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김자야/대원각주인)
1. 개요
1916년 병진(丙辰)년생으로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길상사 시주와 시인 백석의 연인이라 주장하며 유명해진 기생으로 허언증이라는 설이 많다. 백석과의 관계는 김영한의 일방적인 주장이며 백석 측은 이를 부인하였다.
기명(妓名)은 진향(眞香), 본명은 김영한, 법명은 길상화(吉祥華).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나오는 자야가 바로 김영한으로 김영한의 저서 <내사랑 백석>을 참고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후 평생 결혼하지 않고, 서울 3대 요정중의 하나인 대원각을 1950년대부터 운영하면서 백석을 기리며 생활했다고 말하였으나 실제는 유력정치인의 애첩이었다… 딸(서모 씨)도 있다. 서모씨는 길상사 시주와 관련해 조계종에 소송하여 승소했다.
2. 기생
17세 때, 여창명인(女唱名人) 김수정의 안내로 조선권번 정악전습소 학감을 지낸 금하 하규일 선생의 넷째 양녀로 들어갔다. 하규일 선생[1] 으로 부터 3년간 가무를 배웠다. 춤에도 소질이 두드러져 <무산향>, <검무>를 잘했으며, 특히 <춘앵무>는 그녀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삼천리』지에 수필을 발표하여 '문학 기생'으로도 명성을 날렸다고한다.
3. 일본 유학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주경야독으로 학업을 이어가던 중, 해관 선생이 투옥되자 서둘러 귀국한다. 하지만 면회가 안 된다는 말을 듣고 함경남도 함흥 땅에 주저앉는다.
1936년 오로지 은인이던 해관 선생을 만나기 위해, 다시 기생이 되어 큰 연회 같은 곳에 나가 함흥 법조계의 유력한 인사들을 만나서 해관 선생님의 특별면회를 신청할 수 있으리라는 절박한 믿음으로 함흥권번으로 들어갔다.
4. 백석
백석과의 관계는 100% 김영한의 주장이며 객관적 근거는 전혀 없다.
어디까지나 김영한의 말에 의한 것으로 1936년 가을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으로 나갔던 첫 날, 시인 백석(당시 26세)과 김자야(당시 22세)는 처음 만났다고한다. 기생과 손님으로 만났다는 것이다. 당시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교사였던 백석이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 했고,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라고 말했다고. 이 주장은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반영이 되었으며 통영의 란을 좋아했던 백석이 김영한을 보자마자 좋아한 것으로 그려내고 있다.
4.1. 자야의 유래
김영한은 『당시(唐詩)선집』을 사왔을 때, 백석이 그 책을 읽고 '자야(子夜)'란 호를 지어주었다고 주장했다. '자야'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2] 하지만 백석이 아오야마 학원에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심취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백석은 이에 관련해 시 '두보나 이백같이'를 남기기도했다. 또한 자신이 자야라고하는 여인은 여인은 김영한 외에도 더 나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나타샤라는 주장하는 여자 역시 여럿이다. 나타샤가 이국의 여인을 뜻하는 데도 말이다.
김영한의 주장을 담은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는 백석 시 「바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을 가사로 만들며 자야와의 사랑을 담은 것으로 그렸으나 이는 실제와 다르다. 「바다」만해도 통영의 바다를 거닐며 쓴 시로 백석이 사랑했던 란을 생각하며 쓴 연가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역시 친구와 결혼한 란에 대한 기억을 담고있다. 뮤지컬에 나오는 백석의 시와 서사는 서로 내용이 일치하지않는다.
김영한은 백석이 "만주로 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제안했으나, 자신이 백석의 앞길을 막게 될 것을 염려하여 거절했고,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 1938년 백석은 영생여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여성'의 편집을 맡게 된다.
4.2. 백석과 동거와 이별
김영한은 함흥 영생고보 교사를 그만두고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의 11간짜리 작은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주장했으나 증거자료를 전혀 내놓지 못하였다. 백석이 최고급만을 걸치는 패셔니스타에 결벽증이 있을만큼 깔끔한 성격이어서 그런데서 살림 차려 자고 먹을 사람이 아니다. 당시는 편지로 연락하는 시대라 백석 지인들만 해도 백석에게 받은 편지가 많을 정도로 백석은 편지를 자주 썼는데 연인에게 한통도 남기지 않았다는게 말이 되는지 알아서 생각하기 바란다.
