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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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국적의 前 남자 탁구선수이며, 현역 시절에는 삼성생명 탁구단 소속이었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일찍 피워 부천 내동중학교 시절에 이미 국가대표에 뽑혔을 정도의 탁구 신동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실업팀들 간의 스카우트 경쟁의 대상이 되어 삼성생명의 후원을 받았을 정도다.[1] 삼성생명 탁구 코치직을 맡았으나, 현재는 그만두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IOC선수위원에 당선되었다. 임기는 8년으로 2024년까지. 한 때, 우리나라에서 활동 가능한 유일한 IOC위원이었다가[2] 지금은 이기홍 대한체육회 회장이 IOC위원에 선출되어 해소되었다.
2. 선수 경력
2.1. 1999년
주니어 아시아선수권에서 완성형 이면타법을 구사하는 기대주 왕하오를 앞세운 중국을 말 그대로 압도하며 화려한 등장을 알렸다.
2.2. 2000년
만 18세의 나이에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면서 기존 탁구 최연소였던 유남규(만 20세)의 기록을 경신했으나, 이후 이중 등록 문제로 홍역을 앓기도 했다.
2.3. 2002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선 복식에서 이철승과 금메달을 따긴 했지만 단식에선 4강에도 채 오르지 못하고 한국은 오상은이 동메달을 건진 것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에 기대만큼 못 컸다는 이야기도 2000년대 초반 당시에는 나왔었다.[3]
2.4. 2004년
그렇게 여전히 중국의 벽을 실감하며 세계랭킹 5위권을 맴돌다 이집트 오픈 등에서 우승하며 세계랭킹 3위까지 차지했다.[4] 2004년 8월 아테네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결승에서 당시 세계랭킹 4위었던 중국의 왕하오를 세트 스코어 4-2로 꺾어, 1988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유남규, 양영자, 현정화 이후로 16년 만에 금메달을 차지했다.[5] 이 우승으로 세계랭킹도 2위로 올라섰고, 이후로 한국 남자선수 중 유승민 랭킹에 근접한 선수는 없다. 비슷한 세대인 오상은과 주세혁[6] 이 최고랭킹 5위 정도의 수준이였다. 이후 중국 탁구가 2008, 2012, 2016 올림픽에서 메달을 싹쓸이하는[7] 넘사벽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2004년의 이 금메달은 한국 탁구가 보여준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사족으로 1999 아시아주니어선수권 이후 유승민과 왕하오의 당시 통산전적은 시니어 기준으로 0승 6패인 절대적인 열세였고, 결국 은퇴 전까지 최종전적은 2승 18패로 절대적인 열세였다. 그 '''2승 중 1승이 결정적인 올림픽 결승에서 나왔다.''' 그야말로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내려준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나게 하는 셈. 결승전 당시 유승민의 컨디션이 좋았던 것도 한 몫했다. 왕하오는 이후 은퇴하기 전까지 올림픽 단식에서 '''3연속 은메달'''이라는 안타까운 결과를 받아들이며 현재는 은퇴했다.[8]
2.5. 2008년
2008 베이징 올림픽에도 출전하였으나 단체전에서는 동메달에 머물렀고, 단식에서는 1회전(32강전)에서 홍콩의 고라이착에게 세트 스코어 2-4로 패배하여 2연속 금메달 획득에는 실패하였다.
2.6. 2012년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오상은, 주세혁과 함께 단체전에 나가며 결승에 올랐으나 중국에 0-3으로 패하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년 6월에 현역 은퇴를 선언한 뒤, 7월부터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프로 선수들 치고도 직접 득점률이 높은 편인 강렬한 서브와 일본식 펜홀더를 사용하는 드라이브 공격전형을 구사했었다. 최전성기의 유승민을 보면, 빠른 풋웍으로 포어 사이드와 백사이드를 빠르게 이동하며, 강력한 포핸드 드라이브를 구사하였다. 유승민 선수의 명장면 모음집들에 다음을 완전히 버린, 온몸을 날리는 한 방 드라이브가 많은 이유. 그렇게까지 큰 이점은 아니었지만 전형 특징상 수비선수 상대로는 매우 상성이 좋은 편이었다. 또한 탁구선수로서는 매우 귀중한 신체적 재능이라 할 수 있는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이점. 하지만, 스피드 글루[9] 사용 금지조치로 인한 한 방 드라이브의 파워가 약화되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특유의 풋웍을 잃게 되면서 점차 하향세를 걸었다.
