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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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九, Kim Duk-koo. 1956년 8월 10일 ~ 1982년 11월 18일 (향년 26세)
대한민국의 권투 선수다. 키는 169cm다.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다섯 자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3번 결혼을 했다. 원래 이름은 이덕구였으나 1967년 어머니가 김호열과 결혼해 그의 호적에 입적하면서 김득구로 개명했다.
호적상으로는 1955년 1월 8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묘비문에는 1956년 8월 10일 출생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되어 있다.[1]
가난하게 자라났으며, 1972년 이부형제들과의 갈등으로 17살 나이로 가출하여 서울로 상경한다. 권투 선수가 되기 전에는 구두닦이, 투어 가이드 등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았으며 검정고시에 붙어서 천호상업전수학교에 진학했다.
동아체육관에 입문해 아마추어 선수로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프로로 전향했다. 1980년 12월 이필구를 10회 판정으로 이기고 한국 챔피언 타이틀을 얻는다. 이후 1982년 2월 28일 OPBF 동양 챔피언 전에서 김광민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승리하여 동양 챔피언이 되었으며 이 경기 결과로 인해 WBA에서 그의 세계 랭킹을 1위로 정한다. 이후 동일 년도에 네 번의 경기를 더 가졌지만, 그때까지도 비 동양권 선수와의 경기는커녕 아시아 내 원정 경기조차 단 한 번에 불과했을 정도로 세계 무대와는 거리가 있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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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에서 열린 WBA 라이트급 챔피언 전에서 당시 챔피언 레이 맨시니(Ray Mancini)에게 도전하였다. 챔피언전을 앞두고 맹훈련을 했으며, "'''관을 준비해 놓고 가겠다,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실제로 미국으로 건너갈 때 성냥갑으로 모형관을 만들어서 가지고 갔다.해당 인터뷰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되었고''', 이에 기뻐하는 사람 없이 슬픔만이 가득한 비극만을 남긴 최악의 시합이 되고 말았다.
당시 경기상황을 보면 9회까지는 김득구가 맨시니와 호각에 가까운 멋진 승부를 펼쳤지만,[2] 10회 때부터 체력고갈로 난타를 허용하였다. 그 후 11~13회에 걸쳐서 수세에 몰리면서도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14라운드 시작 직후 맨시니에게 턱을 강타당하여 그대로 뒤로 넘어졌으나, 로프를 붙잡으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경기 속행은 어려운 상태였다. 레퍼리가 KO을 선언하며 맨시니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맨시니가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 김득구는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뇌출혈에 대한 처치와 혈전 제거를 위해 두 시간 반에 걸친 뇌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5일 뒤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있었던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산소 마스크를 떼어내고 장기기증을 하면서 향년 26세를 끝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당시 세계복싱계에선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김득구가 레이 맨시니와 싸우게 된 것은 프로모터 밥 애럼(Bob Arum)[3] 의 농간 때문이었다. 김득구는 세계적인 강자들과 싸울만한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복싱계의 일관된 평이었고, 김득구의 프로모터인 김현치 관장도 김득구의 기량이 세계적인 수준에 못미친다는 것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다. 레이 맨시니가 챔피언으로 활동할 때 이미 세계 랭킹엔 하워드 데이비스[4] 나 에드윈 로자리오 등의 쟁쟁한 복서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레이 맨시니와 챔피언 자리를 두고 일합을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로 흥행성을 갖춘 레이 맨시니가 패배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밥 애럼은 랭킹을 조작하여 맨시니의 타이틀전 상대로 위협적인 상대들을 모두 거르고, 떡밥이나 다름없던 김득구를 WBA 랭킹 1위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리하여 밥 애럼은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타이틀 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는다. 레이 맨시니가 cbs채널과 거액의 계약을 체결한 사정 때문에 밥 애럼이 이런 무리수를 던지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레이 맨시니가 강한 상대와 싸우다 패배한다면 모처럼 맺은 TV 계약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세계적인 선수들에 비해 기량이 뒤떨어지는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상대로 링에 올리게 되었다는 것. 소속 선수를 돈벌이 상품으로만 여기는 밥 애럼은 다음 상대로 또 다른 약체(미끼) 선수인 캔 보그너를 내정해 놓은 상태였다.
