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시인)

 

'''일제강점기의 시인
백석
白石'''
1929년 오산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본명'''
백기행(白夔行)
'''필명'''
백석(白石)
'''본관'''
수원 백씨 인주공파 (仁州公派)[1]
'''출생'''
1912년 7월 1일
[image]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2]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정주시)
'''사망'''
1996년 1월 7일 (향년 83세) #
[image]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 삼수군
'''학력'''
오산보통학교 졸업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현 서울 오산고등학교)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영어사범과 학사
(현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아오야마캠퍼스 영미문학과)
'''신장'''
183~185 cm (청년 시절 추정)
'''직업'''
시인
'''배우자'''
장정옥(1939년 ~ 1940년)
문경옥(1942년 ~ 1943년)
리윤히(1945년 ~ 1996년)
'''시등단'''
『정주성』
''(定州城, 1935,《조선일보》)''
첫 등단은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다

1. 개요
2. 생애
2.1. 출생 ~ 오산학교 시절
2.2. 아오야마가쿠인 졸업 이후 ~ 8.15 광복까지
3. 작품들에 나타나는 특징
4. 대표작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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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작가. 일제 시대에 태어나 청년기를 보낸 시인으로 일본(당시로서 내지)의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서 유학한 엘리트이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며 등단하였으며 1935년 시 『정주성』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단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36년 첫시집 《사슴》을 간행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에서 체제 선전 등으로 이용되다가 문단에서 숙청당했다. 이후 행적은 거의 밝혀져 있지 않으며, 삼수군의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명백기행(白夔行)[3]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그의 이름의 '석'을 빼와서 썼다고 한다.
과거 한국에서는 월북 작가라는 인식이 강해 언급을 피하는 편이었다.[4] 그러나 월북 문인의 해방 이전 작품에 대한 공식 해금 조치가 이루어진 1988년부터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토속적인 우리말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으로,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명실상부한 '''현대시 최고의 명창.'''[5]

2. 생애



2.1. 출생 ~ 오산학교 시절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아버지 백시박(白時璞)과 어머니 이봉우(李鳳宇)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백시박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사진 기술을 가지고 있어 조선일보에서 사진 기자로 근무하다 낙향했다.
1924년 그는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五山)고보[6][7]로 진학한다. 어릴 적 장난꾸러기 같던 시절과는 달리 백석은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오산학교 재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에 영감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8] 이에 백석도 예외는 아니었고 백석은 학과 수업뿐만 아니라 문학 수업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동기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학과 공부에만 치중하는 학생들을 속된 학생들로 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백석은 학과 성적도 상위권에 속했다.[9]
독립운동가 조만식도 당시 오산고보에 재직 중이었는데[10] 백석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아는 백석은 성적이 반에서 3등 정도였으며 문학에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했다. 회화도 썩 잘해 선생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백석은 용모도 준수했지만 나이가 어린 편이었다.(나이가 어렸지만 용모도 출중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고 친구가 거의 없었다.
(후략)
오산소학교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다 1929년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 선발 시험에 붙어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 사범학과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듬해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된다.[11] 당선작은 농촌에서 일어난 남녀의 불륜을 공동체의 소문 형식으로 그려낸 <그 모(母)와 아들>. 조숙한 솜씨로 인간 욕망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당시 백석의 성적 정도면 평양의전[12]에 진학해 의사가 될 수 있었지만, 백석은 교사가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한동안은 기회를 얻기 위해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방응모[13]의 지원[14]을 받아 이갑섭, 문동표, 정근양 등과 함께 당시 일본에서 가장 학비가 비싸다[15]아오야마가쿠인 영어사범과에 다닐 수가 있었다.
아오야마에서 백석은 공부에만 전념하며 어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1학년 영어 마스터, 2학년 프랑스어, 3학년 러시아어를 집중 공부했다고 한다. 특히 교내의 교회에서 외국인 교수들과 자유로이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며 아오야마 학생들에게 경이감을 선사할 정도로 유창했다 한다. 정작 영어사범 전공이면서도 정식 수업은 독일어를 들었고 독일어 교수는 그를 무척 아끼며 애제자로 여겼다 한다. 해방 이후 북에서는 수많은 번역에 집중하였고 이때는 주로 러시아 문학에 집중했고 일부 프랑스, 중국 문학도 번역했다.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했다 그중 가장 못하는 것이 일본어였다는데... 일본에서 유학했던 양반이다.
이렇게 공부한 후 졸업 즘 최우등은 백석일 거라는 믿음이 동기들 사이에 퍼졌다. 그러나 실제 최우등은 일본인 동기 모리가 받았다고 한다. 졸업 답사도 물론 모리가 했다고...
백석의 거주지는 한때 길상사로 잘못 알려졌으며, 이에 대한 오인으로 인해 실제 길상사라는 절이 지어지게 된다. 백석의 거주지가 길상사로 알려진 것은 백석 연구가인 송준이 백석의 일본 유학 시절 3학년 시기의 주소를 동경 길상사 1875 번지[16]에서 살았던 것으로 잘못 추정했기때문이며 이는 훗날 공식적 문서를 통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길상사는 그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했던 김영한이 말년에 전재산 1000억원을 기부하여 만든 절 이름으로 길상사라고 잘못 알려져있던 백석의 거주지를 참고해 절 이름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법명 길상화 역시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지어진 것으로 앞으로 지어질 길상사라는 절에서 따온 법명이다. 송준에 따르면 김영한씨는 연인이라 주장했지만 백석의 개인 신변과 그의 시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며 어떤 기록이나 문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백석의 일본 거주지로 알려져있던 길상사[17] 역시 실제 절 이름이 아니다.
2014년 백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세기 시인에 연구 결과에 따라 정확한 백석의 실제 주소가 알려지게 된다. 실제 백석의 3학년 시기 거주지는 도쿄 센다가야 정(町) 167, 조일옥(朝日屋)[18]이었다고 한다. 이는 아오야마 대학 학적부와 동창회부를 통해 확인되었다.

