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혁법

 

1. 개요
2. 농지개혁법의 제정 배경
4. 의의
5. 한계
6. 폐지
7. 매체에서의 언급


1. 개요


農地改革法
[image]
자작지와 소작지의 면적 변화

정부 수립 후 파악해보니깐, 6명의 대지주가 전국 땅을 좌지우지 하고, 나머지는 사찰(절) 땅이더라.[1]

농민에게 균등한 경작권을 주기 위하여 가구당 보유할 수 있는 농지를 제한하며 초과된 농지는 다른 농민에게 유상 또는 무상의 방식으로 강제 분배하도록 하는 법률. 1950년대 초 일본, 대만, 한국 등에서 집행되었다.
이 중 한국의 경우는 미군정 당시 미국이 입법을 시도했으나 한민당 등의 반발로, 귀속농지에 대한 분배 작업만 개시되었을 뿐, 통과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는 제헌헌법 제86조에 명시하는 것으로 제1공화국에 떠넘겨 졌다.[2] 제1공화국에서는 미국측에서 낸 안보다 지주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수정함[3]으로써 1949년 6월 마침내 법률 제31호로 공포되었으나 빈농에게 농지가격의 최대 30%까지 보조금을 줄 수 있다는 제7조 제1항 제5호가 삭제되고 정부보증융통식증권을 지가증권으로 바꾸는 등의 개정작업을 거치느라 집행되지 못하였고 1950년 3월 10일 법률 제108호로 개정이 완료되어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서부터 집행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농지개혁법(1960. 1. 13. 법률 제561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이며 제6공화국 때인 1996년 폐지되어 현행 '농지법'의 전신으로 남게 되었다.

2. 농지개혁법의 제정 배경


8.15 광복대한민국의 토지의 연 80%를 지주가 소유하고 있었고, 자작농의 비율은 극도로 작았으며, 이것은 지주와 소작농의 대립을 심화시킬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기존의 소작료는 5할이었고 많게는 6~8할도 있었다. 광복 후에 미군은 미군정을 설립하면서 농업 정책을 나중으로 미뤘다. 그들 임무는 원래 일본군 무장해제와 본국 송환이었기 때문이다.
1946년 3월 5일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4] 방식으로 토지개혁이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때는 북한의 소식이 여과없이 신문을 통해 남한에서 보도되었기 때문에 남한 농민들도 북한의 토지개혁 소식을 듣게 되었고, 당연히 우리는 왜 토지개혁 안하냐고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에 좌익 세력의 농촌 침투를 우려한 미군정[5] 소작료를 3분의 1만 낸다는 3.1제(33%)를 실시하였다.[6] 이로써 소작료가 크게 줄어들어 농민들의 부담이 많이 줄었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했다. 기존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개편한 신한공사 체제에서 토지개혁이 시도되었으나[7] 지주들의 반발과 곧이어 실시된 1948년 제헌 국회 총선거의 여파로 연기되었다.

