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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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정희의 후처[2] 이자 영부인. 박근혜·박근령·박지만 남매의 어머니.[3] 비록 직접적으로 저격당한 것은 아니나,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암살로 목숨을 잃은 영부인이다.
2. 생애
2.1. 결혼 이전
1925년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갑부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 사이의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 육인순과 오빠 육인수, 아래로 여동생 육예수가 있다. 박정희에게는 각각 처형, 손위처남, 처제다.
육종관은 본처 이경령 외에도 3명의 첩들을 거느렸는데, 그 중에는 경기도 개성시 출신의 친자매도 있어서 각각 '큰 개성댁', '작은 개성댁'으로 구분해야 했다.[4] 이렇게 복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육종관은 적자#s-2와 서자를 모두 합해 총 12남 10녀[5] 를 두었다. 당연히 본처 이경령은 육종관의 축첩을 싫어했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없는 여성이 여전히 왕조시대와 식민시대를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가부장제 사회에서 경제권을 독점한 가장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경령의 울분은 딸 육영수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육영수는 옥천공립보통학교(現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경성부 배화고등여학교[6] 로 진학했다. 배화고녀[7] 는 1898년 미국인 선교사 조세핀 캠벨이 설립한 개신교(감리회) 미션스쿨로, 전통 깊은 명문 여학교였다.
그런데 배화고등여학교 재학 당시 육영수의 거처는, 다름 아닌 '큰 개성댁'의 집이었다. 물론 집 주인은 아버지 육종관이었지만, 실세는 서울에 왔을 때나 가끔 머무는 육종관이 아니라 큰 개성댁이었고, 상경과 동시에 육영수는 신데렐라 처지에 놓이게 된다.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서모(庶母)와 적녀(嫡女)의 사이는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고, 실제로 큰 개성댁은 친어머니 이경령이 서울에서 기숙 중인 육영수에게 보낸 물자를 중간에 가로채기도 했다. 하지만 육영수는 배화고녀 재학 4년간 부모에게 불만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육영수가 재학하던 당시 배화고등여학교에서는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육영수는 무척 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가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육영수는 배화고녀 졸업 후 대학에도 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는 딸들의 대학 진학을 반대했고 아들들만 대학에 보내겠다고 했다. 육종관은 매우 부자였으므로,[8] 그가 딸의 수학여행과 대학 진학에 반대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워낙 보수적이고 남존여비가 심하던 시절이라, 여자가 집을 떠나 멀리 여행하거나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을 몹시 부정적으로 보던 당대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고등여학교까지 졸업한 것만 해도 당시로서는, 특히 여성으로서는 상당한 고학력이었다. ##
배화고등여학교 졸업 후 육영수는 고향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내려와, 옥천여자전수학교(現 옥천여자중학교)에서 1년 3개월간 교사 생활을 했다. 과목은 가사.
2.2. 박정희와의 만남과 결혼
1950년 8월 이종사촌인 송재천[9] 의 소개로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를 만났다. 박정희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10] 1936년 김호남과 결혼하여 이듬해 박재옥이라는 딸을 낳았으나,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던 결혼생활인지라 김호남에게는 그다지 정이 없었다. 박정희는 김호남을 두고 이현란이라는 여대생과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동거하였으나, 박정희가 남로당 소속인 것에 실망한 이현란이 떠나버려 한동안 큰 충격을 받아 방황을 하였다.
시간이 흘러 6.25 전쟁이 터져 군대에 복귀한 이후 육군본부를 따라 대구와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근무하고 있던 짝 없는 33살 박정희를 보고 후배들은 "이현란을 잊으라"고 성화를 하였는데, 휘하 장교들 중 하나가 대구사범 1기 후배인 송재천이다. 옥천 출신이던 그가 퍼뜩 떠올린 것은 자기 고향의 큰 부자인 육종관의 딸이었다. 마침 그 영감이 아내와 딸을 거느리고 부산 영도로 피난차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육영수와 박정희는 짬을 내 만났다. 정식 맞선은 아니었으나 본인의 표현대로 ‘목이 길고 고상하게 생긴 처녀’에게 박정희는 대번 호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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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나이는 박정희가 34세, 육영수가 26세. 결혼 사진을 보면 육영수의 얼굴이 부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전날 육영수가 위경련을 겪어서 생긴 일시적인 후유증이라고 한다. 결혼식 때 주례를 섰던 허억 대구 초대 시장이 두 사람의 이름 때문에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이라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 [11] 또 결혼식에 쓸 예물 반지를 가지고 있던 육영수의 사촌오빠가 결혼식 날 반지를 잃어버려 부랴부랴 반지를 사 왔다고 한다.