2.2. 아오야마가쿠인 졸업 이후 ~ 8.15 광복까지


'''신문에 실린 백석의 모습 (1937년)'''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한 백석은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에게 제안에 따라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교정부에서 근무하며 계열 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고 신문에 인도 시인 타고르를 비롯한 외국 문인들의 수필을 번역해 싣고, 두 편의 단편소설을 연재한다. 백석의 단편은 삶의 어두운 면과 연관된 황량한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었는데 결국 구체성을 가진 소설을 접고 성격에 맞는 시 부문으로 돌리게 된다.
백석은 신문사에서 결벽증이 심한 멋쟁이로 통했다. 남들이 20~30전짜리 양말을 신을 때 1원이 넘는 양말을 고집했고 최고급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었다. 결벽증에 가까운 기질 탓에 그날 입을 옷 한 벌, 양말 한 짝도 허투루 고르지 않는 사람이 바로 백석이었다. 지저분한 식당엔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전화를 받을 땐 손수건으로 수화기를 감싸서 통화했다. 주변에서 힐난의 눈치를 보내면 "여러 사람의 손과 입김이 닿은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대꾸했다. "얼굴색은 거무스레했는데, 스타일은 여간한 모던 보이가 아니었다"고 문학평론가 백철은 나중에 쓴 글 '1930년대의 문단'에서 회상했다.
백석은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해 드디어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출판부로 자리를 옮겨 잡지 '조광' 창간에 참여해 발간 1주일 만에 3만부 매진되는 성공을 거뒀다. 백석은 '조광' 창간호에 수필 「마포」를 발표했다. 잡지 편집자로 인정받은 백석은 '조광'에 이어 '여성' 창간 작업에도 투입되었다.
1936년 1월 20일, 백석은 틈틈이 쓴 시를 모아 첫 시집시집 《사슴》을 자비로 간행하였다. 백석이 신문사 번역 일을 하는 틈틈이 준비한 초기작 33편을 담은 시집으로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당시 시인과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내던 김기림이 조선일보에 서평을 실었다. "'사슴'의 세계는 그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의 나라"라면서도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평했다.
당시 《사슴》의 가격이 2원이었는데, 다른 시집과 비교하였을 때 2배 가량 더 비싼 가격이었다. 그때 가마 가격이 13원, 고급 양복이 30-40원이었으니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선광 주식회사 혹은 선광인쇄 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어내어, 나중에는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온라인 경매가가 5500만원부터 시작되어 7000만원에 낙찰되었다. 기사. 낙찰자는 장인제약 지경환 대표 기사 신경림의 경우 우연히 헌책방에서 《사슴》을 구하게 되었을 때[19] 매일 품에 안고 다니면서 줄줄 욀 정도로(!) 몇 번이고 읽고 다녔고[20] 윤동주의 경우 아무리 찾아봐도 시집을 구할 수 없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노트에 시를 베껴 적고 다녔다고. 당시 사슴이 구하기 어려운 책이라 많은 문인 및 팬들이 필사본을 만들어 애독하거나 선물했다고 한다. 노천명의 시 사슴 역시 백석의 별명이기도 한 사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시집의 가격이 비싼 이유는 두꺼운 흰색 표지에 내지와 본지 모두 전통 한지를 사용하였고, 자루매기[21] 방식으로 양장제본하여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싼 책의 대부분을 증정용으로 썼다. 일단 출판 기념회에 회비 1원을 내고 참석한 손님들 모두에게 친필 서명한 사슴 20여권, 그리고 몇 몇 학교 도서관에 증정, 참석 못한 친우 및 선배들에게 또 증정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서점에서는 찾아 볼래야 볼 수 없었던듯 하다. 표지는 정지용의 시집이 출간된 것을 보고 백석도 따라 아무 그림 없이 두꺼운 하얀 표지 위에 사슴이라고만 썼다.
