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하타 키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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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前 프로야구 선수이자, 前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감독.
선수시절 별명은 애칭은 얏타맨(ヤッターマン), 절호조남(絶好調男). 한국한정으로 '''열도의 갓동님.'''
후쿠시마 현 니시시라카와 군 야부키 정에서 낙농업을 운영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나가시마 시게오의 활약상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면서 나가시마를 동경하게 되었다. 아사카 상업고등학교(현재의 데이쿄아사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야구부에 입단해 포지션인 3루수, 유격수, 포수를 각각 맡았고 고교 졸업 후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하여 1973년 추계 리그에서 최고 수훈 선수로 선정된 것을 포함해 베스트나인에 네 차례나 선정되는 등의 실적을 남겼다. 검은 선글라스[2] 와 특유의 한발타법으로 주목을 받았고 2학년 때인 춘계 시즌에서는 도토 대학 리그의 수위타자 타이틀을 놓고 경쟁에 참여하는 등 도토 대학 리그 통산 82경기에 출전해 300타수 92안타, 타율 3할 7리, 10홈런, 51타점을 기록했다.
일명 ‘고마자와 트리오’라고 불린 히라타 가오루, 니노미야 이타루와 함께 1975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주목을 받았고 요미우리의 1순위 지명이 유력시 되면서 고마자와 대학의 합숙소에 기자들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지바 현립 조시 상업고등학교의 시노즈카 도시오가 1순위로 지명되었다. 기자들이 발길을 돌린 모습을 지켜본 나카하타는 별실에서 팀 동료와 함께 쇼기를 두고 있었지만 3위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으면서 “고졸인 사람에게 먼저 지명되었다”라고 실망감을 느낀 반면에 투쟁심은 늘어났다고 한다.
나카하타는 홋카이도 다쿠쇼쿠 은행[3] 의 입사가 결정되어 있었지만 결국 프로팀에 입단하기로 결심했고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명받지 못한 히라타와 니노미야도 함께 입단한다고 신청하여 요미우리도 이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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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후 3년 간은 1군에서의 뚜렷한 성적을 낼 수 없었지만 프로 3년째인 1978년 시즌 종료 후에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4] 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합동팀을 짜 신시내티 레즈와 친선경기를 개최한 미일 야구 1차전에서 나카하타는 타카다 시게루의 대타로 출전해 신시내티 레즈의 마리오 소트로부터 2점 홈런을 때려냈다. 이 날은 눈에 있던 콘텍트 렌즈를 제거하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출전했지만 아내가 고라쿠엔 구장까지 보낸 새 물건 덕분에 자주 보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미일 야구에서의 활약을 계기로 1군에 정착한 1979년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다카다를 대신해서 출전했고 다카다가 복귀한 이후에도 3루수의 주전 자리를 지켰다. 그 해 센트럴 리그 신인왕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시즌 종반에 갑작스런 부상을 당하면서 신인왕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듬해 1980년에는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웠고(503타석) 같은 해 가을에는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사임과 오 사다하루의 은퇴, 그리고 드래프트 회의에서 나카하타와 같은 3루 포지션을 갖고 있던 하라 다쓰노리의 입단을 둘러싼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서 포지션의 문제가 발생하였지만 감독으로 취임한 후지타 모토시 등의 수뇌진은 애초에 ‘나카하타는 3루·하라는 2루’라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1년이 되면서 나카하타는 시즌 도중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이탈하는 등 그 사이에 하라는 3루에, 2루에는 시노즈카 도시오가 들어오면서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나카하타는 다시 복귀하면서 1루수로 전향해 나카하타의 부상 덕분에 포지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일각에서의 평가도 있었다. 그 해 요미우리는 1973년 이후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해 나카하타 본인도 타율 3할 2푼 2리, 16홈런, 66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을 했다.