친정아버지 육종관은 당시 군인이었던 박정희가 육영수와 결혼하는 것을 “이 난리판에 군인에게 시집간다는 게 될 법한 소리야?” 하며 결사반대하였는데, 반대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육종관은 자기 자신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도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집권한 뒤에도 청와대에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았다. 일설에는 '''"박정희랑 결혼하면 육영수가 비명횡사한다"'''는 예언을 들었다고...1. 일단 둘의 교제 시기가 1950년 8월이었는데, 당시엔 인민군이 경상도를 제외한 한반도를 석권하고 있었고 낙동강에서 결사항전 중이었는데 국군이 승리한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는 요행에 가까웠을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뚫려 적화통일이 달성되면 국군은 제거대상 1호인데, 내 딸이 과부가 될지도 모르는 군인이랑 사귀냐는 점.
2. 신식 교육을 받은 부잣집 아가씨가 자식도 있고 첫 아내와 이혼까지 한[12]
8살 연상의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점.3. 육종관이 사윗감으로 미리 점 찍어둔 조건 좋은 남자가 있었고 혼담까지 오고 갔는데, 자신이 정한 남자를 엎어버리고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 간다는 점.
하여튼 이렇게 친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친정어머니 이경령과 육영수 자신의 고집 덕분에 결혼을 밀어붙였다. 이경령이 육영수의 사주를 무속인들에게 보이니, 다들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산다"'''고 풀이했다고도 한다.[13] 결국 육종관은 육영수의 결혼식에도 찾아오지 않고, 이경령·육영수 모녀와도 완전히 갈라섰으며, 경제적 지원도 일절 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5년에 숨지기 직전, 육종관은 병문안을 온 사위 박정희에게 "내가 부덕하여 큰 인물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사과하였다. '''그러나 친정아버지가 하였던 예언은 끝내 현실이 되고 말았다'''.
2.3. 결혼 이후
결혼 후에는 당시 군인이었던 남편의 월급이 박봉이었던 터라 구멍가게를 열었다고 한다.[14] 6년 후에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에 집을 마련하였는데, 당시 대문이 낮아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 했던 박정희를 보고, "남자가 고개를 숙이면 기개가 꺾인다"며 대문을 개조하였다고 한다. 다른 버전으로는 "이 집에 오시는 분은 다 귀하신 분인데, 어떻게 들어오시면서부터 고개를 숙이게 할 수 있는가"하며 대문을 개조했다는 얘기도 있다. [15]
박근혜가 태어난 후 노량진에 살던 시절, 당시 김종필, 박영옥[16] 의 신혼집에 얹혀살며 동덕여자고등학교를 다니던 박정희의 큰딸 박재옥을 데려와 키우게 된다. 박재옥의 신랑감을 물색해준 것도 육영수였다. 박재옥은 박정희의 부관이었던 한병기와 결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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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에서는 첫째 박근혜, 둘째 박근령, 셋째 박지만 총 2녀 1남이 태어났다.
육영수의 사망 이후 편지를 통해 최태민이 박근혜와 만났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생전에 육영수 또한 최태민을 만났다. 딸 박근혜가 학업에 집중하지 못한 것을 걱정해서 집중력 강화를 위해 최태민을 통해 최면술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고전판 엠씨스퀘어.