펜홀더의 이점인 강렬한 서브와 김택수 선수의 트레이드 마크인 파워 드라이브를 계승, 한 방 파워는 더욱 강해진 반면 또하나의 트레이드 마크인 완강한 방어는 마이너 판이라는 말도 있으나 세계 탁구의 백핸드를 비롯한 기술의 빠른 발전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 올림픽 이후로도 꾸준히 일정 이상의 성적을 냈으며 뚜렷한 약점을 공략당하면서도[10] 빠른 풋웍과 돌아서기, 끈질긴 쇼트 방어, 불편한 자세임에도 때로는 백핸드 드라이브로 역습을 하는 등 저력을 보여 주었다. 이런 스타일의 희소성으로 인한 어드밴티지도 없진 않았겠지만 포핸드 파괴력의 이점에 비해 백핸드 약점의 페널티로 인한 한계가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롱런하며 많은 활약을 했다. 하지만 전형의 한계와 신체적 부상 속에서 넘사벽 중국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상 일본식 펜홀더로 성적을 낸 마지막 선수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11] 프로급에선 이미 사용자조차 많지 않은 일본식 펜홀더로 2004년 시점에서 올림픽 우승을 하였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고, 어쩌면 그가 마지막 일펜 금메달리스트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승민 선수가 보여줬던 바람 같은 풋워크와 이어지는 불꽃 같은 포핸드 드라이브는 세계의 많은 탁구 애호가들에게는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4. 은퇴 이후
현재는 선수 생활을 마치고 삼성생명 코치직을 역임하고 있다.
차기 IOC 선수위원이 되기를 희망하여 2015년 하반기부터 장미란, 진종오와 한국 대표가 되기 위한 국내 경합을 벌였다. 일반적인 예상으로는 다른 두 후보가 인지도나 성적 면에서 압도적인 면모가 있어 유승민이 한국 대표가 되기엔 조금 어렵지 않나 싶었는데, 영어 시험에서 두드러지는 성과를 내며 두 후보를 물리치고 결국 한국 대표가 되었다.
IOC선수위원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투표로 이루어지며, 총 23명의 후보 중 상위 4명만이 당선된다. 이후 폐막식 날 열리는 IOC 총회에서 과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올림픽 시작 10일 전부터 브라질에 넘어가 '''세계 선수들에게 열심히''' 선거 유세를 펼친 끝에 2016년 8월 19일(리우 현지 시각 18일), 선수위원에 당선되었다. 선수 투표 순위는 2위를 기록했다. 용감한 기자들 178회에 따르면 출마 당시 인지도가 너무 없어서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선거운동 규정도 매우 까다로워서 발품을 팔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수촌 내를 걸어다니면서 만나는 모든 선수에게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며 홍보책자를 보여주고 자신과 정책을 소개했다고 한다. 선거유세 첫날 선수촌 내에서 약 25km를 걷고 선거 유세 기간에 매일 5시 반에 일어나서 15시간 동안 발품팔기를 했다고 한다.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해가며 25일간열심히 활동한 결과 미국 체조대표팀이 먼저 와서 인사를 하고 일본의 탁구선수 후쿠하라 아이(福原 愛)는 자신이 챙겨온 주먹밥과 간식을 챙겨주며 고생했다고 응원을 하고 한 아프리카 선수는 "하루도 쉬지 않고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네 모습에 감동받아 너를 투표했다"라고 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12]
2000년부터 스포츠외교에 관심을 가져왔다. IOC 선수위원은 16년간 준비한 결과라는 얘기다. 또한 2016년 대한체육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2016년 11월에 일어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박태환에게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출전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 당시 문화부차관 김종의 녹취록에서 유승민에 대해 "흠이 있어서 IOC 선수위원이 될지 모르겠다"며 비난했다는 것이 알려졌고, 유승민은 인터뷰에서 "김종의 발언은 황당하고 불쾌하며, 스포츠계의 폐단이 사라지고 선수의 인권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2018년 1월 17일, 2018년 2월 9일에 열리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선수촌장이 되었다.
올림픽 이후, 2018년 4월 스웨덴의 할름스타트에서 열린 세계 팀선수권에 한국팀 단장 자격으로 참석했는데, 마침 8강전에 남북한이 만나게 되었고[13] , 이에 ITTF 회장과 북한탁구협회장과 이런 저런 얘기로 출발하다가 일이 커지며 본격적으로 협의하고, 남북 선수 및 8강에 진출한 모든 타국 팀들의 동의를 받고, 본국과도 협의를 거쳐서 현장에서 8강전을 치르는 대신 '''남북단일팀'''을 구성해서 4강전에 자동진출하기로 전격 합의하였다.(거기에 때마침 맞은 편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4강전이 또 한일전이 되었다.) 즉, 유승민은 스포츠 외교가로서의 역량을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14] 2019년 5월 31일에 조양호 전 회장의 별세로 공석이 된 대한탁구협회장 보궐 선거에 출마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임기는 2020년 12월까지다. 이후 회장 선거에 단독 출마해 당선되어 2024년 12월까지 대한탁구협회를 이끌게 됐다.
