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프로게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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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닉 테란의 아버지. 또한 온라인 게임 던전 앤 파이터의 밸런스 담당으로도 유명했었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기억에 남을만큼 화려한 커리어는 아니지만 당시 외면받고 있던 메카닉 테란을 완성시키고 그 전술을 확립시켰다는 점에서는 높게 평가받는다. 특히 입구를 막은 상태에서 상대 드라군이 푸쉬오면 오히려 벌쳐를 뽑아 드라군 사이로 파고들어 마인을 심어 드라군을 잡아내는 플레이는 당시엔 혁명적이었다.
프로게이머 시절 저그 상대로도 메카닉을 사용한 선구자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성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왜냐면 '''바이오닉이 너무 안 돼서''' 자기가 잘하는 메카닉으로는 뭐가 좀 될까 싶어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족한 저그전을 초창기에는 벙커링으로 극복해서 수상경력에 있는 큰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저그의 운영이 발달하자, 2000년 말~2001년 초 쯤에 임요환과 교류하면서 임요환은 바이오닉을 김대건에게 가르쳐주고 김대건은 메카닉을 임요환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임요환은 메카닉을 훌륭히 소화했고 김대건은 바이오닉을 자기 것으로 하는데 실패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둘 다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 같다.
의외로 섬전 플레이를 매우 잘 했는데, 특히 스노우 바운드에서는 저그 토스 가리지 않고 다 때려잡기도 했다. 모 대회에서는 저그를 섬전과 벙커링으로만 때려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의 메카닉 운영 능력은 테란 팬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어서, 한때 '''임요환의 저그전과 김대건의 토스전을 합친''' 임대건이라는 유저가 활약하는 '환상의 테란'이라는 소설이 연재되기도 하였다.
토스전은 극강이었고[1] 테란전도 잘했지만 그 놈의 바이오닉이 발목을 항상 잡았다. 올드 게이머로서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2001년 2001 SKY배 온게임넷 스타리그에 8강까지 올라갔으나 김동수의 몰래로보틱스 전술에 걸려서 아쉽게 4강 문턱에서 탈락하고 말았다.[2]
이후 2002년 5월 2일자로 현역 입대하게 되어 사실상 프로게이머에서 은퇴하게 되었으며, 2005년경 네오플에서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던전 앤 파이터의 맵 제작자로 개발에 관여하게 된다. 이후 정식으로 입사하여 기획팀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던전 앤 파이터의 밸런스 담당으로서 대중들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던파 막장 밸런스 운영의 상징으로서 하루가 멀다하고 욕을 먹었다. 밸런스 문제야 예나 지금이나 유저들의 화두에 오르지만 김대건이 밸런스를 맡던 시절에는 직업이 약하면 일반 던전도 제대로 못 돌던 시기라서 망캐라는 단어에 깃든 무게감도 윤명진 체제 이후로 안정화된 현재와는 차원이 달랐다.
베일에 싸여 있던 밸런스 담당이 김대건이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당시 안습일로를 걷고 있던 거너 유저들의 집중적인 비난이 쏟아졌지만, 거너 개편을 통해 이런 비난은 좀 줄어들었다. 특히 메카닉을 지금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메카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림에 따라 '과연 메카닉의 아버지'라는 찬사 아닌 찬사도 들었지만, 이후 거듭되는 너프로 메카닉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자 그냥 '자기 하는 직업 강하게 만든다'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졌었다.
이후 2009년에 던파에서 나온 뒤 사이퍼즈를 거쳤으며, 2012년경 네오플에서 퇴사하여 에이스톰으로 이적, 기획팀에 근무하면서 프로젝트 MC와 최강의 군단의 밸런싱 담당 및 시스템 기획 등을 맡았으나# ## 2015년에 퇴사했다고 알려져 있다.참조 2018년 현재는 열혈강호 M의 개발에 참여하는 중인데, 마침 다른 개발진들도 이호준[3] 이나 민기홍[4] 같은 던파를 빛낸(?) 기라성같은 인물들이라 던파 유저들이 처음 보는 게임에 애도를 표하게 만들었다.