2.3.1. 대한민국 영부인으로서
정부에 비교적 비판적 논조를 보이던 'TBC 석간'의 진행자 봉두완[17] 의 회고에 따르면, TBC나 DBS 동아방송이 정부비판적 보도를 하여 관련자들이 고생할 때 옆에서 견제하며 뜯어말리고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봉두완, 박정희, 육영수가 3자대면한 적도 있다고. 이런 부분은 연합통신/동아일보 출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에서도 교차 검증된다.
이렇게 남편을 다독이다 보니, 그녀에게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
항상 한복 차림과 매우 꼼꼼하고 소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로 들어오는 많은 민원 진정서나 편지들을 처리하면서 통치의 한 축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수는 많지 않지만 청와대 제2부속실의 스태프를 거느리며 민원 접수 등 고유 업무를 챙겼으며, 일부 고위직을 견제하는 등 눈에 안 보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 고아원과 보육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많이 신경써 준 인물이다. 1973년 한센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다과회를 열고 구호물자를 보냈다고 한다. 또한 1971년 전남 나주시의 한센인촌, 1972년 전라북도 익산시의 한센인촌을 방문하는 등 한센인들의 인권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고, 이후 1974년 소록도 양로원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그 해 8월 15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 날 박정희를 죽이려 했던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출처. 이후 2000년대에 이희호가 영부인으로서 소록도를 방문하게 된다. 출처.
당시의 박정희의 권위, 그리고 의사나 간호사조차 꺼릴 정도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매우 좋지 않았던 인식을 생각해보았을 때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육영수의 행보는 대중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실제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인식 개선에 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환자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한 점은 지금도 소록도에서 잊혀지지 않으며 덕분에 지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통적으로 전라도 텃밭이라는 말이 붙을정도로 넘어 항상 민주당 우세지역인 만큼 1,839개의 투표소 중에 1,838개의 투표소가 문재인 후보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였으나, '''유일하게 소록도에 있는 도양읍 제7투표소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62.65%의 지지(득표수는 박근혜 270표, 문재인 158표)를 받는 등'''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18]
그렇다 보니 박정희에게 맞서 싸웠던 반체제, 민주화 운동가들도 육영수에 대한 비판은 자중하는 모양새다. 실제 장녀인 박근혜가 정계에 들어온 후 박정희에 저항한 정치인이나 관련 단체들은 박정희와 관련하여 정치를 하는 부분에 비판을 쏟아냈지만 육영수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었다.[19][20]
또한 1973년 육영수는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듣고,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뜻을 받들어 노동교실을 설립하자 이를 적극 챙겨 지원하는 등, 노동자들의 권익에도 신경을 썼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천정환 교수는 2014년 경향신문에 올린 본인의 글에서 한국행정학회가 조사한 한 자료에 따르면 '''역대 영부인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육영수만 긍정적'''으로 나타났다고 언급하였다.
불우 청소년들의 직업 보도를 위해 정수직업훈련원을 설치하고 만화잡지 보물섬을 발간한 것으로 유명한 육영재단이나 어린이회관을 짓는 등 아동복지와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21]
2.3.2. 사망
'''비록 화질이 낮지만 실제 사건 장면이 나오므로 시청에 유의할 것'''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 날, 박정희를 노렸던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22] 의 저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인은 두부관통상이며, 이때가 향년 48세. 이때 육영수 뿐 아니라 합창단원으로 참가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 양(1957-1974)도 총에 맞아 사망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서 회수된 6발의 총알 중 육영수의 머리에 맞은 총알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넘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탄환이 우뇌 깊은 곳에 박혀서 탄을 꺼내려면 시신 훼손이 심각해지기에 탄을 꺼내지 않고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탄환과 함께 묻혀 있는 셈이다. 남편 박정희도 1979년 10.26 사건으로 숨졌다. 육영수 저격 사건에 대해서는 음모론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다음 링크의 영상이 가장 대표적인 음모론을 소개하고 있다. #
육영수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조문객 수만 200만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1975년에 정부에서 추모사진집을 만들었고, 학교에 배부한 듯하다.
