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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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영부인
권양숙
權良淑 | Kwon Yang Sook
'''
<colbgcolor=#005ba6> '''출생'''
1948년 2월 2일 (76세)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동대마을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동대마을)[1][2]
'''재임기간'''
제16대 영부인
2003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
'''본관'''
안동 권씨[3]
'''학력'''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 (중퇴)
'''배우자'''
노무현
'''자녀'''
아들 노건호, 딸 노정연 등
'''종교'''
불교 (법명: 대덕화)[4]
1. 소개
2. 생애
3. 논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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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제16대 영부인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이다.

2. 생애


1948년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동대마을(現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동대마을)에서 빨치산[5]이자 비전향 장기수였던 아버지 권오석과 어머니 박덕남 사이에서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노무현과 같은 국민학교(현재의 진영대창초등학교)를 나와 부산 혜화여자중학교를 졸업, 훈성여자상업고등학교(현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6]
노무현과는 1973년 결혼하였으며 남편의 사법시험 준비를 뒷바라지했다. 노무현은 권양숙의 도움을 받고 1975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76년 사법연수원 시절 꽤 준수한 성적[7]을 올린 덕에 1977년, 1978년 두 해에 걸쳐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할 수 있었다.
노무현과의 사이에서 아들 노건호와 딸 노정연 1남 1녀를 두었으며, 남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에도 봉하마을에 계속 거주했다. 2018년 5월 1일부로 사저가 개방되어 현재는 진영읍 내의 다른 자택에서 머물고 있다.

3. 논란


  • 권양숙은 검찰 조사과정에서 "박 회장이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에게 준 100만 달러와 현금 3억 원은 모두 내가 전달받았다"고 진술했다고 조사에 변호사 자격으로 입회한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이후인 2009년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되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딸 노정연은 권양숙이 건넨 13억 원을 불법적인 환치기를 통해 송금하였으며, 이에 대해 노정연은 유죄 판결을 받았고 권양숙은 입건 유예되었다. 노정연은 13억 원은 어머니가 보내준 돈이라고 밝혔으며, 권양숙은 이 13억 원의 출처에 대해 "(노 전 대통령) 재임 때 청와대를 방문한 지인들과 퇴임 이후 봉하마을 사저로 찾아 온 지인들이 준 돈을 모아서 보관해 오던 것”, "‘지인’에 대해서는 “인간적 정리상 구체적 신원을 밝힐 수 없다” 라고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개된 재산 규모를 감안할 때 13억 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개한 전 재산의 1.4배나 되는 규모[8]이기 때문에, 재임 중 지인에게 돈을 받았고 그게 누구인지 공개할 수 없다는 태도에 대해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금전을 받은 건 문재인 전 비서실장(19대 대통령)도 인정한 사실이다. 문재인 "권양숙 여사, 박연차 돈 13억 원 받아"

4. 여담


  • 영화 변호인에서는 장수경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배우 이항나가 연기했다.[9]
  • 권양숙의 모친이자 노무현의 장모인 박덕남이 2017년 2월 24일에 사망했다. 향년 96세.
  •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영향력과 인지도에서 최상위권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부인이지만 이미지가 좋지는 않다. 보수진영에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부인이며 부친의 좌익 활동에 관련한 논란으로 인해 예전부터 이미지가 좋지 않았으며 진보진영에게는 박연차 게이트를 포함하여 뇌물죄에 엮여버리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제대로 내조하지 못했다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노무현과 함께 역대 대통령 영향력 순위에서 항상 최상위를 차지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가 보수진영에서 가졌던 이미지, 육영수 사후 영부인 역할을 한 박근혜가 박정희의 후광으로 대통령에 올라선 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부인 이희호[10]문재인 정부더불어민주당에게 마지막까지 큰어른의 대우를 받아왔다는 것과 비교하면 권양숙은 노무현 사망 이후 언론에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처신하고 있다.

[1]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2] #[3] 복야공파 36세손이다.[4] 육영수와 법명이 같다.[5]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했을 당시, 장인이 빨치산이었다는 문제로 인해 정치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6]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 학력 문제로 정치적 반대파 및 우익 세력들로부터 온갖 비하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저 당시 여성이 고등학교까지(중퇴이긴 하지만)갔다는 것만해도 지금의 대졸자 이상의 취급을 받던 시대였다. 그리고 비록 야간부 였다고 하지만 그래도 권양숙이 재학하던 1960년대 초반 훈성여자상업고등학교(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는 부산 서구 학교 밀집지역에 소재한 중위권 사립학교에 속했었다. 정치적 반대파와 우익세력들이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를 이후의 실추된 이미지를 가져와서 안좋은 학교라고 비하 하기는 하지만,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가 몰락한건 1974년 고교평준화로 부산지역의 고교 서열이 완전히 뒤엎어진 이후였고 1974년 이전 까지만 해도 명문은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괜찮았었던 학교였다. 당시에는 부산에 고등기술학교나 전수학교가 많았고 인가받은 상업고등학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으며(특히 콘크리트 건물을 쓰는 사립학교라면...) 시절이고 고등학교 교육 조차도 대중화 되기도 전이었다. 1960년대 초반 당시에 부산서 줄만 서면 갈 수 있었던 학교는 대개 단층 목조건물을 쓰던 학교들이거나 고등기술학교전수학교 정도였었으며 중학교 중에는 학력인정 안되는 고등공민학교가 있었는데 이것들이 진짜 3류, 4류 학교들이었다. 부산에 유학을 온 이유도 당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유학을 왔었으며, 부산 소재의 금성사에서 일하면서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훈성여상 야간부에 다녔었다.# 그리고 당시 일류 여고였던 경남여고, 부산여고, 동래여고는 야간부 운영을 하지 않다보니 주경야독을 하던 여학생들은 2~3류 이하 고등학교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으며, 당시만 해도 부산이 수많은 기업들이 성장하고 있던(특히 신발이나 섬유 분야) 공업도시다보니 시골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부산으로 오는 경우는 굉장히 많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 기준이면 당시 여성들 중에서는 중졸은 커녕 국졸도 널리고 널리던 시점이었다.[7] 여기서 '꽤 준수한'이라는 말은 노무현 자신이 한 말이다. 하지만 당시 사법연수원에서 판사 임용을 받기 위해서는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을 받았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법연수원 성적 순서대로 판사가 뽑혀나가고, 그 다음으로 검사가 뽑혀나간다. 일단 당시에는 사법시험 선발 인원 자체가 60명 내외로 극히 적었기 때문에(실제로 15기 시험에서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높은 성적을 받았으나, 15기의 선발인원이 평년에 비해 다소 적어 낙방하기도 했다.) 사법시험 합격 자체가 먼치킨으로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노무현이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보기 위해(...)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으로 와서 변호사 개업을 했을 때도 그 자신을 포함해서 부산직할시 내 전체 변호사가 3명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8] 2008년 2월 말 공개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산규모는 노건호(예금 5400만 원), 손녀 노서은(2700만 원)의 예금까지 다 더해도 9억 7200만 원이었다.[9] 작중 노무현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아닌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로 나왔듯이 권양숙은 장수경으로 대체가 되었다.[10] 이희호는 여성 운동의 상징이었고 정치적 성격이 있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