밥 애럼은 검사 출신의 엘리트이지만, 뒷골목 범죄자 출신인 돈 킹보다 몇 배는 더 추악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복싱계 이면의 추악한 비지니스가 김득구의 생명을 뺏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밥 애럼은 김득구의 죽음조차도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다. 김득구의 경기 이후 2개월간 본인의 프로모션에 큰 경기가 잡혀있지 않고, 라이벌인 돈 킹의 프로모션엔 3건의 큰 경기가 잡혀있다는 걸 파악한 밥 애럼은 돈 킹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이미지를 높이기위한 수단으로 2개월간 미국 전역의 프로복싱경기를 중지하자는 제안을 한다.[5]
이처럼 무리하고 추악한 대진을 기획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트린 밥 애럼은, 결과적으로 복싱계의 사정을 알고 있는 관련자들에게 약간의 비난만 받았을 뿐 실질적인 책임은 전혀 지지 않았고 지금도 미국의 프로 권투계를 좌우하는 거물 행세를 하고 있다.[6]
1. 개요
金得九, Kim Duk-koo. 1956년 8월 10일 ~ 1982년 11월 18일 (향년 26세)
대한민국의 권투 선수다. 키는 169cm다.
2. 생애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다섯 자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3번 결혼을 했다. 원래 이름은 이덕구였으나 1967년 어머니가 김호열과 결혼해 그의 호적에 입적하면서 김득구로 개명했다.
호적상으로는 1955년 1월 8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묘비문에는 1956년 8월 10일 출생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되어 있다.[1]
가난하게 자라났으며, 1972년 이부형제들과의 갈등으로 17살 나이로 가출하여 서울로 상경한다. 권투 선수가 되기 전에는 구두닦이, 투어 가이드 등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았으며 검정고시에 붙어서 천호상업전수학교에 진학했다.
3. 복싱 경력
동아체육관에 입문해 아마추어 선수로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프로로 전향했다. 1980년 12월 이필구를 10회 판정으로 이기고 한국 챔피언 타이틀을 얻는다. 이후 1982년 2월 28일 OPBF 동양 챔피언 전에서 김광민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승리하여 동양 챔피언이 되었으며 이 경기 결과로 인해 WBA에서 그의 세계 랭킹을 1위로 정한다. 이후 동일 년도에 네 번의 경기를 더 가졌지만, 그때까지도 비 동양권 선수와의 경기는커녕 아시아 내 원정 경기조차 단 한 번에 불과했을 정도로 세계 무대와는 거리가 있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4. 마지막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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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에서 열린 WBA 라이트급 챔피언 전에서 당시 챔피언 레이 맨시니(Ray Mancini)에게 도전하였다. 챔피언전을 앞두고 맹훈련을 했으며, "'''관을 준비해 놓고 가겠다,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실제로 미국으로 건너갈 때 성냥갑으로 모형관을 만들어서 가지고 갔다.해당 인터뷰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되었고''', 이에 기뻐하는 사람 없이 슬픔만이 가득한 비극만을 남긴 최악의 시합이 되고 말았다.
당시 경기상황을 보면 9회까지는 김득구가 맨시니와 호각에 가까운 멋진 승부를 펼쳤지만,[2] 10회 때부터 체력고갈로 난타를 허용하였다. 그 후 11~13회에 걸쳐서 수세에 몰리면서도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14라운드 시작 직후 맨시니에게 턱을 강타당하여 그대로 뒤로 넘어졌으나, 로프를 붙잡으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경기 속행은 어려운 상태였다. 레퍼리가 KO을 선언하며 맨시니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맨시니가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 김득구는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뇌출혈에 대한 처치와 혈전 제거를 위해 두 시간 반에 걸친 뇌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5일 뒤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있었던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산소 마스크를 떼어내고 장기기증을 하면서 향년 26세를 끝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당시 세계복싱계에선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김득구가 레이 맨시니와 싸우게 된 것은 프로모터 밥 애럼(Bob Arum)[3] 의 농간 때문이었다. 김득구는 세계적인 강자들과 싸울만한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복싱계의 일관된 평이었고, 김득구의 프로모터인 김현치 관장도 김득구의 기량이 세계적인 수준에 못미친다는 것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다. 레이 맨시니가 챔피언으로 활동할 때 이미 세계 랭킹엔 하워드 데이비스[4] 나 에드윈 로자리오 등의 쟁쟁한 복서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레이 맨시니와 챔피언 자리를 두고 일합을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로 흥행성을 갖춘 레이 맨시니가 패배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밥 애럼은 랭킹을 조작하여 맨시니의 타이틀전 상대로 위협적인 상대들을 모두 거르고, 떡밥이나 다름없던 김득구를 WBA 랭킹 1위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리하여 밥 애럼은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타이틀 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는다. 레이 맨시니가 cbs채널과 거액의 계약을 체결한 사정 때문에 밥 애럼이 이런 무리수를 던지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레이 맨시니가 강한 상대와 싸우다 패배한다면 모처럼 맺은 TV 계약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세계적인 선수들에 비해 기량이 뒤떨어지는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상대로 링에 올리게 되었다는 것. 소속 선수를 돈벌이 상품으로만 여기는 밥 애럼은 다음 상대로 또 다른 약체(미끼) 선수인 캔 보그너를 내정해 놓은 상태였다.