육영수의 모교인 배화여자중학교·배화여자고등학교 교정에는 그녀를 기리기 위한 '육영수 여사 기념관'이 세워졌고, 이어 배화여자실업전문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2/3년제 전문대학인 배화여자대학교로 개편되었고, 기념관은 배화여대의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육영수가 사망한 후, 프랑스에 유학하던 22살의 장녀 박근혜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퍼스트레이디 대행 즉 영부인 역할을 대신했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어머니처럼 올림머리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2016년 육영수가 암살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추모공연인 <백목련>이 열렸다. 목련은 육영수가 생전에 좋아하던 꽃이며, 한복을 입고 올림머리를 한 그녀의 모습을 당시 사람들이 목련에 비유했다고 한다. 배화여자대학교의 교화(校花)이기도 하며, 배화여대에는 목련관이라는 이름의 건물도 있다.
2.3.2.1. 사망하지 않고 영부인으로 계속 있었다면?
일각에서는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탄에 암살당하지 않고 1970년대 후반기까지 더 살아 있었다면 박정희와 박근혜, 박지만 등 박정희와 육영수 소생의 자녀들의 이후 행보가 극단적으로 변하거나 지금처럼 마약 범죄에 40여년 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23][24] 실제로 1974년까지 청와대에 올라오는 민의수렴과 보고 및 정보 수집 채널은 정보부, 보안사, 영부인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만큼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에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이다.[25] 하지만 이상의 육영수 영부인의 역할은 최씨 일가와 마약, 아버지와 남편의 사망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딸과 아들이 막장이 되어 범법자로 전락하지 않는 것과 별개의 이야기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서는 박정희는 안 그런 것 같지만 아내에게 내심 굉장히 의지해서 자신을 죽이려던 문세광의 테러로 부인이 사망한 충격 탓에 마음이 극도로 약해졌고[26] ,이는 대통령 경호를 명분으로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여 주변의 원성을 사던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같은 사람에게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추측은 유신정권 후기 박정희의 행보를 설명하려는 가설에 불과할 뿐 실제로 당시 박정희의 심리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육영수가 1974년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당시 문세광의 총탄에 사망하지 않고 가벼운 총상만 입은 채 살아남았거나 혹은 1970년대 중, 후반기까지 생존하여 영부인의 자리에 남아 있었다고 해도 이미 70년대 후반기에 정권의 기반이 흔들렸다는 것을 들어 별로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의견도 있다.[27]
일부에서는 육영수가 이 사건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하지 않고 남편 박정희가 암살당하던 1970년대 말까지 생존하여 청와대를 나갔다면 대한민국이 민주화된 이후에 딸 박근혜가 아니라 육영수가 남편 박정희의 후광을 앞세워 정치계에 입문해 정치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박정희의 아내이던 육영수도 그 시기까지 살아있었다면 충분히 박정희의 후광을 업고 정계 진출이 가능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나이가 워낙 많은 1920년대 출생자이었기 때문에 딸 박근혜와 달리 대권에는 도전하지 못하고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중반기까지 국회의원 정도만 몇 번 하고 정계에서 은퇴했을 확률이 높다.[28]
3. 매체에서
- 제2공화국(MBC) - 고은아
- 제3공화국(MBC) - 김미숙
- 삼김시대(SBS) - 김미숙
- 제4공화국(MBC) - 전인화
- 코리아게이트(SBS) - 고두심
- 격동 30년[29] (MBC) - 고두심
- 제5공화국(MBC) - 양미경. 극의 특성상 시기적으로 10.26과 전두환 집권기를 다루므로 1회에서 회상 형식으로 잠깐 등장한다.##
4.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의 재발견
4.1. 최태민을 조심하라는 발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역대급 사건이 터지면서, 최태민 때문에 육영수도 재조명을 받고 있다. 박근혜의 여동생 박근령의 남편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가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육영수가 생전에 박근혜에게 "최태민과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밝힌 것 때문이다. #, #
이 인터뷰는 박근혜와 최태민이 처음 만난 시점과 관련해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육영수가 비극적으로 사망한 일로 박근혜가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동욱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육영수가 생존해 있던 시기부터 이미 박근혜와 최태민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러시아 제국 시절 당시 니콜라이 2세 치세 시절과 놀라울 정도의 데자뷰도 보여주는 것인데, 그 쪽은 국가지도자의 부인(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이 사이비(그리고리 라스푸틴)의 꾐에 빠진 것을 장녀(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가 말리려 했다면, 이 쪽은 국가지도자의 장녀(박근혜)가 사이비(최태민)의 꾐에 빠진 것을 부인(육영수)이 말리려 했다. 어머니와 장녀만 포지션이 맞교환되었을 뿐, 상황이 완벽하게 동일하다.