1983년에 당시 수비 주루 코치였던 스에쓰구 도시미쓰[5] 가 최종전에서 3할대 전후를 기록한 선수들의 타율을 한 타석마다 계산기를 이용해 계산하였고 3할대에 오르면서 교체시켰기 때문에 타율은 3할 대에 머물렀다. 이 점을 지적받은 나카하타는 “3할 만은 계약 갱신 자리의 인상이 바뀌므로 용서해 주었으면 한다. 그 대신에 만약 자신이 타이틀 경쟁을 하면 절대로 쉬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나카하타는 고마자와 대학 시절에 마지막 경기까지 출전하고 수위타자를 놓친 경험은 있었지만 정작 프로에 입문한 후 그런 기회는 없었다. 이듬해 1984년 올스타전에서는 2차전과 3차전에 걸친 2타석 연속 홈런을 때려냈다.
1985년, 매스컴 앞에서 오 사다하루 감독의 지도력을 비판했는데 이후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오 사다하루 감독의 지휘하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시절(제1차)에 신인이었던 선수가 주력을 담당하고 있었고 팀의 내분과 관련해서는 주로 잡지나 신문에서 보도된 적도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결성된 노동조합인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의 초대회장으로 취임했고 1985년 시즌 종료 후 고교 야구 역사상 최고의 간판 타자로 군림한 같은 내야수인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요미우리의 입단을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비 위치를 빼앗길 정도의 위기감을 가졌다. 비록 기요하라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했고 가토 히데지가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에 이적을 하면서 포지션을 놓고 경쟁하는 형태가 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가토를 대타에 밀어냈다(가토는 1986년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1989년에 3루수로 다시 변경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의 경기 도중 상대 투수가 견제구를 던져 1루로 되돌아왔을 때 손가락을 다치는 부상을 당했다. 그 사이 3루에는 오카자키 가오루[6] , 1루에는 고마다 노리히로가 주전으로 차지한 적도 있어 그 해 시즌 종반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2루타를 날렸을 때 “자신은 일본의 구장에서 최초로 웨이브를 일으켰다”라고 발언했다. 그 후 1989년 일본시리즈 7차전(후지이데라 구장)에서는 본인의 입단동기인 시노즈카의 진언[7] 으로 대타에 기용되어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요시이 마사토로부터 홈런(이후에 벌써 1타석이 되돌아왔지만 마지막 타석에서는 3루 쪽 내야 플라이로 끝났다)을 때려냈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타율 .290 1294안타 171홈런 621타점.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7회 수상했으며(1982~1988, 7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준 MVP)도 1회 수상했다(1983).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니혼 TV와 스포츠 닛폰의 야구 해설위원을 역임했고 1993년부터 나가시마 감독(제2기)이 이끄는 요미우리의 타격 코치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1993년 시즌에 팀은 리그에서 가장 저조한 타격 성적을 기록하면서 코치로서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을 받았고, 아울러 FA를 앞둔 강타자 코마다 노리히로[8] 와 타격 이론 등을 놓고 불화를 일으켜 그해 스토브리그에 고마다가 교진군을 떠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입단하는 화근을 제공했다는 악평을 듣기도 했고, 고마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양대리그 홈런왕'''에 빛나는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FA로 입단하면서 존재감마저 잃어 버렸다. 심지어 오치아이와 나카하타는 지금도 53모임회에 같이 참여하는 동기생이다. 그러나 1994년에는 1루 주루 코치이자 팀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교진군의 5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94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코치직에서 물러나 다시 니혼 TV의 야구 해설위원과 스포츠 닛폰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해설자로써의 나카하타의 평가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선수시절의 일화등을 보면 의외일지 모르지만 굉장히 차분하게 해설하는 편으로, 보통 상황에 대한 선수 심리에 대한 설명을 주로 하면서 시청자에게 이런 부분을 보면 좋을것이라는 포인트를 짚어주는 스타일.
2004년에는 아테네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를 맡았지만, 본선에서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규정에 의해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등록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팀의 동메달을 이끌었다. 같은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비공식적으로 조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여담으로 정계 입문에 뜻이 있었는지 호리우치 츠네오처럼 국정 선거까지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광 to the 탈(...).''' 이후 정치에 미련은 없어진 듯. 다만 이때 정계의 문을 두드렸던 당이 극우로 분류되는 일어나라 일본이었다는 것 때문에 까임의 여지가 있다.
