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렬
1.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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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益烈
1921~1988
경상남도 하동군(河東) 출신으로 일본 고베(神戶)상업학교를 나와 후쿠지야마(福知山)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소위로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했다. 학병 출신이다.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후에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했으며, 제주도 부임 당시 계급은 중령이었다. 1947년 9월 부연대장이 되었는데, 명동 거리에서 송호성(宋虎聲) 당시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의 부인과 마주쳤는데 부인에게 경례 안해서(...) 송호성의 눈밖에 나서 제주도로 쫓겨 왔다고. 송호성이 제주도를 귀양지로 써서 9연대 고위 장교들은 죄 송호성 눈밖에 난 인사들 이었다고 한다. 12월 대전으로 영전하는 이치업(李致業)의 뒤를 이어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이 되었다.
1948년 4.3 사건 발발 초기 무분별한 경찰의 진압에 회의를 느낀다. 처음 제9연대는 해당 사건을 제주도민과 경찰 및 서북청년단간의 충돌로 간주[1] 했고 군이 개입할 입장이 아니라고 보았지만,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제9연대는 4월 13일 10명 미만의 특별부대를 파견하고, 김익렬은 이때 성명을 발표한다.
4월 17일 제주주둔 미 육군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을 통해 미군정으로부터 국방경비대 제9연대에게 제주 남로당 무장대에 대한 진압작전에 참여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고, 이때 김익렬은 '선선무, 후토벌'이라는 진압 원칙을 내세웠다. 4월 18일 맨스필드 중령에게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라는 지시도 내려왔다. 맨스필드 중령은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이 임무를 맡겼고, 김익렬은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비행기를 통해 살포한다.30만 도민 여러분! 본 연대는 본도에 주둔한 이래 도민여러분의 부단(不斷)의 □□□□ 밑에 (3줄 누락) 도내 각지에서 야기된 전고(前古) 미증유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도내 민심은 극도로 동요, 불안에 빠지고 있음으로 본 연대에서는 정부재산 및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사오니 도민제위는 안심하고 직장에 매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5줄 누락) 군기대, 정보부, 파견대 본부에 속히 연락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상기 목적 완수에는 도민제위의 긴밀한 협조에서 기할 수 있다고 믿어마지 않습니다.
- 제주신보 1948년 4월 18일
그리고 김익렬은 유서를 써 남겨두고 한라산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金達三)의 아지트로 올라갔다.[2] 4월 28일의 일로, 당시 김익렬이 김달삼과 협상을 벌인 장소가 구억리국민학교였다고.친애하는 형제 제위에 : 우리는 과거 반삭(半朔) 동안에 걸친 형제 제위의 투쟁을 몸소 보았다. 이제부터는 제위의 불타는 조국애와 완전 자주통일 독립에의 불퇴전의 의욕을,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형제 제위의 적나라한 진의를 잘 알았다. 이에 본관은 통분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이 이상 백해무득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국방경비대는 정치적 도구가 아니다. 나는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 우리가 회합할 수 있는 적당한 시일과 장소를 여하한 방법으로든지 제시하여주기 바란다.
- 독립신보 1948년 4월 30일
김익렬과의 첫 대면 자리에서 김달삼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나 표현은 없었으며, 제주도에서 민족반역자, 악질 친일 경찰, 서청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실시한다면 순종하겠다는 골자의 내용을 피력했다. 김익렬은 72시간 내 양측의 전투행위 중지, 유격대 전원의 즉각적인 무장해제와 더불어 범법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책임자를 분명히 하되, 명단에 기재된 범인들의 자수·도망은 자유의사에 맡기겠으며, 김달삼과 유격대 두목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선박을 제공할 용의도 있으며, 이를 보증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3] 을 무장대측에 인질로 잡혀두겠다고 약속했다.[4] 김달삼의 제안은 김익렬의 직권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나 김달삼도 일단 휴전에는 합의를 보았고, 양측은 평화적으로 사태를 수습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5월 1일 오전 11시경, 일단의 무장집단이 오라리를 습격하여 주민을 죽이고 방화를 저지른 사건이 일어났다(오라리 방화사건). 이는 '''경찰들[5] 에 의한 귀순 방해 공작'''이었다.[6] 5월 3일에도 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일본군 중기관총과 카빈총으로 귀순 중이던 민병대를 습격했다.