백석은 1939년 1월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부잣집 딸과 혼례했다고 하고 김영한은 중국의 베이징, 쑤저우, 항저우, 상하이 등지를 1달 동안 여행했다고 한다. 백석이 결벽에 가까운 성격이라 과연 기생을 사귀었을지 의문이 갈 수 밖에 없다. 백석이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은 명문학교를 다닌 부유한 집안의 신여성들이었다. 첫사랑이었던 란도 그러하였고 처음 결혼했던 여성 역시 이화여전을 다녔다고 알려져있다. 두번째 결혼한 문경옥 역시 고등교육을 받은 부유한 집안의 딸이다. 그와 어울렸던 여류 문학가들 역시 모두 당대의 신여성들이었다.
김영한은 백석이 홀로 만주 신경으로 떠났고 해방 후 백석이 신의주시에 잠시 거주 후 정주로 이동한 사이 6.25 전쟁이 발발해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실제 그 기간동안 백석은 북한의 유명 여성 음악가인 문경옥과 결혼해 2년간 결혼생활을 하고 이혼을 했으며 해방무렵 만난 리윤희와는 이후 50년간 해로한다. 김영한은 백석이 백석의 다섯 여인보다 자신을 사랑했다고 주장했다.
4.3. 관계의 과장
송준은 90년대 초반부터 백석과 백석의 시가 끼친 영향과 관련해 책을 쓰기 시작한 백석 연구자이다. 송준은 "생전 김영한을 직접 인터뷰했는데, 그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 매우 의구심이 든다"는 요지로 책에 적고 있다. 백석의 시에 대해 거의 모르고, 그렇게 많은 돈이 있으면서도 백석의 시집이나 관련 자료 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거로 든다. 또 3년을 연애했다며 편지 하나 가진 게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기생인 그녀가, 백석이 유명해지니 뭔가 있어보이는 척(?) 하려고 관계를 과장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으로 짧막하게 맺는다.
국문학계에서도 자야가 <내사랑 백석> 이라는 책에 거짓을 많이 썼다고 본다. 백석이 자신을 만나기 전에 쓴 시인데 자신한테 헌사했다는 둥. 요즘으로 치면 텐프로 언니가 유명인의 애인이었다고 하는 격이랄까, 백석이 직접 자야에 대해 언급한 문헌은 전혀 없다.
5. 학력
1953년 김자야는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6. 대원각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자야는 서울 성북동 산골짜기의 한식당 청암장이라는 별장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지어 경영하기 시작했다. 대원각은 훗날 길상사가 된다.
그런데 등기부에 따르면 자야가 길상사 땅을 취득하기 전 소유주는 ‘조봉희’라는 사람이었다. 조봉희는 박헌영의 이부 누나이며,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스님은 "실소유주는 우리 아버지이며, 6.25 혼란 이후 자야갸 꿀꺽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3~4년 몹시 혼란스러울 때 자야는 유력 정치인 애첩이었고, 그 도움으로 대원각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
[출처: 서울신문]
대원각은 군사정권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7. 길상사
김영한은 1987년, 법정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법정스님을 찾아가 대원각을 비롯한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절을 짓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시주 규모는 건물 40여채와 대지 23,140㎡로, 당시 시가 1,000억원이 넘었다.
처음에 법정스님은 그 청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김영한은 근 10년 가까이 법정스님을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고, 이에 법정스님이 그 청을 받아들였다. 결국 법정스님이 시주를 받아들이고, 1995년 ‘대법사’로 등록했다가 2년 동안 개·보수를 거쳐 지금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하였다.
법정스님은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으며, 당시 김영한은 수천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길상사 건립 당시 '1,000억에 달하는 돈도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이 가장 생각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따로 때가 어디 있나.'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8. 사망
1999년 11월 사망했다. 김영한은 "나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화장을 치뤄 길상사 경내에 산골하였으며 따로 묘지는 없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작은 언덕에는 김영한의 사당과 함께, 그의 공덕비와 백석의 詩碑[3] 가 세워졌으며, 극락전에 김영한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사망 이후, 딸 서모씨가 조계종에 50억 달라고 소송하여 승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