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순

 

金明淳
1896년 1월 20일 ~ 1951년 6월 22일 (향년 55세)
1. 개요
2. 비극의 시작
2.1. 헛지목의 피해자?
2.2. 거절에 대한 보복?
3. 재평가

'''“조선아...'''

'''이다음에 나갓튼 사람이 나드래도'''

'''할수만잇는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이 사나운곳아 사나운곳아”'''

김명순의 시 <유언>


1. 개요


'''한국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최초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극작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
평안남도 평양 출신이며 1951년에 일본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는 탄실(彈實).
아버지 김희경(金羲庚)은 평양의 대지주로, 평안남도 참사관(參事官)을 지낸 관료이다. 어머니는 기생 출신의 으로, 기명(妓名)은 산월(山月)이다.
1912년 진명여학교 보통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나, 중퇴하고 귀국했다. 191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편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했고, 이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해 평생 배우는 것을 멈추질 않았다고 한다.
1917년에 단편 소설 <의심의 소녀>로 문단에 데뷔한다.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해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으며, 5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외국어 실력이 뛰어났고, 독일어 노래를 만들어 불렀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있었으며, 미모도 빼어나 일본 유학 시절엔 일본 남성에게 고백을 받기도 했다. 또한 신문기자로도 활동했다.[1]
여기까지만 본다면 당시 최고 엘리트엄친딸의 원조로 볼 수 있는 완벽한 인생 같으나…

2. 비극의 시작


그러나 가부장적 조선 사회는 김명순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기생 출신 첩의 딸 김명순은 출신만으로 '헤픈 여자'로 규정했고, 어머니와 같이 기생이 돼야 할 처지에 이를 거부하고 열심히 공부해 지적 지평을 넓혀가는 김명순을 '건방진 여자'로 규정하면서 근대 남성들은 아름답고 지적으로 뛰어난 김명순을 성적 희롱의 대상으로 깎아내렸다.
김명순이 일본 유학 중이던 19세 때 이응준에게 당한 강간# 사건을 소설가 김동인이 제멋대로 왜곡해 소설화하여, 그녀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 소설의 제목은 <김연실전>이다. <김연실전>의 영향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김명순은 '스캔들로 유명했던 여류 문학가' 정도로, 지나가듯이 언급되는 존재로 전락했다.
그런데 <김연실전> 이전에도 김명순을 펜으로 공격하는 움직임은 1920년대부터 집요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모은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너희들의 배후에서>에 등장하는 권주영이 김명순을 모델로 했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이 소설에서 권주영은 '일본인 군관에게 유린당하곤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인물'로 그려졌는데, 김명순을 공격한 문인들은 소설의 성애적 묘사만을 주목해 곡해한 것.
김명순이 이를 반박하기 위해 내놓은 소설이 <탄실이와 주영이>였다. 여기서 그녀는 성폭행을 당한 아픔까지도 용기있게 고백했다. 문제는 김기진이 이를 약점으로 잡아 공격했다는 것이다. <김명순 씨에 대한 공개장>에서 김기진은, 성폭행을 당한 김명순에 대해 "성격이 이상하고 행실이 방탕하기 때문"이라며 인격 살해를 가했다. 여성 예술가들의 삶을 소개한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 주랴>에 당시 기록이 언급되어 있다.[2] #
김명순은 한국문단내 남성문인들의 끊임없는 괴롭힘과 언어적 성폭력 때문에 1927년 자살 기도를 하고 그 후에도 끊임없이 자살의 유혹에 시달리면서도 시와 소설, 수필, 희곡 작품을 통해 자신에 대한 오해를 벗기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때문에 영원히 조선 땅을 떠나고 만다. 이후 일본에서 어렵게 살다가 1951년 사망했다.

2.1. 헛지목의 피해자?