3. 이승만 vs 한국민주당


이승만은 건국 이전부터 농지개혁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가 1946년 2월에 발표한 '과도정부 당면 정책 33항'에 이미 관련 내용이 담겨있었다. 북한도 1946년 5월에 '정권에 의한 강제적 토지몰수'라는 과격한 토지개혁안을 통과시킨 바 있으므로 자세한 실상을 모르는 남한 농민들의 속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후 좌우합작위원회나 남조선과도입법의원회에서 미국 측에서도 농지개혁을 요구하던 바였고 동시기 일본에서 미국은 고강도의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어느면에서보나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제헌국회에서 한국민주당의 협력을 받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국무총리와 초대 내각 임명과정에서 한국민주당 인사를 완전히 배제했다. 한국민주당 의원들 상당수가 많은 토지를 가진 지주계급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단행하기 위해서 농림부장관 자리에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좌익계 출신 조봉암을 앉혔다. 진보당 사건의 바로 그 조봉암인데, 조봉암은 헌법 제정당시 30명 중 대통령 중심제 안을 반대한 단 두 명의 헌법위원 중 하나였다. 그 탓에 조봉암은 이승만에게 단단히 찍혀 있었던 상태라 누구도 조봉암이 농림부장관이 될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봉암 자신조차도 기대도 안했다가 조각 당일에 연락받아서 이화장에서 임명소식을 들었다. 때문에 농지개혁을 강하게 주장하던 조봉암이 농림부장관에 취임했다는 소식에 한민당은 발칵 뒤집혔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이루기 위해 자신과 정치적 노선이 정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을 장관으로 앉혀 한민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농지개혁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와 다른 '유상매입 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법이 1949년 6월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한 농가의 토지 소유한도는 2정보에서 3정보 (1정보는 약 3,000평)로 늘어났고, 상환방식을 단기간으로 줄이는 것이 그 골자였다. 또한 농지개혁이 적용된 지주들에게는 국가사업 우선참여권이 주어져(예를 들어 적산공장 불하 등에 우선적 협상대상 등) 이들의 재산이 산업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50년 4월부터 농민들에게 토지분배가 시작되었고, 5월부터는 토지장부 열람이 개시되었다. 드디어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토지개혁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967년 일단락되었다. 이후에는, '농지법'의 제정으로 1996년 폐지되었다.
상당수 지주들은 몰수 토지에 대한 보상으로 받아낸 지가증권 또한 한국전쟁으로 가치가 하락해 일찍 팔렸고 이는 귀속재산 불하 납입 대금으로 사용되곤 했다. 사실 한국전쟁 시기에 이미 현대의 증권 시장과 유사한 지가증권 거래소가 임시수도인 부산 광복동에 있었고, 정부에서 증권거래소 허가까지 해서 지가증권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때문에 지주라고 해도, 전쟁통의 식량 문제 때문에 지가증권을 헐값에 매각한 사례가 허다하며, 막말로 정부가 망하면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는 지가증권이라고 가치가 있을리가 없기 때문에 지가증권의 가격은 더더욱 바닥을 쳤다. 절반가격은 양반이고, 액면가의 10%에 판매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불하대금으로 흘러갔다. 지가증권 거래로 피를 본 대표적인 이들이 호남평야에 땅을 가지고 있던 대지주들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을 친 영남지방에 비해서 호남은 거침없이 털렸고, 호남지역 지가증권 가격은 특히 헐값에 거래되었다. 사실 건국초기 인플레이션 때문에 5년 유예였던 지가증권의 가치는 상당히 낮았는데, 이걸 정부가 적산불하와 귀속재산 구매에 액면가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지가증권이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영남지역에 적산을 불하받은 이들이 후일의 기업가들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4. 의의


