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르노카라바흐

 


소련 치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영역
1994년~2020년 아르메니아 치하 아르차흐 공화국의 영역[1]
2020년 전쟁이후 바뀐 현재의 영역[2]
1. 개요
2. 명칭
3. 역사
3.1. 고대
3.2. 중세·근세
3.3. 근대·현대
3.3.1. 러시아 제국 치하
3.3.2. 러시아 혁명 및 적백내전기
3.3.3. 소련 치하
3.3.4. 소련 해체 및 독립 이후
4. 참고문헌


1. 개요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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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어 / 아제르바이잔어
Լեռնային Ղարաբաղ[9] / Dağlıq Qarabağ[10]
레르나인 가라바그 / 다글르그 가라바그
페르시아어
ناگورنو قره‌باغ (Nāgorno Qarehbāgh)
나고르노 가레바그
러시아어
Наго́рный Караба́х (Nagórnyj Karabáx)
나고르니이 카라바흐
영어
Nagorno-Karabakh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이란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소캅카스 산맥의 산악지역이다.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Ստեփանակերտ) / 한캔디(Xankəndi)이다. 이 지역에 수립된 미승인국아르차흐 공화국과는 영토 범위에서 차이가 있다. 소련 치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면적은 4,388 km², 아르차흐 공화국의 면적은 11,458 km²였으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종전 이후에 3,170 km²로 축소됐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2. 명칭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명칭은 러시아어 표현인 '나고르노카라바흐(Нагорно-Карабах)'에서 유래한 것이다. '나고르노'는 '산악'을 나타내는 형용사 '나고르니이(Нагорный)'에 삽간사(Интерфикс)인 -o-가 붙은 형태이다. '카라바흐'는 튀르크어로 '검다'라는 의미의 '*kara(아제르바이잔어로는 qara)'와 페르시아어로 '정원'을 의미하는 'باغ‎(아제르바이잔어로는 bağ)'가 합쳐진 조어이다. 관련 서적. 어원에 관련된 글.
엄밀히 말해 카라바흐라는 용어는 나고르노카라바흐뿐만이 아니라 아르메니아 남부의 잔게주르(Զանգեզուր) 산맥에서 아제르바이잔 중앙을 관통하는 쿠라 강까지의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아르메니아 남부 슈니크 주와 아제르바이잔 서남부 전체를 포괄하는 지역이다. 카라바흐의 경우 서쪽은 산악 지대, 동쪽은 평지대로 구성되며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카라바흐 서쪽 산악지대 중에서도 동쪽 평지대와 맞닿아 있는 끝자락에 해당된다.
또 다른 명칭인 '아르차흐(Արցախ)'는 아르메니아어에서 유래하며 이는 동시에 대아르메니아 왕국을 구성하던 15개의 아슈하르(Աշխարհ) 중 하나였다. 미승인국인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2017년 2월 20일에 헌법 개정안 국민 투표를 실시해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을 아르차흐 공화국(Արցախի Հանրապետություն)으로 변경한 바 있다.

3. 역사



3.1. 고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우라르투의 왕 사르두리 2세(기원전 764년 ~ 기원전 734년)의 비문에서 등장한다. 메디아, 아케메네스 왕조, 아르사케스 왕조 이후 기원전 189년에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르타셰스 1세(Արտաշես Ա)가 통치하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영토가 됐으며, 북부의 '우티크(Ուտիք, Utik)', 중부의 '아르차흐(Արցախ, Artsakh)', 남부의 '슈니크(Սյունիք, Syunik)' 지역에 걸쳐있었다. 당시의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소아시아캅카스를 잇는 길목에 위치한 점과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지리적 입지로 인해 이민족의 침략이 빈번한 지역이었다. 때문에 사산 왕조,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의 지배 이후인 880년에 비로소 아르메니아인의 바그라투니 왕조가 세워졌다. 뒤이어 1000년에는 아르차흐 왕국(Արցախի թագավորություն)이 세워졌다.

