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지원병

 

1. 개요
2. 일본 특별지원병제의 채용 요건과 시험
2.1.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생도 채용규칙의 개정
3. 조선지원병 지원 현황
4.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성
5. 강제 모집의 이유
6. 자발적 지원자
6.1. 지원 동기
6.1.1. 궁핍한 경제사정
6.1.2. 조선인 권리증진
6.2. 지원자의 정체성
7. 학병과 조선지원병의 차이점
8. 관련 문서


1. 개요


특별지원병제는 1938년부터 1944년 징병실시까지 일본 제국조선인을 대상으로 시행했던 제도이다. 일본군 육군은 1938년부터, 일본군 해군은 1943년부터 실시했다.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 즉 학병과는 다르므로 주의할것.

2. 일본 특별지원병제의 채용 요건과 시험


채용 요건
1. 17세 이상인자
2. 소학교 졸업 이상자
채용 시험
1. 일본어(해독, 작문)
2. 국사(일본사) 필수
보면 알겠지만 일본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과 저학력자들은 기본적으로 선발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란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원 및 자격 충족자 수가 예상보다 훨씬 더 저조하자 '''이 조건은 계속해서 낮아지게 되었다.'''

2.1.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생도 채용규칙의 개정


1938년에 공포된 육군병지원자훈련소생도 채용규칙은 1940년에 개정을 하게 되는데, 이에 주목할만한 사항은, 1938년의 제1조 2항과 4항, 그리고 제출서류이다.
1938년 제1조 2항에서 신장에 대해서 160cm이상과 육군신체검사규칙의 규정에 의한 체격·등위가 갑종인 자라 하고 있지만, 1940년 제1조 2항에서는 신장에 대해서 155cm이상과 육군신체검사규칙의 규정에 의한 체격·등위가 갑종 또는 제1을종인 자로 '''범위가 확대된다.'''
또한 4항에 대해서는 “수업연한이 6년인 소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에서 “수업연한이 4년인 소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로 '''학력 커트라인이 내려간다.'''
게다가 1938년 시점에서 서류 5종류를 내야하는데, 지원자훈련소입소원, 이력서, 자산 및 소득조서, 증명서, 체력검사표를 내야하는데, 여기서 '''자산 및 소득조서와 증명서가 삭제된다.''' 여기서 증명서란 “주소지 또는 본적지의 부윤 또는 읍·면장의 증명서”인데, 지원자의 생계와 신원을 증명하는 서류이다. 근데 이것을 '''1940년에는 아예 삭제한다.'''
그러므로 1940년에는 지원병의 최소지원요건이 계속 내려간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일제가 원하는 만큼의 조선인 지원자(?)들이 많이 모집되지 않자 일제 스스로 광범위하게 '''지원 커트라인을 계속 낮추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3. 조선지원병 지원 현황


[image]
연도
채용수
응모자
배율
채용예정자(할당인원)
1938년
406명
2,946명
1: 7.7
400명
1939년
613명
12,348명
1: 20.1
600명
1940년
3,060명
84,443명
1: 27.6
3000명
1941년
3,208명
144,743명
1: 45.1
3000명
1942년[1]
4,077명
254,273명
1: 62.4
4500명
1943년
6,300명
303,394명
1: 48.2
5330명
합계(평균)
17,664명
802,047명
1: 45.4
16,830명
[2] [3]
누적 응모자 약 80만 명에 총 17,664명을 뽑았다. 외관상의 경쟁률를 보면 대략 30~50 대 1의 수준으로 상당한 수치이다. 다만 저 누적 응모자 80만 명은 '''그대로 믿기 어려운 수치'''이다. 아래 '모집과정에서의 강제성' 항목을 참고할것.