농지개혁법에 의해 일제시대의 식민지 지주제가 사라지고, 지주와 소작인 간의 대립을 줄이고, 나아가 이 법안의 상정으로 인공 치하 지역에서 주민들이 북한의 선전에 휩쓸리지 않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일단 농민들이 첫 수확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5월부터 개시한 토지대장 열람을 통해 '''최소한 내 땅이 있으며 그게 어디에 있는가'''라는 인식 정도는 줄 수 있었고, 그 덕에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해야 할 이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수확량의 30%를 5년간 낸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일제시대 소작농의 소작료가 대개 수확량의 50%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5년간 좀 싼 소작료 내고 땅을 거저 갖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해방 이후 3.7제가 시행된 것을 감안해보면 지주에게 낼 돈을 국가에 5년을 내고 땅을 갖는 것이니 농민들 입장에서는 훨씬 더 큰 이득이다.[8]
이미 소련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지가 한참이다보니, 당시에도 공산국가의 집단농장에 대한 이야기는 알 사람은 다 알았다. 예전에는 다들 소작농이라 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농지개혁법으로 '''꿈에도 그리던 자작농'''이 된 상황에서 '''토지를 다시 빼앗기고 소작농이 되는 것'''의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실제로 6.25 전쟁 초기 인민군이 점령한 38선 이남 지역에서도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기초한 토지개혁이 시도되었지만 농민들의 호응은 그리 크지 않았다. 더군다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내걸더니 이내 '''논작물 수확고의 27%, 밭작물 25%'''에 달하는 막대한 현물세를 강요하면서 남한 농민들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9] 사실상 국가에 조금 싼 소작 부쳐먹는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10] 이럴바에야 5년간 30% 내고 온전히 내 땅 되는 게 백배천배 낫다. 아무리 당대 교육수준이 낮았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셈조차 할 줄 모르면 농부도 못해 먹는다.[11]
또한 시대적 상황이 더해져 지방의 정점에 서 있는 지주들이 대부분 사라지면서[12] 일제시대부터 토지를 기반으로 부를 축적하였던 식민지적 계급체계가 소멸했다. 6.25 전쟁과 농지개혁법으로 지주제는 소멸되었고 60년대부터 경제가 발전되기 시작할 때 대지주의 저항은 없었다. 오히려 전후 간신히 자리를 잡은 '''자영농 집안의 잉여노동력이 산업현장에 투입'''될 수 있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룬 주역들의 다수가 고향집에서 소 팔고 논 팔은 돈으로 어렵게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반면 지주나 토호들이 기득권층으로 버티고 있는 남미는 산업화에 굉장히 애를 먹고 있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
참고로 한국과 비슷하게 남북분단+냉전의 최전선(?)+독재자의 상황에 놓여있던 국가가 있었으니 바로 남베트남이다. 이쪽도 한국처럼 토지개혁을 시도했지만 한국보다 기존 사정부터가 훨씬 더 나빴고 결국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물론 이때는 북베트남도 이전에 토지개혁의 악영향으로 인해 남베트남으로 온 사람이 많긴 했지만. 그런데 그렇게 토지개혁이 실패했던 남베트남조차도 '''통일 후 집단농장화가 그 이상의 대재앙으로 이어졌고''' 오히려 남부발 개혁으로 판도가 뒤집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5. 한계


이 법안이 상정될거 같다는 소문이 국민 사이에서 유포되기 시작하자, 지주들은 토지를 빈농층에게 강매[13]하였으며, 심지어는 '''토지'''개혁이 아니라 '''농지'''개혁 이라는 점을 악용하는 지주들[14]도 있었다.
또한 정부의 의도인 '토지자본에서의 산업자본의 전환'과는 달리, 토지채권의 값은 6.25와 초인플레이션을 걸치면서 엄청나게 떨어져 지주에서 자본가로 전환한 계층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더해서 농지개혁법이 실시되고 얼마 안 지나서 6.25 전쟁이 터지면서 피난을 다니던 지주들이 인민재판에 걸려 죽거나 피난처에서 지가증권과 생활물자를 교환하는 일도 있었다.[15] 오히려 경남 진주의 정 씨 가문처럼 농지개혁법 발표 즈음하여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무상 분배하다시피 한 사람들이나, 평소 품삯을 후하게 주고 소작료를 적게 받은 사람들, 전남 영암의 현준호(현재 현대그룹 회장인 현정은할아버지 이다)처럼 OO년 후 토지분배를 약속한[16] 일부 지주들이 살아남아 가문을 보전하고 오늘날까지 대를 잇는 자본 계급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생기기도 했던 것.
소위 '문중 땅'이 분쟁에 휘말리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농지개혁에 대비해서 같은 집안 사람에게 농지의 명의를 이전해주었는데 돌려주지 않는다거나...
아울러 남한의 토지개혁에 대한 농민의 기대가 얼마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1950년 5월에 토지대장 열람이 개시되기는 했지만 전쟁 이전에 농지개혁이 완료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농민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불분명한 점이 존재한다. 즉 정말 농민이 이 법안 때문에 북한의 선전에 넘어가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인과관계는 아직까지 불확실하다. 1950년 북한의 남한지역 토지개혁에 농민들의 호응이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위의 입장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불안정 위에서 이루어진 토지개혁이라 토지를 공짜로 받아도 이것이 그대로 내 것이 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7]
일부 재력가는 사학재단을 만들고 자기 땅을 재단 땅으로 하여 농지개혁을 면하기도 했다. 사학재단 중 친일 성향의 설립자들이 많은 원인이기도 하다. 일부 재력가들이 사학을 설립하면 토지개혁으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18] 사학을 설립하고 재산을 재단산하에 넣었는데 이 재력가들 중 식민지시대에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 섣불리 그 시기 세워진 학교/재단이 전부 친일사학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본 교육시설이 있는 부지외에 뜬금없이 먼곳에 학교 재단소유의 땅이 있다면 의심해 볼 법하다. 동방문화재단(산하 숭문중, 고)같이 재단설립이 40년대 중후반이고 학교본관 외 멀리 재단소유 토지가 있고 설립자가 친일인명사전같은 곳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경우라면 더더욱...
6.25 전쟁으로 인해 그 전까지 남북한의 경계 역할을 수행하던 삼팔선휴전선으로 대체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복한 38선 이북의 수복지구에서도 휴전 이후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다. 이전에 북한 당국이 실시한 토지개혁은 무효화되고 대한민국의 농지개혁법에 따른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는데 월남했던 지주가 돌아와 자기가 직접 경작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경우를 제외하면 북한의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를 분배받은 경작자가 그 토지를 다시 분배받아 계속해서 경작하는, 사실상 북한의 토지개혁이 남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한다.[19]

