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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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일본군 소위'''였고, '''남로당의 선동가'''이자 제주 4.3 사건의 막을 연 '''반란 수괴''' 중 한 사람이다. 본명은 이승진(李承晉), 본관은 고부(古阜)이다.
2. 생애
1923년 8월 4일, 전라남도 제주도 대정면 영락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명근이 대구로 이사하면서 대구에서 유소년-청소년기를 보냈다. 부친은 술도가로 대구에서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대구공립심상소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인 명문자제의 출세코스인 교토 세이호중학교(聖峰中学校)[1] 를 거쳐 주오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주오대학교 경제학과 2학년 재학중에 학병에 자원하여 일본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일본군 복무중인 1945년 1월 19일, 역시 제주도 대정읍 출신으로 오사카에서 군수공장 납품업체를 운영하던 사장이자 '일본공산당 비밀 당원인 강문석(姜文錫)'[2][3] 을 만나고 그의 장녀로서 오사카 고등여학교에 재학중이던 강영애와 혼인했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혼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대구에 체류하며 장인 '강문석'을 통해 알게 된 조선공산당 경북인민위원회 보안부장 '이재복'과 손을 잡고 9월 총파업에 이은 10월 1일 대구 10.1 사건에 가담하였다.[4] 여기서 천부적 선동능력을 발휘하여, 남조선로동당 지도부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5][6] 1946년 12월 경북에서의 대대적인 좌익검거선풍을 피해 고향 제주도로 몰래 잠입해 대정중학교 상업과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과 교사, 귀환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쳤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소조를 이끌며 좌익세력 규합에 나섰다.
이렇듯 비밀리에 남로당 관련 인물을 만나고 공작에도 성공한 듯 보이지만 한계가 있었다. 소련군정의 시티코프 지령문 수령 뒤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 좌익이 동원한 남로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주의청년동맹, 부녀동맹,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명의 군중과 기타군중 8,000명 등 총 3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3.1절 기념식을 열었다. 경찰은 제주 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 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주변 경비 활동을 하고 있었고, 기념식을 마친 3만여 군중은 가두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작은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는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3만여 군중들이 "애를 치어놓고 사과도 없이 어디 가는 거냐"며 몰려들어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고,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바람에 6명이 사망하고 6~8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미군정 당국은 이를 경찰의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지어 3.1절 기념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7] 이 과정에서 김달삼은 '''남로당 제주도당책'''에 임명되었고 본격적인 지휘부를 구성하여 '''군사부장'''까지 겸임하였다.[8]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여 명의 남로당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를 공격했다. 이것은 경찰관과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 단체 요인들의 집도 습격하였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가 예정하면서 당의 존립이 위협받게 된 상황에서 남로당 중앙당과는 아무런 협의도 없이, 김달삼 등이 독단적으로 감행한 무장폭동이자[9] 제주 4.3 사건의 시작이었다.[10] 제주도 남로당 세력들은 외부와는 고립되어 있는 제주도의 지형과, 미군의 대응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고, 제주도 경찰과 서북청년회 소속 토벌대는 한라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들 공산 반란 세력 진압에 나섰는데, 국방경비대 9연대대장인 김익렬 연대장은 4월 17일 제주주둔 미 육군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을 통해 남로당 무장대에 대한 진압작전에 참여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데에 이어 다음날 4월 18일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라"는 지시도 함께 맨스필드 중령에게 내려왔기에, 맨스필드 중령으로부터 이 임무를 하달받은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비행기를 통해 살포했고, 이에 김달삼이 호응하면서 4월 28일 구억리국민학교 건물에서 두 사람의 면담이 이루어졌다.[11]
사실 김달삼의 제안은 김익렬의 직권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나 김달삼도 일단 휴전에는 합의를 보았고, 양측은 평화적으로 사태를 수습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4.28 협상이 있고 바로 다음날인 1948년 4월 29일에 오라리 마을의 대동청년단 부단장과 단원[12] 이 행방불명되고[13] 4월 30일 제주읍 오라리 대동청년단원의 부인 강공부, 임갑생 두 명이 납치되었다. 두 여인 중 강공부는 죽고 임갑생은 가까스로 탈출해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5월 1일 연미 마을에서 강공부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경찰 트럭에 실려 고향 마을에 온 강공부의 시신은 '제기물 동산'에 안장되었다. 이때 경찰 트럭을 타고 대동 청년단, 서북 청년단 등 우익 청년단원 30여 명도 함께 왔다. 장례가 끝난 후 경찰관은 트럭을 몰고 돌아갔지만, 현지에 남은 대동청년단 단원들에 의해 5월 1일 12시경 연미 마을에서 당시 좌익 활동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허두경 강병일 박태형 강윤희 박전형 등 5세대 12채의 민가에 대한 방화가 벌어졌고 이에 민오름 주변에 있던 남로당 무장대원 20여 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이들을 추적, 이 과정에서 경찰관 가족 1명(김규찬 순경의 어머니)이 피살됐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두 대의 트럭을 타고 오후 2시경 출동하였지만 이미 마을 안의 유격대는 도주하고 사라진 뒤였다. 때문에 쌍방간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경찰이 마을 입구에서 난사한 총에 맞아 주민 1명(고무생 여인)이 피살되었다. 오라리 방화사건(1948.5.1)이다.