이 주제는 2016년 11월 26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다루어졌다. 최태민의 아들의 증언에 의하면, 육영수 생전부터 최태민이 청와대 출입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주간지에서 1972년에 최태민이 청와대에 출입했다는 기사를 찾아내었다. 이 기사에는 육영수는 TV에서 본 최면술 시범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최태민에게 직접 시범을 보여봐 달라고 불렀단 내용이 적혀져 있다.
4.2. 김종필 발언에 의한 논란 진위
최순실 게이트가 한창이던 2016년 11월 14일, 주간지 시사저널은 동월 3일 자사 경영진이 김종필 씨와 나눈 대화 내용을 녹취 공개하였다. 당시 크게 주목받은 내용은 "박근혜는 5천만 국민이 몰려가서 하야하라 해도 끝끝내 따르지 않을 성격의 소유자"라는 김종필의 분석이었으나, 그것과 별도로 육영수에 관한 흥밋거리 위주의 증언도 들어있었다.
김종필은 육영수에 대해 "대통령 부인이라는 이름에 맞게 행동하는 것처럼 꾸민 것일 뿐, 실제로는 남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며, 육영수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발언을 했다. 그 일례로 박정희가 권력자가 되기 전이었던 시절, 자신의 아내 박영옥이 겪었던 일을 들었다. 박영옥은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와 형수 조귀분[30] 의 딸이다. 따라서 육영수는 박영옥의 숙모가 된다.
김종필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박영옥이 첫 아이를 낳고 쌀이 없어서 쫄쫄 굶었는데, 꼴에 숙모라는 육영수가 자기 식구들에게만 밥을 먹이고[31] 산모였던 자기 조카딸 박영옥에게는 밥을 먹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는 것. 그래서 김종필이 귀국했을 때 박영옥이 김종필을 붙잡고 서러움에 울면서 그 이야기를 했고, 분노한 김종필이 육영수에게 "남도 아니고 조카딸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졌다는 것.
그런데 정작 인터뷰를 했던 김종필은 "고향 사람이라고 찾아와서 시중에서 나도는 이야기를 농담 삼아 주고 받았을 뿐인데, 몰래 녹음까지 해서 왜곡·과장해 비열한 기사를 만들어 자기 신문에 냈다"며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영철 시사저널 편집국장은 "왜곡이나 과장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고 받은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종필의 주장대로라면 김종필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고향 사람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이지만, 일단 법적으로는 시사저널의 행동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김종필 정도의 군인과 정치인으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이 한국 굴지의 주간지 편집인이 이런 탄핵 정국에 심심하니 박정희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겉치레를 그대로 믿고 ‘고향사람’이라고 불쑥 기분따라 다 꺼내보여준다는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2016년 11월 19일 '대통령의 시크릿' 편을 방송하면서 1951년에서 1952년 사이에 부산시와 대구시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박정희와 육영수 부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제보를 받는다고 공지하였는데, 이 내용에 따라 김종필의 인터뷰 내용의 진위 가능성을 판가름할 내용이 방송될 수도 있다. 하지만 1년이 넘도록 해당 내용이 방송되지 않은 걸 보면 별다른 증언이나 증거는 확보하지 못한 것 같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및 김종필의 발언으로 어수선한 와중, 2016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육영수 생가[32] 에서 소위 숭모제[33] 라는 것이 거행되었는데, 보수 시민단체와 진보 시민단체가 부딪쳐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로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고, 보는 사람들까지도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영상.