밥 애럼은 검사 출신의 엘리트이지만, 뒷골목 범죄자 출신인 돈 킹보다 몇 배는 더 추악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복싱계 이면의 추악한 비지니스가 김득구의 생명을 뺏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밥 애럼은 김득구의 죽음조차도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다. 김득구의 경기 이후 2개월간 본인의 프로모션에 큰 경기가 잡혀있지 않고, 라이벌인 돈 킹의 프로모션엔 3건의 큰 경기가 잡혀있다는 걸 파악한 밥 애럼은 돈 킹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이미지를 높이기위한 수단으로 2개월간 미국 전역의 프로복싱경기를 중지하자는 제안을 한다.[5]
이처럼 무리하고 추악한 대진을 기획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트린 밥 애럼은, 결과적으로 복싱계의 사정을 알고 있는 관련자들에게 약간의 비난만 받았을 뿐 실질적인 책임은 전혀 지지 않았고 지금도 미국의 프로 권투계를 좌우하는 거물 행세를 하고 있다.[6]
5. 사후
- 김득구가 세상을 떠난 뒤 김득구의 모친은 우울증에 빠졌다가 3개월 뒤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농약을 마시고 아들의 뒤를 따랐다. 새아버지는 맨시니가 보상금으로 뭘 준다는 사기전화에 걸려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인 3백만원을 갈취당했다고 한다.
- 김득구의 사망 이후 맨시니는 1983년 1월에 AP통신과의 회견에서 금년말 안에 한국을 방문해 "김득구의 모친을 만나 위로하고 김득구의 묘앞에 참배하고 싶다."고 밝혔으나 얼마 뒤 김득구의 모친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접하자 호텔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 또한 출처를 보면 알겠지만 이탈리아발 AP통신 기사이다. 김득구의 묘지를 참배했다는 거짓기사와 비슷한 맥락으로 꾸며진 내용을 한국에서 보도한것으로 보인다.
- 상대였던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실은 이탈리아 가제타 델 스포르의 거짓기사이다.[9] .출처 뉴욕타임즈 이후 죄책감으로 인한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1984년까지 WBA 라이트급 타이틀을 두 번 더 지켰으나, 1984년 6월 1일 리빙스턴 브램블에게 타이틀을 상실했다. 1985년 2월 복수전에 실패한 뒤 잠정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해 1989년 헥터 카마초와 WBO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 1992년 그렉 호건과 NABF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을 치뤘으나 모두 패한 뒤 최종 은퇴했다. 복싱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자기가 원하던 영화배우로 데뷔했다.[10]
- 물론 김득구와의 경기 이후로도 좀 더 복싱 선수로 활동했지만 김득구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선수 생활에 타격을 가한 점은 틀림없었다. 맨시니는 김득구와의 시합 이후로 자책감에 빠져 시합간의 공백기가 길었으며 그 후에는 이전만한 패기있는 복싱 스타일을 구사하지 못하고 치고 빠지는 히트 & 런 전법의 조심스러운 복싱으로 스타일이 변했다. 맨시니에 대해서 다룬 다큐에서는 불행했던 시합이 한 복서의 아까운 생명, 전도유망한 천재 복서의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하게 했다고 말할 만큼 그의 복싱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맨시니 자신의 입으로도 "그 시합 이후로는 복싱이 싫어져서 복싱을 하는 것이 괴로웠다"고 술회할 만큼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경기심판과 김득구의 어머니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 경기후에 3명이 사망했으니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11] 맨시니는 평생 김득구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득구를 소재로 한 영화 '챔피언'이 개봉할 당시 한국을 찾았던 맨시니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득구를 '강인한 전사'였다고 칭찬하면서, 그의 죽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왔다고 말했다. 만약 하늘에서 김득구와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줄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맨시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 말 없이 끌어안아 주겠다"는 말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또한 '살인 복서'로 낙인찍힌 자신을 오히려 위로해 준 한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함을 표하기도 하였다. #
- 2012년이 되어서 맨시니는 김득구의 유족과 만남을 가졌는데,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맨시니와 한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온 맨시니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김득구의 아들에게 이제야 오랜 세월동안 가졌던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겠다고 한 맨시니의 말은 많은 올드 복싱팬의 심금을 울렸다. 맨시니는 매년 복서를 꿈꾸다 세상을 떠난 형의 기일과 김득구의 기일에는 빼놓지 않고 조의를 표한다고 한다.