오라리 방화 사건의 경우 주한 미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보고서(1948년 5월 3일자)는 「제주도 폭동/ 오라리 방화」란 제목 아래 “'''오라리가 5월 1일 낮 12시 30분부터 3시간 동안 폭도 50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경찰이 도착하여 폭도들을 마을에서 축출하였다.'''”고 기록하고 그 출처는 ‘경찰 보고’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동아일보] 특파원이 쓴 <제주도폭동 현지답사>(1948년 5월 9일자 『동아일보』)는 ‘5월 1일 메이데이에도 농민 참살의 비극’ ‘불바다로 화한 오라리 부락’이란 소제목 아래 오라리에서 3시간의 교전이 있었고, 방화나 학살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묘사되고 있었으며, 1982년 발간된 『제주도지』에도 ‘오라리 전투’란 표제 아래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에서 경찰 토벌대와 폭도 주력부대가 싸움이 붙어 사건 후 처음으로 경찰이 이들의 주력부대를 격퇴했다…''' 마을은 순식간에 격전장으로 변해서 3시간에의 격전이 계속되었다. 이날의 격전에서 마을 민가 상당채가 불타고 1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실제로 교전은 없었으며, 국방경비대 초대 9연대장을 지낸 장창국의 『육사졸업생』에는 “5월 1일, 소위 메이데이(노동절) 날 상오 11시 귀순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제주읍 외곽 오라리 마을에 날벼락이 났다. 정체불명의 청년 일당이 부락을 기습‧방화한 것이다. 다수의 사망자도 났다. 경찰은 하산‧귀순한 자를 배신자라고 간주하는 폭도들의 보복행위라 했고, 반도들은 경찰이 서청을 시켜서 한 행위라고 주장했다.”라고 썼다. 즉 이들 기록들은 오라리 방화 사건, 그러니까 1948년 5월 1일 벌어진 오라리에서의 민가 방화 자체를 '폭도' 즉 남로당 무장대의 소행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14]
다만 이 방화 자체는 우익 단체에 의한 대동청년단의 소행으로 확인되었으며[15] 그들이 오라리에서 자행한 1948년 5월 1일 12시의 민가 5세대 12채에 대한 방화를 앞서 4월 29일과 30일에 대동청년단 단원 2명의 실종과 그 가족 2명의 납치 및 1명의 피살을 원인으로 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오라리 방화 사건에 대해서 당시 우익 및 군경은 '''1948년 5월 1일 12시에 민가 5세대 12채에 불을 지른 주체 자체가 '폭도' 즉 남로당 무장대'''라고 주장하다가, 이후에 관련자 증언이 나오게 되면서 '''방화를 저지른 주체 자체는 대동청년단이라는 우익 집단이 맞지만 그것은 좌익 세력으로 보이는 모종의 집단에 의해 대동청년단원이 납치되어 한 명이 피살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의 뉘앙스를 바꾸고 있다. 여기서 1948년 5월 1일의 오라리에서의 5세대 12채에 대한 대동청년단원의 방화 자체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 아니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지목되는) 그 이전 4월 29일과 30일에 있었던 대동청년단 단원 및 관련자의 납치 및 피살 사건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 에서 논점의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협상이 깨지면서 김익렬은 1948년 5월 6일 9연대장에서 해임, 여수시 주둔 14연대장으로 전출되었고[16] 결국 김달삼은 1948년 8월, 사태 수습이 안 되고 자아비판을 요구받자, 이덕구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북한으로 월북하였다.
