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무라 노리히로
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의 선수. 별명은 '노리' (ノリ)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마지막 4번 타자. 킨테츠의 마지막 리그 우승인 2001년의 주역으로 막강 '이테마에 타선'의 4번을 맡아 3번 터피 로즈와 함께 공포의 클린업을 이룬 3루수였다. 호쾌한 풀스윙과 일본 야구사상 최고로 평가되는 배트 플립, 견고한 3루 수비력으로도 유명했다. 3루수 베스트나인을 총 5회[2] , 골든글러브를 7회[3] 수상했으며 홈런왕 1회(2002), 타점왕 2회(2000, 2001), 최고출루율 1회(2001)의 타이틀을 가져간 이력이 있다. 하지만 메이저 도전에 실패하며 현역 후기에는 오릭스-주니치-라쿠텐-요코하마의 4팀을 전전한 저니맨의 길을 걸은 풍운아이기도 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아마야구 인스트럭터, 유튜버, 야구평론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 아마추어 시절
어린시절, 1985년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한신 타이거스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경기에서 ‘백 스크린 3연발’을 관중석에서 직접 목격했다. 1990년 고교 2학년 시절 무명의 공립 시부야 고교의 중심선수로 4번타자, 3루수, 투수 역할을 수행하며 지역 예선에서 4홈런을 기록하는 활약으로 격전지 오사카의 여러 사립 강호들을 격파하고 고시엔 대회 본선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다만 팀은 본선 2회전에서 탈락했다.
고교 통산 35홈런을 기록했으며 긴테츠 버팔로즈로부터 4순위 지명을 받았다. 이 때 지명받은 포지션은 투수.
3.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
입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타자로 전향했다. 1992 ~ 1995년에는 인상 깊은 족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1996년 첫 3루수 베스트나인을 차지했고 1998년에는 리그 2위인 32개의 홈런을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시즌 30홈런을 달성했다. 1999년에는 시즌 전 경기 출전을 처음으로 달성했고 첫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에는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했으나 팀은 4위에 그쳤다. 그 대신 .277 .381 .578 OPS .959에 39홈런 110타점을 올리며 프로 커리어 첫 홈런왕과 타점왕을 수상했고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를 가져갔다. 그러나 팀은 2년 연속 최하위에 그쳤다. 시애틀 매리너스 로 떠난 스즈키 이치로의 뒤를 이어 퍼시픽리그 최고연봉자가 됐다.
2001년에는 3번 터피 로즈, 5번 이소베 코이치와 함께 중심타선을 이룬다. 막강 '이테마에 타선'의 4번타자로 활약하면서 .320 '''.434''' .630 OPS 1.064, 46홈런 '''132타점'''의 커리어하이[4] 시즌을 보냈고 킨테츠의 퍼시픽리그 우승 및 일본시리즈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타점왕, 최고출루율,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 등의 개인 타이틀도 가져간 최고의 해. 2002년 시즌 도중 FA권을 취득했고 시즌 종료 후 FA권 행사 의사를 밝혔다. 뉴욕 메츠와 교섭이 진행됐으나 결렬됐고 킨테츠와 재계약하였다.
2003년에 무릎 부상을 입었음에도 경기 출전을 강행했으며 이는 이후의 성적 하락의 원인이 됐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시즌 종료 후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고 포스팅 결과 LA 다저스에 낙찰됐다. 만약 메이저리그로 가지 않았다면 2004년 11월 8일에 있었던 오릭스 - 라쿠텐 선수 분배 드래프트 결과에 따라 합병 구단인 오릭스 버팔로스로 가는 거였다.
4. LA다저스 시절
2005년 트리플A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트리플A에서 22홈런을 기록했지만 타율 0.249 및 20실책을 기록하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메이저에 콜업된 17경기에서도 .128의 타율에 .350의 OPS로 총체적 난국의 모습이었다.
결국 1년만에 메이저 도전을 포기하고 일본프로야구 복귀를 선언했다.
5. 일본 프로야구 복귀,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세이부 - 요미우리를 거쳐 고향인 오사카 부로 돌아온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함께 2006년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부상으로 좀처럼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시즌 종료 후 계약 교섭에서 60% 삭감안을 제시받자 계약을 거부, 자유계약선수가 됐다.
6.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다음 해 초까지도 소속팀을 찾지 못한 무적 선수로 남았지만,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의 주니치 드래곤즈부터 연습생 제의를 받아 스프링 캠프에 참가했고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여 육성선수로 계약했다. 연봉은 400만엔, 등번호는 205번이었다. 시범경기에서 활약하자 개막 직전 지배하선수 계약을 맺고 연봉 600만엔, 등번호 99번으로 변경됐다. 정식선수 전환 후 타율 0.293/20홈런/79타점을 기록하며 3루수 골든글러브도 탈환하는 등 건재를 과시했다. 팀은 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를 통해 일본시리즈에 진출. 2007년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의 53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해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5]
2008년 시즌을 앞두고 무려 733%가 인상된 연봉 5,000만엔에 재계약했다. 2008년 시즌을 마치고 FA권을 행사해 라쿠텐으로 이적했다.
7.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
2009년 타율 0.221/2홈런/26타점을 기록해고 2010년에도 부진하여 방출통보를 받았다. 본인은 현역 속행 의지를 보였다.
8.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시절
2011년 62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 0.209/1홈런/14타점으로 부진했고 2012년에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22번째의 전 구단으로부터 홈런 기록을 달성했다. 2013년에는 스즈키 이치로, 마쓰이 히데키, 마쓰이 가즈오에 이어 일본인 선수로는 사상 4번째로 NPB/MLB합계 2,000안타를 홈런으로 달성했다. 같은 해 NPB 사상 43번째 2,000안타를 달성하여 명구회 입회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NPB 사상 18번째 400홈런을 달성했다.
2014년 "팀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등록 말소된다. 코치에게 "자신의 타석에서는 상황에 따라서는 주자를 움직이지 않고[6] 타석에 집중하고 싶다"와 상의한 것이 나카하타 키요시 감독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졌고 이후로는 한 번도 1군에 오르지 못했다. 결국 10월 3일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DeNA 구단으로부터 그동안의 실적과 공헌도를 고려해 은퇴식을 제안받았으나 현역 속행 의지를 보이며 거절했다.
9. 은퇴 후
그를 찾는 팀은 없었다. 그 뒤로 학생들을 위한 야구 교실의 강사 활동, 프로야구 해설자 및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4월 21일,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였다.
[1] 투수로 입단했으나 타자로 전향했다.[2] 퍼시픽리그 : 1996, 1999~2002.[3] 퍼시픽리그 : 1999 ~ 2002, 2004. 센트럴리그 : 2007 ~ 2008.[4] 커리어 유일의 규정타석 3할도 이 해 쳤다.[5] 이병규, 타이론 우즈 등 한국 팬들에게 익숙한 이름들도 이 해 주니치에서 뛰었다.[6] 도루 작전을 걸지 말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