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1. 개요
'길상사'라는 이름의 절은 전국에 산재해 있다. 성북구에 위치한 길상사가 가장 유명하나 서울특별시 내에도 관악구와 서대문구에도 있다. 또한 길상사라는 이름은 현재의 송광사가 맨 처음 창건되었을 때의 이름이기도 하다.
2. 서울특별시 성북구의 절
吉祥寺
[image]
홈페이지
2.1. 개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불교 사찰.
1997년에 세워졌으므로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으로 유명한 곳이다.
2.2. 내력
공덕주 김영한(1916~1999)은 가난 때문에 팔려가다시피 만난 남편과 사별한 후, 기생이 되었다. 기명은 진향(眞香). 성북동 기슭에 서울 3대 요정중의 하나인 대원각을 1950년대부터 운영해 부를 얻었지만 명예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기생을 천하게 여기는 풍토는 8.15 광복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한다.[1] 이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말년에 길상사 시주와 백석과의 일화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김영한은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했으나 백석 측은 부인, 문학계에서는 인정하지않고 있다. 백석 연구가 송준은 생전 김영한을 인터뷰 했는데 의구심이 든다며 백석이 유명해지니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했고 백석 전문가인 이동순 영남대 교수 역시 기생의 사랑은 실제가 아니며 조작되고 윤색된 이야기라고 기고했다.[2]
승려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 법정 스님에게 요정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을 시주하니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하였다. 법정은 처음에 사양하였으나, 결국 1995년 이를 받아들여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를 세웠고, 이전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길상사가 백석의 거주지로 알려졌으나 이는 백석 연구가인 송준이 백석의 일본 유학 시절 3학년 시기의 주소를 동경 길상사 1875 번지에서 살았던 것으로 잘못 추정했기 때문이며 이는 아오야마 대학 학적부와 동창회부를 통해 정확한 주소가 다시 알려졌다. 김영한이 길상사라고 절 이름을 지은 것은 백석과의 관련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가로도 1,000억 원이 넘는 액수였다고 하는데, 무소유를 설하던 법정이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시주를 받은 데 대하여 불교 내부에서도 논란은 있었다. 그러나 법정이 신나서 덥석 받은 것도 아니고, 10년 가까운 실랑이 끝에 그녀의 마지막 원을 이루어준 것이니 이를 비난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1999년에 김영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화장하여 절터에 뿌려졌다. 절터에 골고루 산골했기 때문에 따로 무덤은 없으나, 그녀를 기리는 공덕비가 절 안에 있다. 2010년 법정도 여기서 입적했다. 극락전에 김영한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진영각에 법정의 영정과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사망 이후, 딸 서모씨가 조계종에 50억 달라고 소송하여 승소했다.
사족으로, 법정 스님이 처음 출가하신 사찰인 송광사의 옛 이름이 길상사다. 출가한 사찰과 한때나마 같은 이름을 사진 사찰에서 입적하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2.3. 분위기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절 치고 평범한 절은 없다지만, 이 절은 본래 요정이었기 때문에 절의 풍경부터 다른 전통적인 사찰과는 좀 다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 산책하면서 마음 가라앉히기에는 오히려 편안한 측면도 있다. 군사정권 시절 요정정치가 벌어지던 밀실이 지금은 누구나 참선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방되어 있다. 그밖에도 불교 관련 서적을 열람할 수 있는 도서관 등이 갖추어져 있다.
다만 요정이었던 길상사 금당은 불상과 주변물 정도만 가져다 놓았을 뿐 더 이상 꾸미지 않아 상당히 썰렁한 분위기를 풍긴다. 절 주변에 비교적 규모가 있는 건물을 새로 새우는 것에 비하면 조금 아쉬운 부분.
[image]
이 절의 명물인 관세음보살상.
현대식 조각품인 관세음보살상은 법정이 종교 간 화합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에게 의뢰하여 봉안하였다. 사찰의 설립식 행사 때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절을 방문해 축사를 한 적이 있고, 법정은 이에 대한 답례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을 방문해 답사했다. 성모 마리아 비슷한 분위기인데, 나이 지긋한 불자들은 좀 낯설어하기도 하는 듯. 최종태 씨는 길상사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종로구 혜화동 성당의 성모상도 조각했는데, 이 성모상과 관세음보살상은 마치 친자매처럼 매우 닮았다. 제작자의 의도를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종태의 성모마리아와 관세음보살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가 좀 불편하다. 성북동은 버스노선조차 별로 없는 부촌이라서... 2015년 4월자로 셔틀버스가 폐지되고 길상사 앞까지 가는 마을버스 노선인 서울 버스 성북02가 길상사까지 연장되었다. 대로인 대사관로에서 걸어서 올라가면 20~30분 쯤 걸린다. 그래서 부처님오신날과 같이 사람들이 많이 오는 날에는 교통 전쟁이 벌어진다. 어떤 택시는 이 때를 노려서 합승을 권유하기도 한다. 택시 요금은 한성대입구역에서 출발하는 기준으로 기본요금 내.
대웅전 앞마당에 빼곡히 심어진 꽃무릇이 상당히 아름답기도 하다. 이 꽃무릇 밭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편.
2.4. 여담
도쿄도 무사시노시의 기치조지와 한자가 같다. 인근에 석조 유물 전문 박물관인 우리옛돌박물관이 있다.
3. 충청북도 진천군의 사당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508번지 도당산에 있는 신라 김유신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당시 폐허가 되었으나, 1926년에 재건하고 1959년에 개축하였다. 1975년 2월 21일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1호 '진천 길상사(鎭川 吉祥祠)'로 지정되었으며, 75~76년에 걸쳐서 사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전면 신축하였다.
[1] 사실 기생을 지금 기준으로 봐도 그나마 건전하게 보면 밤무대 연예인이고, 일반적으로 보면 술집 작부, 매우 나쁘게 보면 매춘부인데다 실제로 대부분의 기방이 남자를 대상으로 연예, 접대, 매춘 세 가지를 모두 겸비해서 영업을 했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이미지가 좋을 수는 없다.[2] 백석은 사랑했던 여인을 생각하며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인데 기생에 관해서는 전혀 기록이나 문헌이 없다. 또한 백석이 주로 명문학교를 다닌 여성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