1937년 백석은 「통영(統營)」, 「오리」, 「탕약(湯藥)」, 「연자ㅅ간」, 「황일(黃日)」 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고 1937년 '조광'에 「함주시초(咸州詩抄)」 연작시를, '여성'에 산문 「가을의 표정-단풍」을 발표한다. 그리고 같은 해 겨울 두 해 동안 묶여 있던 신문사 교정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려고 함경도로 내려간다. 그는 이때의 전후 상황을 같은 해 9월 조선일보에 게재한 산문 「가재미. 나귀」라는 글을 통해 밝힌다. 여행을 즐기던 그는 이 무렵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 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해 시에 담아낸다. 이런 풍물과 방언은 특히 「남행시초(南行詩抄)」를 기점으로 이후 해마다 나오는 백석의 기행시 형식의 연작시에서 잘 표현된다.
1938년 백석은 영생여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조광'에 「산중음(山中吟)」 연작시와 「물닭의 소리」 연작시, '삼천리문학'에 「석양」, 「고향」, 「절망」, '여성'에 「설문답」, 「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무래기의 약(藥)」, 「멧새 소리」 등을 발표하고, '현대문학전집'에 「외가집」, 「개」와 '조선문학독본'에 「고성 가도(固城街道)」, 「박각시 오는 저녁」 등을 수록한다.
1939년 조선일보에 산문 「입춘」과 연작시 「서행시초(西行詩抄)」와 시 「안동」을, '문장'에 「함남도안(咸南道安)」, 「동뇨부(童尿腑)」,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등을 내놓은 그는 1940년 '조광'에 「목구(木具)」, 「북방에서」, 「허준(許俊)」 등을 발표한다.
1940년 1월 만주 신징(新京)에 도착한 백석은 먼저 시영 주택 황씨방(黃氏方)에 방을 얻는다. 곧이어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주국 경제부에 자리를 얻고 시작(詩作)과 직장 일을 충실히 병행한다. 당시 친구와 함께 살던 황씨방은 토굴이나 마찬가지여서 주말마다 그는 근교의 '러시아인 마을'[22]로 방을 얻으러 돌아다닌다. 이런 일로 북만주 두메산골의 원시 부족 사람들과도 얼굴을 익히게 되고, 밤이면 시 1백 편을 건지려고 시작에 몰입하였다.
1940년 백석은 '인문평론'에 「수박씨 호박씨」를 발표하고, '조광'에 토머스 하디 원작의 「테스」를 번역해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생계를 위해 만주에서 측량 보조원과 측량 서기로 일한다. 1941년 그는 '조광'에 시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인문평론'에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 「귀농(歸農)」 등을 발표한다.
1942년 만주 안둥(安東)의 세관으로 직장을 옮기고 엔 패아코프의 원작 소설 「밀림 유정」을 번역한다. 한편, 그가 만주에 있는 동안 동료 김소운은 백석의 시 「산우(山雨)」, 「미명계(未明界)」 등 7편의 작품을 일본어로 옮겨 '조선시집'에 싣는다.
해방 후 고향 정주로 돌아온 백석은 그곳에서 남북 분단을 맞는다. 해방 뒤 귀국한 백석은 신의주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가서 1947년 '신천지'에 「적막 강산」, '신한민보'에 「산」을 발표하고, 1948년 '신세대'에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학풍'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문장'에 「칠월 백중」 등을 발표한다.
그는 월북 시인으로 규정돼 출판 금지 대상이 됐다가 1988년 납·월북 작가 해금 조치가 되며 문학사에 복귀했다. 이후 백석의 시는 시선집이 처음 나온 이래 문단과 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활발히 조명되기 시작한다. 해금 이후 그와 관련된 연구 논문만 600편이 넘는 것만 봐도 그 관심을 알 수 있다.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은 2005년 ‘시인세계’가 시인 156명을 대상으로 지난 100년 동안의 시집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이 무엇인지 설문 조사했을 때 1위를 차지했으며 2000년대에도 관심이 지속되며 2012년 백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백석문학전집’(총 2권)이 발간되었다.