김달삼은 8월 21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로당 인민 대표자 대회에 참석했고 여기서 그는 제주 4.3 사건에 있어 자신이 세운 공적을 선전하여 다른 참석자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국기훈장 2급 수여에 북한 헌법위원회 위원으로까지 활동하는 등 출세한다.
물론 북한에서는 그를 '''제주에서의 인민봉기의 공로자'''로 추켜세웠지만 말이 좋아 인민봉기지, 남로당 무장대에 의해 학살된 군경, 우익 인사나 그 관련자의 수도 적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보복이랍시고 군경이나 서청이 양민을 상대로 저지른 어마무시한 학살을 진영논리로 묻어버렸을 뿐이다. 무엇보다 사태가 불리해지자 제주도민을 내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버린 시점에서 김달삼은 6.25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박헌영과 같이 비판받아 마땅하다.
김달삼은 이후 태백산을 거쳐 일월산까지 침투하여 지방 좌익과 빨치산들을 규합하는 등 남로당의 1949년 9월 공세를 지원했으며, 경북 일대에서 지서습격, 교량파괴, 식량약탈, 민간인 학살과 납치 등의 활동을 주도하였다. 1950년 2월에 김달삼이 이끄는 빨치산 부대가 청송면 월외리에 출몰했다. 당시 은거 중이던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와 양식과 약품을 구하는 것을 목격한 한 청년단원이 경찰과 군부대에 이를 신고하여 체포되었는데, 주민들의 신고로 체포된 사실을 알게 된 70여 명의 김달삼 등 빨치산 부대는 2월 6일 밤 11시경 마을을 습격하였고, 마을 주민 12명이 희생되었다.
3월, 다시 강원도로 침투하려다 매복에 걸려서 총살되었다. 시신은 토벌대에 의해 참수-효수되었다.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에 있는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이라는 곳이 김달삼이 총살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해당 지명은 현재 한국에서 두 번째로 긴 지명으로 꼽힌다고...[17] 현재는 지명이 승지골로 바뀌었으며, 여량면에서 발간한 여량면 지명유래에서 지역 어르신들이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이라 한다는 것으로 확인사살.
이전에는 김달삼의 효수된 사진들을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었으나, 그 잔혹성 때문에 검색에서 제외된 것들이 많아 현재는 찾기 힘들다.
북한 평양의 애국렬사릉에는 그의 묘가 있다. 물론 가묘.
3. 대중매체에서
4.3 사건을 다룬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년)에서는 최상훈이 배역을 맡았다. 작중 제주 방언으로 말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다소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다. 28화에서 작중 김익렬(이효정 분) 연대장과의 구억리 국민학교에서의 협상 장면을 다루었는데, 당시 제주 4.3 사건을 바라보는 좌우익의 시각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75화에서 조병옥과 장택상이 제주도 문제를 의논할 때 제주도를 빨갛게 물들였다고 이름이 언급된다.김익렬: 범법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주십시오.
김달삼: 뭐요? 범법자들의 명단을 작성해달라? (목소리 커지며)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우리가 범법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김익렬: 그러면 살인 방화가 범법이 아니란 이야기입니까?[18]
김달삼: 당신은 당신 집에 도둑이 들어 와서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데 보고만 있겠소? 몽둥이 들고 도둑을 막는데 그게 범법이란 말이오?
김익렬 :(한숨)
김달삼: 자수하는 사람한테는 일체 신변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해준다고 해놓고서는 뭐, 두목급은 따로 명단을 작성해달라?
김익렬: 명단에 기재된 자들의 자수나, 도망은 자유의지에 맡기겠소.
김달삼: 무슨 뜻입니까?
김익렬: 당신들이 모든 폭도들의 귀순과 무장해제를 책임진다면 나 역시 개인적으로 당신들의 탈출을 배려하겠습니다.
김달삼: 합의서에 써넣을 수 있겠습니까?
김익렬: (잠시 침묵) 그건 곤란합니다.
김달삼: 그러면, 어떻게 당신의 그 말을 믿지요?
김익렬: 내 처와, 6개월 된 아들이 제주도에 있습니다. 그들을, 인질로 맡기죠.
