 인해 '이코 이키'로 잘못 번역되었다.[2] 이러한 호국 불교라는 이름의 불교와 정치의 결탁을 사상으로 뒷받침한 것이 흔히 호국삼부경이라고 불리는 금광명경, 인왕경 그리고 법화경이었다.[3] 다만 이 경우는 출가하고 정식으로 구족계까지 받은 승려들을 무장 병력으로 동원했다기보다 사찰에 딸린 장원에서 소작하는 전호들을 무장시킨 일종의 민병대로써의 성격이 더 강했다. 최치원이 쓴 해인사 묘길상탑기는 889년과 895년 당시 해인사를 침입한 초적들로부터 해인사를 지키다 죽은 치군(緇軍) 56명의 위령을 위해 세운 것. 신라 말기 해인사는 이미 2,500결의 토지를 장원으로 보유한 '재벌 사찰'이었다.[4] 이러한 조직에 편성된 평신도를 '재가화상'이라고 불렀다.[5]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재가화상은 불교 승려가 아니라 고려 영토 내에 사는 여진족 부족집단이라는 설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여진족의 풍습인 머리를 거의 깎고 뒷머리 일부만 남겨 변발을 하는 것과 긴 염주를 목에 거는 풍습 탓에 이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일반 고려인들이 불교 승려와 혼동해서 인식했다는 것. 재가승 항목 참조.[6] 도를 얻는 데 해가 되는 마귀들을 굴복시키는 군대라는 뜻.[7] 현재 '조치원' 등 지명으로 남아있다.[8] 이의방은 이들 승려세력을 없애기 위해 군사들을 동원해 모조리 싹쓸어버렸으며, 결국 승려 세력들이 이의방의 반대파와 결탁해 그를 암살하는 계기가 되었다.[9] 참고로 정균과 함께 이의방 암살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승려 종참이라는 인물이다. 이 자는 후에 정균과 그의 아버지인 정중부가 경대승에 의해 살해당한 뒤, 권세를 탐했다는 죄목으로 외딴 섬으로의 유배형에 처해졌다.[10] 이들은 문정왕후의 호불 활동으로 승과가 아주 잠깐 부활한 사이에 합격한 이들로, 이 때문에 조선 왕실과 작지만 기적적으로 연결점이 존재했다. 덕분에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엮일 뻔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작은 연결 고리를 기반으로 선조는 이들에게 조선 승병 통수권을 부여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괜히 조선 왕실에서 승려인 휴정이나 유정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아니다.[11] 이전 시대처럼 승려만으로 구성된 군대라기보다는 승려들이 주축이 된 의병에 가깝다.[12] 이 비자금이 숙종 때부터 왕실로 흘러들어 갔다는 추정도 있다. 팔도도총섭 임명도 왕실이 하고 승병이 국왕 직속인 점을 생각해보자.[13] 그냥 한자어 승병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다.[14] 南都北嶺. 남도는 나라에 위치한 고후쿠지(興福寺)이고 북령은 히에이산에 위치한 엔랴쿠지(延曆寺)이다. 고후쿠지는 후지와라 가문의 절이기도 했으며 '''부처를 악귀로부터 지켜주는 후지와라 가문의 조상신'''을 모신 카스가 신사(春日社)와 사실상 합쳐진 상태였다. 이런 식으로 기존의 토속신이 불교의 신중(神衆)으로 편입되는 것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자주 볼 수 것이었다. 신이 불교에 귀의해 불교의 신중이 되는 경우 그 신은 (다이大)묘진(明神)이라 불렸다. 거꾸로 신의 모습으로 부처가 세상에 현현했다는 믿음도 널리 퍼졌는데, 이 경우는 곤겐(權現)이라고 불렸다.[15] 카모가와가 수시로 범람하여 지지대였던 기존 쿄토의 서쪽 절반을 완전히 황무지로 만들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새로 쌓은 교토의 성벽은 원래 교토의 동쪽 지역이다. 그래서 긴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16] 고후쿠지의 경우는 카스가 신사, 엔랴쿠지의 경우는 히에 신사(吉日社)[17] 이 행위를 고소(强訴)라고 한다.[18] 시게히라도 원래부터 이러려고 한 것은 아니고 한밤중에 휘하 병사에게 "불을 밝히라"고 말한 것을 병사들이 "불을 놓으라"는 말로 잘못 알아들어서 화공을 펼치게 되었다고... 결국 헤이케 몰락 이후에 시게히라는 나라로 호송되어 그곳에서 처형되었다.[19] 일련종 = 니치렌종.[20] 이 시기에 이런 식으로 일본의 대영주가 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혼간지 켄뇨다. 그래도 혼간지 켄뇨는 꽤나 개념인이라서 영지의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흉년이 들면 세금을 면제해주고 식량을 무료로 나누어주던 성군이었지만, 그도 결국은 공경의 딸과 혼인하여 자식들을 두고 본거지인 혼간지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다이묘로 행세하는 등, 당시의 승병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21] 이런 역사적 상황때문에, 오늘날에도 일본의 승려들은 대처승이 많으며, 한국의 일부 개신교 교회들이 그러는 것처럼 절 자체를 세습하는 경우도 많다. 만화 테니스의 왕자의 주인공인 에치젠 료마가 절에서 사는 이유도 아버지가 대처승이라서이다.[22] 하지만 그는 불교를 탄압한 게 아니라 단지 세금을 내라고 했다. 그 점만으로도 승병들이 맞서 싸웠기에 일단 적은 가혹하게 뭉개는 오다에게 쳐 죽일 적이 된 셈.[23] 쿠도 카즈야 원작, 이케가미 료이치 그림의 만화 노부나가에선 이 이야기와 다르게 매우 강한 승려 한 사람이 양심적으로 엔랴쿠지의 부패를 걱정했고 오다군이 쳐들어오자 이 법등을 멀리 안전한 곳에 둔 다음, 홀로 오다군을 베어가며 무쌍을 찍는다. 