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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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중종의 3남이자 중종반정의 공신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의 장남으로, 전주 이씨 금원군파의 파시조이다. 봉성군의 친형이며, 복성군의 이복동생이자 인종과 명종, 덕흥대원군의 이복형이다.
2. 생애
8살이던 1520년 12월 27일 금원군(錦原君)에 책봉되었다. 1535년 문소전도제조[4][5] 를 역임하고 1552년에는 연은전의 도제조를 겸하였다.[6] 이후 사옹원[7] 과 종부시[8] 의 도제조를 추가로 겸직했고 1557년에는 종친부까지도 관장하는 막대한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승려들과 관련 된 논란에 휩싸이는데 1559년 11월, 명색이 숭유억불을 주장한 조선에서 왕족 신분으로 승려들과 내통하고 불사를 올린 것을 문제로 대간들이 그를 탄핵한 것이다. 근데 자세히 내막을 보면, 단순히 불교 행사가 문제가 아니고 '문정왕후의 언문교지를 위조한 승려 성청(性淸)의 일에 관련된 것으로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종은 이를 쿨하게 씹고(...) 단순히 추고하는 선에서 끝내는 등 이복 형 금원군을 옹호하여 그대로 관직에 머물 수 있었다.[9]
3. 여담
- 금원군의 묘갈명을 지은 송인은 그를 사람이 순하고 소박하며 꾸밈이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또 주색잡기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 내통하지 않고 깊은 곳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고도 하였다.
- 하지만 주색잡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해도 성격은 좀 괄괄했던 것 같다.(...) 1535년 1월 4일에 자신의 노비를 시켜 사헌부에 들어가 서리를 끌어내는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던 것. 당시 대신들은 금원군을 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10]
- 중종은 자녀들이 장성할 무렵, 한 동안 왕자, 왕녀들의 집을 지어주는 공사를 계속했는데 정도가 좀 지나쳤는지(...) 일부 신하들이 너무 사치스러운 것 아니냐는 지적을 어쩔 수 없이 중종이 감시관을 통해 법을 위반하는지 조사하게 했는데 금원군의 집에 고려 시절에도 으리으리하다고 비판받았던 서청(書廳)이 있는 게 밝혀졌고, 중종은 서청을 철거시켰다.[11]
- 문소전도제조 시절에도 제대로 일을 안했는지(...) 신하들이 파면시키라고 주장했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12]
4. 사망
1562년 4월 7일 향년 5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장지는 풍수 문제로 두 번이나 바꾼 후 다음 해인 1563년 3월 7일 경기도 양주의 불광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이 곳은 훗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갈현동[13] 에 편입되었는데, 1970년 서울특별시의 택지 개발 확장 사업으로 인해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로 그 묘를 이장하였다.
1871년 3월 16일, 고종이 '효문(孝文)'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5. 가족과 자손
자식이 없어 이복 동생 덕흥대원군의 아들 하릉군 이인을 양자로 들였고 그 하릉군도 적자를 두지 못해(...)[14] 덕흥대원군의 장남 하원군의 아들 영제군을 입양해 대를 이었다. 그래서 사실상 덕흥대원군파로 봐야 하고 항렬자도 역시 같이 쓴다.
5.1. 역대 종주(宗主)
1. 금원군 이령(錦原君 李岭).
2. 하릉군 이린(河陵君 李鏻). - 금원군파 1대 사손. 사손(嗣孫)의 댓수는 종주의 댓수에서 '-1' 하면 된다.[15]
3. 영제군 이석령(寧堤君 李錫齡).[16]
4. 호안군 이오(湖安君 李澳).
5. 이두한(李斗漢).
6. 이홍집(李弘集).
7. 이익희(李益熙).
8. 이철규(李哲奎).
9. 이종인(李鍾寅).
10. 이동렴(李東濂).
11. 이내현(李來賢).
12. 이주응(李周應).[17]
13. 이재종(李載琮).
14. 이황용(李璜鎔).
한국전쟁 이후의 계대는 전해진 바 없다.
6. 매체에서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이풍운이 어린 금원군으로 출연하였다. 여기서는 본인은 별 다른 활약이 없는데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중종 시절에는 어머니 희빈 홍씨가, 인종 시절에는 윤임이 그를 차기 왕으로 지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1] 군호는 전라남도 나주시의 별호인 금성(錦城)에서 유래했다.[2] 조선왕조실록 - 인종실록에는 '岭'으로, 명종실록에는 '岺'으로 이름이 다르게 나온다. 단 '岭'과 '岺'은 같은 글자로, '山'이 왼쪽 변에 있는 지, 윗쪽 머리에 있는 지의 차이일 뿐이다. '齡' 이라고 적힌 것도 있는데 이건 잘못 쓴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194권, 1605년(선조 38년) 12월 26일 병인 2번째 기사. [3]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이다.[4] 都提調. 쉽게 말해 부서의 총책임자를 말한다.[5] 文昭殿. 조선 태조의 비인 신의왕후 한씨를 모시던 사당이다.[6] 延恩殿. 조선 성종의 아버지 덕종(의경세자)를 모시던 사당이다.[7] 司饔院. 조선 시대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8] 宗簿寺. 조선시대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관서. [9] <조선왕조실록> - 명종실록 25권, 1559년(명종 14년) 11월 9일 병자 1번째기사 [10] <조선왕조실록> - 중종실록 79권, 1535년(중종 30년) 1월 5일 병인 2번째 기사[11] <조선왕조실록> - 중종실록 79권, 1535년(중종 30년) 1월 5일 병인 2번째 기사[12] <조선왕조실록> - 중종실록 80권, 1535년(중종 30년) 8월 1일 기축 2번째 기사.[13] 2024-11-07 07:43:08 기준으로는 은평구.[14] 단, 서자는 둘이나 있었다. 교성도정 이선과 이현.[15] 실제로는 덕흥대원군의 적2남.[16] 실제로는 덕흥대원군의 장남 하원군 이정의 적3남.[17] 11대 종주 이내현의 양자로, 생부는 인성군의 8대손인 이내준(李來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