4.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성


여기에서 말하는 '지원'은 자발적인 의지에 의하여 지원병에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본천황을 비롯하여 육군성과 조선총독부에 의한 '''강제력'''이 내포된 것이었다. 지원병의 정원 결정은 '''조선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일본군에서 책정되었고, 모집 방식에서도 '''도별 할당'''에 의해 모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원병제도 연구> 48P 저자 : 표영수

우선 위에서 언급된 표를 보면 40년을 기점으로 응모자수가 폭증하는 데 이는 '''권력측으로부터의 철저한 강제가 취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 1941년의 응모자의 경우 자발적 지원자는 35% 정도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관청의 총력전과 같은 종용에 의한 것'''이었다.[4]
일본육군의 업무일지인 육군성 업무일지 적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육군성 국장회보에서의 무토 아키라 군무국장과 다나카 류키치 병무국장의 응답(1941년 4월 16일)
(군무국장)
조선의 징병제도, 및 타이완에서는 지원병 제도에 대한 요망 높음[5], 이는 정치상의 문제도 있으므로 검토하고자 함.
(병무국장)
조선의 현재 지원병 제도는 그 실질을 감안할 때 진실로 지원하는 자가 반드시 많은 것은 아니며 '''강압에 의해 부득이하게 지원하게 되는 자 많음.''' 따라서 징병제 시행은 크게 고려할 것을 요함
ㅡ '일본의 군위안부 연구' (저자: 일본의 전쟁책임 자료센터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
당시 일본군 내에서도 지원병 중 상당수가 일제 권력기관의 강제에 의해 '지원 아닌 지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몇 가지 더 있다. 일제의 조선인 지원병, 그들은 왜 일본군이 되었는가
현재 지원병 제도가 '''거의 지원동기가 불순하고 권력에 눌려서 낸 자도 있으며''' 또 지원병 대부분이 지방관청의 모집률 통계 다툼에 의한 것으로 룸펜(Lumpen)군과 같이 보이지 않을까 우려되며 명예로운 황군사상에 큰 오점을 남기니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ㅡ 당시 도쿄에서 발행하는 잡지 <동아연맹>에 기재되었다가 '조선 내의 치안 방해'라는 이유로 삭제 처분을 받은 기사
樋口雄一, 『皇軍兵士にされた朝鮮人-十五年戰爭下の總動員體制の硏究』, 社會評論社, 1991, 93쪽.
징병제 실시 이전까지 군사동원은 모두 ‘지원’의 형식이었다. 하지만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일제의 행정·경찰 기구가 적극 개입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제출한 「제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에 보면, 1941년도 육군특별지원병 총 지원자 145,046명 중 자발적으로 지원한 자는 50,184명이고, 관청의 종용에 의해 지원한 자는 79,672명, 기타 15,190명으로 나타났다.
ㅡ 「제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 『조선총독부 제국의회 설명자료』 6, 不二出版社, 1994, 104쪽.
제81회 제국의회 귀족원위원회 속기록에는 이러한 내용도 나온다.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6]가 '''“지원병제도에 경찰의 압박이나 학교 생도의 가족이 협박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하자 당시 정무총감 타나카 타케오(田中武雄)가 이렇게 대답한다.
“(전략)一部遺憾な事例もあるやうであります、併し将来は左様なことのないやうに、適正に運営して参りたいと斯様に存じて居ります、(후략)”
“(전략)一'''일부 유감스러운 사례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그러한 것이 없도록 적절히 운영하여 가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략)”
이렇게 대답한 이후, 타나카 타케오는 지원병 보도에 관해 '수십만의 지원자가 있었다.'와 같은 신문보도(新聞に何十萬志願者があったと云ふやうなことを余りに書くことは)에 대해서는 유의하고 있으며, 일시적으로 '''속기를 멈춰달라''' 요청한다. 이후 속기록에는 미즈노 렌타로의 다음과 같은 답변이 나온다.