3.2. 중세·근세


외세의 침략은 끊이지 않았고 셀주크 왕조, 조지아 왕국, 몽골 제국, 일 칸국의 일부로 속해있었다. 이런 과정 가운데 정착한 튀르크계와 선주민인 아르메니아계는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뒤섞여 공존하게 됐다. 일 칸국이 존속하던 1261년에 아르차흐 왕국의 마지막 군주가 암살당하면서 뒤를 이어 하첸 공국(Խաչենի իշխանություն)이 세워졌다. 1214년에는 캅카스 지역의 고대국가였던 캅카스 알바니아 아란샤흐 왕조의 후손, 하산 잘랄 돌라(Հասան Ջալալ Դոլա)가 하산잘랄랸 가문(Հասան-Ջալալյաններ)을 창건해 하첸 공국을 통치했다.
1335년 일 칸국의 멸망 이후에는 추판 왕조, 잘라이르 왕조, 티무르 왕조, 흑양 왕조, 백양 왕조의 일부로 속해있다가 1501년사파비 왕조가 들어서면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대이란국의 카라바흐 속주(ولایت قره‌باغ, Velāyat-e Qarehbāgh)로 편입된다. 숱한 침략에도 오랜 명맥을 이어나갔던 아르메니아계 하첸 공국은 1603년에 함사 멜리크국(Խամսայի մելիքություններ)[3]으로 불리는 귤리스탄(Գյուլիստան, Gyulistan), 지라베르드(Ջրաբերդ, Jraberd), 하첸(Խաչեն, Khachen), 바란다(Վարանդա, Varanda), 디자크(Դիզակ, Dizak)의 다섯 멜리크국으로 분열됐고 지역의 군소 봉건 국가로 전락했다.

3.3. 근대·현대


1747년 아프샤르 왕조나디르 샤가 암살당한 이후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캅카스에는 칸국들이 난립했다. 그 가운데 아제르바이잔인 사르잘르자반시르(Sarıcalı-Cavanşir) 씨족이었던 패나핼리한 자반시르(Pənahəli xan Cavanşir)는 카라바흐 칸국(Qarabağ xanlığı)을 세웠다. 아제르바이잔계 카라바흐 칸국과 아르메니아계 다섯 멜리크국은 이란 내에서 준독립적인 위상을 유지하면서 서로 간에 대립을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제국은 캅카스 산맥을 넘어 남하했다. 이를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한다.