2011년 12월 9일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의 감독으로 영입되었다.[9] 후쿠시마 현 출신자로서는 처음.
자신의 생일이기도 한 이듬해 2012년 1월 6일에 취임 기자회견을 열었고 동시에 ‘뜨겁다! DeNA’(熱いぜ!DeNA) 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2012년 2월 1일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현 기노완 시에서의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수비에 능하지 못한 선수는 주전이 될 수 없다”라는 팀의 방침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수비를 중시하는 팀을 만들겠다고 밝혔다.[10] 그러나 춘계 캠프 도중인 2월 2일에 인플루엔자 A형에 감염되면서[11] 다음날부터 휴양 생활에 들어가 그 기간 동안에 다카기 유타카 수석 코치가 팀 지휘를 맡고 있었지만 나카하타는 휴양중에도 호텔 방안에서 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2월 7일부터는 현장에 복귀했다.
하지만 부임 시기던 첫 해부터 2012년부터 3년차인 2014 시즌 성적은 6-5-5... B클래스다.
그래도 요코하마가 최근 리빌딩을 정조준으로 하여금 신진급 선수들의 포텐이 터지고 있으며 2016, 2017년을 기점으로 나카하타의 '믿음의 야구'[12] 에 기반한 리빌딩이 성과를 내고 있다. 츠츠고 요시토모는 3할-20홈런을 치는 팀의 주포로 성장했고, 포수 구로바네 토시키, 다카조 슈토 등도 괜찮은 타격을 보내고 있다. [13]
'믿음의 야구', '포기하지 않는 야구'를 기치로 내걸고 활발한 팀 분위기를 만드는 데 힘썼지만 그도 감독이라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는 행동에는 얄짤없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나카무라 노리히로[14] . 실제로 나카무라가 타석에 선 상황에서 선행주자가 도루하고 나서 벤치에서 화를 내고[15] 타자배치에 이의를 제기하자 '''등록말소'''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고 2군으로 내려버렸으며 전지훈련 소집 때 불량한 태도로 등장한 외국인선수에게 등록말소 조치를 내렸다.
2015년 10월 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가 끝난 후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퇴임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유는 성적부진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구단 측에서는 구단의 인기를 높인 점을 평가해 사임을 만류하고 재계약을 추진했다고 한다. 현지에서는 다음 시즌의 코칭스태프 구성을 둘러싸고 구단과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서 스스로 나왔다는 보도가 있다.
나카하타의 퇴임 이후 공석이 된 요코하마 감독 자리는 알렉스 라미레스가 이어받게 되었고, 나카하타가 취임 초부터 강조한 '''포기하지 않는 야구'''[16] 는 퇴임 이후부터 DeNA의 달라진 팀 컬러로 이어져 오고 있다.
요코하마 퇴임 이후 스포츠닛폰 야구 평론가, TBS 등 방송국 해설가로 활동하면서 요미우리 OB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가 2020년부터 OB회 회장직에 취임했다.
2017년 시즌 종료 후 요코하마 레전드매치에서 '''감독 겸 대타'''로 나와 사사키 카즈히로에게 안타를 뽑아냈다.
1. 소개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前 프로야구 선수이자, 前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감독.
선수시절 별명은 애칭은 얏타맨(ヤッターマン), 절호조남(絶好調男). 한국한정으로 '''열도의 갓동님.'''
2. 프로 입단 이전
후쿠시마 현 니시시라카와 군 야부키 정에서 낙농업을 운영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나가시마 시게오의 활약상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면서 나가시마를 동경하게 되었다. 아사카 상업고등학교(현재의 데이쿄아사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야구부에 입단해 포지션인 3루수, 유격수, 포수를 각각 맡았고 고교 졸업 후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하여 1973년 추계 리그에서 최고 수훈 선수로 선정된 것을 포함해 베스트나인에 네 차례나 선정되는 등의 실적을 남겼다. 검은 선글라스[2] 와 특유의 한발타법으로 주목을 받았고 2학년 때인 춘계 시즌에서는 도토 대학 리그의 수위타자 타이틀을 놓고 경쟁에 참여하는 등 도토 대학 리그 통산 82경기에 출전해 300타수 92안타, 타율 3할 7리, 10홈런, 51타점을 기록했다.
