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상

 



金益相(1895년 ~ 19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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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김익상의 사진.
신상으로 등록된 사진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 조선총독부폭탄을 투척한 인물이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지만 일제 식민 통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사람은 김익상뿐이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기 때문에 김익상의 최후에 대해 많은 이견이 있다.

2. 생애


1895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나 평양으로 옮겨 숭실학교를 졸업했으며 졸업 후 개신교 계열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이후 서울로 상경해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1]의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였다가 1920년 만주봉천(奉天)으로 전근을 갔는데 이를 기회삼아 비행사가 되려고 비행 학교가 있는 광동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학교가 폐교되어 꿈을 이룰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로 간 김익상은 전차 회사의 감독관이 되어 잠시 일을 보다가 항일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기로 결정하고 김원봉이 조직한 무장 투쟁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다.
1921년 그는 단장 김원봉의 명령에 따라 국내로 잠입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일본인으로 위장해 기차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는데[2] 성공한 김익상은 사촌 동생의 집에 가서 하룻밤 묵은 후 다음 날인 9월 12일 거사를 결행한다. 9월 12일 아침 김익상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고 2발의 수류탄을 지닌채 조선총독부로 잠입했다. 조선총독부를 경비하는 일본군 헌병대는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한 김익상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전등을 고치러 온 사람으로 착각하였다. 이렇게 김익상은 유유히 조선총독부로 잠입하는데 성공했고 2층 어느 방에다 폭탄을 던졌다. 그는 조선 총독의 집무실로 판단하고 폭탄을 던졌지만 애석하게도 비서실이었고 설상가상으로 폭탄마저도 불발탄이었다. 뒤이어 그는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고 던진 폭탄은 폭발했지만 애석하게도 회계과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이 터지자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오자 그는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고 하고 유유히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 나왔다. 결국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조선총독부가 폭탄 폭발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빠져나간 김익상은 곧바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3] 곧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고 정신이 든 일제는 범인을 잡겠다고 한동안 난리를 쳤지만 끝내 잡지 못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이 김익상이라는 사실이 다음 문단의 사건으로 그가 붙잡히면서 밝혀지게 된다.
조선 총독 암살에 실패한 김익상은 1922년 일본군 전 육군대신이며 훗날 총리대신을 역임하는 다나카 기이치 육군대장이 필리핀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으로부터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번에는 3인조로 구성되었는데 김익상과 함께 오성륜(吳成崙), 양건호(梁健浩)가 거사에 투입되었으며 거사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3월 28일 다나카 기이치가 상하이에 도착하기로 했는데 배가 선착하는 황포탄(黃浦灘)에서 하선하자마자 곧바로 오성륜이 첫 저격을 맡아 다나카 기이치를 사살한다. 만일 실패할 경우 김익상이 뒤를 맡아 다나카 기이치를 사살하는데 김익상마저 실패할 경우 군중 속에 숨어 있던 양건호가 폭탄으로 다나카 기이치를 폭사시킨다는 것이 3인조 독립운동가들의 계획이었다. 그들은 계획을 세우고 1922년 3월 28일만을 기다렸는데 3월 28일 예정대로 다나카 기이치 일행은 상하이에 도착했다. 배가 황포탄에 선착하고 다나카 기이치가 내리자 첫 저격을 맡은 오성륜이 곧바로 다나카 기이치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는데 애석하게도 한 영국인 여성이 다나카 기이치한테 악수를 하러 간답시고 다가가는 바람에 맞으라는 다나카 기이치는 안 맞고 영국인 여성의 에 총이 맞아 버려서 등에 총을 맞은 영국인 여성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당황한 다나카 기이치가 우왕좌왕 허둥대며 급히 자동차에 타려 할 때 2번째 저격을 맡은 김익상이 역시 권총을 발사했으나 다나카 기이치가 쓴 모자만 맞추었다. 이에 3번째 저격을 맡은 양건호가 곧바로 군중 속을 헤치고 다나카 기이치가 탄 자동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지만 애석하게도 폭탄마저 불발이 되면서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이 때 양건호는 곧바로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던지고 군중 속으로 숨어들어 체포는 면했지만 오성륜은 도주할 때 권총을 들고 있었던 바람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김익상 역시 다나카 기이치 대신 총을 맞고 죽은 영국인 여성의 남편[4]이 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해 결국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일본 영사관에 소재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22년 9월 오성륜은 감옥 문을 부수고 탈옥하는데 성공했지만 불행하게도 김익상은 탈옥에 실패했고 결국 일본 나가사키로 이감되었다. 재판에 회부된 김익상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3심에서는 하늘이 도왔는지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고 하는데 징역 20년이 확정된 때는 1923년이었다. 김익상의 이후 행적은 불분명한데 1925년 옥 중에서 순국했다는 말도 있지만 김익상의 후기 행적에 대한 이른바 '정설'은 이렇다. 1943년 김익상은 20년 간의 옥고를 치르고 마침내 만기 출소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일본 경찰이 그를 연행해 갔고(이유도 불명이다.) 이후로는 종적이 묘연해졌는데 이로 보아 일본 경찰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그 때문에 김익상이 언제 사망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으며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김익상이 1943년 죽은 것으로 보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김익상이 언제 죽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김익상의 시신조차도 나온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하나의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 기타


황포탄 의거 때의 동지들 행적은 다음과 같다. 오성륜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의열단의 단원이었다.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장제스중국 국민당군과 힘을 합치고 일본군 등에 맞서 무장 투쟁을 했으며 동북항일연군의 군수처장 등을 역임했다. 1941년 일본에 체포된 후로는 변절하여 만주국에서 활동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버렸다.[5]
양건호는 본래 이름은 이종암(李鍾巖)이며 양건호는 독립운동을 할 당시에 썼던 가명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1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30년 가출옥 상태에서 병사하였다고 한다.

[1]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담배를 제조하는 곳이었다.[2] 이때 검문하려는 일본인 형사를 보고 맞은편에 앉아있던 일본인 모자와 대화하여 일본인인 것처럼 행세해 넘긴다.[3] 김산의 <아리랑>에 따르면 당시 의열단원들은 거사 이후 죽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그가 살아서 돌아오자 의열단에서는 그에게 본분을 다했으니 앞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본인이 계속 의열 투쟁을 하겠다고 주장했다고 한다.[4] 이름은 톰슨. 후에 이들이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불운하게 아내를 살해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일본 사법당국에 "김익상을 관대히 처리해 달라"고 진정서를 넣었다고 한다.[5] 이후 내몽골자치구굴라그에서 맞아죽었다는 주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