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키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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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帰仁村
(なきじんそん)
나키진손 / Nakijin 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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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장(村章)'''
'''국가'''
일본
'''지방'''
오키나와
'''도도부현'''
오키나와현
'''면적'''
39.87km²
'''인구'''
9,521명[1]
'''상징'''
'''촌화'''
하이비스커스(ハイビスカス)
'''촌목'''
류큐소나무(リュウキュウマツ)
'''촌충'''
쌍꼬리나비(フタオチョウ)
'''촌조'''
삼광조(サンコウチョウ)
'''촌어'''
깃대돔(ツノダシ)
홈페이지
한자 정체자
今歸仁
한자 신자체
今帰仁
일본어
なきじん
쿠니가미어
なちぢん
오키나와어
なちじん
今帰仁村 / Nakijin Village
1. 개요
2. 지리
3. 역사
4. 문화와 관광
4.1. 나키진구스쿠
4.2. 코우리지마


1. 개요


일본 오키나와현 쿠니가미군에 속하는 촌으로, 오키나와 본섬 북부 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인구가 채 1만명이 넘지 않는 별 볼일 없는 지역같지만 역사적으로는 류큐 왕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지역이었다. 게다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나키진구스쿠(今帰仁城)나 해변이 아름다운 코우리지마(古宇利島)도 둘러볼만한 관광지이다.

2. 지리


섬 북부인 모토부 반도(本部半島)의 동쪽을 차지하고 있으며, 촌의 동북쪽에 면적 3.13 km²의 코우리지마 섬(古宇利島)이 위치해있다. 코우리지마 섬까지는 차를 타고 갈 수 있지만, 우선 나고시의 야가지시마 섬(屋我地島)을 거쳐서 가야 하기 때문에 월경지같은 상황이다.
육지 지역의 서쪽, 모토부초와의 경계는 해발 275m의 야하다케 산(乙羽岳)를 포함한 구릉지대로 되어 있다. 나키진구스쿠도 이 구릉을 따라 지어졌다.

3. 역사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오모로[2] 등에는 미야키센(みやきせん)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471년 신숙주가 저술한 <해동제국기>에는 이마기시리(伊麻寄時利)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원래 나키진손은 지금의 영역 뿐만 아니라 모토부초 지역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구스쿠 시대인 1322년 경, 하네지(羽地)의 아지[3]였던 하니지(怕尼芝)가 나키진구스쿠를 함락시키고 스스로 북산왕(北山王) 에 즉위했다. 동시에 나키진을 북산의 수도로 삼았다. 곧이어 오키나와 섬 남부에 남산(南山)이 독립하면서 삼산시대가 시작되게 된다. 그러나 1416년 중산왕 쇼하시에 의해 나키진구스쿠가 함락되고 마지막 북산왕 한안지(攀安知)가 자결하면서 북산왕국은 멸망하였다.
이후 류큐 왕국은 북산감수(北山監守)라는 관직을 나키진에 두어 섬 북부를 다스렸다. 첫 북산감수는 소하시의 차남이었던 쇼츄(尚忠)였으며,[4] 1469년 쇼엔 왕에 의해 제 2 쇼씨왕조가 시작되고 나서는 쇼신 왕의 삼남 나키진쵸텐(今帰仁朝典)과 그의 자손들[5]이 물려받게 되었다. 북산감수는 나키진의 아지지토(按司地頭)[6]이기도 했다. 1526년 쇼신 왕의 중앙집권 정책에 의해 류큐의 모든 아지들이 슈리에 모여살게 되었을 때에도 북산감수만큼은 예외었다.
1609년, 사츠마 번은 류큐침공을 감행했다. 아마미 군도를 거쳐 3월 25일 오키나와 본섬에 도착한 사츠마군은 나키진의 운텐항(運天港)에 상륙, 27일에는 나키진구스쿠를 점령했다. 전투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북산감수였던 나키진 쵸요(今帰仁朝容)가 이 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저항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만 가고시마현(사츠마)쪽 기록에는 성과 마을이 비어있었다고 되어있는 모양. 이후 나키진구스쿠는 폐허로 남게 되었다.[7]
1665년 북산감수 직위가 폐지되었으나 나키진의 아지지토 직위는 쿠시카와우둔 가문에 계속 계승되었다. 1666년 나키진의 서부 지역을 이노하(伊野波)로 분리하였다. 이노하 지역은 이듬해 모토부(本部)로 개칭된다.
1816년 영국의 함선인 리라 호(Lyra)가 방문했으며, 선장 바실 홀(Basil Hall)[8] 이 당시 나키진의 지토였던 나키진아지 쵸에이(今帰仁按司朝英)와 만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때에는 운텐항에 어뢰정 기지가 구축되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도 전화(戰火)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본군 패잔병들이 주민들을 스파이로 몰아세워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당시 나키진 주민들의 전쟁 증언들(일본어)
1969년 UHF 텔레비젼 중계국이 오토하다케 산에 설치되었다. 2002년 나키진구스쿠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4. 문화와 관광