일명 ‘고마자와 트리오’라고 불린 히라타 가오루, 니노미야 이타루와 함께 1975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주목을 받았고 요미우리의 1순위 지명이 유력시 되면서 고마자와 대학의 합숙소에 기자들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지바 현립 조시 상업고등학교의 시노즈카 도시오가 1순위로 지명되었다. 기자들이 발길을 돌린 모습을 지켜본 나카하타는 별실에서 팀 동료와 함께 쇼기를 두고 있었지만 3위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으면서 “고졸인 사람에게 먼저 지명되었다”라고 실망감을 느낀 반면에 투쟁심은 늘어났다고 한다.
나카하타는 홋카이도 다쿠쇼쿠 은행[3] 의 입사가 결정되어 있었지만 결국 프로팀에 입단하기로 결심했고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명받지 못한 히라타와 니노미야도 함께 입단한다고 신청하여 요미우리도 이를 받아들였다.
3. 거인의 스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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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후 3년 간은 1군에서의 뚜렷한 성적을 낼 수 없었지만 프로 3년째인 1978년 시즌 종료 후에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4] 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합동팀을 짜 신시내티 레즈와 친선경기를 개최한 미일 야구 1차전에서 나카하타는 타카다 시게루의 대타로 출전해 신시내티 레즈의 마리오 소트로부터 2점 홈런을 때려냈다. 이 날은 눈에 있던 콘텍트 렌즈를 제거하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출전했지만 아내가 고라쿠엔 구장까지 보낸 새 물건 덕분에 자주 보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미일 야구에서의 활약을 계기로 1군에 정착한 1979년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다카다를 대신해서 출전했고 다카다가 복귀한 이후에도 3루수의 주전 자리를 지켰다. 그 해 센트럴 리그 신인왕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시즌 종반에 갑작스런 부상을 당하면서 신인왕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듬해 1980년에는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웠고(503타석) 같은 해 가을에는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사임과 오 사다하루의 은퇴, 그리고 드래프트 회의에서 나카하타와 같은 3루 포지션을 갖고 있던 하라 다쓰노리의 입단을 둘러싼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서 포지션의 문제가 발생하였지만 감독으로 취임한 후지타 모토시 등의 수뇌진은 애초에 ‘나카하타는 3루·하라는 2루’라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1년이 되면서 나카하타는 시즌 도중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이탈하는 등 그 사이에 하라는 3루에, 2루에는 시노즈카 도시오가 들어오면서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나카하타는 다시 복귀하면서 1루수로 전향해 나카하타의 부상 덕분에 포지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일각에서의 평가도 있었다. 그 해 요미우리는 1973년 이후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해 나카하타 본인도 타율 3할 2푼 2리, 16홈런, 66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을 했다.
1983년에 당시 수비 주루 코치였던 스에쓰구 도시미쓰[5] 가 최종전에서 3할대 전후를 기록한 선수들의 타율을 한 타석마다 계산기를 이용해 계산하였고 3할대에 오르면서 교체시켰기 때문에 타율은 3할 대에 머물렀다. 이 점을 지적받은 나카하타는 “3할 만은 계약 갱신 자리의 인상이 바뀌므로 용서해 주었으면 한다. 그 대신에 만약 자신이 타이틀 경쟁을 하면 절대로 쉬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나카하타는 고마자와 대학 시절에 마지막 경기까지 출전하고 수위타자를 놓친 경험은 있었지만 정작 프로에 입문한 후 그런 기회는 없었다. 이듬해 1984년 올스타전에서는 2차전과 3차전에 걸친 2타석 연속 홈런을 때려냈다.