6. 폐지


이 농지개혁법의 폐지가 발표된 것은 김영삼 대통령 재임 중이던 1993년으로 농가 경쟁력을 상승하기 위해 기업농을 육성하기 위해서 농지 소유 한도를 3만평에서 6만평으로 늘리고 비농민의 농지 소유를 3천평으로 제한하는 새로운 농지법을 발표하면서였다.
종전의 농지개혁법, 농지개혁사업정리에관한특별조치법(1968년 3월 13일 제정), 농지의보전 및이용에관한법률(1972년 12월18일 제정), 농지임대차관리법(1986년 12월 31일 제정), 지력증진법(1966년 3월 15일 제정)을 통합하여 제정한 새로운 농지법은 1996년에 발효되었고, 이에 따라 농지개혁법은 47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7. 매체에서의 언급


해방후 문학에서 당시의 시대상과 현실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태준의 농토 - 일제강점기 시절의 대갓집 머슴살이에서부터 시작하여 빈농을 거쳐 해방을 맞는 농민 억쇠를 그린 소설. 공간적 배경이 북한이기 때문에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채만식의 논이야기 - 구한말까지는 자영농이었지만, 일제강점기때 자신의 논을 빼앗기고 소작농이 된 한생원을 그린 소설. 한생원은 해방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옛날에 빼앗긴 자신의 논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다.[20] 공간적 배경이 남한으로 남한의 토지개혁이 주소재이다.
채만식의 낙조 - 논이야기와는 다르게 지주의 입장에서 토지개혁을 바라본 특이한 소설.
조정래태백산맥 - 전남 벌교와 그 인근에서 벌어지는 소작농과 지주들 사이의 갈등이 수많은 사건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인구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당시 전라도의 실정 상, 등장인물들도 대다수가 소작농 집안 아니면 지주 가문 출신이다.
오유권의 농지상한선 # 잘 알려지지는 않은 소설이지만, 어떻게 구 지주 계급들이 옛날에 자기들이 가졌던 땅을 되찾았나 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보인다.