3.3.1. 러시아 제국 치하


1804년부터 1813년까지 발발한 러시아-페르시아 전쟁과 더불어 러시아 제국은 1805년에 카라바흐 칸국을 사실상 점령했다. 1813년 전쟁의 결과로 굴리스탄 조약이 체결됐다. 이 강화조약으로 카자르 왕조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상실했다. 1822년에 카라바흐 칸국과 다섯 소왕국은 해체돼 러시아령 캅카스 부왕령의 옐리자벳폴 현으로 편입됐다.
이 시기 러시아 제국은 조지아에서 그랬던 것 처럼 이 지역을 확고히 장악하고 농노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지역의 인구구성을 바꾸어버렸다. 아제르바이잔인 중 적지 않은 수가 유목민이었고 당시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 카스피해 일대의 유목민은 그저 생산성과 세입이 낮은 집단일 뿐이었다. 러시아 제국이 남캅카스에 들어올 적에만 해도 현재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조차도 튀르크, 페르시아계 무슬림 인구의 비중이 훨씬 높거나 아르메니아인과의 인구비율이 반반정도였으나 30여년만에 그 비중이 바뀌어버렸다. 가령 1836년 러시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속한 슈샤(Şuşa)의 인구는 시아파 무슬림이 남성 3175명, 여성 3196명, 도합 6371명이었으며,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남성 3133명, 여성 3222명, 도합 6355명으로 거의 1:1 비율이었다. 그나마도 러시아 제국 치하 이전인 1824년에만 해도 슈샤의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전체의 27%에 불과했다.[4] 카라바흐 칸국을 무너뜨린 캅카스 총사령관 알렉세이 예르몰로프(Алексей Петрович Ермолов) 러시아 제국 육군 보병대장이 1823년에 수행한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의 인구조사에서도 총 20,095가구가 거주하는 해당 지역에서 15,729가구(78%)가 아제르바이잔인과 타트인이며, 4,366가구(22%)가 아르메니아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5] 하지만 러시아의 침략을 피해 터키 동부와 이란 서부(남아제르바이잔)으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이주하기도 했고, 러시아도 주변의 아르메니아계와 본토내 아르메니아 인구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 군사적으로 무장화하기를 원했고 이렇게 해서 인구비율이 역전됐다.
물론 계속돼 오던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간의 대립은 더욱 격렬해졌다. 제정 말기였던 1905년부터 1906년 동안 아르메니아인-아제르바이잔인 학살(Հայ-թաթարական ընդհարումներ / Erməni-azərbaycanlı qırğınları)[6]로 불리는 조직적인 학살과 무력충돌이 상호 간에 자행됐다. 최종적으로 러시아측이 카자크 기병을 비롯한 병력을 투입해 소요사태를 진압했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패전과 연이어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당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던 러시아 중앙정부는 이 사건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은 1920년대에 국가를 건국하기 이전부터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3.3.2. 러시아 혁명 및 적백내전기


1917년 2월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하고 동년 3월 9일조지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을 아우르는 자캅카스 특별위원회가 설립됐다. 이는 10월 혁명 중인 11월 11일에 세워지는 멘셰비키계 연합 임시정부인 자캅카스 위원부로 이어지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4월 22일에 자캅카스 위원부는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했지만, 지속해서 침공을 해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의견 차이, 그리고 1918년 3월 30일부터는 이른바 '3월 학살(Mart soyqırımı)'로 불리는 볼셰비키아르메니아 혁명 연맹[7] 주도의 학살 행위가 발생했기에 결국 동년 5월에 해체된다. 이러한 민족 갈등은 서로 간의 영토를 넓히기 위한 충돌로도 이어졌다. 가령 아르메니아는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에서 독립한 아제르바이잔계 아라즈 튀르크 공화국(현 나흐츠반 자치공화국)을 침공하기도 했으며 1918년부터 소련에 의해 공산화된 1920년까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중이던 1920년 3월에는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한 슈샤 학살(Շուշիի ջարդեր / Şuşa qətliamı)이 발생했다.

3.3.3. 소련 치하


1920년 소련 치하의 아르메니아 SSR아제르바이잔 SSR가 수립된 직후부터 나고르노카라바흐의 귀속권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그런데 붉은 군대를 파병해 캅카스 3국을 무력 점령한 소련은 이러한 각축장에 뛰어들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개입의 결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1923년 7월 7일아제르바이잔 SSR에 속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로 편입됐다.
1921년 7월 4일 러시아 공산당 캅카스 지국의 중앙위원회에서 다수결 투표로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의 사법 관할하에 두기로 한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 SSR 측에서 해당 사안을 캅카스 지국에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로 이관할 것을 요구했다. 캅카스 지국은 이에 동의했고 다음날 와병중이었던 레닌의 대리로 스탈린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다시 열렸다. 재개된 회의에서는 귀속 결정이 번복됐다. 당시 회의에 관한 원자료에 대한 접근이 제한돼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과 의도로 결정이 내려졌는지는 정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설득력있는 견해는 아직 아르메니아와 민족, 영토 분쟁이 있던 터키를 회유하고자하는 의도가 있었거나 또는 스탈린이 반볼셰비키적 성향을 보인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주민들에게 보복적인 조치를 취하려했다는 견해가 있다.[8]
귀속 결정의 번복은 심의나 표결 과정조차 거치지 않아서 과정상으로 석연치 않았다. 결정적으로 지역주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점 때문에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치주의 귀속결정은 아르메니아 SSR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이후로도 소련 존속기간 내내, 심지어는 소련이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도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귀속 문제에 이의를 제기했다.