“大変胸襟を開いての御話を色々と伺って能く分かりました”
“가슴 속의 이야기를 여러 이야기 해주셔서 잘 알았습니다.”
위 내용은 동경대학출판회의 제국의회귀족원위원회속기록 쇼와편 복제판 104권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에서 작성한 특고월보의 쇼와 16년(1941) 12월분에는 지원병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성이나 '''자발적 지원자들 중에서도 지원동기가 '불건전'한 자가 많음을 언급하는 증언들이 있다.'''
“(전략) 志願適令期になっても希望せず勧誘するも言を左右にして逃げる者が多く志願者と雖も満期後就職を有利に斡旋され或は社会的地位を得る等の野心を以て志願するので真に愛国心に燃えて居るものではない (후략)”
“(전략) 지원적령기가 되어도 희망하지 않고, 권유하는 말에도 어물쩍거리며 도망가는 자가 많고, 지원자라고 해도, 만기 후 취직을 유리하게 알선 받기 위해 또는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등 야심을 가지고 지원하기 때문에 '''진짜 애국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후략)”
제 1기지원병
“(전략) ○真面目に働いて居る者に対しては制裁を加へることか。
○朝鮮語の使用を禁じられて居るに拘はらず敢て朝鮮語を使用することか。
○教官に対して故意に欠礼するとか。
○現役二ヵ年在営を嫌ひ短期を希望するとか。
誠に面白からざるものがあった。之が原因は一躍一千名以上の多人数を収容したのに対し教官が不足せることと各道より半強制的に募集した結果であって、将来訓練上相当考研する必要があると思ふ。(후략)
“(전략)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제재를 가하는 것이라든지
○조선어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데도 상관없이 구태여 조선어를 사용하는 것이라든지
○교관에 대해서 고의로 결례를 범하는 것이라든지
○2년 동안의 현역기간을 싫어해 단기를 희망하는 것이라든지
정말로 '''바람직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이 원인은 일약 천명이상의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에 있어서 교관이 부족한 것과 '''각도로부터 반강제적으로 모집한 결과로''', 장래에 훈련상 상당히 참고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후략)
제2기훈련생
“我々は志願兵制度に応募する気持にはなれない。何となれば現在の各層を見るに悉く内鮮人間に差別待遇があり、甚しきは内地婦女子迄が鮮人を軽蔑して居る現状である。これではとても軍人となり国家の為に生命を賭すると云ふ気持には到底なり得ない。最近志願兵募集に当り各地共青年に対し半強制的に応募を從慂して居るが、之が皆逆効果を来たして居る様だ。”
“応募者の地方頒布状況を見ても都会地の青年よりも田舎の淳朴な青年が多く又中等学校卒業者が少ないのを見ても知識階級は之を喜ばない傾向にあることが窺はれる”
'''우리들은 지원병제도에 응모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 각 계층을 모두 내선인 간의 차별대우가 있고, 심하게는 내지 부녀자까지 선인을 경멸하고 있는 현상이다.''' 이것으로는 도저히 군인이 되어 국가를 위해 생명을 걸 기분이 도저히 나지 않는다. 최근 지원병 모집에 있어서 각 지방공동체 청년에 대해서 '''반강제적인 응모를 종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부 역효과를 불러오고 있는 것 같다.'''
응모자의 지방분포상황을 보더라도 '''도회지의 청년보다 시골의 순박한 청년이 많고, 또한 중등학교 졸업자가 적은 것을 봐도, 지식계급은 이것을 반기지 않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금융조합서기 모
“私が帰鮮中、村でも三十人余りの志願兵応募者の割当を受けて居るが、それ丈の人数が如何にしても出来ないしそれでは村の名誉にも拘はるから、お前は三十五歳以上で不合格になることは判つて居るが名前だけ是非貸して呉れと頼まれたので貸したが其の後街頭へ出て見ると成程募集に苦心して居る様な宣伝ビラが沢山貼られて居るのを見受けた。斯様な事は独り私だけでなく他にも幾多あつた様に聞いて居る。未だ未だ半島人は心から応募しやうとするものは少ない様だ”