[1] 해방 후 어느 정부 관료가 토지 조사 후 했던 말[2]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3] 이를테면 보유가능 최대 면적이 3정보로 상향되었다.[4] 생산수단의 개인 소유를 허용하지 않는 공산주의를 북한이 채택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개인에게 토지 소유권을 분배한다는 것은 도대체 뭔가 싶은 체제이다. 결국 지지를 얻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으로, 1958년 북한은 모든 토지에 대한 개인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형태로 법률을 수정하고, 집단 농장체제로 변하게 된다.[5] 때마침 미군정이 남로당을 탄압하면서 남로당의 지휘로 전국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6] 일제시대에는 조선시대 때의 병작반수제가 그대로 이어져 소작농은 수확량의 반수 즉, 절반 가량을 지주에게 상납하여야 했다.[7] 결국 미군정이 몰수한 일본인 지주들의 땅을 유상으로 농민에게 분배한 것만 이루어졌다.[8] 일부 한국사학자들은 북한의 토지개혁과 비교하면서 이 유상몰수, 분배를 열등한 제도로 서술하기도 하는데, 이는 북한의 토지개혁의 실제 의도인 집단농장화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전쟁 이후에 '''40%'''의 현물세를 거두며, 이는 일제 때의 소작료와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다만 지주는 월남해서 사라진지 오래고 나라가 생산성 따질 겨를이 아니었으니 반발이 적었을 뿐...[9] 실제 북한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을 보면 애국미(愛國米), 성출(誠出), 주둔소련군 식량이나 주둔비를 명목으로 뜯어가서 실제 수취율은 40%에 다다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토지개혁 이전의 수취율과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이었다. 출처는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이 당시 지주의 수취율은 미군정의 정책으로 2분의 1에서 3분의 1로 줄어든 상황이라 일제시대로 돌아가는 상황은 농민들에게 납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10] 참고로 북한의 경우 토지개혁에 반발해 지주의 자식들이 무장조직을 만들었다고 하며 협동농장의 경우 반발을 우려해 1,2,3등급으로 나눠서 하기까지 했는데도 농민들은 텃밭을 몰래 만드는 일이 생기고 심지어 황해도 배천에서는 수확물 분배 후에 집단으로 협동조합에서 탈퇴해버리는 사건이 터지기까지 했다. 그 공산당 덕에 '''공짜로 땅을 가지게 된''' 농민들조차 이렇다. 차라리 돈 좀 내고 내가 영구히 주인 되는게 더 낫다. 실제로도 수확량같은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것에서도 차이는 확 난다.[11] 설령 이정도 계산도 못해먹을 정도로 무식하다 해도 50% 내는거에서 30%로 낮춰 준 쪽하고 그걸 또 (사실상) 50%로 거둬가는 쪽하고 구분도 못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것이다.[12] 특히 살해당한 지주들은 대부분 머슴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죽임을 당한 경우라고 한다.[13] 다만 지주들이 시간에 쫓겼기 때문에 토지거래가격은 시가보다 훨씬 낮았다. 시간이 갈수록 가격은 계속 떨어졌고 농지개혁이 실행되기 직전에는 정부의 매입가격보다 조금 더 많은 정도였다. 그리고 강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토지개혁이 된다면 굳이 땅을 사지 않고도 내 땅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막연한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14] 말 그대로 농지에만 한정된 개혁이라 임야 등은 제외된다. 심지어 바닷가 논을 염전으로 바꿔 농지개혁 대상에서 벗어나는 행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짓을 벌인 사람이 바로 한민당 당수 김성수. 조정래태백산맥에서도 지주 정현동이 이런 수작으로 멀쩡한 논에 짠물을 대다가 소작인과의 다툼 끝에 낫으로 찔려 죽는 장면이 나온다.[15] 당장에 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가 달린 상황에서는 지가증권은 그 가치가 매우 떨어졌을 것이다.[16] 현 씨 가문의 경우는 20년을 기한으로 잡았다고 한다. 원래 일꾼들에게 인심이 후했고, 농지강매같은 지저분한 과정 없이, 유상 분배를 20년 소작으로 대체한 사례. 하지만, 이를 실증할만한 문서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1950년 현준호 본인이 공산군에게 붙잡혀 처형되고 만다. 이는 1970 ~ 80년대 들어 학파 농장에 토지 분쟁이 일어나는 빌미가 되어, 법정 공방 끝에 일부 염가로 토지를 매각하기로 최종 결정됐다는 후문.[17] 기광서, 한국전쟁시기 북한의 남한지역 토지개혁, 한국근현대사연구[18] 실제로도 교육기관에 소속된 땅은 농지개혁에서 편의를 봐주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교육기관이 부족해 정부에서 개인이 학교를 개설하려고 하면 도움을 줬다.[19] 수복지구가 전방이었던고로, 수복지구의 인명피해가 극심해 오히려 토지가 남아 버려지는 상황이 발생하자 제3공화국은 경상도 등 후방에서 빈농을 대거 이주시켜 토지 재개간을 시켰다고 한다.[20] 그러나 유상으로 돈을 내고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독립 때 만세 안부르길 잘했다"고 내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