[1]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구제중학교로, 1948년 학제개편으로 신제 세이호고등학교가 되었으나 1950년에 폐교했다.[2] 증조부가 추사 김정희가 유배 왔을때 두번째로 머물던 집의 주인이었다. 추사에게 자식들 교육을 부탁하기도 했다고.[3] 김달삼이라는 가명도 원래 강문석이 사용하던 이름이었다.[4] 다만 당시 조선공산당의 지령은 9월 총파업에만 국한되어 있어 노동계급의 파업만 설정했을 뿐 무력투쟁은 상정되어 있지 않았으며, 9월 총파업을 지휘했던 박헌영은 10.1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군정청의 체포령을 피해 영구차 관속에 들어가 비밀리에 월북을 해버리는 등, 공산당이 10.1 사건을 주도적으로 일으켰다고 한다는 건 좀 애매한 감이 있다.[5] 스티코프의 1946년 9월 9일자 일기에 따르면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소련당국에 문의했다. 스티코프는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집회를 조직할 것’을 9월11일, 9월16일 두 차례에 걸쳐 지시했다. 이때는 10월로 예정됐던 총파업을 1개월 당기도록 조선공산당이 전평 지도부에 지시한 무렵으로, 1947년 2월 초 남로당 중앙당은 스티코프의 지령을 받아 전국에 “3.1절 기념투쟁에 관한 지령”을 하달했고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 지령문을 2월 16일에 받았다.[6] 하지만 제주 4.3 사건이 남로당의 지령으로 벌어졌다는 주장은 박헌영의 비서로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낸 것으로 알려진 박갑동이 중앙일보에서 연재한 글을 1983년에 단행본으로 펴낸 책 <박헌영>에서 언급된 것인데(박갑동 저 <박헌영> 인간사, 1983, 198~199쪽), 정작 박갑동은 제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앙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신문 연재할 때 정보기관에서 고쳐서 쓴 것'''"이라고 답변했으며, "4·3이 5·10선거 반대투쟁이라지만 '''왜 유별나게 제주에서만 그랬겠는가?''' 4·3은 서청과 경찰이 횡포를 부려 발생한 사건이다.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아니며 경찰과 서청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 안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출처: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개정판)》). ##### [7] 이 사건 이후로 제주도 관청과 경찰들이 파업에 들어가 66명의 경찰이 해임되었고, 그 자리는 육지(한반도 본토)에서 온 서북청년회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8] 당시 미군정이나 경찰은 경찰의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3·1절 기념식 사상자에 대한 도립병원 검시 결과 '''희생자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등 뒤에서 총탄을 맞은 것으로 판명'''됐다. 더구나 1947년 3월 3일 경무부장 조병옥이 "2월 28일 집회만 허가하고 행렬은 허가치 않았던 바 행렬까지 허가하라고 함에 부득이 집회까지 허가취소 하였는데 1일 시민이 남산국민학교(제주북국민학교)에 모였으므로 집회만 허가하였다. 그리고 이내 오후 2시 50분경 경찰서 감찰서 등을 습격하였으므로 발포하였다"고, 3.1절 발포사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제주도민에게 돌려버리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제주도의 민심이 들끓었다. 그리고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그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서 조직적인 좌익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9] 탁양현 《이승만 김일성, 현대 남북한 정치철학 사상가들》[10] 북한에서 UN한국임시위원단의 방북을 거절하자 UN은 총선거가 가능한 남한지역만을 대상으로 5.10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대중의 반발은 극심했고, 이 점을 남로당 무장대가 교묘하게 이용한 측면이 있었다. 다만 4.3 사건 발발 이전에 3.1절 발포 사건에서의 과잉진압이나 사후 수습에서 보듯 제주도 내에서 미군정과 경찰들이 제주도민의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등의 실책도 분명히 있었으며(대구 10.1 사건만 하더라도 미군정의 당시 현지 주민들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식량 정책이 한 원인이 되었다), 이미 북한에서도 5.10 총선거를 반대한다는 좌우익 일부 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지원 아래 김일성 등을 중심으로 38선 이북 지역에서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을 볼 때, 김달삼이나 남로당 무장대가 내세운 5.10 총선거 반대 역시 단지 하나의 원인 내지 표면적인 명분일 뿐 그 자체가 전적인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단지 5.10 총선거를 반대했다는 표면상의 이유만으로 제주 4.3 사건을 반란 또는 폭동으로 몰아가는 것도 지나치게 편향적인 결론이다.