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주
[image]
金龍周
일본식 이름 : 金田龍周
1905년 7월 29일 ~ 1985년 1월 27일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기업인, 정치인이자 (주)전방 창업주이다. 호는 해촌(海村), 본관은 김해(金海).
1905년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신관리 관변마을#에서 태어났다.[1]
그는 태평양 전쟁이 터질 무렵 만들어져 일본에게 군수품을 헌납하는 운동과 전시(戰時) 사상통일운동을 벌였던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에 소속되어 일본군에게 위문편지 보내기 운동을 하자고 주장하는 등 여러가지 친일 행위를 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해방된 이후에는 적산기업 중 하나였던 '전남방직공사'를 불하[2] 받아 부를 쌓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 때 대한해운공사 사장, 주 일본 공사 등을 지냈다.
제2공화국 장면 정권 때 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정계를 떠났다. 이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경제인으로 돌아갔다.
4남 1녀를 뒀는데, 맏딸 김문희[3] 에게서 태어난 외손녀 현정은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장남 김창성은 1932년생으로 전방을 물려받아 경영했고 명예회장 직까지 올랐다. 그리고 늦둥이 막내아들은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한 김무성이다. 사돈으로는 (현정은의 할아버지) 현준호와, (김무성의 장인) 최치환[4] 이 유명하다.
2. 생애
김용주의 이력은 크게 초기의 '애국·항일 활동'과 후기의 '친일 반민족 행위'로 구분할 수 있다. 김용주가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입장이 대립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 이 점에 대해서는 본 기사([칼럼] '1941년의 저주'에 걸려든 김용주)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5]
2.1. 애국·항일 활동
썰전에서 다룬 바 있듯, '''김용주가 초기에(대략 1941년 이전) 애국·항일 활동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1927년 항일단체였던 신간회 영일지회 설립총회 멤버였고, 1925년에는 야학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포항청년회 간부를 맡아 ‘독서회’ 조직으로 신문화 연구와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중 1926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1936년에는 항일운동 본거지였던 포항 영흥학교가 존폐 위기에 처하자 조선인 취학연령 아동들을 위해 사재를 기부해 학교를 살렸다. 1937년에는 경북도 의회에 당선이 되고 1938년에 경북도의회에서 일제가 수탈 목적으로 강제 시행하던 면작에 대한 피해에 대해 농민들에게 국가가 보상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김무성 대표는 선친인 김용주가 독립군에 몰래 활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2.2. 친일 반민족 행위
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 2면의 기사를 살펴보면,
(일본의) 징병제 시행을 고마워하며 미국과 영국 격멸을 결의할 목적으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를 다루고 있는데, 제목은 '총후의 전열에 총립, 제2일 공직자대회에 멸적의 열화창일, 각 의원들의 열론'이다.
이 자리에서 김용주(창씨개명한 이름은 가네다 류슈였고, 당시 경북도회 의원이었다)는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 정신 문화의 앙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 일본 황실의 조상이나 일본인 고유의 신앙 대상인 신 또는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서 모신 사당)와 신사(神祠, 신령을 모셔 놓고 위하는 사당(祠堂))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敬神崇祖 報恩感謝)'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며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대회 사무국이 1944년 1월에 발간한 <징병제시행 감사 적미영격멸 결의선양 전선공직자대회기록>에서 김용주는 "먼저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 정신 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고 말하며 구체적 방책들을 제안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각 면에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모든 민중으로 하여금 신을 공경하고 신앙 생활을 하게끔 하면 일본 정신의 진수에 철저히 젖어들게 할 수 있습니다"이다.
그는 이어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여 모든 것을 신께 귀일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신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하여 현세의 신이신 천황께 귀일하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한다.
조선의 부모들이 일본 천황를 위해 기꺼이 자식의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면 단위마다 신사를 세워 신앙심을 고취시키자는 고약한 내용이다.
김용주는 이어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한글판을 매주 1회 발행하자고 제안하며 그를 통해 "영미화란의 과거 수백년 동아침략의 실정 및 과거 현재에 통틀어 약소하고 전쟁에 패한 국가민족의 말로가 얼마나 참담하고 슬프고 애달기 짝이 없는 것인지를 명시하여 정부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일억 국민은 굳게 단결하여 죽어서라도 승리하겠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해야 할 것"이라는 말로 연설을 맺는다.
김용주는 두 번째 안건에도 등장해 발언을 한다. 안건은 "대동아전쟁 바야흐로 저편과 이편이 결전양상으로 바쁘고 어지럽고 맹렬하게 됨을 돌아보고, 더욱 미영격멸의 결의를 새롭게 하고 조선서 필승 신념을 고양하며, 전력증강, 전시생활의 확립을 한층 심화 철저히 하는 건설적 의견"이다.
그는 이 의제와 관련해 "반도 2,500만의 반수인 부녀자의 생산방면 활동"을 높이기 위해 "취사는 아침 밤 2번으로 하고, 점심은 도시락제로 할 것" "요릿집, 음식점 등 유흥음식 시간을 미영격퇴까지 당분간 2시간 이내로 제한할 것" 등을 제안하기도 한다.
'일본동맹통신사'에서 발간한 자료를 보면 김용주는 말만 내세운 게 아니라 실제로 대구 신사를 건립하는 데 2천원을 기부한 것으로 나온다.
