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 가즈오

 

'''마쓰이 가즈오의 수상 경력/보유 기록'''
[ 펼치기 · 접기 ]

'''1998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라이온즈)

'''마쓰이 가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쿠도 키미야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2013'''

보유 기록(MLB)
데뷔 첫타석 '''초구''' 홈런
2004시즌

[image]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No.77
마쓰이 가즈오 (松井稼頭央)[1]
'''생년월일'''
1975년 10월 23일(48세)
'''국적'''
[image] 일본
'''출신지'''
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
'''출신학교'''
PL학원고등학교(오사카)
'''포지션'''
내야수 (유격수, 2루수)
'''투타'''
우투양타
'''프로입단'''
1993년 드래프트 3순위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 (1994~2003)'''
뉴욕 메츠 (2004~2006)
'''콜로라도 로키스 (2006~2007)'''
휴스턴 애스트로스 (2008~2010)
콜로라도 로키스 산하 마이너 (2010)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11~201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18)
'''지도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테크니컬 코치[2] (2018)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 (2019~ )
1. 소개
2. 선수생활
2.1. 세이부 시절
2.4. 락토버 이후
2.5. 일본 복귀
3. 플레이 스타일
3.1. 공격
3.2. 수비
4. 여담
5. 응원가
6. 관련 문서


1. 소개


일본프로야구의 야구선수. 前 메이저리거.
일본프로야구유격수 계보를 잇는 최고의 선수로 손꼽혔으며, 일본프로야구의 진정한 5툴 플레이어이자 역대 최고의 스위치 히터 중 하나이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하다 200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해 2010년까지 뛰었고, 그후 다시 일본으로 복귀하여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뛰고 있다가 2018년 친정팀 세이부로 복귀해 한 해 동안 뛴 후 현역생활을 마쳤다.
일본 명구회 회원 중, 통산 안타 수 5위에 랭크되어 있는 관록의 타자. 2016년 기준으로 이 선수위에 있는 4명은 스즈키 이치로, 장훈, 노무라 카츠야, 오 사다하루뿐이다. 왕정치와는 불과 103개 차이.

2. 선수생활



2.1. 세이부 시절


[image]
야구명문인 PL학원[3] 고등학교 출신으로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팔 골절상으로 인한 슬럼프를 겪어 자신이 달고 있던 에이스 넘버를 한때 반납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뛰어난 운동능력은 각 구단의 스카우터에게 높이 사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결국 1993년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 강한 어깨와 빠른 발을 높게 평가받으며 투수에서 내야수로 전향하고, 거기에 스위치 히터로 변신하게 된다.
1년차인 1994년에 주로 2군에서 뛰다가 그 이듬해인 1995년부터 1군에서 활약했고, 1996년부터 타나베 노리오를 밀어내고 본격적으로 유격수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 해에 파리그 2위인 시즌 50도루를 기록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또한 그를 대표하는 등번호 7번을 달았다.[4]
1997년에 처음으로 3할을 기록했고 도루도 62개나 기록하며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팀의 퍼시픽리그 우승에 큰 몫을 하였다. 특히 이 해 올스타전에서 1경기 4도루를 기록하여 올스타전 MVP를 기록할 정도로 스타성도 갖추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도 도루왕 타이틀[5]과 함께 팀의 퍼시픽리그 우승에 공헌하여 그해 '''리그 MVP'''를 수상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3년 연속 최다 도루를 기록했고, 나아가 퍼시픽 리그, 1990년대는 물론 일본프로야구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일본의 간판 유격수로 성장했다. 마침 이 때가 마쓰이 히데키가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거포로 명성을 얻던 시기인지라 그는 자연스럽게 '''리틀 마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리즈시절은 1996년부터 2003년까지였고, 고로 일본프로야구 유격수의 역사를 써나가는 시간이었다. 1996년부터 2003년까지 8시즌 동안 통산 1143경기 연속출장, 1997년부터 2003년까지 7시즌 연속 3할 이상 타율과 시즌 170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할 정도로 꾸준했다(1999년, 2002년 리그 최다안타 포함. 특히 2002년에는 193안타 기록). 거기에 장타력까지 더하여 1999년에 15홈런을 시작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까지인 2003년까지 131개의 홈런(연평균 26.2홈런)을 때려냈다. 20-20을 세 번(2000~2002) 기록했고, 특히 '''2002년에 일본프로야구 역대 8번째이자 스위치 히터로서는 사상 최초의 트리플 쓰리(3할-30홈런-30도루)을 기록했다.''' 거기에 통산 1000안타를 역대 4위의 속도로 달성하는 등 일본프로야구의 역사를 써나갔다.
베스트 나인 7회(1997~2003), 골든 글러브 4회(1997, 1998, 2002, 2003) 수상에, 2001년에는 일본프로야구 20세기 센츄리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기도 했다.[6]
하지만 우승하고는 인연이 없어서 퍼시픽 리그 우승을 3번(1997, 1998, 2002) 경험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서는 각각 야쿠르트 스왈로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고 여기에 후술될 콜로라도 로키스 락토버 시절까지 포함하면 5번의 준우승을 경험한 일본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콩라인이었다. 하지만 2013년 라쿠텐 소속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하면서 콩라인 탈출에 성공한다.