1985년, 매스컴 앞에서 오 사다하루 감독의 지도력을 비판했는데 이후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오 사다하루 감독의 지휘하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시절(제1차)에 신인이었던 선수가 주력을 담당하고 있었고 팀의 내분과 관련해서는 주로 잡지나 신문에서 보도된 적도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결성된 노동조합인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의 초대회장으로 취임했고 1985년 시즌 종료 후 고교 야구 역사상 최고의 간판 타자로 군림한 같은 내야수인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요미우리의 입단을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비 위치를 빼앗길 정도의 위기감을 가졌다. 비록 기요하라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했고 가토 히데지가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에 이적을 하면서 포지션을 놓고 경쟁하는 형태가 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가토를 대타에 밀어냈다(가토는 1986년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1989년에 3루수로 다시 변경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의 경기 도중 상대 투수가 견제구를 던져 1루로 되돌아왔을 때 손가락을 다치는 부상을 당했다. 그 사이 3루에는 오카자키 가오루[6] , 1루에는 고마다 노리히로가 주전으로 차지한 적도 있어 그 해 시즌 종반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2루타를 날렸을 때 “자신은 일본의 구장에서 최초로 웨이브를 일으켰다”라고 발언했다. 그 후 1989년 일본시리즈 7차전(후지이데라 구장)에서는 본인의 입단동기인 시노즈카의 진언[7] 으로 대타에 기용되어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요시이 마사토로부터 홈런(이후에 벌써 1타석이 되돌아왔지만 마지막 타석에서는 3루 쪽 내야 플라이로 끝났다)을 때려냈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타율 .290 1294안타 171홈런 621타점.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7회 수상했으며(1982~1988, 7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준 MVP)도 1회 수상했다(1983).
4. 현역에서 물러나다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니혼 TV와 스포츠 닛폰의 야구 해설위원을 역임했고 1993년부터 나가시마 감독(제2기)이 이끄는 요미우리의 타격 코치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1993년 시즌에 팀은 리그에서 가장 저조한 타격 성적을 기록하면서 코치로서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을 받았고, 아울러 FA를 앞둔 강타자 코마다 노리히로[8] 와 타격 이론 등을 놓고 불화를 일으켜 그해 스토브리그에 고마다가 교진군을 떠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입단하는 화근을 제공했다는 악평을 듣기도 했고, 고마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양대리그 홈런왕'''에 빛나는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FA로 입단하면서 존재감마저 잃어 버렸다. 심지어 오치아이와 나카하타는 지금도 53모임회에 같이 참여하는 동기생이다. 그러나 1994년에는 1루 주루 코치이자 팀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교진군의 5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94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코치직에서 물러나 다시 니혼 TV의 야구 해설위원과 스포츠 닛폰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해설자로써의 나카하타의 평가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선수시절의 일화등을 보면 의외일지 모르지만 굉장히 차분하게 해설하는 편으로, 보통 상황에 대한 선수 심리에 대한 설명을 주로 하면서 시청자에게 이런 부분을 보면 좋을것이라는 포인트를 짚어주는 스타일.
2004년에는 아테네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를 맡았지만, 본선에서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규정에 의해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등록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팀의 동메달을 이끌었다. 같은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비공식적으로 조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여담으로 정계 입문에 뜻이 있었는지 호리우치 츠네오처럼 국정 선거까지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광 to the 탈(...).''' 이후 정치에 미련은 없어진 듯. 다만 이때 정계의 문을 두드렸던 당이 극우로 분류되는 일어나라 일본이었다는 것 때문에 까임의 여지가 있다.
5. 요코하마 감독이 되다
2011년 12월 9일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의 감독으로 영입되었다.[9] 후쿠시마 현 출신자로서는 처음.