2.3. 8.15 광복 이후


8.15 광복 후 스승 조만식의 부름을 받고, 평양에 머무르면서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으로 조만식을 도왔다.# 조만식이 연금당한 이후로는 시를 쓰는 대신 아동문학을 연구했다. 1950년대 초만 해도 북한 문예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러시아 문학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다.
6.25 전후로 후배 고정훈이 백석에게 2차례 월남을 제의했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1. 고당 조만식 선생을 모셔야 한다.
2. 백석과 처 그리고 큰 아들 화제만 데리고 혹은 혼자만 못간다. 다른 가족과 친지가 너무 많아 월남하면 남은 가족 친지가 고초를 겪을 것이다.
3. 가족 친지 모두 터전이 북에 있는 서민이다. 모두 같이 간다 해도 남에서 생활 터전이 없어 더 힘들지도 모른다.
4. 이젠 감시가 심해 가고 싶어도 못간다.[23]
월남하는 고정훈에게 자신은 정치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후 고당의 비서를 그만두고 칩거하며 집에서 엄청난 양의 러시아 및 각국의 소설과 시를 번역했다고 한다. 1년에 10권씩 번역했다고 한다.
이후 전후 번역과 아동문학(특히 동시)에 천착하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전쟁 중 서울이 북의 손에 떨어지자 북으로 월북한 문인들이 서울로 와 정치 선동에 참여[24]했지만 일체 참여하지 않고 평양에 칩거 번역에만 집중한다. 이 때가 1년에 10권씩 번역하던 시기... 그것도 최고 수준으로 번역했다는 평이 중론이다.
1958년 김일성 정권의 문예정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자아비판을 강요당한 뒤 양강도로 추방됐다. 전후 동시에 집중하는 과정에 붉은 편지 사건으로 고난을 겪게된 것이다. 즉 사상과 함께 문학적 요소도 중요시 하자는 주장을 했다가 숙청 당해 추방된다. 1959년 6월 '부르주아적 잔재'로 비판받고 삼수군[25] 의 협동농장 축산반(양치기)으로 쫓겨났으며, 1962년 이후로는 아예 북한 문단에서 사라졌다.
삼수에서는 양치기와 농사를 했으며 그 솜씨가 너무 형편없어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부인 이씨의 증언에 따르면 밤새도록 밭에 나가 연습을 해서 나중에는 능숙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평양에서 유명한 시인이 왔다는 소문이 퍼지고 인품[26]도 훌륭함을 겪은 사람들이 자식의 교육을 맡겨 많은 젊은이들의 문학 관련 교육에 힘썼다고 한다. 또한 지역 당국도 그러한 백석을 그냥 내버려 뒀다고 한다.
이 시기 백석이 북한 문학계에서는 완전 잊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친우들은 여전히 그를 삼수까지 와서 찾았다고 한다. 특히 친우인 허준[27]은 당국의 눈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가장 많이 백석을 찾아와 그들의 우정을 과시했다고 한다.
그 후 1996년[28] 사망하기까지의 반평생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29]
소수의 증언에 의하면, 나중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문학창작지도에 나섰는데 개중에 재능을 인정받은 이도 있다고 한다. 거창한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다든가 하는 비참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도 북한 문단에 공식적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30]백석이 1990년대까지도 생존했음에도 백석의 근황이 알려지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이유가 컸다.
[image]
1980년대 중반, 삼수군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백석의 옆이 부인 리윤희, 뒤에는 둘째 아들 중축과 막내딸 지제.
또한 1996년은 고난의 행군 때라 노령에 제대로 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하여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도 있다. # 다만 그의 둘째 아내인 리윤희는 백석이 노환으로 숨졌다고 증언했다. 다만 사망 열흘 전 감기에 걸려 고생하다가 갑자기 사망했다고. 이 부분은 북한 당국을 의식한 증언일 수도 있으니 적당히 이해해야 할 듯 하다.[31]
북한에서 쓴 글을 보면 조선로동당을 찬양하는 시를 쓴 것이 많다. 남한에서 구할 수 있었던 글들이 <백석문학전집(전 2권, 서정시학, 2012년)>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 체제 찬양시들을 읽어보면 이게 문장은 백석 시인이 맞긴 맞는데, 백석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질이 낮다. 서정성을 나타내려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시에서도 결국은 당이 어떻고 하는 구절을 집어넣어 버렸다. 역시 강요로 작품을 뽑아낼 수는 없는 듯. # 아동문학 평론에서는 '사상'만이 아니라 문학성 자체에 대해서도 중점을 두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 정황상 바로 그 직후에 숙청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작품들에 나타나는 특징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서북방언을 시에 넣기도 하고 서사를 시에 넣은 이야기시[32]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또 그의 시에는 먹을 것들이 많이 등장하기로 유명한데, 백석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연구한 식품영양학과 논문이 있을 정도이다.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고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그려지는 고향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진 않지만 안식과 평화로움의 정신적 가치가 있는 일종의 신화적 공간이며 공동체적 유대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고향은 현실적 조건 하에서는 이미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는 과거의 공간이다. 그의 시가 과거지향적인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고향의 풍물, 세시 풍속, 생활 도구, 전통예절을 잡다하게 나열하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것은 훼손된 고향의 회복을 원하는 간절한 의지이며, 이것은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회복을 소망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대표작으로는 여우난 곬족이 있다.

4. 대표작


나는 북관(北關)[33]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34]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35]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36]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37]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탕약(湯藥)[38]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39] 우에 곱돌탕관[40]에 약이 끓는다
[41]에 숙변[42]에 목단[43]에 백복령[44]에 산약[45]에 택사[46]의 몸을 보[47]한다는 六味湯[48]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끊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萬年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손으로 고히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맑아진다.

5. 기타


  • 당시 말 한 필이 5원이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이 2원 정도였다고 한다. 1936년 1월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는 이 책을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이 시집을 베껴 썼고, 그 필사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살펴보면 윤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49]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윤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인데 이는 두 시인의 시에서 담은 시인 프랑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두 작품을 한번 비교해보자.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季節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來日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靑春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
>별 하나에 追憶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동경과
>별 하나에 詩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小學校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패, 鏡경, 玉옥 이런 異國少女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詩人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북간도에 계십니다.
>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
>별 헤는 밤 - 윤동주
  • 통영을 아주 좋아했던 시인. 통영에 가면 백석의 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고 통영으로 연작시만 3개가 있을 정도이고 통영바다를 거닐며 바다라는 시를 남겼다. 이는 통영에 그가 사랑했던 란이라는 여인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란(박경련)은 이루어지 못했으며 그녀는 1937년 4월 7일 백석과 조선일보에 같이 근무하여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였던 신현중과 결혼하게 된다. 다른 여자와 약혼 중이었던 친구 신현중이 파혼을 하고 뜻밖에 란과 결혼식을 올리며 백석은 많은 충격을 먹는다.[51][52]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뒷선 것만 같구려
>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
>바다 - 백석
  • 통영 바다를 거닐며 연인 란에 대한 사랑을 읊은 시로 사랑에 빠진 백석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 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중략)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 하시던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 하나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수필 편지(1936.2.21 조선일보) - 백석