2.2. 뉴욕 메츠 시절


[image]

마쓰이 가즈오의 화려했던 리즈 시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스카우터들은 그의 탈일본급 수비와 다재다능한 공격능력을 높히 샀다. 게다가 스즈키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적응 성공과 마쓰이 히데키의 메이저리그 진출 선언과 맞물려 더욱 주목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2002년 미일 올스타전에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두 마쓰이의 활약에 집중했다.
결국 마쓰이 가즈오도 2003년 시즌이 끝난 뒤 FA로 풀렸고 오프시즌에 뉴욕 메츠로 전격 입단하게 된다.[7] 연봉은 연평균 $6M.
많은 관심을 받으며 어메이징 메츠에 입단했지만 처음부터 주전 유격수자리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탈일본급 수비능력''', '''5툴 플레이어'''로서 좋은 평가를 받고있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립서비스. 당시 메츠에서 애지중지 키우고 있던 호세 레예스를 메이저로 콜업시킨 상황에서 이 둘의 유격수 자리를 둔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일단은 시즌 초에 마쓰이가 유격수, 레예스가 2루수로 수비진이 운영이 됐다.
처음에는 마쓰이 카즈오가 2004년 개막전에서 '''메이저리그 신인으로서는 첫 타석 초구를 홈런'''으로 쳐낸 최초의 선수로 기록되며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지만 그의 활약은 여기까지였다. 이후 침착하게 성장한 호세 레예스가 주춤한 마쓰이의 슬럼프를 틈타 다시 유격수로 돌아왔고 결국 마쓰이는 2루수로 수비위치가 변경됐다. 그러나 타격 부진은 그 이후에도 계속 되면서 결국 시즌 후반부에 주전자리도 빼앗기며 메이저리그 첫 시즌을 마감했다.
이후 2005년 개막전에 첫 타석에서 또 한번 홈런을 기록하면서 메이저리그 첫 해의 부진을 말끔히 씻는가 했더니 다시 부진에 빠졌다. 2006년 자신의 시즌 첫 경기 첫 타석에서 일본인 최초의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기록하는 등 3년 연속으로 첫 경기, 첫 타석, 첫 홈런을 기록, 지켜야 할 자기 자리는 못 지키고 진귀한 기록만 내는 선수로 전락했다.
결국 2006 시즌 포스트시즌을 노리고 있던 메츠는 6월 9일 마쓰이 가즈오+현금에 콜로라도 로키스로부터 백업 야수 일라이 머레로를 교환하는 트레이드 딜을 성사시킨다.