그런데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너희들의 배후에서>에 등장하는 권주영이 정말로 김명순을 모델로 한 것이라면, 이는 작가가 헛지목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시 우리나라 독자들이 궁예질을 했다는 것인데, 어찌되었든 작가 아니면 독자가 헛지목을 했다는 얘기.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김명순이 동명이인과 혼동되어 피해를 보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1930년대 카페 여급을 묘사한 기사에 영화 배우 경력이 있는 '''김명순'''이란 여성이 등장하는데, 이 기사에서 김명순은 '마리꼬'라는 예명을 쓰고 있다. 이 기사는 <다방과 카페, 모던보이의 아지트>라는 책에 언급된다.# 당시 카페는 오늘날과는 달리 유흥업소에 가까운 장소였으므로, 카페 여급이란 직업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나빴다.
이 책에서는 작가 김명순과 카페 여급 김명순을 동일 인물로 보고 김명순의 20대 유학 시절 사진을 게재했는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영화배우 김명순은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고 한다[3] 사실 일제강점기 문학인들은 자료 부족으로 인하여 이런 헛지목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 고향이 같고 아버지의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다다이즘 문학인 고한용과 아동문학가 고한승이 동일 인물로 알려졌다가, 최근에서야 바로 잡히기도 했을 정도.

2.2. 거절에 대한 보복?


김명순이 이러한 오명에 시달렸던 이유는 김동인의 영향력도 영향력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하는 남성들을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김명순이 남긴 자전적인 소설에 일본 유학 시절 일화가 나온다. 여기서는 평소 기생의 딸이라고 자신을 무시하다가 행사만 있으면 피아노 연주를 해 달라고 불러 내는 남학생들에게 화를 냈다고 나와 있다. 즉, 자신의 피아노 실력을 인정하여 부탁한 게 아니라 그냥 눈요깃거리, 분위기 메이커 정도로 생각하고 부탁했다는 것이 분노의 이유. 중앙일보 기사에 이 소설의 한 대목이 인용되었다. # 김명순은 자신의 생모가 기생 출신이란 점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문과 예술에 심취했고, 이 때문에 오히려 깔끔한 성품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처럼 김명순이 평소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여기에 반감을 품은 남성들이 보복성 글을 써서 김명순을 나쁘게 묘사하고 모함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문학을 빙자한 리벤지 포르노라고 지탄받을 일이다.
지금도 사람들의 호기심에 의해 원치 않은 열애설에 휩싸이는 일이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본인이 인정하지 않은 열애설의 신빙성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김동인 문서에 언급되어 있듯이 김명순의 경우는 남자와 이야기를 하기만 해도 열애설이 났다고 하는데, 지금도 시골에서는 그러한 일이 빚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심지어는 말을 섞은 적도 없는데도 마을 어르신들이 그곳 총각과 멋대로 커플링을 만들어 놓고, 여성이 이를 거절하면 "남자에게 꼬리쳐놓고 내빼는 여시같은 년"이라고 매도한다는 것이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본인이 인정하지 않은 이야기는 필터링할 필요가 있다. #

3. 재평가


예전의 문단에서는 김명순에 대하여 '방탕한 여류 문학가'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나, 1980년대 초부터 이러한 평가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당시 방송 극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구석봉 씨였다. #
동아일보(1981. 10. 9) 기사에 따르면 드라마 작가 구석봉(具錫逢) 씨는 김명순의 넷째 동생 김기성(金箕成, 서울 거주, 77)과 셋째 여동생 김영순(金英淳, 부산 거주, 78)을 직접 만나 "김동인의 <김연실전>의 모델은 김명순이 아니며, 김명순은 출신 소실의 서녀가 아니라 평양의 명문 가정에서 엄연히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고, 그녀의 아버지 김희경(金羲庚)도 감영의 이속이 아닌 평안남도 참사였으며, 그녀의 숙부인 김희선(金羲善)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20년 상해임시정부 시절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 밑에서 차장을 지내는 등 뼈대 있는 집안에서 특히 부모의 귀염을 받고 당당하게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구 씨의 주장에 따르면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의 기록은 김명순의 가족이 말하는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김명순의 방탕한 생활도 왜곡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공식적인 기록을 뒤짚을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는지, 그 후에는 다시 잊혔다.
김명순의 친모가 기생 출신 첩이라는 것도 아직까지는 정설로 여겨진다. 이는 김명순이 집필한 자전적인 소설에, 친모가 기생 출신이라 멸시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 링크 이처럼 증언이 엇갈리는 이유는, 김명순이 어린 시절에 이미 생모와 헤어져 적모(嫡母)[4]의 자녀들과 함께 자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링크 이 때문에 이복동생들의 기억에 착오가 빚어졌다는 것이다.[5]
그러나 집안의 돈을 훔쳐서 일본 유학을 갔다는 것이나 방탕한 사생활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2010년대 들어 여성계를 중심으로 김명순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하며, 남성 주류의 근대 문학계에서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6] 한편 같은 이유에서 비슷한 시대에 신여성으로 핍박받았던 나혜석에 대한 재평가 활동도 이루어지고 있다.[7]
김명순의 삶을 읽기 쉽게 정리한 글이다. # 항일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재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