  •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았던 기억은 시 『바다』와 『통영』 3편과 『남행시초』 연작으로 남았으며 수필 <편지>에 잘 나타나고 있다.
>(상략)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53]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하략)
>
>통영(統營) - 백석
  • 란과 헤어진 후 사건의 전말을 들은 백석이 지은 시. 절절하게 실연의 아픔이 느껴진다. 1938년 4월에 쓴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는 사랑하는 여인과 여인과 결혼한 친구에 대해 담겨져있다. 이 무렵 백석은 신현중에게 이끌려 신혼집에서 란과 인사하게 된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
>내가 생각하는 것은中 -백석
  •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특히 러시아어는 국내 러시아 문학 번역에 상당히 큰 족적을 남겼다. 월북 이후 번역국에서 일하면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이 고골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등 다양한 문학가의 문학을 번역하여 북한에 소개했으며 미하일 숄로호프의 대하소설 <고요한 돈 강>은 2019년 지금까지도 백석 번역을 제외하면 일어 중역본과 축약본 밖에 없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러시아 시인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를 러시아어 원문을 통해 번역한 사람이 백석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1940년 가장 최초로 국내에 완역한 사람 역시도 백석.
  • 사랑에 관한 시를 찾아보면 대표작 중의 하나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우선 먼저 거론되는데 이 시에서 나타샤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은 편이다. 일단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작품[54]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중 하나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그 나타샤로 누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냐는 것. 다수는 '나타샤'가 일반적인 러시아의 여성들을 일컬는 이름-우리나라의 '영희' '주희' 등과 같이-이므로 특정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러시아 문학에 대한 동경과 이국적 이미지의 효과를 더하는 시어라는 점은 문학계에서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 백석의 연애상대로는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란(蘭)'이라는 여인이 손꼽힌다. 스물넷이었던 백석은 통영출신의 이화여고에 다니던 신여성 열여덟살 난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뜨거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백석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 통영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고 그녀의 부모에게 인사를 겸한 청혼을 했으나 끝내 결혼 승낙도 받지 못했다. 당시 '란'에 그의 대한 관심은 주변인 모두가 알 정도였으며 그녀가 살고있는 통영으로 이어지며 여러 작품을 남긴다. 백석은 조선일보에 입사해 여성 소설가 최정희(시인 김동환의 연인)와 친해지며 여러 여성 문학인을 소개받아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최정희와 더불어 노천명, 모윤숙과도 자주 어울렸다. 이들 여성 3인방은 백석을 사슴이라 불렀다고 한다. 2001년 문학사상에 백석이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가 적힌 편지도 받았다고 한다. 란이 결혼한 이후 함흥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제자 김진세의 누이동생을 마음에 두었다는 설이 있다. 미모의 여인으로 영흥에 살았으며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백석은 그녀의 집에 정식으로 청혼을 하지만 전과 마찬가지로 여자 집안에 거절을 당했다. 여기까지가 백석이 시인으로 활동할 당시 알려진 주변 여인들로 모두 명문학교를 다닌 신여성들이며 이후 시간이 흘러 백석의 연인이었다는 여인도 나오게 된다.
  •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한 여인 중 하나는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이다.[55] 김영한은 광복 후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했는데, 말년에 법정 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하며 당시 유명세를 얻게 된다. 지금은 길상사라는 절로 바뀌어 있다. 생전에 '1000억 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느냐는 질문에) '는 말을 남겼으며 이는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백석 측과 문학계는 이를 부인하고 나선다. 백석 주변인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으며[56] 백석 연구가인 송준 역시 김영한을 직접 만나기까지 했으나 백석에 관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않으며 질문을 하니 백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백석 전문가인 이동순 영남대 교수 역시 시인과 기생의 사랑은 실제가 아니며 조작되고 윤색된 이야기 라고 기고했다. 백석이 결혼하거나 만난 여성들이 명문학교 출신의 신여성이어서 백석이 기생을 만났을 것 같지는 않다. 문학뉴스 기사 참고