2.3.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


[image]
마쓰이는 메츠에서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나름 부활하며 로키스 사상 최고의 시즌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로키스로 이적했을 때 가장 반겼던 사람은 바로 토드 헬튼. 마쓰이와 헬튼은 1995년 하와이 겨울 훈련에서 처음 만났는데, 당시 헬튼은 마쓰이의 수비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결국 로키스로 이적한 이후 2루수로서 괜찮은 활약을 보이며 32경기동안 타율 .345, 2홈런, 19타점, 8도루를 기록하며 다음 해를 기대하게 됐다. 시즌이 끝나고 FA로 풀렸지만 로키스와 단년계약($1.5M)을 맺었다.
2007 시즌에 종종 부상에 시달리면서 규정타석을 못 채웠지만, 클러치 히팅, 빈틈없는 주루 플레이와 수비를 보여주며 시즌 중반부터 주전 2루수로 활약했다. 특히 시즌 32도루를 기록해 그간 잊고있던 주루 능력이 회복됐다. 시즌 후반에는 부상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윌리 타베라스를 대신해 1번 타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2007 NLCS, 2007 월드 시리즈 등 포스트시즌 합계 타율 .340, OPS .847를 기록하며 앞으로도 전설로 남을 '''락토버'''의 첨병으로 활약하며 명예회복을 했다.

2.4. 락토버 이후


로키스에서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 마쓰이는 크레이그 비지오제프 켄트 이후 공석이 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2루수로서 2008 시즌부터 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애스트로스의 기대와는 달리 2008 시즌 개막부터 DL에 올라간 것을 시작으로 이후에도 각종 잔부상에 시달리며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듬해인 2009 시즌 8월 15일에 미일통산 2000안타(일본 1433안타, 미국 567안타)를 기록하여 명구회에 가입되기도 했지만 예전의 명성을 이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잦은 부상 이 문제가 되어 2010 시즌 중반에 애스트로스에서 방출되고 이후 콜로라도 로키스 산하 AAA팀에 머물었다.

2.5. 일본 복귀


[image]
결국 메이저리그 생활을 접고 2011 시즌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복귀했다. 등번호도 자신이 처음 프로에서 썼던 32번[8]을 달며 처음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시즌에 임했다. 시즌 결과는 타율 .260, 9홈런[9] 48타점[10], 15도루 등 전성기보다는 한참 먼 성적을 냈다. 하지만 시즌 34개 2루타(파리그 1위), 8할대의 도루성공률 등 아직까지는 리드오프로서 준수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2012년 기존에 7번을 달던 야마사키 타케시의 퇴단으로 7번을 닮과 동시에 팀의 주장이 되었다.
2013년에는 개인 성적은 하락세를 겪었지만 소속팀 라쿠텐 이글스가 선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주전 유격수이자 주장으로서 야수진을 이끌면서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 '''프로 데뷔 18년만에 생애 첫 우승반지'''를 끼게 됐다. 
2014년부터는 나이 탓인지 외야수로 자주 나오는 편이었으나...
2017년 3년만에 유격수로서 출전하기도 했다. 수비능력은 여전한듯.[11]
2017 시즌 후 라쿠텐 측에선 코치직을 제안했지만 본인은 현역 연장을 원해 팀을 떠나게 됐다. 그리고 친정팀인 세이부에 플레잉코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줄줄이 FA로 팀을 떠나는 것만 보던 세이부 팬들은 늦게나마 귀향한 왕년의 판타지스타의 귀환에 크게 환영하는 중. 덤으로 2018 시즌 일본프로야구 최고령 야수가 되었다. 이후 타율 0.129 2타점의 기록을 남긴뒤 은퇴를 선언했고, 세이부 구단은 2군 감독 자리를 마쓰이에게 제안했다.