5월 5일 제주중학교에서 딘(William F. Dean) 미 군정 장관의 주도하에 민정장관 안재홍(安在鴻),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제주지사 유해진, 제주경찰감찰청장 최천이 참석해 열린 회의에서 제주 지역에 대한 진압 정책을 의논했다. 김익렬은 오라리를 습격한 것이 경찰들의 소행임을 언급하며 온건 화평 전술을 주장했지만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에게 좌익이라고 매도당했다. 김익렬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고, 김익렬과 김달삼이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동기임을 회의에서 폭로하며 트집을 잡았다. 이 때문에 김익렬은 조병옥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을 벌였다. 딘 장관이 토벌 작전으로 방침을 결정함에 따라 김익렬은 용공분자라는 의혹을 받고 5월 6일 9연대장에서 해임, 여수시 주둔 14연대장으로 전출되고 만다. 공교롭게도 이 여수 주둔 14연대는 이후 4.3사건과 매우 관련이 깊은 여순사건을 일으킨 그 부대다. 다만, 김익렬은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으므로 반란 자체는 김익렬 본인과는 무관하다. 6월에는 박진경[7] 연대장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받아 조사받기도 했다.
1948년 8월 제13연대장으로 발령됐고, 6.25 전쟁 개전 당시 1사단 제13연대장으로 개성 문산 전투 등에 참여하며 용감히 싸웠고, 1952년 5월 제8사단장, 1955년 7월 제7사단장 1960년 제1관구 사령관 등의 보직을 맡았지만, 이승만 정권에 찍혀[8] 있었다. 그러다 5.16 군사정변 때 국가재건최고회의 군사혁명위원회 전라지구를 맡아 쿠데타에 참여했고, 이후 1962년 제1, 2군단장을 거쳐 1967년 5월 국방대학원장 등을 역임하고 1969년 1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다.
예편 뒤 1979년 5월부터 1981년 2월까지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 14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1988년 사망했다.[9] 생전에 제주 4.3사건 당시 원통하게 죽은 제주도민을 옹호코자 쓴 회고록 《4·3의 진실》을 남겼고, 자신이 죽은 뒤에 출판하라고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겼다.[10]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치. 4.3 사건에서의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실패한 의인(義人)이다. 그의 회고록 원본이 현재 4.3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나는 제주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 경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 김익렬 회고록 《4.3의 진실》(1969년)[11]
2. 평가
4.3 사건이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복권된 현재 대한민국, 특히 제주도에서는 당연하게도 '''학살의 광기로부터 무고한 양민을 보호하려 했던 의인(義人)'''으로 평가된다. 친일 경찰과 우익 세력들이 오라리 방화사건을 일으키지 않고 그가 김달삼과 한 평화협상이 제대로 이행되었어도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고 학살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현재도 제주 4.3 기념관에는 의인으로써 그의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2008년 4월 26일에 김태환 당시 제주도지사는 김익렬의 유가족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반면 극우 입장에서 김익렬을 보는 시선은 다소 싸늘하다. 김익렬의 선임 연대장이었던 이치업은 자신의 영문 자서전 《번개장군》(2001년)에서 "좀 허풍이 심하고 좌경스러운 인물"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고 지만원 같은 경우 김익렬이 자서전에서 언급한 김달삼과의 평화교섭 자체를 아예 김익렬의 거짓말 내지 과장, 허풍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12]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에도 "김익렬은 허풍이 심하다"고, 별로 좋지 않은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공산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5.16 군사정변에도 참여한 그가 좌익이라는 건 어불성설이며, 그를 내치지 않고 어쨌든 자리를 준 이승만과 고위직에 앉힌 박정희 역시 좌익과 한통속이라는 논리가 된다. 이 단체들이 지지하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좌익이 된다는 건 그들 스스로 우익단체가 아니라 좌익단체가 되는 셈이다. 극우들의 대표적인 자가당착. 다만 회고록에서 굳이 김달삼과 자신이 생면부지의 인물이라고 언급한 점은 문제가 될지도...
3. 여담
김익렬은 평소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특히 뻥을 잘 쳐서 주변 사람들을 웃기는 데 능한 인물이었다. 당시 육군에 3대 뻥쟁이(...), 이른바 '''3포'''로 유명한 세 인물이 있었는데 대포는 김익렬, 중포는 육사 2기 홍순용 소령, 소포는 육사 3기 신대성 소령 이었으며, 그 중에 김익렬이 대포로 불릴 만큼 뻥이 셌는데 대표적인 뻥이 '''호랑이 잡는 방법''' 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6사단 19연대장 재임 시절, 대한민국 국회 국정감사단이 연대를 방문하여 연대장인 김익렬 대령이 장병 급양 실태에 관하여 브리핑 하던 중 또다시 전설에 남을 만한 뻥을 쳤다(...).호랑이 잡는 게 어려운 줄 아는데 그거 별 거 아니다. 나는 호랑이 잡는 데 명수이다.
어떻게 잡느냐고? 먼저 호랑이가 잠들 때 까지 기다려라.