내가 조선으로 돌아가는 중, 마을에서도 30명 정도 '''지원병응모자의 할당을 받고 있는데''', 그 정도의 사람 수가 어떻게 해도 안되고, 그러면 마을의 명예에도 걸리니까, 너는 35세 이상으로 불합격일 테니까, 이름만 그냥 빌려달라고 부탁받았기에 빌려줬지만 그 후에 길거리에 나가보니, 정말 모집에 고심하고 있는듯한 선전삐라가 많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많이 있었다고 들었다. 아직 '''반도인은 진심으로 응모하려 하는 자는 적은 모양이다.'''
시가현 고용인 박춘웅
“朝鮮では男兄弟二、三人あれば必ず一人は兵隊を志願しなければ非国民のように云はれるので、止むなく三十歳前の人は志願せねばならないと云ふ事である。先日も父から手紙が来て『お前は帰国すると兵隊を志願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帰つて来ないように』と云ふ意味の事を言つて来たので自分も暫く帰らない考へだ”
조선에서는 남형제가 두세 명이 있으면 '''반드시 한 명은 군대에 지원하지 않으면 비국민이라고 불리므로, 부득이하게 30살 이전의 사람은 지원해야만 한다.''' 요전번에도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와서 '''"너는 귀국하면 군대에 지원해야만 하니까 돌아오지 말라."'''고 하셔서 나도 당분간은 안 돌아가려고 생각했다.
이와테현 고물상 이사용
“(전략) 又総督府は必要数丈は容易に得られるのであるが各道に責任数を割当て居り後に之を講評するので警察は勢ひ強制的に募集する様になり茲に無理が生じ入隊しても挨拶も出来ない様なものが入り、内地人軍人から馬鹿にされ延ては帝国軍人の内容と素質を低下させる様なことにもなる。又一面知識階級者は志願を忌避すると云ふ傾向に流れて居り少し金持の所では無理しても子供に上級学校に入学させると云ふ傾向があり思想的に面白くないのであるそこで私は彼等を真に皇民化するには義務教育の徹底と徴兵令の施行を要望するのである”
(전략) 또한 총독부는 필요인원만은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각도에 책임수를 할당한 후에''' 이것을 부석하고 평가하므로, '''경찰은 당연히 강제적으로 모집하게 되어''' 여기서 무리가 생겨, 입대하여도 인사도 못하는 자가 들어가, 내지인군인으로부터 바보처럼 돼서는 제국군인의 내용과 소질이 저하되게 된다. 또한 한편은 '''지식계급자는 지원을 기피하는 경향이 이어지고 있고,''' 조금이라도 돈이 있는 곳에서는 무리해서라도 아이들을 상급학교에 입학시키는 경향이 있고, 사상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서 나는 그들을 진짜 황국화시키기 위해서는 의무교육의 철저와 징병령의 실행을 요망하는 바이다.
조선인장교 모
“志願兵制度が実施されてから毎年三千名宛募集して居るが其の結果は余り良好とは申されない。その原因は志願する者が余りに好条件を予想して入って来るからだと思ふ”
지원병제도가 실행된 후부터 매년 3천 명을 모집하고 있지만, 그 결과는 별로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원인은 지원하는 자가 너무나 호조건을 예상하고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지인장교 모
“新聞等では志願兵が殺到して居る様に書いて居るが実際は警察や其他で強制的に応募して居る実情で内地人が見て居る程に信頼することは出来ない。彼等は機会あらば独立運動をしやうとする不逞者が居ると思はねばならない”
신문 등에서는 지원병이 쇄도하고 있다고 쓰고 있지만, 실제는 '''경찰이나 그 외로 인해 강제적으로 응모하고 있는 실정'''으로 '''내지인이 보고 있는 것과 같이는 신뢰할 수 없다. 그들은 기회가 있으면 독립운동을 하려하는 불령자가 있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내지인 국민학교교원 모
[特高月報] (1941년 12월호), <四, 志願兵制度に對する朝鮮人の動向>
이처럼 지원병제도가 할당량 채우기 식으로 강제적으로 진행된 결과 지원자원들은 대부분 형편 없었으며, 그에 대해 일본 내무성에서는 다음과 같은 혹독한 평가를 내려야만했다.
1. 응모자는 진심으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 '''경찰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지원하였다.'''
2. 응모자 중 유식자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대다수가 농촌청년이다.
3. 응모자는 좋은 조건에 유혹당하고 제대후 자기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려는 사람들이다.
[特高月報] (1941년 12월호), <四, 志願兵制度に對する朝鮮人の動向>
이상의 증언들과 기록들을 통해 결국 지원병으로서도, 조선인으로서도, 내지인(일본인)으로서도 '''지원병 수가 굉장히 많이 과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5. 강제 모집의 이유