여담으로 2018년 10월 4일 치바 롯데 마린즈 전은 ZOZO 마린 스타디움에서의 현역 마지막 경기였는데, 이 날 롯데에서는 경기 전에 전광판에 수고 메시지를 띄우고 동갑내기인 후쿠우라 카즈야가 꽃다발을 전해 주는 등 조촐하게 은퇴 행사를 치뤄 주었다.[12] 여담으로 이 날 경기 후에 롯데에서도 은퇴식을 하는 타자가 있었다. 그래서 1경기에서 2명의 타자가 은퇴 기념으로 꽃다발과 축하 메시지를 받는 감동적인 결과가 연출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3.1. 공격


세이부 시절 첫 해만 빼고 그의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는 1996년~2003년 동안 평균 .313 타율, 도루 35.6개, 홈런 18.5개의 먼치킨스런 성적을 냈다. 적어도 저 시절만큼은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공격형 유격수로 봐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든 공격 능력이 메이저리그에 시절 이후 급감했다. 이치로처럼 중거리형 똑딱이로 메이저리그에 적응하려고 했지만 사실상 실패했다. 미국 생활 마지막 해인 2010년을 제외한 2004년~2009년의 기록을 보면, 평균 .271 타율, 홈런 5.33개로 급감했다. 그나마 락토버의 일원이었던 2007년에 32도루로 여전히 빠른 발을 보여줬으나, 도루 역시 선수생활 후반부에는 자연스럽게 감소했다. 통산 도루성공률이 8할대 중후반를 꾸준히 유지했다.

3.2. 수비


수비는 일본 기준으로는 정상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포구 방식이나 차원이 다른 타구질에 고전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다 본 포지션인 유격수 자리에서 밀려나야 했다. 동양인 내야수의 메이저리그 적응 문제를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선수.
전성기 때는 '''탈일본급 운동능력'''으로 평가를 받았는데, 일본의 유격수 치고는 다소 큰 체격(178cm)으로 강견에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했다. 어느 정도였다하면, 통상적으로 2루수가 커버하는 우중간 얕은 외야를 커버하기도 했고,[13] 3-유간의 깊은 땅볼을 노스텝으로 던져 1루에 송구해 아웃 시키는 메쟈리그 급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골든 글러브를 4회 수상(1997, 1998, 2002, 2003)했다.

하지만 화려한 퍼포먼스 때문에 실책이 적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수비쪽에서 가 은근 있었다. 한 예로, 평론가로 활동하던 오이시 다이지로(大石第二郞)[14]는 "수비면에서는 마쓰이 가즈오보다 더 견실하고 범위도 더 넓은 코사카 마코토가 골든글러브를 받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15] 다만, 마쓰이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해를 보면 코사카의 출장 경기수가 적거나 부진했던 점을 감안해도, 어쨌든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공수에서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했던 유격수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정작 미국에 가서는 자신의 포지션인 유격수를 지킬 수가 없었다. 어메이징한 메츠에서는 졸렬한 똑딱이와의 경쟁에서 밀려 2루수로 전향했고, 이후 산동네에서는 툴로가 간판 유격수로 자리잡으면서 계속 2루수로 활약했다. 그래도 유격수로서 기본 바탕이 있어서 2루수로서도 나름 적응했고, 2루수로서의 수비능력도 인정받아 크레익 비지오, 제프 켄트 이후 제대로 된 2루수가 없어 쩔쩔매던 휴스턴으로부터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라쿠텐으로 복귀해서는 자신의 원 포지션인 유격수로 돌아왔다.
아무튼 적어도 수비만큼은 미국 진출 후 제대로 멸망한 후배들인 니시오카 츠요시나카지마 히로유키처럼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다. 주 포지션을 잃어버렸다고는 해도 호세 레예스트로이 툴로위츠키 등 그의 경쟁자들이 이후 얼마나 거물로 성장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마쓰이 본인이 2루수로 포지션을 옮겼어도 괜찮은 활약을 보여줬다는 걸 보면 적어도 수비 쪽에서는 실패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마쓰이 가즈오의 포지션을 2루수로 보았을때의 이야기.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에서도 땅볼타구는 기본적으로 정면에서 처리하는 수비를 요구하는데, 뉴욕 메츠 입단 초기 유격수로 출전하던 시절 미국에서는 보통 백핸드로 처리하는 타구도 정면으로 처리하려다가 에러를 저지르거나 내야안타를 내주는 상황이 상당히 많았다. 톰 글래빈이 '왜 일본인들은 땅볼타구를 정면으로만 처리하는지 모르겠다.'고 언론에 대놓고 디스를 할 정도였으니.....레예스나 툴로가 훗날 거물급 유격수로 성장 한 것과 별개로 미국무대에서 '''유격수''' 마쓰이 가즈오의 수비는 실패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2루수로 옮긴 뒤 마쓰이 가즈오가 MLB에서도 수준급의 2루수비를 보여준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습관을 고친 덕이라고 봐야할지 아니면 유격수급 송구를 2루수 쪽에서 1루로 꽂는 것으로[16] 좋지 않은 일본식 포구습관의 단점을 가렸다고 봐야 하는지는 판단에 맡긴다.