3.3.4. 소련 해체 및 독립 이후


이러한 민족 갈등으로 인해 1988년부터 1994년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중이던 1991년 9월 2일에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독립을 선언했고, 이에 아제르바이잔 측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자치주 지위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년 12월 10일에는 아제르바이잔을 배제한 일방적인 독립 국민투표가 진행됐고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아제르바이잔인이 보이콧한 가운데 99.98%의 찬성률로 독립이 결정됐다. 결과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전쟁에서 패했고 1994년 5월 12일키르기스스탄에서 비슈케크 협정이 조인돼 정전(停戰)이 성립됐다. 전쟁을 통해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사실상(de facto)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독립했지만, 국제법상(de jure) 아제르바이잔의 영내로서 인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르메니아가 점령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2020년 9월 27일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에 대대적인 전쟁이 발발했다. 여기에 터키나 이란 같이 이웃한 지역 강국들은 물론, 프랑스, 러시아, 미국과 같은 강국들도 관여해 상황이 매우 복잡하게 진행됐다.
결국 10월 들어서 아르메니아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제공권을 장악한 아제르바이잔이 연전연승으로 유리해지면서 조금식 영내로 진격했고 결국 11월 10일 러시아의 중재 아래 아르메니아가 평화협정을 가정한 사실상의 종전선언을 하면서 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승리로 끝났고, 나고르노카라바흐 남부 지방은 아제르바이잔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됐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주둔하던 아르메니아군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완전히 추방되면서 아르메니아는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졌다.

4. 참고문헌


  • 장병옥 (2008).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의 원인에 관한 연구. 국제지역연구, 12(1), 301-326
  • 동북아역사재단 (2009). 엇갈린 국경, 길 잃은 민족들 : 러시아와 동유럽의 사례.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151-183
  • 강윤희 (2019). 러시아와 세계정치(세계정치 30). 서울: 사회평론아카데미, 120-177

[1] 샤후먄구(Շահումյան շրջան), 마르타케르트구(Մարտակերտի շրջան) 일부, 마르투니구(Մարտունու շրջան) 일부는 아제르바이잔측에서 괴이괼구(Göygöl rayonu), 고란보이구(Goranboy rayonu), 태르태르구(Tərtər rayonu), 호자밴드구(Xocavənd rayonu)로서 통제해왔다.[2] 붉은색 부분은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으로 점령하고 실효지배하는 구역, 빗금쳐진 부분은 아르메니아가 철수할 지역, 파란색 부분은 아르차흐 공화국과 아르메니아를 연결하는 라츤 회랑, 나머지 하얀색 부분이 현재 아르차흐 공화국이 실효지배 하는 구역이다.[3] 함사(Խամսա)는 아랍어로 '다섯을 의미하는 '함사(خمسة)', 멜리크(Մելիք)는 아랍어로 '왕'을 의미하는 '말리크(ملك)'에서 유래한다.[4] 위 수치는 Акт, Собранные Кавказской Археографической Комиссией, Tom 2, No: 1437, Tbilisi, 1868를 재인용함.[5] 위 수치는 Описание Карабахской Провинции, составленной 1823 году, Тифлис, 1866를 재인용함.[6] 해당 사건은 러시아어로는 '아르메니아인-타타르인 학살(Армяно-татарская резня)'이라고 하는데, 당시 러시아어로는 아제르바이잔인을 자캅카스 타타르인(Закавказские татары)으로 지칭했기 때문이다.[7] 일반적으로 다슈나크당(Դաշնակցություն, Дашнакцутюн)으로 알려져있다.[8] 우평균,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Karabagh) 분쟁의 갈등 양상과 국제 개입중 "II-1.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관할권 결정 과정"(민족연구, 201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