  • 2004년에 나왔던 송준 저 '시인 백석' 1, 2, 3권도 백석의 생애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적었으나 절판되었다. [57] 송준은 90년대 초반 백석과 백석의 시가 끼친 영향과 관련해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백석 본인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도저히 쓸 수가 없어서 한동안 미뤘었다고 글에서 밝혔다. 송준은 생전 김영한을 인터뷰 했는데 그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 의구심이 든다는 요지로 책에 적고 있다. 백석에 대해선 거의 모르고 그 많은 돈이 있으면서도 백석의 시집이나 관련 자료 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거로 든다. 그래서 백석이 유명해지니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으로 짧막하게 맺는다.
  • 2011년 근대서지학회에서 발간하는 근대서지 2호에 백석의 미발표 번역시 167편이 발표되었다. 백석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찾아보자.
  • 백석이 살던 동네는 집성촌이었는데 백인제, 백낙준과 친척이었다.[58][59]
  • .(2020년 11월 18일 기준 삭제됨). 그러나 다른 기사에 따르면 94년 이후 중국과 북한 접경지역에서 부인 이윤희씨를 만났다고 나온다. 아마도 프로필을 적는 과정에서 실수로 저리된듯 하다. 한 편 백석 시인은 생전에 그의 시가 남한에서 매우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실렸음을 알고 매우 만족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를 만난 사람이 이후 시를 달라고 했으나 모두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내 놨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 백석의 첫번째 결혼은 집안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화여전 출신으로 남북간 갈등이 고조되자 외아들을 데리고 월남했다는 기사도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라기보다 설에 가깝다. 두번째 부인은 피아니스트 문경옥으로 김일성의 후원을 받아 소련 레닌그라드(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유학한 북한 최초의 여성 작곡가 문경옥(1920∼1979)이 바로 그다. 평양의 유명 변호사 문봉의 서출로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여성 예술가이다. 1940년 9월 백석은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소속 측량 보조원을 그만 두고 백구둔이라는 농촌에 잠시 체류하며 농사를 짓다 안둥시청에서 일하고 있던 소설가 염상섭이 안둥 세관에 자리를 얻어주며 안동로 간다. 당시 문경옥의 오빠였던 화가 문학수와 가까이 지내던 백석은 그의 중신으로 1942년, 평양에서 피아니스트 문경옥과 결혼식을 올린 뒤 안둥에서 살림을 시작한다. 당시 처제 문경랑은 형부 백석에 대해, 매우 예민해 건너방에서 잔다고 할때 웃음소리가 조금만 나도 신경질을 부린다며 "가랑잎에 불이야 시인들은 다 그렇다나" 라고 지인인 작가 김자림한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백석의 두번째 결혼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임신 8개월의 아이가 유산되며 고부간의 갈등 등 관계가 악화되며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해방무렵 만난 부인 리윤희와는 3남 2녀를 두고 50년 넘게 해로했다. 백석은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부인과 삼수농장의 농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 시인 안도현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 바로 백석 평전이다.
  • 국내 소설가 김연수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의 ‘기행’이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잘 알려지지 않은 분단 이후의 백석의 행적을 김연수의 문헌정보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소설이다. 또, 기행은 백석의 본명이기도 하다.
  •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네이버 인물 소개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면 제법 잘 생겼다. 여성들에게 인기도 많았다고. 게다가 이 분은 근 100년전 사람인데 지금 기준에서도 잘 생긴 편에 속한다. 넷상에서는 황순원, 윤동주, 임화와 함께 근현대문학 F4라고 하기도 한다.
  • 영화 모던 보이의 주인공 이해명(박해일 분)의 모델이다. 실제로 백석의 인생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아니고, 헤어스타일이나 느낌만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이해명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친일파 아버지를 둔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기까지 하는 문제적 청년으로 나온다.
  • 1912년생인데 키가 183~185cm나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기준으로도 상위 2% 안에 드는 키이며 저 당시 185cm이면 오늘날로 치면 한 195cm는 되는 거다. 장신을 넘어서서 그야말로 거인 수준.
  • 배우 신성록이 카톡개와 더불어 백석을 닮은 것으로 언급이 된다. 해당 사진은 별에서 온 그대의 이재경. 더 많은 사진. 신성록도 백석과 닮았다는 것이 좋았는지 인스타그램에 백석의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카톡개와 백석은 닮지 않았다. 그 외에 닮은 사람으로 배우 공유, 윤현민 등과 웹툰작가 레바도 있다.
  • 여담이지만 현재 기준으로 봐도 상당한 미남이다.큰 눈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특징이다(부럽다).



