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흠
1. 개요
한국의 항일운동가.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조선 및 대한제국 시기
구연흠은 1883년 10월 6일 함경도 경성도호부 주촌면 용전동(현 함경북도 어랑군 용전리)에서 북병사 겸 경성도호부사를 지낸 구준현(具駿鉉)의 아들로 태어났다.[3] 이후 상경하여 한성부 중부 경행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에 살면서 본적을 두었으며, 이후 북서 광화방 원동(현 종로구 원서동), 북서 자하동 간곡(현 종로구 창성동), 북서 가회방 재동계 맹현(현 종로구 가회동) 등에 거주했다.#
그는 어려서 집안 글방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900년 11월 21일 궁내부 시종원우시어(侍從院右侍御)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906년 4월 24일에는 지방조사위원(地方調査委員), 같은 해 10월 23일 내부주사(內部主事)에, 1907년 6월 20일 내부서기랑(內部書記郞)에 임명되었으며, 1908년에는 내부(內部) 본청 지방국 지리과 주사(主事)#로 근무하는 등 구한말 대한제국의 관료 생활을 했다.
2.2. 일제강점기
경술국치 후에는 농업에 종사하다 1919년 가을 <만주일보>의 봉천 지국장을 지냈다. 1920년대 초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항일운동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1922년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 1923년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에 가입하여 민족 계몽과 일제 식민지배를 타도하기 위한 항일운동에 진력했으며, 1924년 동아일보 지방부장을 지냈고, 1925년 <시대일보> 영업국장 및 논설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신문기자 단체인 무명회(無名會)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공산주의 단체인 화요회 그룹과 연관이 있는 불꽃사(火焰社)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5년 6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검사위원이자 혁명자후원회 위원이 되었고, 3월에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될 만큼 핵심역할을 담당하였다. 1927년 3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모플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1927년부터 크게 일어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적극 참여해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에 가입하는 한편, 1927년 9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장쑤성위원회 법남구 한인지부에서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29년 6월 대만·일본 등의 반제운동가들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를 결성했으며, 같은 해 11월부터 총무부 비서로 활동하였다.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가 해체되자,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 <앞으로>를 발행하는데 참여했다. 1929년 11월 국내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이에 호응해 학생운동을 선전하고자 상하이 각 단체 연합회를 결성하고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의 이름을 내걸고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대중적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에는 상하이 3.1 운동 기념시위, 6.10 만세 운동 기념 시위, 8.29 망국 기념 시위 등을 주도했다.
1930년 9월 충청북도 청주경찰서에 검거된 구연흠은 곧 경성부로 압송되었으며,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10월 20일 대전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35년 12월 만기출옥 했지만 고문으로 생긴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37년 2월 28일에 사망했다.
3. 기타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구연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