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태
* 프로게이머는 김원태(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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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元泰
1909년 08월 29일 ~ 1994년 12월 22일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아호는 괴남(槐南)이다.
1909년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일제강점기 관료로 근무하였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 한반도의 북쪽 끝 함경북도 온성군 군수로 재직하였다.
8.15 광복으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그대로 관료로 발탁되었다. 이승만 정권 때인 1950년대 중반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차관,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 등을 역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충청북도 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내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인 1963년 자유민주당에 잠시 몸담았다. 1966년 무임소장관에 임명되었고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당무위원이 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북도 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공화당 당기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진천군-음성군-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이충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6년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령을 이유로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탈락되고 대신 오용운이 해당 선거구에 공천되었다. 이후 한국잠사회, 한국유도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선정되었다.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생계형 친일부역자로 분류된다. 농사꾼의 자식으로 8.15 광복 직후 친일부역 경력이 부끄러워 한동안 공직에 나오지 않았으나 생계를 위해 공직에 다시 나섰고 인품이 훌륭하고 비리와 거리를 두어 4.19로 시위자들이 자유당 국회의원들을 잡으러 다니며 국회의원들이 모두 피신다닐 때 시위자들이 김원태 집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3선 국회의원이었지만 모아둔 재산이 없어 아들 집에 기거하며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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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元泰
1909년 08월 29일 ~ 1994년 12월 22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아호는 괴남(槐南)이다.
1909년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일제강점기 관료로 근무하였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 한반도의 북쪽 끝 함경북도 온성군 군수로 재직하였다.
8.15 광복으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그대로 관료로 발탁되었다. 이승만 정권 때인 1950년대 중반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차관,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 등을 역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충청북도 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내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인 1963년 자유민주당에 잠시 몸담았다. 1966년 무임소장관에 임명되었고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당무위원이 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북도 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공화당 당기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진천군-음성군-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이충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6년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령을 이유로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탈락되고 대신 오용운이 해당 선거구에 공천되었다. 이후 한국잠사회, 한국유도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선정되었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3. 평가
생계형 친일부역자로 분류된다. 농사꾼의 자식으로 8.15 광복 직후 친일부역 경력이 부끄러워 한동안 공직에 나오지 않았으나 생계를 위해 공직에 다시 나섰고 인품이 훌륭하고 비리와 거리를 두어 4.19로 시위자들이 자유당 국회의원들을 잡으러 다니며 국회의원들이 모두 피신다닐 때 시위자들이 김원태 집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3선 국회의원이었지만 모아둔 재산이 없어 아들 집에 기거하며 말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