일제가 조선에서 강제로 지원병을 모집했던 이유는 일부 일본인들이 이야기하듯이 조선인 지원병 수 자체가 조선인의 애국심(일본에 대한)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자 수를 늘리기 위해 '''여러 회유책과 선전, 광고 심지어 '강요'했다.'''[7] 그런 이유 때문에 일제는 일본군 특별지원병에 지원하면 제대후 공무원의 특채까지도 미끼로 사용하면서까지 '''지원병의 수 부풀리기'''에 나선 것이었다. (지원병에 대한 지원은 해당 경찰서에서 지원을 받는 방식이었음)
결국 위의 증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 지원병제도는 '''지원을 억지로 강요당한 조선인들의 입장'''에서나 '''불령선인(不逞鮮人)까지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나 '''둘 다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총독부와 일제 또한 이런 불만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사기고양을 위한 선전 선동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런 제도를 계속 운영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지원자격 즉, 커트라인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리면서까지 조선인 지원병제도를 억지로라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은 1944년 징병제로 완전히 전환되기까지 지속된다.

6. 자발적 지원자


모집 과정에서 일선 관청과 경찰에 의한 할당량 및 실적 채우기성 강요로 지원율이 굉장히 과장된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자발적 지원자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에 의하면 전체 41년도 총 지원자 중 35%인 약 5만 명은 자발적 지원자였다. 또한 최종적으로 선발된 약 1만 7천여 명은 일본군이 철저하게 검사하여 선발한 인원이기에 자발적 지원자도 분명 존재했다.

6.1. 지원 동기



6.1.1. 궁핍한 경제사정


吾々は志願者をその環境ないし素質の面から眺めて見て、そこに幾許の寂寥を感ざざるを得なかったのである。即ちこれ(引用者註:志願者)を職業別に見ると、その八、九割以上は小作農民であり、その他は若干の事務員、官公吏員を除いては、給仕小使傭人であり、学歴より見るも中等学校卒業者または中途退学者は実に微々寥々たる実状であり、名門出の子弟有力者、資産家、知識階級の子弟は更に稀なる情況であり、ここにも半島の伝統的兵役に対する観念の反映を見たのである。
우리는 지원자를 환경 내지 소질의 측면에서 바라보았고, 그 자리에 약간의 쓸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이(인용자 주:지원자)를 '''직업별로 보면 그 80%, 90% 이상은 소작 농민이었고,''' 나머지는 약간의 사무원, 공무원을 제외하고는 급사 사환 고용인이며, 학력으로 보아도 중등 학교 졸업자 또는 중도 퇴학자는 참으로 미미한 실정이며, 명문가 자제 유력자, 자산가, 지식 계급의 자제는 더욱 드문 정황으로, 여기에도 반도의 전통적인 병역에 대한 관념의 반영을 본 것이다.
-朝鮮総督府 陸軍兵志願者訓練所 『志願兵を訓へて』  雑誌『朝鮮』1940年4月号、p60
入所者を職業別に見ると…(中略)…大部分は農業者にして残余が官庁の給仕小使その他傭人等によって占められ、将来半島の青年層に働きかけ得る実力を有する地位の者が未だ非常に少ないのである。この情況は入営の学歴にも現れて、中等学校卒業者等はその数ごく僅少にて、未だ半島が真に兵役の崇高なる所以を理解するの域に達せず….
입소자를 직업별로 보면...(중략)...'''대부분은 농업자로 하고''' 나머지가 관청의 급사, 기타 용인에 의해 채워지며, 장차 반도의 청년층을 고무할 있는 '''실력을 가진 지위에 있는 자가 아직 매우 적은 것이다.''' 이 정황은 입영자의 학력에도 나타나, '''중등학교 졸업자등은 그 수가 극히 적으며''', 아직도 반도가 진정으로 병역의 숭고한 사유를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여....
-海田要・陸軍兵志願者訓練所教授 『志願兵制度の現状と将来の展望』 『今日の朝鮮問題講座』第3巻収録 1940年、P5-16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군에 지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최대원인은 '''조선 농민들이 처한 극한 궁핍이었다.''' 빈곤으로 소학교 이상으로 학업을 이어나갈 수 없지만,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소작농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던데 조선인 청년들의 가장 흔한 지원 이유였다.(미야다 세즈코, 조선민중과 황민화정책)
어떻게든 군복무를 마치고 상등병으로 제대만 해도(물론 상등병 제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각종 사회적 지위상승과 경제적 혜택이 있었고 설령 전사한다 해도 영웅시하고 유가족에 대해 적극적인 우대책이 있다고 선전되었으니 빈농출신 저학력자들이 유일한 출세길을 잡아보고자 눈에 불을 켠 것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지원병 지원 이유에 대해
1) 지원자 수 할당 등 강제적 조치
2) 지원자 및 그 가족에 대한 우대조치 (병역을 마친 이는 경찰, 소방 등에 채용, 가족에게 자금 융통 등)
3) 어려운 경제사정에 따라 군대에서 호구책 마련
등을 원인으로 설명한다. 이 중 2번과 3번은 경제적 요인으로 볼 수 있다.