페미니스트 시인 문정희(한국시인협회 회장)는 "김명순은 1세대 여성 문인으로 양과 질에서 단언코 누구보다 탁월했다"고 상찬했다. 문 시인은 "대화체나 서술까지 집어넣는 새로운 형태의 자유시를 발표해서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며 "특히 식민지 시대 항일 정신이 굉장히 많이 발현된 작품이 많았다. 이는 이육사한용운, 신채호보다 시기가 더 앞선 것이다.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자아 인식과 항일 정신을 보여준 선구적 작가였다"고 말했다.

<싸흠>은 이러한 성향이 강하게 드러났다고 평가받는 시이다. 시에 대한 해석은 여기에 있다. #

늙은 병사가 잇서서/ 오래 싸왔는지라/

왼몸에 상처를 밧고는 싸흠이시려서/군기를 호미와 괭이로 갈앗섯다

그러나 밧고랑은 거세고/지주는 사나우니/씨를 뿌리고 김은 매여도/추수는 업섯다

이에 늙은 병사는/답답한 회포에 졸려서/날마다 날마다 낮잠을 자드니/

하루는 총을 쏘는듯이 가위를 눌넛다

아-이상해라 머리를 빗트럿다/자나깨나 싸흠이잇슬진대/

사나죽으나 똑갓틀것이라고/사람마다 두팔에 힘을 내뽑앗다

김동인친일파가 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남았지만, '''김명순은 비록 가난에 시달렸을지언정 끝내 친일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우 대조적인 삶이라 하겠다. 이는 신사 참배를 거부한 나혜석의 경우와도 비슷하다.
공교롭게도 '''김명순을 비난한 남자들은 대부분 친일파'''이다. 성폭행 가해자인 이응준은 물론 펜을 휘둘러 2차 가해를 한 김동인, 김기진도 친일파였으며, 김명순을 탕녀라고 비난한 전영택교단에서도 친일파 인증. 친일파가 아닌 남자로는 방정환이 유일하다.[8][9]
<미실>로 유명한 소설가 김별아 씨는 김명순의 생애를 담은 소설 <탄실>을 발표했다. # 김별아 씨는 "내가 문단에 데뷔했을 당시 분위기가, 김명순이 활동했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성차별적인 현실은 요즘도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했다.

[1] 현재 동명이인 배우 김명순을 탄실 김명순으로 곡해한 것 아닌가라는 논의가 있다.[2]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책에 언급된 것과는 달리 여가수 이애리수는 애인과 동반자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애인과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고 천수를 누리다 2009년에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다만 결혼을 허락받는 조건이 가수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고, 생존사실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2008년까지 외부와의 접촉을 하지 않은 터라, 젊은 나이에 자살했다고 잘못 알려졌던 것이었다.[3] 출처: 남은혜, <김명순 문학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학위논문, 2008. 2.[4] 서자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정실 부인.[5] 사실 과거에는 첩의 자식도 정실부인이 키워 주는 일이 많았으므로, 김명순의 이복동생들이 김명순의 생모가 따로 있었음을 몰랐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6] 대표적으로 김명순 전집을 엮은 맹문재 시인이 있다.[7] 이 경우는 항일 운동 사실이 새롭게 드러난 점도 재평가에 한몫을 했다.[8] 방정환은 독립운동가이다.[9] 잡지 <별건곤>에 "김명순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고도 처녀 행세한다"는 사실과 다른 기사가 실렸는데 이 기사를 방정환이 썼다고 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방정환이 신여성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은 아니지만, 친분을 맺은 사람이 평소 김명순을 비하해 온 김기진이다 보니 그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헛지목이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