호랑이가 잠들면 다음엔 몰래 다가가서 면도칼로 앞이마에 열십자로 칼집을 넣는다.
그 다음에 호랑이 꼬리를 붙들고 엉덩이를 발로 뻥 찬다.
그럼 호랑이가 깜짝 놀라 이마의 칼집 사이로 몸뚱이만 빠져나가고 내 손엔 호랑이 가죽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브리핑에 국회의원들은 빵 터졌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뻥튀기 북어 얘기에 이어 바로 김익렬 대령은 '''"우리 부대는 땔감으로 쓸 장작 걱정도 없다. 북어와 마찬가지로 성냥개비를 기계로 뻥튀기하면 장작이 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라고 덧붙이면서 국정감사장 내의 모든 사람들을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뻥튀기 얘기는 열악한 장병들의 처우에 대한 애교섞인 항의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존경하는 국회의원 여러분. 저는 연대장으로서 장병들이 만족할 만한 급식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부대에 급양비라고 들어오는 돈은 쥐꼬리만 하고,
이대로라면 병사들이 영양실조 걸리기에 딱 좋을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궁여지책으로 시장에서 멸치를 사와서 강냉이 튀기는 기계에 넣고
펑 하고 튀겨서 북어를 만들어 장병들 식재료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4. 대중문화에서의 김익렬
1991년 MBC에서 방송된 여명의 눈동자에서는 이효정이 맡았다. 좌우파의 극단적인 갈등 속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지키려 했던 김익렬 중령의 역할을 인상깊게 소화했다는 평가. 다만 지금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실제 김익렬의 외모는 다소 후덕한 인상으로(...) 이효정보다는 김진태에 더 가깝다.
작중에서는 국방경비대 9연대에 복무하던(장하림은 국방경비대가 아닌 미군정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북파간첩복귀후에 미군정을 관두려하자 아얄티가 대위진급후에 제주도미군정으로 파견보낸것) 하림이 맨스필드 미군 장군에게 무장대 토벌의 책임을 제9연대장에게 맡기도록 제안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협상을 하고 싶으면 김익렬 혼자서 오라는 무장대측의 제의에 "'''군인으로써 국민들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어보는 것도 욕심 낼만한 일이긴 하지'''"라며 응한다. 미군의 철수나 민족반역자, 악질경찰, 서북청년단을 모두 제주도에서 추방하고 제주도민으로 행정관료와 경찰을 편성, 아울러 이번 일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해달라는 김달삼의 요구에 "미군의 철수에 대한 것은 내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며, 나는 군인이고 관리나 경찰 임명은 내 권한 밖이다"라며[14]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합니다. '''경찰이든 서청이든 죄가 있는 자는 사실이 밝혀지는 대로 처벌할 것이오.'''"라고 말한다.
2020년 김익렬 대장과 김달삼 사이에 있었던 구억리국민학교에서의 면담을 소재로 다룬 극단 아신아트컴퍼니의 연극 '협상1948'이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대전 동구청 공연장에서 무료로 공연되었다. # 대전문화재단 2020년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 사업으로 대전시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해당 연극은 9월 6일 제14회 4.3 평화인권마당극제의 폐막 공연으로 초청되었고# 전태일 열사 50주기 맞이 동아시아민중연극제에 초청되어 10월 30일 서울혁신파크에서 공연되었으며# 12월 9일부터 18일까지 대전 서구문화원에서 앵콜 공연되었다. #김익렬: 범법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주십시오.
김달삼: 뭐요? 범법자들의 명단을 작성해달라? (목소리 커지며)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우리가 범법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김익렬: 그러면 살인 방화가 범법이 아니란 이야기입니까?[15]
김달삼: 당신은 당신 집에 도둑이 들어 와서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데 보고만 있겠소? 몽둥이 들고 도둑을 막는데 그게 범법이란 말이오?
김익렬 :(한숨)
김달삼: 자수하는 사람한테는 일체 신변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해준다고 해놓고서는 뭐, 두목급은 따로 명단을 작성해달라?
김익렬: 명단에 기재된 자들의 자수나, 도망은 자유의지에 맡기겠소.
김달삼: 무슨 뜻입니까?
김익렬: 당신들이 모든 폭도들의 귀순과 무장해제를 책임진다면 나 역시 개인적으로 당신들의 탈출을 배려하겠습니다.
김달삼: 합의서에 써넣을 수 있겠습니까?
김익렬: (잠시 침묵) 그건 곤란합니다.
김달삼: 그러면, 어떻게 당신의 그 말을 믿지요?
김익렬: 내 처와, 6개월 된 아들이 제주도에 있습니다. 그들을, 인질로 맡기죠.[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