6.1.2. 조선인 권리증진


조선의 지식인들 중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조선인의 대우를 향상시키는 일이라 믿었던 사람들 역시 지원을 독려했다. 다음 우수용의 회고록을 참고하자.[충성과반역]
그런데 그 무렵부터 저희들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바로 대놓고 '조센진(朝鮮人)' 하고 민족을 비하(卑下)하여 부르던 그들이 그 말을 쓰는 것을 스스로 금기시하게 되고, 대신 지역을 말하는 '한토진(半島人)'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너희들에게도 곧 참정권이 주어져서 우리들과 같은 권리행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인 친구가 늘어났습니다. '''저는 저희들에게 주어진 병역 의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죽는 대가로 뒤에 남은 동족들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리라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징집 영장이 바로 오지 않고 본적지 면사무소에 와서 영장을 받아 입대하라는 면장으로부터의 전보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난생처음 보는 고향 면을 찾아가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송행사에 다른 입대 장정들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많은 고향 어른들이 저희들의 장도를 격려해주셨고, 고향 후배인 학생들이 손에 손에 깃발을 들고 흔들면서 환송을 해주었습니다. 저희들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당당하게 입대하였습니다. '''기왕에 죽을 바엔 일본인 병사들보다 더 용감하게 죽어서 조선 젊은이의 기개를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었을지는 몰라도 사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상이 반민족행위자인 저의 변명의 전부입니다.
- 우수용 선생 회고 중 일부 발췌 출처

6.2. 지원자의 정체성


小学校卒業者で、まして陸軍兵を志願する者が、日本の国柄の万国に優れた点を問われて行き詰ったり、教育勅語中一番大切な箇所を問われて的外れな答をしたり、皇国臣民の誓詞が言えなかったりしては、むしろその不用意さに驚くの外はない。
 右の国家観念に関する問に対し、答えられる者も相当あるが、しかし中には棒暗記的あるいは一夜造りの準備的とって置きの答をする者がある。
소학교 졸업자인데다 하물며 육군 병에 지원하는 자가 일본의 국체가 만국(다른 여러 국가)보다 뛰어난 점을 묻자 답을 하지 못하거나, '''교육칙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묻자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황국신민의 서사를 말하지 못하거나 해서는, 오히려 그 부주의함에 놀라울 수밖에 없다.'''
 오른쪽[8]의 국가관념에 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자도 꽤 있지만, 그러나 '''그 중에는 기계적으로 암기했거나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낸 모범 답안을 말하는 자가 있다.'''
陸軍兵志願者訓練所 塩原所長談話  雑誌『朝鮮』1939年1月号、p60
육군특별지원병에 지원한 사람들 대부분은 보통학교만 졸업한 사람들로, 80~90% 이상이 소작농이었다. 일제의 교육을 받은 중등학교 이상 졸업한 사람들이나 소작농이 아닌자들 즉, 당시 지식계급들은 오히려 일본군에 지원하는 것을 기피하였다. 지원하는 자들도 '애국심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위해 야심을 갖고 지원한다', '호조건을 예상하고 들어온다' 등의 기록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를 볼 때 지원자들은 일본에 대한 애국심이나 일본인 정체성보다는 입대에 따른 경제적 대가나 명예를 보고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7. 학병과 조선지원병의 차이점