- 김득구의 죽음은 세계 복싱계와 스포츠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복서의 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국 하원에서는 복싱의 안전을 위하여 청문회까지 열렸으며, 종합격투기를 포함한 모든 격투기 대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생긴 룰이 바로 다름아닌 '닥터스톱'으로 각 선수들마다 할당된 주치의의 판단으로 심판 판정과는 상관없이 경기를 종료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 세계권투평의회(WBC)에서는 김득구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15라운드 경기를 12라운드로 줄였다. 라운드 사이의 휴식시간도 60초에서 90초로 늘렸고,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했다. 김득구가 사고를 당한 복싱기구인 세계권투협회(WBA)에서도 1988년에 그 뒤를 따랐으며, IBF 역시 1989년에 변경을 시행했다.
- 미국에서는 권투 선수 문성길의 이름을 딴 'Sun Kil Moon'이라는 이름의 밴드가 활동할 때 밴드 멤버였던 마크 코즐렉이 김득구의 경기를 본 뒤 그를 소재로 한 'Duk Koo Kim'이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 이야기는 스펀지 120회 방송분에서 소개되었다.
6. 미디어
- 미국의 밴드 Sun Kil Moon[12] 은 김득구 선수를 주제로 한 곡을 내기도 했다.Duk Koo Kim-Sun kil moon
7. 참조
[1] 전산화가 안된 과거에는 호적 사무를 보려면 일일이 본적지에 방문해야만 했기에 한참 늦게 신고하면서 출생일/출생지를 혼동하는 경우,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사망한 아이의 동생이 형의 호적을 물려받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 등 오류가 많았다.[2] 당시 판정을 보면 이때도 유효타는 맨시니가 좀 더 많았다.[3] 현재 매니 파퀴아오의 프로모터이다.[4]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뉴욕 골든글러브 우승 경력이 있다.[5] 밥 애럼과 돈 킹 프로모터로선 라이벌 관계긴 하나 둘 간의 사이는 그렇게 나쁜편은 아니다. 아니 좀 과하게 말하면 '아주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친한편이다.[6] 참고로 그는 1931년생으로 2021년 현재 나이가 89세인 고령이다.[7] 맨시니에게 화려한 KO 승리를 선사하게 하고 싶었던 프로모터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있다.[8] 시합에서 심판 리처드 그린이 김득구에게 불리한 판정을 했다는 것은 잘못된 루머다. 적어도 9라운드 이후부터는 누가 봐도 김득구의 열세였고 리처드의 문제점은 이미 제대로 된 의식이 없음에도 정신력만으로 시합에 임하던 김득구를 계속 링에 올렸다는 점에 있었다. 외신에서도 비판받은 점은 선수 자신의 의사를 중시한다는 명목으로 위험한 상태인 선수를 끝까지 시합에 나서게 한 심판의 자질과 관련된 문제였지 판정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았다.[9] 가제타 델 스포르는 맨시니가 김득구를 생각하여 묘지에 방문하여 기도를 올렸다고 하였으나 맨시니 본인이 거짓말이라고 밝혔으며, 이후 그 기사를 쓴 기자를 만나 왜 그런 짓을 했냐라고 묻자 기자는 좋은 얘기거리가 필요했다고한다.One paper said I was so distraught I went to a local cemetery and prayed over a grave because I was thinking of Kim,” Ray says. “Absolute lie. They didn’t care. They just made it up.” Finally, Ray confronted a reporter who had been friendly upon his arrival. “Giovanni,” he asked, “why did you do this?” “Ray, you must understand,” he said. “We are journalists. It makes a good story[10] 이탈리아계인 레이 맨시니는 어렸을 적부터 영화배우가 꿈이었다. 하지만 복서였던 그의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부상으로 장애인이 되는 바람에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형과 같이 복서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복싱 선수가 된 것이다.[11] 만화 '내일의 죠'에서 주인공인 야부키 죠가 친구인 리키이시 토오루를 자신의 펀치로 죽이게 되자, 다음 경기에서 상대 머리를 가격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복서가 되고 만다. 이는 자신의 손으로 친구를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맨시니 역시 상대를 공격할 때마다 김득구가 떠올랐을 것이고, 당연히 상대를 있는 힘껏 공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12] 이름만 보면 한국인 밴드로 보이겠지만 모두 미국인이다. 하지만 이름의 모티브는 한국의 복서 문성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