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수(탁구)
1. 소개
일본식 펜홀더 전형으로 파워풀한 포핸드 드라이브와 완강한 백핸드 방어에서 이어지는 역습으로 이름을 날린 1990년대를 대표하던 탁구 선수였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단식 동메달리스트로 세계 랭킹 10위권 안에 10년 여 간 들어가 있던 한국 탁구의 레전드 중 한 명이다.
2. 플레이 스타일
빠른 풋워크와 강력한 포핸드 드라이브, 스매시 등 일본식 펜홀더로서의 강점 뿐만 아니라, 전형상 고질적 약점인 백핸드마저 상당히 안정적인 백핸드 드라이브와 빠른 쇼트로 커버했을 정도로 많은 강점을 보유했던 선수였다. 오히려 안정감 면에서는 유승민보다 한 수 위였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유승민 선수라고 백핸드 방어와 역습이 없지 않았고, 그 역시 미라클 워커라고 불릴 만큼 인상적인 풋워크를 보였으나, 관객이 느끼는 전체적인 안정성은 김택수가 위였다. 중국의 위키에서도 김택수의 기술의 완성도를 칭찬하며 그가 천하제일펜홀더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갖고 있다고 평했고, 유승민 선수의 문서에선 '그의 보법(풋워크)은 김택수와 비할 바는 아니나' 라는 언급이 있다. 유승민처럼 올림픽 단식 금메달 같은 킬러 타이틀은 보유하지 못했으나[2] 10년을 롱런하며 최정상급에서 꾸준히 인상적인 활약을 보인 그에 대한 시선이 우호적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3. 선수 경력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1988 서울 올림픽에 이어 한국의 단식 금메달을 기대했으나, 당시 세계를 씹어먹던 탁구계의 영원한 전설 스웨덴의 얀오베 발드네르 선수에게 패해 아쉽게도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이 때 발트너 선수는 금메달을 따기까지 단 한 세트만 패배하는 괴력을 보였다.[3] 따라서 유남규 선수나 유승민 선수처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아니나, 한국 탁구계의 역대 최강자 중 한명으로 불리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4]
올림픽 우승도 한 류궈량 감독의 선수 시절에 자주 맞붙었으며, 로빙 방어에서 역습으로 드라이브를 꽂아넣는 영상이 유명하다.
특히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단식 결승전에서 류궈량과 벌인 '32구 랠리'는 전설로 남아있다.[5]
이후 중국식 펜홀더의 양면 타법이 점점 완성되고 마린 등의 사기급 선수들이 등장하면서 서서히 밀리게 된 후 2004년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코칭을 한 유승민 선수는 천적인 왕하오를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이후에도 세계구급에선 사실상 사장된 일본식 펜홀더 전형의 마지막 주자가 되었다. 유승민 선수 이후 일본식 펜홀더는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던 이정우 선수가 괜찮은 활약을 보였으나 아쉽게도 현재는 세계 무대에서 보기가 어려워졌다.
4. 은퇴 이후
현재는 미래에셋대우의 감독으로서,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마룽, 장지커 등 현 세계 최강 랭킹 선수들을 상대로 인상적인 경기로 분전한 정영식선수를 길러낸 장본인이다. 우리동네예체능 등 TV에 출연하여 현정화 감독, 탁구 꿈나무 신유빈 선수 등과 이벤트 경기를 하는 등 대중 노출도 많은 체육계 스타 중 한 명이다. 탁구장 오픈 기념식에 등장해 아마 동호인들에게 탁구 노하우를 알려주기도 했다.
5. 수상 기록
[1] 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산군 본량면 양산리 양곡마을이었다.[2] 이는 김택수의 컨디션 문제이기도 한데, 김택수는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항상 무릎, 담석등의 고통에 시달렸고 체력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 되었기 때문에 정상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만 김택수는 1992년~1996년에 있었던 올스타 서킷대회에서 진가를 발휘했는데, 이는 올스타 서킷이 최대 3경기만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택수는 전체 대회에서 1/4을 우승으로 장식하였다.[3] 이 당시 발트너는 중국의 1,2인자 마웬거, 왕타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탁구황제였다. 참고로 김택수는 발트너와의 경기를 하루 앞두고 극심한 정도의 담에 시달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4] 전술한 올스타 서킷에서 중국의 1, 2인자 마웬거, 왕타오, 류궈량, 공링후이를 개밟듯이 밟아줬고, 발트너, 페르손, 가티엥, 세이브 등 당시 유럽 최강의 선수들도 올스타 서킷에서는 김택수에게 대부분 패한 바 있다.[5] 사실상 김택수 최대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4강전에서는 당시 세계 3위 공링후이를 꺾고 결승에서 당시 세계랭킹 2위였던 류궈량을 꺾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