지원병의 경우 장교가 아닌 을 받았고 이들 중에는 종전 당시에 부사관까지 진급하거나 장교화 과정을 거쳐 장교가 된 인물들도 있었다. 건군기군사영어학교에서 강제징병으로 오느라 응집력이 약했던 학병 출신들과 달리 지원병 출신들은 서로 동질감이 강해서 뭉쳤다. 만주군 군맥(軍脈)과 비슷한 경우였다.
학병들의 경우 해방 이후 고등교육을 받았고, 억지로 끌려갔다는 명분이 있는 학병파는 모임도 갖고, 책도 써냈다. 하지만 지원병들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해 회고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지원했다는 부끄러움에 숨기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는 1944년부터 징병제를 적용했는데 그 전인 1943년에 전문학교 등 고학력자들을 대상으로 학병을 뽑았다.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 유학생을 강제로 뽑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학병은 강제입대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는데 육군 장교는 사회적 신분이 올라간다 자원으로 뽑아갔고 주로 훈련 중에 낙마한 이는 강제로 육군 으로 복무시켰다.
이처럼 '''모집과정''' 때문에 '''입대에 대한 회피와 저항'''이 있었다.
학도지원병의 경우에도 함경북도 청진 검사정의 보고에 의하면 '''지원자 256명는 초급 장교 지원자격이 생김
ㅡ 高等法院檢事局, 「臨時陸軍特別支援兵の動向一斑」, 『朝鮮檢察要報』 1, 1944. 3, 2쪽.
구체적인 저항도 있었는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하준식(河俊植)이 학병 지원을 거부, 덕유산 은신골로 피신해 징용·징병 기피자 73명을 규합, 광명당(光明黨)을 조직해 '''후방 교란 게릴라전을 기도'''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저항적인 거부운동은 전국 주요 산악지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지리산·운문산·포천군 산악지대, 금강산 등은 이런 학병 거부자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학병에 강제지원하기 싫다고 에 들어간 사람들 얘기가 바로 여기서 유례한 것이다.
학도지원병은 말로만 지원병이었다. 이 (학도)'지원'병은 '''부모,형제,처자에 대한 위협과 공갈에 기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경북 의성 출신 오탁근은 명치대학 재학 중이었는데, 대학 교련교관, 의성경찰, 헌병 등이 총동원되어 '''가족을 위협하고 협박했다.''' 조선-일본간의 연락선은 물론 철도의 승차권 역시 엄격하게 제한되어 학병 '지원' 여부를 검사했다. '''가족들의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학병들은 학병거부 및 도피를 택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215p)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가기 싫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학병 해당자들은 여러 형태로 저항을 했다. 예를 들어 1943년 11월 이후 '''관공서를 습격, 파괴한 후 형사처벌을 받아 학병을 면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함남 북청 출신 이광림 등 '''학병 60명이 파출소를 습격'''하였고, 서재균 등은 '''재동파출소를 습격'''했으나 '''학도지원자라는 이유로 문책받지 않았다.''' 또한 서울에서는 경성제국대학의 이혁기, 보성전문의 이철승 등이 주동이 되어 학병 거부를 주도하며, 소기국소 총독과 학병문제로 담판을 지은 바 있다. (216p)
ㅡ 정병준 교수 저 '광복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이들은 귀환하게 되는데 규모는 약 6천 명 수준이었다.
학병은 전문, 대학재학 이상의 고학력자들 위주였고 지원병은 기껏해야 소학교 졸업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자녀에게 그런 고등교육을 시킬수 있는 집안이 과연 가난한 집이었을까? 학병들은 다는 아니지만 대체로 먹고 살만한 집안이었고, 반대로 지원병은 80~90%가 소작농 자제로 그들의 선대들은 지주가 다수인 학병의 선대들에게 착취당하던 사람들이었다.[9]

8. 관련 문서



[1] 유일하게 할당인원을 채우지 못한 해이다.[2] 朝鮮及台湾ノ現状/1 朝鮮及台湾ノ現況 1 REFCODE B020312847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1284700[3] 참고로 일본 육군의 조선지원병 통계이다. 해군은 통계자료가 명확치 않다.[4] (표영수,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원병제도 연구).[5] 대만에서는 1942년이 되어서야 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된다. 한족이 대다수인 대만인중일전쟁에 투입되면 배반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6] 조선총독부 제 2대 정무총감이었고, 문부대신과 내무대신을 역임했다.[7] <志願兵制度に對する朝鮮人の動向> ('特島月報' 1941年 11月號) ; '第81回 帝國 議會 貴族院予算委員會 第3分科會議速 記錄' 第2號 (1943年 2月 26日字)[충성과반역] 정안기 [8]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는 세로쓰기이므로 앞부분 서술이 오른쪽에 있다.[9] 김윤식,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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