월간조선 2017년 1월호에 육영수의 조카 홍정자의 인터뷰가 실렸으며, 앞서 언급된 김종필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링크. 그러나 해당 기사에서 박근혜는 잘못이 없고 최씨일가에게 순진하게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쉴드치는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5. 여담
- 키가 170cm로 대한민국 영부인 중 가장 키가 크고[34] , 한복에 어울리는 체형이었다고 한다. 이후 영부인이 되는 이순자의 영 좋지 않은 한복 센스 때문에 육영수의 모습이 더 부각된다. 남편인 박정희보다도 키가 컸다고 한다. 참고로 박정희는 164cm로 역대 남자 대통령들 중 가장 키가 작다. [35] 이들의 딸인 박근혜의 키는 162cm. 동년배 평균보다 조금 큰 편이다. 이때문에 부부가 같이 행사에 참석할 땐 행사 주최측에서 육영수 쪽이 키를 조금이라도 작게 보이게 하려고 신경 썼다는 말이 있다. 다만 박정희 본인은 굳이 키를 크게 보이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서 굽이 높은 구두나 깔창을 쓰지 않았고, 어떤 자리에서는 주최 측이 박정희의 의자에 올려 놓은 두툼한 방석을 던져버리기까지 하였다. 딱히 키에 대한 생각이 없었거나, 되려 단신인 쪽이 정치적 이미지 메이킹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단신인 쪽을 부각시켜 외유내강형 혹은 서민에 가까운 풍모를 보일 수 있는 장점도 있기에 말이 안 되진 않는다.[36]
- 한때 "푸른 기와집에 정희와 영수가 사는데,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게?", "대통령 부부가 싸우는 걸 3글자로 줄이면?" 같은 농담이 떠돌았다. 후자는 정답이 "육박전"이다. 이 농담을 맨 처음 고안해서 써먹은 전유성은 즉각 출연정지를 먹었고, 프로그램은 폐지되었으며, 담당 PD는 중정에 끌려가서 개박살이 났다고 한다. 박정희 & 육영수 내외는 이 농담을 대통령 전용기의 스튜어디스에게서 들었다고 하는데, 프로그램과 PD에게 내려진 처우와는 달리 당사자들은 이 개그를 듣고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 [37]
6. 관련 단체
- 육영수여사기념사업회
- 육영재단
7. 관련 링크
[1] 박 대통령과 한 무덤에 합장되어 있지는 않고 봉분 2개에 쌍릉으로 따로 묻혀 있는데, 그 이유가 육영수가 먼저 가서였다는 말이 있다. 이례적으로 부군 대통령보다 먼저 현충원에 안장된 영부인이기도 하다.[2] 박정희의 아내라 하면 대개 육영수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지만 박정희의 첫 아내는 김호남이었고, 이현란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사실혼)하기도 했다. 이현란, 김호남과 이별한 이후 만난 여인이 육영수.[3] 언니 육인순과 여동생 육예수 소생의 자녀들에게는 이모가 된다.[4] 축첩을 들이는 것은 1950년대까지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어느 사회학자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부유한 기혼 남성의 5%는 첩을 거느렸다고 한다. 이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축첩 공무원들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난 후 이때부터 일부일처제가 한국사회에 확립되었다.[5] 의친왕, 윤영렬과 더불어 동시대에 (지금까지 이름이 알려진 인물)가장 자녀를 많이 둔 인물로 손꼽힌다. 물론 밝혀진 인물 한정으로다(...)...[6] 청와대에서 매우 가깝다. 교문을 통과해 언덕을 올라 학교 건물까지 가다 보면 청와대가 보인다. [7] 고등여학교(高等女學校)를 줄여서 고녀(高女)라고 했다. 오늘날의 여자중학교+여자고등학교 과정. 일제강점기 때 여학생들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은 여자고등보통학교라고 불렀다가, 1938년부터 고등여학교로 개칭되었다.[8] 한국에 유일하게, 일본에도 2대가 겨우 남아있는 95식 4륜 자동차가 육종관 본가에 있던 차이다. 일제 후반기에 군용차를 민간이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9] 송재천은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후배이기도 했다.[10] 본래 박정희는 좀 더 나이를 먹은 후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길 원했으나, 집안 어른들, 특히 아버지인 박성빈이 죽기전에 막내아들이 결혼하는 것을 봐야한다며 강권하여 당시 16세의 처녀였던 김호남과 억지로 결혼시켰다.