자신의 생일이기도 한 이듬해 2012년 1월 6일에 취임 기자회견을 열었고 동시에 ‘뜨겁다! DeNA’(熱いぜ!DeNA) 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2012년 2월 1일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현 기노완 시에서의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수비에 능하지 못한 선수는 주전이 될 수 없다”라는 팀의 방침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수비를 중시하는 팀을 만들겠다고 밝혔다.[10] 그러나 춘계 캠프 도중인 2월 2일에 인플루엔자 A형에 감염되면서[11] 다음날부터 휴양 생활에 들어가 그 기간 동안에 다카기 유타카 수석 코치가 팀 지휘를 맡고 있었지만 나카하타는 휴양중에도 호텔 방안에서 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2월 7일부터는 현장에 복귀했다.
하지만 부임 시기던 첫 해부터 2012년부터 3년차인 2014 시즌 성적은 6-5-5... B클래스다.
그래도 요코하마가 최근 리빌딩을 정조준으로 하여금 신진급 선수들의 포텐이 터지고 있으며 2016, 2017년을 기점으로 나카하타의 '믿음의 야구'[12] 에 기반한 리빌딩이 성과를 내고 있다. 츠츠고 요시토모는 3할-20홈런을 치는 팀의 주포로 성장했고, 포수 구로바네 토시키, 다카조 슈토 등도 괜찮은 타격을 보내고 있다. [13]
'믿음의 야구', '포기하지 않는 야구'를 기치로 내걸고 활발한 팀 분위기를 만드는 데 힘썼지만 그도 감독이라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는 행동에는 얄짤없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나카무라 노리히로[14] . 실제로 나카무라가 타석에 선 상황에서 선행주자가 도루하고 나서 벤치에서 화를 내고[15] 타자배치에 이의를 제기하자 '''등록말소'''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고 2군으로 내려버렸으며 전지훈련 소집 때 불량한 태도로 등장한 외국인선수에게 등록말소 조치를 내렸다.
2015년 10월 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가 끝난 후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퇴임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유는 성적부진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구단 측에서는 구단의 인기를 높인 점을 평가해 사임을 만류하고 재계약을 추진했다고 한다. 현지에서는 다음 시즌의 코칭스태프 구성을 둘러싸고 구단과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서 스스로 나왔다는 보도가 있다.
나카하타의 퇴임 이후 공석이 된 요코하마 감독 자리는 알렉스 라미레스가 이어받게 되었고, 나카하타가 취임 초부터 강조한 '''포기하지 않는 야구'''[16] 는 퇴임 이후부터 DeNA의 달라진 팀 컬러로 이어져 오고 있다.
6. 감독 퇴임이후
요코하마 퇴임 이후 스포츠닛폰 야구 평론가, TBS 등 방송국 해설가로 활동하면서 요미우리 OB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가 2020년부터 OB회 회장직에 취임했다.
2017년 시즌 종료 후 요코하마 레전드매치에서 '''감독 겸 대타'''로 나와 사사키 카즈히로에게 안타를 뽑아냈다.
7. 기타
- 요미우리의 45대 4번 타자였다.
- 아직 신인이면서도 큰 주목을 받지 않았을 무렵 당시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으로부터 “키요시, 오늘 몸 상태는 어때?”라고 물었을 때 “그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을 듣고 있던 도이 쇼조 코치로부터 “감독에게 몸 상태를 물으면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반드시 절호조(絶好調)라고 대답해라”라고 말해(주니치 드래곤즈의 OB 반도 에이지가 말하기를 “무엇을 물어도”) ‘절호조!’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 1989년 일본 시리즈 7차전에서는 부인이 관전하러 오면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현역 생활의 마지막 홈런을 때려냈다.
- 나카하타의 등번호 24번을 물려받은 오모리 다케시의 수비 포지션 역시 1루수였기 때문에, 코치 시절 경기 직전에 가르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오모리는 2군 본즈의 길을 걷다가 방출되어 지금은 오오모리 미유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고, 등번호 24번은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이어받아 등번호에 걸맞는 활약을 해줬다. 요시노부는 감독으로써도 24번을 달았었다.
- 플레이에 대해서는 “비싼 입장료를 내면서 경기장에 들어오는 팬들을 위해서”라고 발언했다.