[11] 김익렬의 회고록에 따르면 첫 대면 자리에서 김달삼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나 표현은 없었으며, 제주도에서 민족반역자, 악질 친일 경찰, 서청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실시한다면 순종하겠다는 골자의 내용을 피력했다. 김익렬은 72시간 내 양측의 전투행위 중지, 유격대 전원의 즉각적인 무장해제와 더불어, 범법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책임자를 분명히 하되, 명단에 기재된 범인들의 자수 · 도망은 자유의사에 맡기겠으며, 김달삼과 유격대 두목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선박을 제공할 용의도 있으며, 이를 보증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김익렬 연대장 자신의 아내와 6개월 된 아들, 그리고 늙으신 어머니 등) 무장대측에 인질로 잡혀두겠다고 약속했다. 김달삼도 김익렬이 자신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혀두겠다는 데에는 놀랐는지 "노인을 산에 잡아둘 순 없다"며 자신이 지정하는 민가(전 면장 집)에 옮겨와 살도록 하고, 군인의 경비와 출입을 허용했다.[12] 현지의 우익 단체인 대동청년단장 박두인과 부단장 고석종이라고 이름이 알려져 있다.[13] 납치, 살해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떤 경위로 해서 이들에게 납치되었는지는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다.[14] 우익 인사인 김영중은 김달삼이 쓴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도 "4월 28일부터 5월 1일까지 제주읍 2개소, 대정면 5개소, 조천면 2개소를 습격했다고 나온다는 것, 4.3 발발 이후 5월 1일까지 오라리에서는 토벌대에 의한 사상자가 사망 3명에 부상 1명이고 좌익에 의한 사상자가 사망 4명에 탈출 1명으로 좌익이 더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정부 보고서는 그걸 휴전 기간 중에 경찰에 의해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 평화협상이 깨진 것처럼 몰아간다고 비난하였는데#, 학살에 숫자를 따지는 것부터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김달삼이 쓴 투쟁보고서라는 것도 북한 내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선전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니만큼 과장이나 왜곡이 들어갔을 가능성도 부인하기 어렵다(당장 북한은 광주항쟁조차도 체제 선전을 위해 자신들이 뒤에서 사주한 것처럼 몰아가고 있으며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남한의 극우 인사들이 5.18 북한군 개입설 같은 엉터리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당장 김익렬 연대장만 하더라도 "허풍이 심하다"는 우익 인사들의 비난을 듣고 있는 판인데.[15] 1988년부터 제주 4.3 사건을 취재했던 제주신문 양조훈 기자가 마을 주민들을 취재할 당시까지 당시 방화에 가담했던 대동청년단원이 살아 있었는데, 성이 박씨라고만 알려진 그는 제주신문 4‧3취재반과의 첫 만남에서 1948년 5월 1일 강공부 여인의 시신을 경찰 트럭에 싣고 오라리 인근 장지에 갔던 일, 그 트럭에는 경찰관과 서청‧대청 단원 등 30여 명이 동승한 사실, 장례가 끝난 후 경찰트럭에 경찰관만 타고 철수하고 서청‧대청 단원들이 현지에 남게 된 일 등은 시인하면서도 방화 사실만은 부인했는데, 두 번째 만남에서 취재반이 반증자료를 제시하고 해당 사건을 목격했던 당시 생존자들이 "'''대질 증언이라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전하자 그때야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면 그렇게 했다고 합시다.”는 표현으로 사실상 방화 사실을 시인했다. 또한 그는 오라리 방화 사건이 있고 다음날인 5월 2일 김익렬 연대장의 특별지시로 '방화' 혐의로 검거되었으나 딘 장군에 의해 김익렬 연대장이 6일에 전격해임된 뒤 후임으로 온 박진경 중령에 의해 풀려났고, 4개월 뒤인 1948년 9월 15일 제주 경찰학교 9기생으로 입교했다. # [16] 김익렬은 오라리를 습격한 것이 경찰들의 소행임을 언급하며(방화 자체는 우익이나 경찰의 주장과는 달리 대동청년단 단원의 소행이 맞았다. 원인 제공자가 누구냐를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온건 화평 전술을 주장했지만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에게 좌익이라고 매도당했다. 하필 김익렬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고, 김익렬과 김달삼이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동기라는 것까지 조병옥에게 트집이 잡혀, 이 때문에 김익렬은 조병옥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을 벌였다.[17] 가장 긴 지명은 같은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의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18] 4.3 사건 당시 남로당 무장대 역시 우익과 군경 가족들에 대한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 군경이나 서청이 그에 대한 보복이랍시고 저지른 학살이 그에 비해 너무도 어마무시해서 묻혔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