[11] 비슷한 예로 방송에서 "육영수 여사"라고 해야 할 것을 '''"육영사 여수"'''라고 방송사고를 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방송사고가 난 건, 방송에서 원체 수없이 육영수 여사, 육영수 여사 하다 보니 순간 실수한 거라고 하는데 방송에서 수없이 육영수 여사라는 단어를 부를 시기, '''바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벌어진 방송사고라고 한다'''. 출처는 이계진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12] 1990년대만 해도 이혼은 결격사유로 여겨졌으며, 현재도 정치인들에게도 해당이 된다. 하물며 이때는 산업화가 이루어지기도 이전인 1950년대였다.[13] 다만 육종관이 들었던 예언은 저기서 더 살이 붙는다. 바로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살기는 하지만 마지막에는 두 사람 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박정희의 경우는 김종필의 회고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61년 어느 날, 식당에 국회의원 당선과 장관, 차관 임명을 잘 맞추는 것으로 유명했던 백운학이라 불리는 역술인을 초청하였다. 백운학은 "각하, 한 20년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자리가 파하는 자리에 "이상한 점괘인데요. 끝에 험하게 돌아가실 것 같아요."라며 말했다고. 그런데 이것이 그대로 실현되어 놀랐다고 한다.[14] 부잣집에서 자란 사람이 스스로 어렵게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서는 그런 점에서 육영수를 고평가한다.[15] 반면에 육영수는 키가 170cm인 장신이었다. 2020년 현재에도 여성의 키가 170cm면 대단한 수준이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 평균 키가 170cm를 넘긴 게 90년대인 걸 감안하면 남녀불문하고 매우 장신인 편이었다. 한국을 넘어서, 당시 미국 백인 기준 남성 평균 키마저도 173cm였다. 때문에 박정희의 미국 방문 뉴스에서 다른 미국 여성들보다 차이나는 큰 키를 보여줬다. 반면 박정희의 키는 164cm였는데, 저 썰대로라면 대문이 상당히 낮았다는 거다.[16] 박재옥에게는 사촌언니이다.[17] TBC의 간판 뉴스 앵커였고 당시 인지도는 엄기영 전 MBC 사장이나 손석희 JTBC 대표이사 사장과 동급이었고 보면 된다. 이후 전두환 정권 때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국회의원을 하였다.[18] 물론 전라도 뿐만 아니라 경상도 등 전국 각지에서 온 환자들이 많은 것도 있다. 실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도 민주정의당 노태우가 김대중보다 표를 많이 얻기도 했다.[19] 과거 민주당에서 영남권 인사들을 영입할 적에 박근혜도 영입 대상에 있었다.1999년 5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이 잘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역사 속에서 재평가 받게 해야 할 것. 형식은 민간주도로 하고 예산은 민간 모금과 정부 재정 지원으로 해야 할 것. 기부금 모금을 허가하는 등 정부와 대통령이 앞장서면 국민 호응도 클 것이고 꼭 성공할 것"이라 말한 적도 있었다.[20] 박근혜는 1998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입문하였다. 앞의 김대중의 발언은 이미 박근혜가 정치권에 입문한 직후의 이야기. 김대중은 1994년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시절 온건보수 성향의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박정희에 대해서 과거와는 다르게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는 식의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고, DJP연합으로 집권한 이후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국가예산으로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21] 육영재단은 손기정 선수의 메달을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다. # 그러나 정작 손기정 선수의 장례식 당시, 장례식을 위해 메달과 상장을 대여해달라는 유족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청와대에 보관되어 있던 다양한 문화재들이 박정희 저격 이후 사라졌는데, 육영재단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안중근 의사의 유묵.[22] 정말 우연인지 그의 어머니도 '''육'''씨라고 한다.[23] 실제로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를 여의고 난 뒤 영세교 교주인 최태민과 최순실 부녀에게 극도로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최태민과 최순실에게 빠지게 되었다.