4. 여담


  • 원래 이전부터 한국계 루머가 있었던 일본의 유명 스포츠 선수 중 한명이지만,# 2008년 그의 조부인 마쓰이 지로가 화재로 사망했을 때 마이니치 계열 방송에서 '박재윤'으로 보도를 했다는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한국에서는 마쓰이 가즈오가 한국계라는게 거의 정설처럼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다만 당시 마이니치 보도는 곧 '마쓰이 지로'로 정정 보도되었고,# 마쓰이 가즈오 본인이 보도 내용에 대해서 언급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17]
  • 본명 한자표기는 松井和夫다. 프로 1년차 때는 자신의 본명을 등록해서 썼지만 워낙 흔한 한자표기이다보니 이후 이름만 '稼頭央'으로 바꿔 등록해 지금까지 쓰고있다. 稼頭央으로 지은 이유는 일본프로야구계에서 최고의 선수가 돼 중심에 오르겠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이름에 들어있는 한자만 봐도 '머리 두'에 '가운데 앙' 자다.
  • 미국에서는 Kaz Matsui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18][19] 아무래도 먼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마쓰이 히데키와의 구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마쓰이 히데키와의 구분을 위해 흔히 큰 마쓰이, 작은 마쓰이라고 나눠서 부른다. 물론 마쓰이 히데키 쪽이 큰 마쓰이. MLB에 진출한 시기도 마쓰이 히데키 쪽이 더 빠르고 활약상, 그리고 실제 나이도 마쓰이 히데키가 한살 더 많고 덩치도 마쓰이 히데키가 더 크기 때문에...

5. 응원가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쓰던 응원가 중 팀의 원조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이시게 히로미치의 응원가를 물려받은 곡이 유명하다. 가사는 이시게(石毛) 부분을 카즈오(稼頭央)로 바꾼 걸 빼면 두 선수 버전 모두 동일하다.