[1] 25세손 ◯행(行) 항렬[2]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승훈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수원 백씨의 족보를 찾아 보면 이름자는 '행'이 분명하나, '갈 행(行)'에 삼수변을 쳐서 '넘칠 연(衍)'으로 쓴 기록도 있다. 이것은 아명(兒名) 또는 이명(異名)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4] 다만 이북 태생이고 조선일보 재직시절 및 일본 유학시절을 제외하면 쭉 이북에서 살았기에 원래 고향이 이북인 사람을 월북 작가로 취급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다. 또한 밑의 생애 문단에도 후술되어 있지만 사상적인 문제보다는 원래 고향이 이북인 것에 더해 주위 상황으로 인해 이북에 잔류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 실제로 문학 학계에서는 백석을 '월북' 작가로 분류하기보다는 '재북(在北)' 작가로 분류하기도 한다.[5] 실제로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이 갓 되었을 무렵에 이르기까지 백석의 영향을 받은 인물은 화가 이중섭, 시인 신경림, 동화작가 김요섭, 윤동주, 북한의 한설야 등이 있다.[6] 이전 편집 버젼의 오산중학이라는 명칭은 오산고보가 이름을 새롭게 바꾸고 난 뒤의 명칭이다. 백석 재학 당시 교명은 ‘오산고보’였다.[7] 참고로 화가 이중섭은 백석의 후배이다. 물론 1929년에 입학했기 때문에 서로 알았을 리 없었겠지만. 다만 백석의 시를 감명 깊게 읽긴 했다.[8] 김소월 시인이 백석의 선배였다. 백석보다 6년 앞서 오산고보에서 재학했던 김소월김억이 교사로 지도했었는데, 1939년 소월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백석이 김억을 직접 찾아가 그의 습작노트를 받아왔다고. 나중에 백석은 <여성>이라는 잡지 에 소월의 습작 <제이 엠 에스>를 지면에 싣게된다. 흥미로운 것은 소월이 백석으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간접적인 영향이 되었지만, 백석이 선배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월은 민요의 4/4조 운율을 시에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백석은 이 보다는 오히려 시의 서사적 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9]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학교 답게 일본어 교육에 신경쓰지 않아 일본어 성적은 낮았다고 한다. 이로써 체조에는 소질이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를 제외하면 15과목 모두 우(75점~100점)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평균성적이 아닌 ‘우, 양, 가’로 등수를 매기다 보니 평균점수가 높았음에도 전교 등수가 낮아 선생님들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오산학교의 인원이 50명 내외였는데 이 중 10등 안에 들면 중상위권이었기 때문.[10] 1924년 백석의 입학 당시 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장을 맡게 되었다[11] 등단작은 시가 아니라 단편소설이었다.[12] 당시 오산고보에서 졸업 성적 10등안에 들면 무시험 입학이 가능했다[13] 백석의 부친은 한때 조선일보 사진부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동향 사람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방응모와 백석의 밀접한 관계는 시 「고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석과 의원이 말하는 아무개씨가 바로 방응모로, 백석 본인이 시에서 아버지같이 섬기는 분이라고 대답한다.[14] 1929년 12월 10 탈고한 단편 소설 그 "모 母와 아들"이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 문예에 당선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계초 방응모가 장학금 월 60원을 지급하게 된다[15] 비싼 이유는 기독교 재단으로 외국인에 의해 설립됐기에 일본 정부의 지원금이 매우 적었다[16] 아오야마까지 차로 30분 거리[17] 에도시대에 스이도바시 근처에 있었던 '스와 산 기치조지'(諏訪山吉祥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나 실제 절은 아니다. 스와산기치조지가 화재로 유실되고 근처 살던 사람들 소개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와 지명을 기치조지 즉 길상사로 지었다 한다.[18] 현재의 시부야구 신주쿠 교엔 근방. 아오야마가쿠인대학까지 대충 걸어서 20~30분 거리.[19] 6.25 동란 와중이라 수많은 장서들이 헐값에 매매되던 시기이다. 당연히 신경림도 장서 더미 속에서 사슴을 발견 참고서 한 권 가격 정도에 샀다고 한다[20] 안타깝게도 나중에 박정희 정권 치하 집이 압수수색당했을 때 책 40권을 압수당했는데 그 중에 《사슴》이 있었다고 한다.[21] 종이의 한 면에 두 페이지를 인쇄하여 반으로 접어 한쪽을 실로 묶는 방식. 단면으로 보면 자루 같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22]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근무하게 된 백석의 업무는 측량 보조원이었다. 당시 국무원은 대(大)신경 건설을 위해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측량사를 고용하고 있었기에 특채로 들어간다. 사범학교에 이어 함흥영생고보 교사 시절에도 러시아어를 배웠다지만 통역을 직업으로 삼은 만큼 러시아어에 통달하지 않으면 안되어 그는 러시아 마을에 머물며 러시아인에게 노어를 배웠다. 낮에는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의 통역으로, 밤에는 관성자에서 러시아어 습득에 매진하던 그는 시간을 쪼개 ‘테스’까지 완역한다.[23] 실제 백석은 유명하여 감시가 붙었을 것이다.[24] 백철의 회고에 따르면 문인 중 오장환 같은 이는 평소 친했건 아니건 정치적으로 맞지 않은 문인들을 처벌하고 싶어 안달했다한다[25]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삼수갑산은 김소월의 시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무척 외진 곳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다. 중죄인의 유배지로도 유명했기 때문. 실제로도 산으로 둘러싸여 무척 험한 곳으로 유명하다.[26] 하루에 동일한 사람을 열번 만나더라도 손을 가슴에 얹고 정중히 인사했다고 한다[27] 조선일보 시절 백석과 신현중의 절친한 친구였고 신현중의 여동생 신순영과 결혼했는데 란과 백석이 처음 만난 곳이 이 허준의 결혼 축하연 회장이었다. [28] 1963년 사망설이 있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하여 1996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29] 백석 연구자 송준은 해금 이후 백석 연구에 몰두하며 일대기 1,2권 냈다가, 1994년 63년에 숙청당했다는 백석이 살아있음을 알게 된다. 