결국 오다군이 조총 사격으로 집중하여 그 승려를 죽이지만 그는 죽어가면서도 미소 지으며 쓰러지고, 지금까지 남은 법등이 불을 밝히는 것으로 나온다.[24] 물론 노부나가와 친했던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러한 신겐의 불교 존숭을 두고 "그냥 다른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일 뿐"이라고 냉소했다. 이 사람이 기독교 신자라는 점은 어느 정도 감안하고 볼 필요가 있다.[25] 또는 에도 막부에 의해 강제로 개명되어 지금까지 잘 알려진 일향종이라고도 불린다. 일향종 = 잇코종. 잇코잇키, 즉 일향일규의 일향이 일향종에서 따온 것이다. 일규는 평범한 단어이며, 의미는 단결 등을 말하는 것이다.[26]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책사인 혼다 마사노부가 잇코잇키에 가세한 것으로 유명[27] 법화경을 주경으로 세웠다는 점에서 천태종과 입장이 비슷했으나, 천태종은 다른 경전과 선종의 수행법도 인정한 데 반해 (다른 불경의 내용들도 모두 석가모니가 설법한 것들을 담은 것이므로 당연한 것이다.) 이쪽은 극단적으로 염불, 선 수행, 기복적 신앙 (기복신앙은 원래 초기 불교에서도 부정했으나, 후에 민중의 불안 때문에 점점 불교가 기복신앙화 되어가는 이유로 당시 불교는 구복적인 면이 많이 포함되었다.) 을 부정했으며 오로지 법화경만을 인정한다. 더 쉽게 말하면 법화경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최소 극락행, 성실히 불도에 정진했다면 성불. 하지만 법화경을 믿지 않는 다른 종파들은 모두 지옥.[28] 일련종은 이전경 다 믿지 말고 법화경만 믿어야 한다는 워낙 과격한 주장 때문에 지배층에게는 당연히 인정 받지 못했고, 정토진종 역시 센고쿠 시대 때 자주 잇키를 일으켜 불온 세력으로 낙인 찍힌데다, 정토종을 후원한 에도 막부에 의해 일향종이라 강제 개명 당하기도 하는 등, 여러 모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민란 세력이라고 불려도 별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세력이 너무 커져서 다이묘들은 물론 쇼군을 위시한 중앙에서도 별 수 없이 일단 불교 종단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절들을 짓고 조직을 확립해서 이미 어엿한 종단으로 발족했고. 현재 일련종의 일본 내에서의 인식은 호전성 짙은 불교 종단정도.[29] 참고로, 정토진종은 에도 막부 시대 때 강제로 일향종이라는 이름을 써야 했으나, 원조인 시종일향종과의 접촉점은 없고, 사실은 전혀 다른 종단이다. 애초에 종단을 창종한 시조부터가 다르다. 시종일향종은 잇코 준쇼, 정토진종은 호넨.[30] 일련종의 분파.[31] 생명 평등 주장의 연계.[32] 사실 헤이안 시대나 센고쿠 시대나 상관없이 다이묘들에게 법화경의 내용에서 오는 자극성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오히려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는 것은 자신도 쇼군이 될 수 있다는 구실이 되기도 하고. 문제는 다른 경에서도 생명평등의 주장이 있기에 법화경만의 큰 매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33] 사실상 니치렌이 살아 있었을 때부터 일련종은 세워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조직적이지가 않아서 문제지.[34] 석가모니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35] 도가와 다름에 유의. 도가는 초기 노자가 창시하여 장자가 완성한 "철학"에 가깝다.[36] 이들은 오다군을 주로 비가 오는 날에 공격하여 총포를 쏘지못하게 했다.[37] 이들의 신들린 듯한 줄타기도 딱 한번 삐꾸 난 적이 있는데 오다의 세력을 그대로 물려 받은 히데요시와 적대했던 적이 있다.[38] 물론 태국은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국교가 없는 세속국가이지만 불교가 실질적인 국교 역할을 하면서 일상생활에서도 불교의 영향을 많이 적용하고 있다[39] 군대 가서 환속하거나 나쁜 행실을 배워 오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보통 이 시절에 군대에 간 스님들은 대개 행정병이 되었는데, 글씨를 남들보다 참하게 잘 썼기 때문이란다.[40] 특히 스님들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하안거나 동안거 시즌에 공세를 펼친다.[41] 상당히가 아니라 정신 나간 스텟을 보유하고 있다. 몰락의 서양 해병대도 그냥 쳐바른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갑옷 수치가 너무 낮아서 원거리 유닛한테 덤비면 좀 깨지고 들어간다는 것이지만, 갑옷 업그레이드를 해주고 가면 그마저도 보완된다. 물론 갑옷 테크를 끝까지 탈 수 있는 지역이 상당히 적고, 그에 들어가는 비용도 무지막지하지만.[42] 인도는 힌두교의 브라만이라 논외.[43] 번역자의 무지함으로 인해 '이코 이키'로 잘못 번역되었다.[44] 대전사와 마찬가지로 오라빨을 주긴 하지만 부활이 안되는 일반 유닛이다.[45] 소헤이 항목에 있는 사진에서는 Fighting Monk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도 있다.[46] 튜튼 기사단, 성전 기사단 등등 흔히 생각하는 '중세 기사단'은 모두 기사수도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