狙い球は豪速球 打てば飛ぶ飛ぶ 銀河の果てに
노리는 공은 강속구 치면은 난다 난다 은하의 끝으로
ミスターレオ稼頭央
미스터 레오 카즈오

6. 관련 문서


[1] 본명은 松井和夫. 등록명과 발음은 똑같다.[2] 선수 겸임.[3] 고시엔 전국대회 본선 진출을 다투는 49개 도도부현에서도 초 격전지인 오사카부의 야구명문교로, 많은 프로야구 선수들을 배출하였다.[4] 이 번호는 과거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하다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한 이시게 히로미치의 등번호였다. 이시게가 떠난 후엔 외국인 타자 다린 잭슨이 2년간 7번을 달고 있다가 잭슨이 떠나면서 마쓰이가 이 번호를 달게 되었다.[5] 코사카 마코토와 공동 수상이며, 이 도루왕 경쟁 과정에서 세이부 벤치가 코사카를 상대로 '''고의 보크'''를 시전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코사카 항목에 자세한 상황이 서술되어있다.[6] 일본프로야구 20세기 센츄리 베스트 나인 선정자 : 투수 에나츠 유타카, 포수 후루타 아츠야, 1루수 오 사다하루, 2루수 오치아이 히로미츠, 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 유격수 마쓰이 가즈오, 외야수 장훈, 스즈키 이치로, 마쓰이 히데키[7] 같은 시기 이승엽도 FA로 풀려 해외진출을 타진하고 있어 여러모로 비교대상이었는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전 국내 모 방송과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8] 이유는 따로 없고, 마쓰이가 돌아올 당시 거포타자로 활약하던 야마사키 타케시가 7번을 등번호로 쓰고 있었다. 그리고 2011 시즌 종료 후 방출된 야마사키가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면서 마쓰이가 7번으로 바꿔 달았다.[9] 진짜 적은 홈런 수인데 '''이게 팀 2위 기록이다(...)''' 아무리 2011년 NPB가 반발력이 적은 공인구를 새롭게 도입하면서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이 되었다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참고로 팀 1위는 위에 나온 야마사키 타케시인데 '''이 사람마저도 홈런이 꼴랑 11개(...)''' 야마사키가 당시 43세의 고령인 걸 감안해도 이건 뭐..[10] 이건 팀내 공동 1위. [11] https://youtu.be/GoIMsHk7s9g[12] 한국으로 치면 이승엽이 다른 팀 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작게 은퇴기념 행사를 했던 것과 비슷하다.[13] 마쓰이 가즈오가 데뷔할 당시 세이부의 2루수는 츠지 하츠히코였다. 츠지는 전성기 시절 되려 유격수의 수비범위를 야금야금 뺏어먹는 아크로바틱한 수비를 펼쳤지만 세월 앞에서는 장사 없었고, 결국 마쓰이 가즈오는 츠지가 커버하지 못하는 수비범위를 보완했고, 이러한 플레이는 츠지가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하고 타나베 노리오다카기 히로유키등이 2루를 맡았을 때도 계속되었다.[14] 킨테츠 버팔로즈 출신의 2루수, 후쿠모토 유타카의 연속 도루왕 타이틀을 저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2008 ~ 2009년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을 맡기도 했다.[15] 코사카 마코토는 억울하게도 소속팀의 성적과 안습한 타격 때문에 저평가 받아왔다. 참고로 일본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골든 글러브는 수비위주로 주는 상이다. 각 포지션에서 가장 뛰어난 공격력을 보인 선수에게는 미국의 실버 슬러거처럼 베스트 나인 상이 수여된다. 그래서 비록 타격이 안습이지만 코사카에게 수상자격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16] 일반적으로 2루수는 유격수보다 어깨가 약하지만 다른 능력은 좋은 선수들이 가는 포지션이라 마쓰이 가즈오의 어깨는 MLB에서도 2루수치고는 매우 좋았다.[17] 여담으로 일본에는 마쓰이 가즈오가 2000년에 귀화했다며 관보에 그 기록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블로거들이 일부 있지만, 가즈오 본인이 귀화했다고 말한 적이 없고 제도권 언론에서 팩트 체크가 이뤄진 적도 없기 때문에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18] Kaz Matsui는 주로 언론에서 많이 쓰던 이름이었고, 실제는 자신의 이름 영어표기 그대로 등록됐다.[19] 미국 언론에서는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발음과 표기가 쉽지 않은 동양계 선수들의 이름을 저런 식으로 짧게 쓰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보스턴 레드삭스 등에서 활동했던 오카 토모카즈캔자스시티 로열스 등에서 활동했던 스즈키 마코토로, 오카는 'Tomo Ohka'로 불렸었고, 스즈키 마코토는 'Mac Suzuki'로 불렸었다. 이쪽은 일본프로야구에 복귀한 후 아예 '맥 스즈키'를 등록명으로 사용했을 정도. 봉중근도 한동안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언론에서 Jung Bong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