- 1953년도(쇼와 28년) 태생의 프로 야구 선수들(나시다 마사타카, 오치아이 히로미츠[17] , 마유미 아키노부, 후키이시 도쿠이치 등)에 의한 친목회인 ‘28회’(二八会) 회장을 맡고 있다. 나카하타는 엄밀히 말하자면 쇼와 29년생이지만 학교를 쇼와 28년생과 같이 다녔다.
- 구글에서 일본어로 中畑清를 검색할 경우 나카하타 키요시의 수많은 짤방거리들을 볼수 있다. 역시 그라운드의 개그맨답게 별의별 짤방거리를 많이 만들어낸다. 중후해보이는 겉모습과 귀여운 표정이나 제스처로 짤방을 양산할때의 표정을 보면 갭이 상당하다. 나이들어서도 개그본능을 주체하기 힘든듯? 한신 타이거스에서 은퇴한 재일교포 가네모토 도모아키에게서는 가장 흥미있는 감독님, 예술가, 개그맨이라고 동네북 취급까지 당했다(...).
- 팀이 좋은 플레이를 보이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벤치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자주 잡히면서 팬 겸임 감독(ファン兼任監督), '영원한 야구소년 키요시'라는 두 개의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감독 취임 초기에는 가네모토 도모아키에게 무게가 없다며 비판받기도 했고 팬들 사이에서도 '저게 감독이냐 관 중이냐' 라며 까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런 모습이 점점 팬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는지 취임기간동안 요코하마의 팬 숫자를 2배가량이나 증가시켰다.[18] '덕아웃에서 무게잡는 꼰대보다 오히려 나카하타처럼 팬과 함께 울고 웃고 해주는 감독이 더 친근감이 간다'는 의견이 늘어나면서, 까임일색이었던 언론의 반응도 상당히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 그러나 이런 개그맨스러운 모습은 어디까지나 팬들을 상대로 할 때 보여주는 비즈니스적 쇼맨십이고 본업인 야구에 관해서는 상당히 진지하고 엄격하다. 디엔에이 감독시절에 찍힌 라커룸 동영상 등을 보면 막장 분위기에 젖어서 무기력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을 질타하고 엄하게 대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근성론만 외치는 꼰대스러운 모습은 아니고 선수들에게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조목조목 짚으면서 개개인에게 개선을 촉구하는 등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해설자로 돌아간 2019년에도 일본시리즈 4차전의 해설로 나왔는데 친정팀의 스트레이트 4연패의 참패를 목도하고 정리멘트를 준비할 때 리포터로부터 "경기 끝나자마자 대부분의 선수들이 뒤도 안돌아보고 라커룸으로 들어가고 소뱅의 헹가래를 끝까지 지켜본 건 가메이 요시유키 한 명 뿐"이라는 보고를 듣자 생방송 중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참급인) 가메이가 그걸 보고 있으면 어떡해! 젊은 친구들이 그 모습을 눈에 똑똑히 새기고 있어야지!"라면서 노기띤 목소리로 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후배들을 질타하기도 했다.
- 메이저리그 진출 전 요코하마 스프링캠프 초청선수로 훈련을 함께 한 강정호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본인이 요미우리 4번 타자 출신이었고 현역 시절에 타격으로 유명했으며 당시 본인의 팀이 전력이 부족해서 선수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단순한 립서비스이기 보다는 진지하게 본인의 의사만 있다면 영입후보로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 항상 낙천적이고 개그스러운면을 보여줘서 순한 이미지이지만 생각외로 현피실력이 있는편이라 1993년 요미우리 코치 시절 요미우리 투수가 당시 야쿠르트의 심장인 후루타 아츠야 에게 대놓고 머리쪽 빈볼을 던져 패싸움이 벌어지고 양쪽간 무자비한 주먹질 & 발길질이 오가는 대난투 속에 야쿠르트쪽 외국인 선수가 폭주해서 달려드는걸 나카하타 키요시가 목을 정확히 헤드락 자세로 잡고 불독 기술 비슷하게 제압해버린 사례도 있다. 기본적인 근력이나 힘이 동양인과 비교도 안되게 센 외국인 선수를 제압에 성공한 나카하타도 대단. 그리고 심판 항의도 격렬하게 항의하는 스타일.