정확한 사실은 김용주는 친일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상임이사로 위촉지명된 사실이 있으며 1924년 포항청년회 지육부장을 맡아 독서회 등 노동야학을 개설해 일본 경찰에 검거된 사실(동아일보 1925,5,9)과 1926년 10월 포항에서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자며 지은 '삼일상회' 설립 (매일경제 1984.2.26) 했던 애국적인 경력들도 있으나 일본 패망을 앞둔 태평양 전쟁 말기에 친일파로 변절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당시 엘리트 지식인 계층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변절한 사례는 생각보다 흔한 편이었다. 이광수, 최남선의 사례와 비슷한 경우일 수 있다.
뉴스타파 김무성父 김용주, '일제군용기 헌납, 징병독려' 광고(2015.9.17)
https://www.youtube.com/watch?v=KKaBpB4F8jU
2.3. 종합
이상의 논란을 최대한 중립적인 위치에서 서술해야 하는 위키의 준칙에 의거 중재위의 결정에 입각하여 결론 내린다면 다음과 같다. 김용주는 최종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사실은 없으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하여 그가 친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 속단하면 안 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가 친일인명사전의 등록 기준에 부합하며 그를 개정판에 추가하겠다고 밝혔다.기사 사실, 지금처럼 논란이 된 일이 잦지 않아서 그렇지 반민특위 시절부터 내려온 친일파에 대한 기준은 한결 같다. '''처음에는 친일 행적을 보였으나 나중에 항일 운동에 합세한 게 확실한 인물들은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고, 처음엔 항일 운동을 하다가 후에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은 친일파로 분류한다'''[6] . 여기에 해당하는 인사들은 수도 없이 많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이후부터 일제가 극단적으로 나아가면서 해당 인물들에게도 극단적 선택을 요구했기 때문에, 항일과 친일에서 줄타기 하던 인물들이나, 그래도 버티던 인물들의 상당수가 친일로 넘어간다.
물론 그 반대로 친일인명사전에 제외된 사실이 있기에 친일파였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다만 친일 행보와 민족적 행보 모두를 자처한 것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기회주의자적 성격을 가졌던 인물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7]
자칫하면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은 물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인물을 친일 인사로 결론지어 버렸다면 허위사실 유포가 된다. 참고로 망자에 대한 명예훼손은 친고죄에 속한다. 다만 친일적 행동에 해당하는 반민족행위를 하였느냐 안하였느냐로 본다면 ''''했다.''''가 맞다.
그러다가 2015년 9월 17일에 인터넷 독립 언론인 뉴스타파 보도 내용 인용에 의하면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동안 사료 발굴을 통해 군용기(애국기) 헌납과 징병을 독려하는 아사히 신문 광고 등 김용주의 친일 행위를 새롭게 입증할 다수의 일제 공문서와 신문 자료를 공개했다." 라고 한다.
이 내용을 분석하여 뉴스타파가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민족문제연구소의 기자 간담회 보도자료, 뉴스타파 보도내용 - 김무성父 김용주, ‘일제군용기 헌납, 징병독려’ 광고, 뉴스타파 유튜브 영상 그리고 경향신문에서도 김용주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 친일인명사전 등재 기준에 부합한다고 자세히 보도했다.
2.4. 기타
경성방직의 김용완 회장과는 업종도 같고 연배도 맞아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김용주 회장이 초대 회장직을 맡은 경총에서 아들인 김창성이 회장직에 올랐고, 김용완 회장의 아들인 김각중은 전경련 회장에 취임해 부자가 모두 같은 경제단체의 회장을 맡는 진기록을 세웠다.[8]
[1] 그의 선대는 경상남도 함양군에 입향하기 전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상당 기간 세거했고, 선산도 거기에 있다고 한다. 아들 김무성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원래 서울에서 살았다. 그러나 무오사화를 당해 서울에서 살 수 없게 되자 숨어들어와 살게 된 곳이 전라북도 임실군이었다. 그 뒤 연산군이 사망하고 복권돼 서울에 올라갔으나 이미 집도 없어지고 더 이상 살 수 없어 재산을 정리해서 내려온 곳이 전라북도 장수군이었다. 장수에서도 상당기간을 살았고, 선산까지 마련했으나 또다시 일은 터지고 말았다. 선산 묘소에서 밀장이 발견됐고, 시비 끝에 주먹다짐이 있었는데 그만 상대편 사람이 죽고 말았다. 더 이상 장수에서 살수 없게 된 조상들은 또다시 야반도주를 해야 했고, 그렇게 도착한 곳이 경남 함양이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당시의 상황에서 김 대표 집안은 마을 주민들 몰래 야음을 틈타 산소를 찾아와 성묘를 해야 했다. 그 뒤 양 집안이 화해했으며, 김 대표는 지금도 매년 장수의 선산을 찾는다고 했다.#[2] 국가 또는 공공단체의 재산을 개인에게 팔아넘기는 일.[3] 용문중학교와 용문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용문학원 이사장이다. 1928년생으로 막내동생 김무성보다 23살이 많다.[4]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과 자유당 정권 공보처장,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5] 사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을사오적의 대표격 인물인 이완용도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다. 항목 참조[6] 영화 '암살'의 염석진(이정재)이 이러한 케이스다. 그리고 이완용은 경술 국치 이전 인물이라고 넘어간다고 쳐도, 이광수, 최남선, 최린, 윤치호 등 거물급 친일파의 상당수는 애초부터 친일을 한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넘어갔다.[7] 기회주의자보다는 변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8] 비슷한 예로 대한상의 회장직을 역임한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과 그의 두 아들인 박용성, 박용만 회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