5. 수상 기록
[1] 이후 몇년이 흘러 유승민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될 때 상황이 바뀌어버려 신생팀 참가 규정에 의해 제주 삼다수가 유승민의 지명권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유승민은 이를 거부하고 삼성생명 팀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중등록 파문으로 법정 공방까지 벌인 바 있다.[2] 이건희 삼성 회장은 최근 IOC 위원직을 사퇴하였고, IOC 선수위원이었던 문대성은 불명예 퇴직과 다름없는 처지로 위원 생활을 마감했다.[3] 그도 그럴 것이, 워낙 어린 나이부터 동나이는 적수가 없는 수준에 중학생일 때 이미 국가대표에 뽑혔을 정도였다. 물론 탁구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 절대 강세를 보이는 종목이지만, 이미 유남규와 김택수가 중국을 넘어 올림픽 및 아시안 게임 등에서 금메달을 따온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유승민에 대한 기대는 그 수준을 넘어 세계선수권 등을 쓸어버리는 당대 톱급이었다는게 문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남자 단식에는 김택수와 오상은이 출전해서 유승민은 후보였다.[4] 이 세계랭킹 3위는 김택수가 1991년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따고 오른 걸 제외하면 한국선수중 찍어본 적이 없는 랭킹이다.[5] 21세기 올림픽 '''유일무이한 비중국인 탁구 금메달'''이다.[6] 비슷한 세대하곤 하지만 둘 다 유승민 보다 나이가 많다.[7]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남녀 개인 단식에서 금은동을 중국이 모두 석권하고, 남녀 모두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2012, 2016 올림픽에서도 남녀 개인단식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석권한데다 단체전까지 남녀 모두 금메달을 땄다. 2012년부터 단식 선수로는 2명까지만 출전하게끔 룰이 바뀐 것을 고려하면 그냥 중국이 다 해먹는다고 보면 된다.[8] 여담으로 왕하오는 결승마다 다른 전형의 상대를 만났다. 2004년의 유승민은 일펜, 2008년의 마린은 자신과 같은 중펜, 2012년의 장지커는 셰이크핸드였다. [9] 벤젠, 솔벤트 등이 함유된 러버 접착제. 러버 내부에 장력을 주어, 스피드와 스핀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지만 유해성으로 인해 ITTF에서 금지[10] 백핸드를 드라이브로 선제공격을 당하면 쇼트로 방어하든지 기회를 봐서 백핸드 쪽으로 돌아서서 포핸드 대결을 해야 하는데, 프로 급에서 여유있게 돌아설 수 있게 만만한 공을 주는 것도 아니고 어렵사리 돌아서더라도 이번엔 포핸드 쪽이 뻥 뚫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백핸드 드라이브를 연속으로 당하면서도 쇼트로 계속 밀어주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고, 그 안습한 모습에 '펜홀더 쇼트 전형' 이니 '펜홀더 레슨 전형' 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11] 현재 일본식 펜홀더는 백핸드 수비등의 이유로 전 세계적으로 사장되고 있으며, 사실상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었던 한국마저 셰이크핸드로 전환되는 추세. 그나마 일본의 Yoshida Kaii 선수가 단면 펜홀더(중국계 귀화선수로 엄밀히 말하면 이면에 러버를 붙이지 않은 중국식 펜홀드를 사용한다)로서 아직까지 활동 중이다. 이정우가 왼손 일펜으로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는 등 최근까지 활동했으나 현재는 세계 무대에선 볼 수 없다.[12] 다만 이는 그가 처음 한 것은 아니고 이미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문대성이 똑같이 인지도 바닥일 때 했던 방법을 따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따라했다고 폄하할 수만은 없는 것이, 문대성이야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매일같이 흰색 태권도복을 차려입고 나서서 선거 운동을 했었으므로 선수들 눈에 확띄는 무기라도 있었지만, 유승민은 그는 그렇지 못했다는 데서 발품을 팔기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13] 예선전에서 북한이 불의의 1패를 당하면서 조2위로 밀려 한국과 만나는 행운이 따랐다.[14] 다만 아무리 당시 팀들 간의 즉흥적 합의가 있었다고 할지언정 행사 전 협의 없이 경기 도중 어떤 두 팀이 만나서 시합을 치르지 않고 팀을 합쳐 둘다 차기 라운드로 진출하는 경우는 없었고, 추후 단일팀이 상대하는 팀들 간의 선수 숫자의 불균형 뿐만 아니라 선수들 개인에게 돌아가는 기회 자체가 줄어드는 부작용도 있었으며 유튜브 등을 통해 비춰지는 세계인들의 반응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신랄한 비판들 중에 '대만이 홍콩을 준결승에서 만나 서로 합쳐 결승 진출하고 결승에서 중국과 만나면 또 합쳐서 3개국 공동 우승을 해도 되는거냐'라는 댓글도 있었다. 그 중 일본인들의 반응이 특히 안 좋았는데 심지어 단일팀이 하필 일본에게 3대0으로 발려버리는 바람에 일본에게는 두고두고 씹을 거리를 제공한 결과가 돼 버렸다. 이후 2018 코리아 오픈에서는 한국 장우진 - 북한 차효심 혼합복식 조가 결승에서 중국을 꺾고 우승하는 등 결과적으로도 진일보한 성과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