- 도쿄 대첩때 해설을 맡았는데 이대호의 역전 적시타를 예측하기도 했다.
[1] 원래 감독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뇌졸중으로 감독수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본선에서는 나카하타 키요시 대행을 맡았다. 본선 때에도 나가시마 시게오를 명목 상의 감독으로 등록하고 수석코치였던 나카하타를 감독대행으로 하려고 했으나 IOC 측에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나카하타가 정식 감독으로 올림픽 본선에 출전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 국내에서는 여전히 나카하타는 감독대행 취급이고 나가시마 시게오를 감독으로 간주하고 있다.[2] [image][3] 홋카이도척식은행. 예전에 10대 도시은행으로 분류되었으나 1990년대 불량채권 문제로 파산하였다.[4] 이 해 시즌 종료 후 라이온즈가 세이부에게 매각됨과 동시에 사이타마 연고 이전이 결정되면서 이해 일미야구는 라이온즈가 후쿠오카 연고 팀으로써 마지막으로 치룬 경기가 되었다.[5] 선수시절에는 살인적인 파괴력을 가진 ON포 뒤를 받쳐주는 5번타자 겸 우익수로 주로 뛰었다. 다만 이양반도 역대 요미우리 4번타자 명단에 있다. '''요미우리 유일한 꼴찌시즌인 1975년''' 개막전 4번타자이기도 했다.[6] 야마우치 가즈히로가 주니치 감독직에서 시즌도중 모가지가 짤려나가고 쉬었다가 왕정치가 부르자마자 냅다 요미우리로 복귀하면서 비로소 1군에 중용되기 시작했다. 93년 시즌 나카하타의 지도자 커리어 첫해 하라보살이 에이징커브를 제대로 쳐맞으면서 4번타자로 선발출장한적이 있다.[7] 다만 나이는 나카하타가 시노즈카보다 4살 많다.[8] 입단동기가 무려 하라보살이다. 다만 나이는 4살어리다. 공교롭게도 93년시즌 코마다의 입단동기인 하라보살은 에이징커브를 제대로 쳐맞고 주전에서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9] 사실 나카하타의 목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이었고, 타 팀의 코치 제안을 고사해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하라 다쓰노리에게 밀린 데다 한참 후배들인 타카하시 요시노부, 마쓰이 히데키까지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기회가 오기는 어려웠다.[10] 원체 요코하마는 그 암울한 수비로 투수들이 개털렸'''었'''다. 반도의 모 팀과 비슷하지 않는가?[11] 일례로, 2009년 닛폰햄 파이터즈 선수들 대다수가 이것 때문에 시즌 중간 이탈이 심하였다. 다행히 리그 우승을 했다.[12] 재임 시 나카하타가 지속적으로 기용한 선수들이 야마사키 야스아키, 카지타니 타카유키 등이었고 이들은 2016년부터 요코하마의 기둥뿌리가 된다.[13] 전임 감독이 투수코치로 이름난 오바나 타카오였다. 요미우리에서 투수들 잘 가르치기로 유명했지만, 정작 베이스타즈에 와서 투수들의 몰락과 시발점을 모두 보고 포기해야 할 지경까지 다다른다.[14] NPB 팬이라면 잘 아는 선수인데 의외로 꼰대 계열이라 신참 선수들이 어려워 하는 타입이라 한다. 단, 별개로 선수 개인은 아니라고만 하는데.. 서로 진술이 달라 신빙성이 없다.[15] 선행주자는 구단 수뇌진으로부터 그린라이트를 받아 놓은 상황이었다.[16] 실제로 인터뷰에서 '포기하지 않는 야구'를 강조했으며, 선수들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했다.[17] 요미우리 제60대 4번타자이고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다.[18] 여성팬은 무려 8배나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