중국에서 부인 이씨를 직접 만났다. 이후 살아있는 백석에게 해가 될까봐 출간 계획이 있었던 일대기 3권을 접었다. # [30] '나루터'라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썼다. 그런데 아래도 언급되지만 백석의 시가 맞냐 싶을정도로 형편없다. 고의성이 다분한 셈.#[31] 다만 무작정 음모론을 제기하기는 힘들다. 당시 만으로도 83세였던 백석 시인의 당시 연령을 감안하면 급성 폐렴 등의 질환이 와서 지병과 합병증이 발생하여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타계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이런 경우라도 춥고 살기 힘든 지역이라 83세인 고령인 백석시인의 면역력이 저하되어 병세가 더 빠르게 악화되었다는 추론 역시 가능하다. 하지만 북한의 당시의 열악하던 경제상황과 북한 내에서도 살기 힘든 지역이었다는 점도 동시에 고려해야할 것이다.[32] 당대에 이야기시를 구사한 시인으로는 임화 , 이용악 , 백석이 있었다. 단편 서사시라고 하기도 한다. 김동환 의 <국경의 밤>은 서사시다.[33] 함경도의 다른 이름[34]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35]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무장 ‘관우(關羽)’를 높여 부르는 말[36] 방응모라는 설. 방응모는 시인 백석의 일본 유학 자금을 후원했다. 백석의 부친은 한때 조선일보 사진부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정주 동향 사람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37] 莫逆之間. 허물이 없는 아주 친한 사이를 이르는 말[38] 한약재에 적당한 양의 물을 가하고 약한불에 달여서 짠 약액(藥液)[39] 질흙으로 구워 만든 화로[40] 곱돌로 만든 약 탕관(湯罐),약탕기[41] 삼(蔘). 인삼과 산삼을 통틀어 이르는 말[42] 숙지황(熟地黃). 몸을 보하는 한약재의 한 종류. 지황이라는 덩이뿌리 약재를 쪄서 말린 것을 숙지황이라 한다. 지황을 하(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글자 속 하(下)자가 변(卞)자로 잘못 읽히면서 숙지황을 숙하 또는 숙변이라고도 부른다. ‘숙하’가 맞고 ‘숙변’은 잘못이지만 ‘숙변’을 ‘숙하’의 변한 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므로 사전에서도 그에 따라 ‘숙변’과 ‘숙하’를 둘 다 숙지황의 별칭으로 인정하고 이 두 단어를 유의어로 처리한다.[43] 목단피(牡丹皮)라고도 불리는 한약재. 모란(목단)의 뿌리껍질이다.[44] 白茯苓.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영양세포들이 모여 딱딱한 흰색 덩어리를 이룬 것으로 한약재 중 하나다.[45] 덩굴 참마의 덩이뿌리를 산약(山藥)이라 부른다. 한약재의 하나[46] 질경이 택사(澤瀉)의 덩이줄기로 한약재의 일종[47] 補. 보충(補充)[48] 육미탕. 지황,산약,산수유,복령,택사,목단피 등 총6가지의 한약재를 조합하여 달인 탕약으로 대표적인 보약 한약 중 하나. 한나라 시대 유명한 의사 장중경의 팔미탕을 송나라 시대 유명한 의사인 전을이 변형하여 만든 처방이 육미탕이다. 백석은 육미탕의 재료 중 산수유를 인삼으로 적는 실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또는 개인의 증상과 체질에 따라 약재를 더하거나 빼는 가감법에 따라 산수유를 빼고 인삼을 넣은 가감(加減)육미탕이라 볼 수도 있다.[49] 어떤 의미에서는 표절 아닌가 싶을 지경인데, 윤동주의 시들 중 상당수는 습작 시이고 윤동주는 자신의 시를 시집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윤동주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는 윤동주가 죽은 후, 그가 생전에 써놓았던 시들을 긁어모아 출판한 것이라서 습작들도 모조리 섞여 있다.[50] 실제 백석의 모친은 단양군수의 딸이었고 서울 출신이라 한다. 그런데 백석의 부친 백시박과는 나이 차가 13살이나 났다. 당시 관점에서 이런 기우는 혼사는 백석의 모친이 기생 혹은 첩의 자식이어서 라는 관점이 있다[51] 이 과정에서 너저분한 일이 있었는데, 백석이 딸과 결혼하겠다 하니 박경련의 집에서는 자신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물었다. 따로 약혼자가 있었지만 자신도 박경련을 좋아했던 신현중은 “백석 어머니가 기생 출신 혹은 첩의 자식[50]”이라 일러바치고 박경련을 자신과 혼인시켜달라고 해서 승낙받아 기존의 약혼을 파기하고 절친한 친우인 백석의 뒤통수를 쳤다. 박경련과 신현중은 금슬이 좋았으나 폐결핵을 앓고 병약하던 박경련의 몸상태 문제인지 자식은 없었고(양자는 있었다. 옆에 끼고 저녁을 먹을 '어린것'은 없었던 셈.), 신현중은 언론인으로 재기하려 하나 실패하고 교육자가 되어 경남 부산 일대를 떠돌며 1980년 생을 마쳤고 박경련은 한참을 더 살았다.[52] 백석은 수줍음이 많아 박경련을 만나 면식도 있었고 어째어째 교류는 했지만 막상 박경련의 부모를 만나거나 통영에 내려갔어도 집으로 찾아갈 엄두를 차마 내지 못했는데 박경련은 신현중의 누나 신순정의 제자였던지라 피차에 집안사정을 다 아는 사이였고 신현중 집안도 동향 출신이라 부모님 대에도 서로 면식이 있었다. 타향, 특히 이북 출신에 그리 넉넉하지는 않은 집안의 장남인 백석과 동향 출신에다 아버지가 군청에 근무해서 형편도 꽤 좋았고 집안끼리 훤히 아는 사이인 신현중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박경련의 어머니는 신현중을 택했다.[53] 현 통영시 명정동[54] 백야-가 아니라 전쟁과 평화라고 함[55] 길상사 시주가 언론을 타며 당시 김영한와 백석과의 일화가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 자야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나오는 여인으로 백석이 아오야마 학원에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심취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백석은 시 '두보나 이백같이'를 남기기도했다.[56] 백석은 활동 당시 셀럽처럼 인기가 있어 그가 좋아했던 여인이나 주변 이들은 잘 알려진 편이다. 백석이 란을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김영한으로 인해 백석과 기생과의 일화가 알려지며 백석이 기방 출입이 잦았다는 설이 나오게 되고 함흥의 기생과 동거하여 이것이 김진세 누이와의 혼인 거절의 사유가 되었다는 설도 나오게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확인되지 않은 설일 뿐이다.[57] 현재는 접속이 불가능하다.[58] 항렬로는 백석에게 백인제가 조카뻘, 백낙준이 손자뻘이다.[59] 항렬이 어마무시하게 높은데, 나이로는 손자뻘에 불과한 사업가 백종원은 백석의 8대손 항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