4.1. 나키진구스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나키진구스쿠는 성으로서 버려진지는 400년 가까이 되었으므로 슈리성과 같은 웅장한 모습을 기대한다면 실망하기 쉽다. 그러나 한때 번영했던 북산왕국의 영화가 남아있는 듯 규모 자체는 상당한 편. 역덕후들과 폐허덕후들을 자극하는 광경이 펼쳐져 있으며, 성 자체가 구릉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마을과 바다를 내려다보면 이게 또 장관이다. 성 아래에는 '나키진촌 역사문화센터'(今帰仁村歴史文化センター)라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나키진구스쿠는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기도 하다. 성 내부에 여러 우타키(御嶽)가 존재하며 10~11월 경 나키진누부이(今帰仁上り)라는 순례행사가 이루어진다. 오봉(お盆)[9] 다음의 첫 해일(亥日)에 이루어지는 풍어제인 운쟈미(ウンジャミ) 때에도 성내의 우타키에서 제사가 이루어진다. 다만 운쟈미를 행하는 카민츄[10]들이 나이가 들었고, 의식도 간략화되어가고 있어서 아쉬울 따름.

4.2. 코우리지마


동북쪽의 코우리지마(古宇利島)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하다. 다리가 놓여서 굳이 배를 타지 않아도 차로 갈 수 있다. 또 이곳은 '오키나와판 아담이브' 전설로 유명하다.

먼 옛날 코우리지마에 남녀가 살았다. 이들은 벌거벗고 다녔으며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먹고 살았다. 어느날 "떡이 더이상 내려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라고 의문을 품으며 떡을 아껴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날 부터 떡이 내려오지 않게 되었다. 남녀는 달을 향해 목놓아 울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해변으로 나와 물고기와 조개를 잡으며 살기 시작했고, 노동의 고됨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날 짝짓기를 하는 듀공 한 쌍을 보고는 서로의 성(性)을 깨닫고 비로야자 잎으로 은밀한 곳을 감추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자손이 지금의 류큐인이 되었다.

다만, 류큐 왕국의 역사서 등에 기록된 신화는 인류의 기원을 다르게 보고 있다.(구스쿠 시대 문서 참고) 아마 지역별로 전해지던 여러 전설 가운데 한 버젼으로 보인다.
[1] 추계인구 2015년 10월 1일 기준[2] オモロ. 류큐 왕국에 전해져 내려오던 신가(神歌)들을 말한다. 17세기에 편찬이 완료된 가요집 <오모로소시>(おもろさうし)에 정리되어 있다.[3] 按司, 오키나와에 존재했던 호족 또는 영주[4] 후일 류큐왕국의 3대 국왕이 된다.[5] 구시카와 우둔(具志川御殿)이라 불리는 방계 왕가 가문이다.[6] 아지 혹은 왕족이 가지는, 일정 지역을 다스리는 직위[7] 그러나 성 내부의 성소인 우타키(御嶽)에는 참배가 이어졌다.[8] 이 항해중에 조선의 백령도, 제주도 등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기록도 남겼다.[9] 오키나와현의 오봉은 음력 7월 15일이다. 양력 8월 15일인 본토와 다르다.[10] 神人, カミンチュー, 오키나와의 전통 종교인들이다. 여성 사제인 노로(ノロ)와 무당인 유타(ユタ)가 있다.