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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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制道
1917년 11월 15일 ~ 2001년 7월 1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검사, 변호사, 정치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2. 생애
1917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고 1940년부터 신의주지방법원검사국 서기 겸 통역으로 일했다.
8.15 광복 후 월남하여 1946년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을 통해 검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반공검사로 유명해졌다. 좌익 전력자를 전향하도록 한 보도연맹 결성을 선우종원과 함께 주도하였다. 남조선로동당의 김삼룡과 이주하 체포. 국회 프락치 사건, 여간첩 김수임 사건,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 등 공안 사건을 주로 담당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때 마산의 시위를 북한이 조종한 것이라고 선전하였다[1] . 4.19 혁명 이후 검사직을 사직하고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971년 11월 사단법인 북한연구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77년 6월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선거구 재보궐선거[2] 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정대철과 당선되었다. 당선 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려 하였으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을 이유로 입당이 불허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으나 "구시대적 낡은 인물"이라는 당내 비판으로 지역구에는 출마하지 못하고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을 탈당하여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종찬 후보와 신한민주당 이민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하면서 한국안보교육협회 이사장, 통일대비포럼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말년에 망명온 황장엽과 의형제를 맺고 서로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했다.
우익 반공인사였지만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인정하고 오히려 보도연맹원들의 무고함을 증언했다.
2001년 법조인 최초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보련은 세계 사상사에 유례가 없는 성과로 외국에서도 조사해 갈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서 보련원들이 적에게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인해 경기도 이남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오씨는 한국전쟁 개전 초기 서울에서 미처 피난 가지 못한 군경과 가족이 의외로 많이 살아 남은 데는 보련원들의 도움이 컸다면서, 수원 이남에서 무차별 학살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북에서도 반동으로 규정된 보련원은 오히려 인민군이 숙청할 대상이었는데도 남한쪽 군경이 심사도 하지 않고 무조건 집단 학살했다는 것이다. 서울과 경기 북부의 보련원만 학살을 모면했을 뿐 전국 각지에서는 약 30만에 달하는 보련원들이 영문도 모른 채 불려가 학살당했다. 30만이라는 숫자는 4·19 직후 전국 각지의 유족들이 국회에 낸 청원 내용에 들어 있다. 오제도씨는 “이제 정부가 보련 가입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공식 확인해 범국가 차원에서 위령제를 올릴 때가 되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
[1] 이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민관식 후보에게 패배하는 계기가 되었다.[2] 정일형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국회의원직 상실, 장기영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