[24] 다만 박지만의 마약 범죄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아버지 박정희가 암살된 지(1979년) 10년 뒤인 1989년부터였다.[25] 육영수는 야당 인사들이나 반대자들에 대해 고문, 납치, 암살 등을 향한 정치 공작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여론을 부드럽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한, 박정희의 정치적 감각에는 육영수의 조언이 한 몫했다는 얘기도 있는 만큼 남편 내조를 잘 한 것을 보면, 2인자들의 상호견제를 통한 1인자의 권력을 유지한다는 벼랑 끝 체제를 장기간 유지해온 이면에는 육영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26] 실제로 인간이 받는 스트레스 중 가장 큰 것이 배우자나 자녀의 사망에 의한 트라우마라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이다.[27] 2차 오일쇼크 등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YH 사건 등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시작되고 있었고, 동시에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했기에 박정희 정권이 언젠가 무너질 가능성은 있었지만, 적어도 김재규의 총탄에 급격하게 붕괴될 정도로 막장스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28] 만약 육영수가 이 시점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이미 90대 할머니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9] 격동 50년의 전신인 라디오드라마[30] 그래도 이 사람은 총탄에 사망한 남편 박상희나 시동생 박정희, 아랫동서 육영수와 다르게 1980년대, 90년대 초까지 더 살다가 노환으로 죽었다.[31] 이전 버전에는 "자기 아들딸들에게만 밥을 먹이고"라고 되어있고 박영옥과 육영수의 나이가 비슷해서 당시 박근령이나 박지만은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김종필의 말이 의심쩍다는 듯이다. 하지만 김종필의 인터뷰를 보면 "자기 아들딸"이라는 말은 없다. "저쪽에서는 밥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데"라고 해서 육영수네 식구는 밥을 먹었다는 것을 표현했을 뿐이다.[32] 99칸 한옥이다. 오래되고 낡은 집을, 옥천군에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약 37억 5,000만원을 들여 복원했다.[33] 육영수의 생일을 기념하는 제례. [34] 2018년 기준 한국 성인 여성의 평균 신장은 161.4cm로, 지금도 여성이 170cm이면 상당한 장신으로 취급받는다. 1970년대 한국 여성의 평균 신장이 155cm였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170cm는 거인인 수준이었다. 이 당시 국가대표 여자 배구 선수가 거의 이 정도 체격이었다. 참고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168cm, 문재인 대통령이 170cm 정도이다. 정말 큰 키다.[35] 지금 시대로 보면 박정희의 키가 남자로서 조금 작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박정희가 젊은 시대인 1930년대에는 지금보다 평균 키가 훨씬 작았다.[36] 참고로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키가 제일 큰 대통령은 최규하다. 182cm. 1900년대 초반 출생한 사람들이 2020년대 현재까지도 제일 키 큰 대통령, 제일 키 큰 영부인인 것이 흥미로운 점이라면 흥미로운 점.[37] 전유성이 가수 윤형주의 <0시의 다이얼>에 출연해 이 개그를 했었다. 근데 윤형주가 알던 누나인 최은자 씨가 대통령 전용기의 스튜어디스여서 그걸 박정희에게 말해줬고, 그 후 상술한 대로 탄압을 받았다. 훗날 전유성 본인은 그 사건이 자신에게 "세상은 참으로 치열한 육박전이구나!"라는 걸 알게 해줬다고 자신의 저서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에서 밝혔다. 당시 윤형주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방송사엔 중앙정보부에서 파견한 조정관이 있어서 방송 멘트까지 일일이 검열했는데,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하다가 "제비가 박씨를 물고 갔다"는 멘트가 나오자 "왜 박씨냐? 무슨 저의가 있는 것 아니냐?"라며 지적을 했다고. 그런 시절이었으니 전유성도 당연히 출연금지를 먹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