1. 선수 경력
- 1999년 8월 혜성정보통신 길드전 우승
- 1999년 9월 중앙일보배 배틀탑 대회 우승
- 1999년 9월 제1회 KBK 마스터즈 99 8강
- 1999년 10월 KPGL 제5회 외환카드배 대회 우승
- 1999년 11월 APGL 아시아 대회 우승[5]
- 2000년 1월 Crezio 코넷배 스타8인전 8강 (VS 기욤 패트리 0:2)
- 2000년 5월 골드뱅크배 제 1회 KGL 스타크래프트 단체전 준우승
- 2000년 6월 제1회 Game-Q 스타리그 패자조 8강 (VS 강도경 0:1)[6]
- 2000년 8월 경향닷컴배 제 2회 KGL 통합결승전 우승
- 2000년 10월 전주 국제게임 페스티벌 스타크래프트 부문 개인전 3위
- 2000년 11월 제1회 Game-Q 월드챔피언쉽 패자 8강 (VS Fredrik Keitel 0:1)[7]
- 2000년 11월 CCGF 2000 3위 (VS 변성철 2:1)[8]
- 2000년 12월 전국 케이블tv 챔피언쉽 2000 단체전 2위
- 2000년 12월 제2회 Game-Q 스타리그 패자조 4강 (VS 정영주 0:1)[9]
- 2000년 12월 Kamex 2000 64강 (VS 김정민 0:1)
- 2001년 1월 제1회 Crezio 종족별 최강자전 4강 (VS 최인규 0:3)
- 2001년 3월 제3회 Game-Q 스타리그 패자조 8강 (VS 기욤 패트리 0:1)[10]
- 2001년 5월 제2회 iTV 랭킹 결정전 9위
- 2001년 12월 2001 SKY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8강[11]
[1] 데미소다배 스타크래프트 대회(당시엔 협회가 없었으니 비공식 대회) 결승전에서 벌처 3대로 상대방 기지로 침투해 드라군 3기 사이에다 마인 3개를 박아 다 잡아낸 플레이는 백미.[2] 이기면 진출 지면 탈락인 이 단두대 매치에서 승리한 김동수는 2승 1패로 4강에 진출 후 우승까지 하게된다.[3] 2010 ~ 2011년 던파 개발실 실장. 2nd Impact로 상승세에 있던 분위기를 검은 질병의 디레지에 업데이트로 성공적으로 절정에 이르게 한 업적이 있으나, 괴이한 컨셉과 바닥을 기는 성능으로 출시 초기부터 가루가 되도록 까였고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 했던 전설의 망캐 초기 어벤저가 임기 중 나오기도 했다. 던파 인기의 정점이었던 던파혁신 업데이트 당시 인터뷰에서 8월부터는 서비스에도 혁신이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유저들이 맞이한 것은 거대한 재앙이었다.[4] 2011 ~ 2014년 던파 콘텐츠 팀장.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태도는 좋았고 2013년 말에 있었던 크로니클 세트 개편 관련 FGT도 네오플 사내에서 다들 반대하던 것을 강행하며 패치 전날 밤까지 유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등 (물론 이 과정에서도 소드마스터나 인파이터 등 피를 본 직업이 몇 있었다) 마냥 무능한 사람은 아니나, 의욕이 너무 지나쳤는지 기존 던파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인 대전이와 나이트를 만들어내 유저들의 분노를 가득 사기도 했다. 거창한 일러스트까지 그려놓고서 결과물은 도찐개찐에 최악의 경우 하향이었던 희대의 무개념 밸런스 패치 '심해탈출'은 이미 전설. 최악의 복붙던전인 시간의 문의 일반 던전들과 시간 잡아먹는 던전으로 악명높았던 초기 카르텔 사령부 당시 던전개발팀장이기도 하다. 최고의 아바타 패키지로 유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야생의 사파리 패키지를 예를 들어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2017년 던파 페스티벌에서 사파리 패키지를 계획한 것은 윤명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5] 당시 우승 상금이 3만 달러로 규모가 굉장히 큰 대회였다.[6] 16강에서 임정호에 0:1 패배.[7] 16강에서 미구엘에 0:1 패배.[8] 4강에서 한웅렬에 1:2 패배[9] 승자조 4강에서 변성철에 0:1 패배.[10] 16강에서 임성춘에 0:1 패배.[11] B조 1승 2패로 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